스리랑카 데니야야 의료봉사는 불보살의 향기가 나는 마하위하라사찰에서 이루어졌다. 
11월 11일부터 20일까지 내과, 한방, 소아과, 치과, 안과 진료를 한국과 스리랑카 의료진의 협진으로 3,905명의 환자 진료를 보았다. 더운 날씨에 새벽 4시부터 진료를 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했다. 


개인적으로 4번째 참여하는 봉사인데 이번 주방 설거지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잘 정제되지 않은 가스의 그을음이 심하여 두 번, 세 번 닦아야 했기에 주방 식구들은 휴식 한번 제대로 취하지 못했다. 보살행을 한다는 것이 이렇듯 고달픈 여정임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주어진 메뉴를 척척 해내는 것을 보며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맛있게 먹어주니 우리의 업무가 더 빛이 났을 것이다.


의료봉사 여정을 마치고는 양국의 전통의상을 입고 스리랑카 전통악기 연주 및 강강술래를 부르며 어울림한마당이 열렸다. 
그렇게 의료봉사 여정을 마치고 스리랑카 성지순례를 나섰다. 가는 곳마다 붓다의 가르침이 살아 있는 곳, 많고 많은 불상을 보면서 온전한 붓다의 나라임이 실감났다. 국민의 70%가 신심 견고한 불자의 나라 스리랑카에서 수많은 붓다를 만나고 온 느낌이다. 


의료봉사를 잘 다녀오라면서 약 보시를 하고 현지에 가서 꼭 필요한 곳에 쓰고 오라고 현금까지 지원해준 나의 회사 동료들께 감사드린다. 또한 편안한 마음으로 다녀오라고 지지해준 가족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크다. 


이번 성지순례 때 가이드께서 법구경을 말씀하셨는데 마음에 와닿아 적어봅니다.
“벗어남의 맛을 알고 내려놓음의 맛을 알면 근심과 탐욕에서 벗어나 진리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네.” 

다음의 의료봉사지인 몽골 울란바토르에서도 밤하늘의 별을 보며 다시 환희심을 느껴보고 싶다.

 

 

이진희│스리랑카 의료봉사 인솔단장


 

해가 지면 개구리 울음소리가 요란한 정토마을에서 오늘은 개구리가 먼저 예불을 한다.

 

나 오늘 기도하기 싫어~”

스님아, 어여 하시소

못해~!”

 

봉사자랑 이야기가 길어져 예불시간을 10분 놓치신 스님께서는 늦은 것이 마음에 걸려 투정을 하시는 게다.

 

그럼 개구리보고 저녁 예불하라고 할까요?”

내 말에 우리 스님 웃으신다.

아이고 개구리가 어떻게...?”

그럼 어여 가서 예불 하세요.”

몰라~! 싫어 나 못 해 못 해~!”

 

그럼 오늘 예불은 하지 말지 뭐...”

...?”

기도하기 싫은 거 부처님께서 다 아시고 계실 테니까...”

오늘은 쉬세요.”

안돼~!”

큰소리로 말씀하시며 일어나시더니 가만 가만 법당으로 가신다. 그리고는 목탁 소리가 난다.

또르륵- 또르륵 똑 똑...

 

죽음 속에서 죽음을 돌보시는 분, 우리 성오스님, 당신은 환자가 아니란다.

 

우리 성오 스님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4년 전으로 올라가야 한다.

스님께서는 아주 특별한 불치질환 판정을 받으셨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 제방을 두루 다니시면서 공부를 하시었다. 그러다가 어느 여름안거를 들어가시었는데, 공양시간에 뇌혈관과 심장판막이 터져서 바루를 손에 든 채 대중방에서 쓰러지셨다.

 

병원 중환자실에서 얼마 동안 계셨는데, 의료진들이 `살릴 수가 없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고 어른 스님들께 전하셨다고 한다.

'카타야수 동맥염' 우리나라에 500명밖에 없는 생존기간 5년 선고형 불치병이다. 혈관이 이유 없이 뚝뚝 끓어지는 질병이다. 안거 중인 선방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 정토마을로 오시었다.

 

그때 진단서에는, 1주 정도의 생존가능성이 기재되어 있었다. 식사로는 멀건 물죽을 호스를 통해 코로 주입되었고, 소변, 대변, 의식, 기억력, 인지능력, 사지불능, 신체적 정신적 모든 기능이 상실되어 버렸다.

 

그렇게 나는 스님의 임종 맞을 준비를 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 일주일, 보름, 한달... 스님께서는 기적처럼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하시었다. 혈관이 터지는 병이라서 주사 한 대를 놓을 수가 없는 처지였다. 사그라지는 잿더미 속에 빨딱거리는 작은 불씨 하나 부채로 부치고 또 부치며 불꽃을 살려내기 시작하였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6개월 만에 코에서 줄을 빼고 입으로 식사를 드시는 연습을 하시기 시작하였다.

깨어나고 보니 막막한 것은 오른쪽 팔다리가 기능을 다 상실한 것이었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것은 기억력 상실과 인지능력 상실이었다. 모든 기억력이 담긴 뇌신경 세포가 뇌혈관 출혈로 몽땅 제 기능을 상실한 것이었다. 오른쪽 전신마비로 더욱 불편하고 수시로 발작을 하시고 부정맥 등 심장판막도 터지고 상태는 늘 벼랑 끝이었다.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이파리가 되어 하루하루 그렇게 생명을 이어갔다. 말씀도 못 하시고 글자도 다 잊어버리시고 팔다리고 못 쓰시고, 기억력도 반 이상 상실된 채 또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차츰, 차츰, 차츰.... 인지능력이 살아나면서(분별심) 우울증과 조울증에 수시로 시달리면서 정신적인 고통까지 겸하게 되었다. 자신의 모습에서 사람으로서 그리고 승려로서 모든 역할과 관계가 상실되고 존재의 의미마저 퇴색되어가고 있음을 아시고는 비참한 당신의 처지가 너무나 서글퍼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죽고 싶다. 죽어야 한다는 절망 속에서 우울증에 시달리시던 우리 성오 스님께서는 그래도 늘 나의 의지처였다. 상의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그래도 우리 둘은 참 좋은 도반이었다. 눈으로 말했고 마음으로 통했다. 생각과 튀어나오는 어설픈 말들은 늘 따로따로이지만 우리는 다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날 홀로 두시지 않으시고 좋은 스승을 곁에 두어 주시었다.

 

성오 스님~!

당신을 통하여 부처님께서는 나에게 새로운 소임이 있음을 알게 하시었습니다. 스님의 모습을 통하여 장기적으로 투병이 필요한 스님들의 고통과 그들의 삶의 질을 생각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성오 스님이 내 곁에 계시지 않았다면 요양병원의 필요성과 구체적인 기획, 시설방안, 심리적 정신적 이해, 운영에 대한 대책, 열정과 의무감, 이런 것들이 강하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장기적으로 긴 투병이 필요한 스님들의 처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구도자로서의 삶으로 끝까지 이어질 수 있는 대책과 방안으로 고심하게 되는 나를 봅니다.

"성오스님! 당신은 나에게 보살로 오시었구려." 스님의 여윈 몸을 감싸 안아봅니다.

 

여러 스님들의 장기 투병모습을 여기저기서 자주 보고 느끼면서 고심고심 끝에 '그래 천일기도를 해보자' 마음 먹었다.

그러나 천일기도 해주실 스님 오실까?’ 하고 1년을 기다려 보았지만 스님들께서는 오시면 떠나실 뿐이었다. 봉사를 오신 스님들도 사나흘만에 모두 바랑을 메고 떠나기 바빴고, 성오스님과 나는 그런 스님들의 뒷모습에 떠날 수 있음에, 부러운 눈길을 던지곤 했다.

어느 날 나는 성오스님께 매달렸다.

병원을 잘 건립해 보겠으니 스님께서 천일기도를 해달라고 말이다. 투정 반, 억지 반 그렇게 거듭 실랑이를 했다.

한글도 다 잊어버리고, 반야심경 한 구절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 우리스님, 두돌박이 아기 말 배우듯이 더듬거리는 스님, “못해~”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성오 스님께 말씀드렸다.

이제 법당은 스님께서 맡아서 천 일 기도를 올려주세요.”

 

스님께서는 천일기도에 대한 부담감과 할 수 없다는 포기심리에서 오는 갈등 때문에 한참을 괴로워하셨다. 나는 모르는 체 천일기도 입재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대중들에게 천일기도는 성오스님께서 하실거라고 발표하였다. “몰라~! 몰라~!” 아이처럼 왼쪽 손만 흔드셨다.

모두들 무리라고 했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커다란 좌목탁 하나를 샀다. 법당에 놓아드리고 어설픈 왼손에 목탁체를 쥐어드리면서 말했다.

나는 이제 법당에 천일 동안 들어오지 않을 테니 그리 아셔요.”

가슴이 저려오는 걸 참으면서 법당을 나왔다.

절도 못 하시고, 합장도 안 되고, 다리도 말 안 듣고, 말도 제대로 안 나오고, 글도 모르는데 어찌 기도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왜 나라고 무리인 줄을 몰랐을까. 그러나 억지를 부리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성오스님에게는 환자로서의 생존보다는 승려로서의 생존에 대한 의미가 더욱 크기에, 나는 그 이후로부터 특별한 날이 아니면 법당에 들어가지 않았다. 힘없는 손에 목탁을 들려놓고 처음에는 사시기도 때마다 문 뒤에 숨어 서서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부모나 형제였더라면, 그 가슴은 더욱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아픔이 되었으리라. 문 뒤에 숨어 혼자 눈물을 눌러 닦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흩어져 버린 쪼가리 기억들, 오만가지 문구들이 더듬거리는 소리에 튀어나왔다.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지만 그래도 목탁소리는 똑딱 똑딱 흘러나왔다.

 

환자복으로 법당에 가시어 그 목탁 채 몇 번이고 집어던지시며 울며불며 기억을 찾아 헤매시던 우리 스님, 정토마을 가족들은 성오 스님께서 기도하고 나오시면 아낌없는 격려와 칭찬을 해드렸다.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스님과 함께 기도 동행에 나서주시는 순주 보살님...

 

성오 스님과 순주 보살님 두 분은 신체 증상이 비슷하시다.

그래도 순주보살님은 기도하시는 스님 뒷등에 눕기도 하시고 벽을 기대고 앉기도 하시며 기도 동행이 되어주신다. 그 이후로 우리 스님은 할 수 없이 많은 공부를 시작해야 했다.

기도 끝나시면 천수경 반야심경 사경 하시고 ----부터 읽고 쓰기 공부를 시작하였다. 한 마디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어도 스님 기도에 우리는 만족스러웠다. 세월이 흘러갔다. 눈물과 고통들 속에서 어느새 800일 기도 천도의식 날짜를 함께 의논할 수 있게 된 우리는 서로 너무 행복하다.

 

이제 성오스님께서는 법당에 가시면 가사를 걸치시고 기도할 수 있으며, 천수경 반야심경 그리고 영단에 법성계까지 치신다. 제사를 지내야 할 때는 곁에서 한쪽 손으로 목탁을 쳐주시며, 하루 두 번 기도시간은 꼭 법당에 계신다.. 초도 갈고, 자원봉사자들에게 법당청소 지시도 하시는 스님이시다.

 

혜란씨- 청수물 주세요-” 이렇게 말씀도 하신다.

이제는 천수경 소리도 제법 옛 소리를 찾아가고, 아랫방에 내려오시어 옛날, 차 우려내시던 솜씨로 차도 한 잔 만들어 건네주시며 살포시 웃어주시는 그 미소에 나는 너무 큰 행복을 느낀다.

 

우리는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태산이다. 늦은 밤 귀가하게 되면 스님 방에는 불이 밝혀져 있다. 내 차 소리가 들려야 비로소 불을 끄시고 잠자리에 드시는 고마운 도반 성오스님! 기도 중에도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시면서 목탁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

 

엊그제는 늦은 밤 내 방으로 내려오시었다.

빨간 봉투 2매에 십만 원씩을 담아서, 삐뚤삐뚤 글씨로 이렇게 쓰시어 보관하라신다.

1) 성오 스님 입관할 때 수고하시는 분께 보시해 주세요.

2) 해동사문 비구니 성오, 아미타 부처님 전에 불전 올립니다.

 

이러실 때마다 나는 슬펐다.

`왜 저렇게 서두르실까?'

이렇게 쓴 글씨봉투가 벌써 3개째다.

`날 혼자 이렇게 버려두시고 당신 혼자 먼저 가시면 알아서 하라'고 협박도 하지만, 그때마다 웃음을 허공으로 날리신다. `관자재병원 다 지을 때까지 내 곁에 있어 달라'고 늘 애원한다.

 

이 산중에 이라곤 당신과 나 둘뿐인데...

다른 스님들께서는 오고 싶을 때 왔다가 가고 싶을 때 언제라도 떠나가시지만 우리 둘은 이 모든 것 버리고 떠날 길이 없다.

 

어젯밤에는 둘이서 차 한 잔 하면서 감사드렸다. 성오 스님께서도 자신의 기도 원력으로 모든 것이 잘 되어가노라고 좋아하신다.

이제는 내가 없어도, 병실 환자를 위해 힘없이 아래로 처지는 오른손을 잡아 쥐고 기도해 주신다.

매일 힘들어 하시는 환자 곁에 가시어 이야기도 들려주시고 기도하실 때 축원도 잘 해주신다. 사지 말짱한 어느 스님 못지않게 당신의 자리를 이렇게 채워 가신다.

 

출가 승려는 어떤 경우에 처하더라도 수행자로서의 역할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늘 생각한다. 병중에 있을 때라도 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하시면서(이것이 정진이다) 존재하는 것(생명의 존엄성을 상실하지 않는 것이다.) 요즘에는 혼자 살살 산책도 하시고 봉사자들하고 담소도 나누어 주신다.

 

성오스님.

그는 역시 구도자였다. 언제까지나...

800, 우리 성오스님 기도하시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을까?

항상 경상 옆에는 커다란 손수건 하나가 놓여 있다.

그래도 나는 늘 모르는 척 지나쳐 나온다.

아무리 힘들어 해도 기도품을 덜어주지 않는 내가 미울 때도 있겠지만 환자이기 이전에 당신은 승려이기에...

 

요번 800일 기도 축제 때는 우리 성오 스님께서 아마도 4년 만에 처음으로 장삼에 가사를 수하시고 여러분을 반겨 맞아 주실 겁니다. 너무나 장하시고 거룩하시지요.

당신께서는 `한 오년 더 살아 병원 다 짓는 것 보시고 떠나시겠다'고 하시지만 여러분 기도해 주세요. 스님이 성오 스님을 정말 편안히 모시고 오늘의 고생스러움에 보답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서둘러 준비하시는 모습에... 늘 걱정입니다.

그래도 천진한 웃음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천도재에서 성오 스님을 만나는 분들께서는 붓다를 만나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죽음을 돌보아 주시는 분...

 

 

성오 스님!

당신께 정례를 올립니다.

금생에 모두 성불하옵소서.

오늘 저녁에는 성오스님과 둘이서 따뜻한 차 한 잔 나누어야지...

 

-2004, 어느 날 능행 합장

아름답게 늙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어떤 모습이 아름다운노년의 모습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만난 것이호스피스라는 것이다.

살아내면서 가장 두렵고도 알기 어려운 것이 죽음이다. 죽음이란 상황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황하고 놀랍고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댈 것이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런 당황스런 죽음의 상황에서 조금이나마 놀라고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고 죽음의 옆에서도 여유로울 수 있는 마음그릇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일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호스피스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다.

 

지난여름 호스피스교육을 받았다. 그러면서 자재요양병원에서 3일간의 실습 을 하게 되었다. 우린 먼저 중환자실로 향했고, 도울 거리를 찾게 되었다. 중환자실 환자들의 목욕날,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냥 환자를 씻기는 데 손을 보탰다. 그렇게 3일간 환자목욕 시키는 일을 도울 수 있었다. 구석구석 문질러 드렸더니 어르신들이 시원하고 때가 싹 씻긴 것 같아 좋다고 해주셨다. 그런 칭찬에 더 힘을 내어 정성껏 어르신들의 몸을 닦아 드렸다. 아직 서툴렀지만 몸을 맡겨주시는 분들께 듣는 칭찬에 뿌듯함을 느끼며 힘든 줄 모르고 하게 되었다.

목욕봉사를 하면서 늙어 가면서 내 몸 하나 내 힘으로 건사하지 못하고 남의 손에 맡겨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어떨까?’하고 생각해보게 되었다. 궁극적으로 봉사라는 것은 남보다도 나 자신을 위한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나를 위한 것이 남을 위한 것이며, 남을 위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것임을 이번 자재병원에서의 실습을 통해 다시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우리네 인생은 서로 도와가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 같다. 지금 내가 이렇게 조금이나마 보태게 된 힘이, 결국 내 인생의 막바지에 누군가의 도움으로 내게 다가오게 될 거란 생각을 멈출 수 없다.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도록 서로의 공간을 조금씩 내어줄수 있는 마음씨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름답게 늙어가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그렇게 아름답게 늙어가고 싶다. 힘을 보탤 수 있을 때 충분히 정성껏 돌보아 드리도록 해야겠다. 그것이 내 노년을 위한 저축이며, 아름다운 노년을 위한 준비가 될 것이다.

 

이상필│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호스피스 봉사자

 


http://www.jajae-hospital.com/

 

정토마을자재요양병원

세계에서 행복지수 1위인 .. 세계에서 행복지수 1위인 부탄으로 성지순.. 2017.05.25

www.jajae-hospital.com

 

진정한 구도자, 이 분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20여년 이라는 시간을 오직 치유할 수 없는 병에 걸린 이들을 위해 바치신 분, 바로 능행스님이시다. 스님을 처음 만나 뵌 건 방송회의 차 자재요양병원을 찾아가서였다.

 

죽음에 대해 평소 생각해본 적 없던 나는 처음 ‘지금 이 순간’ 이라는 프로그램의 작가를 맡게 됐을 때 사실 걱정이 먼저 앞 섰다. 누구나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무섭고 두려운 느낌이 들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죽음은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능행스님을 만나기 전인 불과 몇 달 전까지, 20대의 난 그렇게 생각했다.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곳이었다. 병원을 이야기하면서 아름답다는 표현이 조금 아이러니할 수도 있지만 내가 그 곳에서 느낀 것은 그 표현이 딱 알맞은 것 같다. 하나같이 밝은 미소를 띄고 계시던 호스피스 봉사자 분들, 심지어 심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고 계실 오가는 환자분들의 표정에서 더는 아픔이 아닌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회의를 마치고 능행스님은 PD님과 나를 임종을 앞두신 한 보살님이 계신 곳으로 인도하셨다. 병실 안, 침상 위에 누워 계신 보살님은 암 환자이신 듯 했다.

방송을 통해서나 본 모습처럼 무척이나 야위셨고, 마치 돌아가신 것처럼 잠들어 계셨다. 하지만 스님은 그 분이 아직 떠나신 게 아니라고 했다. 임종하시는 분의 모습을 처음 본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고, 마음속으로나마 그 분의 극락왕생을 발원했다. 그런데 그 분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의 표정이 저렇게 편안해보이시는 걸까?’

죽음에 대한 어떤 두려움, 공포, 슬픔 등의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마치 행복한 여행을 떠나시는 것처럼 그 분은 그런 표정으로 편안히 누워계셨다.

 

병실을 나와 점심공양을 하기 위해 가려다가 한 젊은 보살님을 만났다. 많이 운 듯한 눈에 잠을 주무시지 못한 것 같은 얼굴을 보아 환자의 보호자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보살님을 따라 들어간 한 병실, 그 곳엔 얼핏 보아도 20대로 밖에 보이지 않는 남자 환자분이 침상에 누워 계셨다.

‘내 또래인 것 같은데 저렇게 젊은 사람이 왜 이 곳에……’나는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능행스님은 누워 있는 환자의 손을 잡으시고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셨고, 환자분은 스님께 마치 “괜찮아요.”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환자분의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식을 먼저 보내야하는 부모님의 마음이 느껴져서였을까? 안타까움에 가슴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그 날, 자재요양병원을 가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능행스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난 어쩌면 아직도 죽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난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능행스님을 만나고,‘지금 이 순간’작가인 지금의 나는 너무나 행복하다.

그 언젠가 죽음이 내 앞에 다가왔을 때 나는 웃으며 말할 것이다. 기다리고 있었노라고, 잘 살다 떠난다고……

한치 앞을 모르는 것이 우리들 인생이고, 누구나 죽음은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현재 건강한 것에 감사하고 지금 이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면서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고 싶어졌다. 누군가가 말했듯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그렇게.[2014.봄]


김윤지BBS불교방송 작가

조용히 누워 있는 어미에게 어린 딸이 꽃을 꺾어 손에 쥐여 준다.어린 딸을 홀로 이 땅에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어미. 그 어미의 식어가는 가슴에 어린 딸은 슬며시 함께 드러눕는다. 뼈만 앙상한 어미의 가슴을 만지며 식어가는 어미에게 자신의 따뜻한 체온을 나누어주고 있나보다. 강물 처럼 출렁이며 아이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보고 있으니 나 역시 눈물 이 흐른다.

 

한 시간이 지나도 아이는 어미 곁에서 떨어지지 못하고 죽어 누워있는 어미의 가슴팍에 온몸을 묻고 나란히 누워 있다. 아버지는 뜰에서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나뭇가지를 붙잡은 채 쪼그려 앉아 있다. 이 세상에 남은 가족은 이제남편과 딸 둘 뿐이다.

 

엄마 이제 그만 보내드리자고,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어린 저 딸에게 어떻게 이야기할까 망설이는데, 새들은 눈치도 없이 맑은 목소리로 지저귀고 산사의 풍경소리는 왜 이리도 청명한 것인지…….

 

"엄마, 엄마~."

 

아이는 조그마한 손으로 어미의 가슴을 만지며 흐느꼈다.

 

"울지 마라. 제발 울지 마라, 아가야! 너는 나의 그림 자요, 너는 내 삶의 의미요, 너는 나의 기쁨이요, 너는 나의 사랑이란다."

 

아내를 살리려고 애쓰던 남편이 아이에게 말했다.

서로의 그림자처럼 함께 살던 비둘기 부부가 정토에 온 것은 지난 늦은 가을이었다. 남편은 오직 아내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 하나였고, 아내 역시 그런 남편을 홀로 두고 갈 수 없어 꼭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며 정토에서 추운 겨울을 보냈다. 어쩌면 그렇게도 두사람이 서로에게 지극 정성 일 수 있을까.

구녀산 자락에 참꽃이 붉게 타오르고 매화 향기 가득한 봄날, 보살님께서는 창문 너머 저만치 피어있는 대문지기 참꽃 두 그루를 보고 기뻐하셨다. 몸은 야윌대로 야위어 뼈와 가죽만 덮인 앙상한 모습이었지만 소녀처럼 아름다웠다. 기력이 떨어져 점점 처지는 두 손을 힘들게 모으고, "스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저는 행복합니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얼마 후, 볼 일이 있어 남편이 잠시 아내 곁을 비울 일이 생겼다. 남편은 영 불안했는지 가는 도중에도 몇 번이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 결국 핏기 하나 없는 아내가 남편에게, 나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라며 젖먹은 힘까지 다 해 힘겹게 말했다. 모처럼 남편이 자리를 비운 잠깐 동안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스님, 저 안 울어요. 저 절대로 안 울어요."

 

마음속으로는 피보다 더 깊은 오열을 쏟아내면서도, “스님, 저 절대로 울지 않아요. 울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 그래 울지 마요!"

"스님, 결혼생활 20여 년 동안 내 자신의 삶은 없었습니다. 아직 어리지만 그냥 딸아이를 믿고, 그리고 아빠도 잘 살것이라 믿고 이젠 가렵니다. 이렇게 가도 되겠지요……? 전 요즘 꿈만 꾸면 웃고있는 제 모습이 보입니다. 그래서 잠이 들면 정말 행복 하답니다."

 

꿈 속에서 세 사람의 고운 소녀가 당신을 시봉하고, 당신이 걸어 다니는 곳마다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고,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너무나 친절히 맞아주어 너무 행복하다고 말하는 보살님. 아마도 목숨이 다하면 그런 곳으로 갈 것 같다며 무척 행복해했다. 나는 부디 정신을 맑게 하시고, 떠나시면서 일념으로 아미타불을 염송하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날 늦은 저녁 에 남편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

 

수화기를 들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남편이 아내를 불러놓고 하염없이 우나 보다. 혹 당신 없는 사이에 아내가 저 세상으로 떠날까봐 무척 두려운가 보다. 밤이 새고 나면 부리나케 달려올 남편. 전화를 끊고나서 아내가 내게 말했다.

 

"남편과 딸아이가 너무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일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습니다. 어서 저를 죽게 해주세요. 제발……."

 

부처님, 이럴 땐 정말 어찌해야 좋습니까? 부처님! 굽어 살펴주소서. 남편과 딸아이가 자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빨리 죽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저 보살님을 제발 도와주소서.

 

며칠 후 나는 남편을 불러 차분하게 말했다. 부인께서 어느 날 혼수상태에 빠지면, 그땐 정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니 부인 마음 편히 가시도록 이야기 하시라고. ‘여보! 잘 가거라. 나도 때가 되면 당신 곁으로 가마. 나 잘 살거다. 건강하게 아이랑 잘 살다가 당신 간 곳으로 나도 갈게. 그러니 아무 걱정 마라’하며 서로 행복을 빌어주는 작별인사를 해 주시길 부탁드렸다. 남편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네, 스님 올라가서 이야기 좀 해볼께요."

 

그분이 앉아 있던 바닥에는 눈물자국이 흥건했다.

사랑하는 어린 딸과 남편을 두고 세상을 떠날 것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짐에 피눈물을 흘리던 보살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합니다. 행복합니다. 울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몸이 앙상하게 야위어가는 죽음 앞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보살님. 엄마품에 매달려 그렁그렁 맺히던 아이의 눈물과, 헤어짐에 고통스러워 하던 남편의 눈물……. 이생에서의 이별과 슬픔은 얼마나 깊고 질기고 아픈 것일까.

 

저 대문 곁에 핀 참꽃이 제 아무리 예뻐도 열흘을 못 간다 하니, 우리 인생이라고 별수 있으리. '만나지 말아야지, 만나지 말아야지, 애달픈 인연일랑 만나지 말아야지.' 생각하는데 나도 모르게 그 곱고도 아린 가족들의 눈물이 자꾸만 내 눈 속에 후두둑 참꽃으로 피었다가 진다.

 

[능행스님 저서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중에서]

봄인가 싶더니 벌써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 사계절은 삶이란 과정에서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선물과도 같다. 나에게 있어 사계절은 계절마다 만나는 환자분들이 다르다는 것이다. 계절이 지나갈 때마다 환자분들과의 추억도 지나가고 슬픔도 상실도 지나간다. 그러나 지나간 자리에 언제나 흔적이 남는다. 그 흔적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간직한 채 또 다른 계절을 맞이하게 된다. 사별가족 마음 안에 상실과 슬픔의 여정이 있듯이 나에게도 환자와의 만남에서 슬픔과 상실의 여정이 있다. 일상생활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임상영적돌봄가라는 역할이 때로는 생각을 많이 하게 한다.

 

어느 날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제목부터 흥미로움을 유발하게 되었고 얇은 책 두께가 마음에 들었다. 책 내용에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내게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무슨 일을 할 때 가장 좋은 때가 언제인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스승이 말하기를, 기억하시오. 가장 중요한 순간은 바로 '지금'이라는 사실을 말이오. 왜 지금이 가장 중요하겠소? 우린는 오직 '지금'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오. 오직 지금 이순간만이 우리가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라는 말이지요. 또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이오. 앞으로 그 어떤 상황에서 그 누구와 자신이 인간관계를 맺을지 모르므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함께 하는 사람이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은 함께 있는 그 사람에게 착한 일을 행하는 것이지요. 그를 위해 이 세상에 인간이 보내졌고 오직 이를 위해 인간이 이 세상에 왔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위 세가지 질문은 삶의 회고와 용서 그리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수 있는 지혜로운 방법이다. 죽음이 임박해져 왔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혼돈 속에서 살다가 급작스럽게 마무리를 한다. 삶과 죽음이 따로 있지 않듯이 매일 세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으면서 삶을 살아간다면 마지막 여정 또한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행복한 죽음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능인 │정토마을자재요양병원 영적돌봄연구실장

자재병원을 소망하신 스님의 이야기

밤하늘에 별이 된 스님

무더운 어느 여름날, 호스피스 관계로 잘 알고 지내는 수녀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짐을 보면 스님 같은데 가족이 없고 임 종이 임박한 상태라면서 한번 다녀가길 원했다. 바로 다음 날 아침에 나는 서울로 향했다.

 

수녀님의 안내로 잠시 작은 방에서 여러 가지 기본적인 임상 자료를 브리핑 받고 호스피스 병실로 들어갔다. 날이 너무 더워 병실 공기가 탁하고 습했다. 창 옆 침상에는 뼈만 남은 남자분이 누워 있었는데, 수녀님이 저 분이라고 눈짓으로 말해주었다. 살포시 다가가 깡마른 손을 살며시 잡아드려도 환자는 눈도 뜨지 않았다. 느낌이 스님 같았다. 그래서 귓전에 대고 “스님!” 하고 불렀더니 그제야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셨다. 웬 비구니가 비구 손을 잡고서 있으니 ‘누구?’ 하며 놀라면서도 반가운 눈빛이었다.

 

스님이라는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 억장이 무너져 할 말을 잃어버렸다. 머리카락과 수염은 제멋대로 길어 엉망이고, 목욕은 언제 했는지 옷 속에 비늘이 뚝뚝 떨어지고, 손톱과 발톱은 길어 살을 파고들어갈 정도였다 차마 바라볼 수 없는 그 모습, 대명천지 밝은 하늘 아래 어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무엇부터 먼저 해야 하나 막막한 심정이었다. 밖에 나가 속옷, 바리깡, 면도기, 수건 등을 사왔다. 휠체어로 모시고 간신히 병실 목욕탕에서 삭발 면도하고 깨끗한 새 속옷으로 갈아입혔더니 병원 자원봉사자들이 모두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타 종교 봉사자가 나를 찾아와 정말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저희는 스님인 줄도 모르고, 기독교인 천주교인 할 것 없이 찾아와 찬송가 부르고 성경 읽어드리고 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왜 그렇게 해야 했으며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이렇게 무더운 여름날에…….’

 

나는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다. 다 씻기고 옷을 갈아입혀 자리에 눕혀 놓고 바라보니 얼마나 거룩하고 맑으신지……. 옛말에 한 다리가 천리라고 그래도 부처님의 한 제자로, 비구니에게 당신 몸을 맡기시는게 덜 서글프고 덜 비참했으리라.

 

"스님! 제가 이제 곁에 있을 거예요. 아무 염려 마세요."

 

우리는 서로 마주 눕고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법랍法臘 24년 출가 이후 지금까지 선방에서만 정진하느라 토굴 하나 장만하지 못 한 구도자였다. 지난 겨울 결제結制때 자주 잔 기침이 나서 해제하면 병원에 한 번 가봐야지 하다가 해제 후 주위에서 병원은 서울로 가야 한다고 해서 도반들이랑 함께 이곳을 왔는데 진찰 결과 폐암 말기로 진단이 나왔다고 했다.

 

"처음에는 도반 스님들이 해제비를 털어 입원했고, 도반들이 오가곤 했는데, 몸이 그저 그래서 모두 결제 들어가라고 했지. 그런데 이렇게 빨리 병이 깊어질 줄이야……."

 

올해 세속 나이가 47세. 속가에는 여동생 하나 달랑 살아 있어 가끔 왔다 가곤 했는데, 어렵게 살다 보니 요즘에는 통 못 온다고 말씀하셨다. 커다란 키에 뼈만 남은 육체의 고통……. 숨이 가빠 온몸의 땀구멍 마다 식은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전신은 산소 부족으로 청색증이 와서 피부는 파랗게 죽어가고 물 한 모금 제대로 떠 넣어주는 이가 없어 혀는 마른 논바닥처럼 갈라져 있었다. 거즈에 물을 묻혀 입속에 넣어드리고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 나를 찾았다. 병원비 문제로 직원이 올라온 것이다.

 

"450만원인데 스님 병원비는 어디로  구하면 되나요?"

 

대답이 퍼뜩 떠오르지 않았지만  "걱정 마세요. 해결할 테니……." 한 칸 토굴 형편에 이렇게 대답을 했다.

 

450만원. 시간은 없고 그 많은 돈을 어디서 구할까? 생각나는 대로 전화를 돌렸다. 차마 스님 병원비가 없어 그런다는 사정 이야기는 체면상 빼놓고 일곱 군데 전화를 해서 돈을 마련했다. 그리고 착한 어느 보살님께 스님 떠날 때 입혀줄 수의 한 벌 값까지……. 이 모든게 스님의 청정한 수행공덕이었으리라.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님. 왜 저 사람들이 와서 무례하게 굴면 나무라시지 가만히 계셨어요?"

 

스님은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서 말씀하셨다.

 

"우리나라에서 땅을 제일 많이 가진 종교가 불교인데, 중이 지 죽을 자리 하나 없어 남의 병원에 와서, 그것도 이렇게 큰 십자가 아래 누워 죽는 주제에 무슨 할 말이 있겠노? 허! 허! 내가 이래 큰 십자가 아래서 죽어나갈 줄 우예 알았노? 내가 중이믄 뭐 하겠노? 부끄러바서 눈도 뜰 수가 없었제."

 

스님의 부끄러운 마음이나 지금 내가 부끄러운 이 마음이나 같을까?

 

"스님! 제가 저 바랑 열어봐도 되지요?"

 

눈으로 그러라고 허락하셨다. 바랑을 열어 보니 가사, 장삼, 지갑, 승려증, 8만원, 통장 (120만원 들어 있었음)이 스님의 생활을 반영하듯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스님! 그동안 살아오신 짐들은요?"

 

내 물음에 고개를 흔든다. 20년 세월을 수행자로 살아온 마지막 모습이 이토록 비참할 수가……. 숨이 차서 좌불안석인 스님이 푹 꺼진 눈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시더니, 붉은 눈 속에서 눈물을 토해내셨다. 닦아도 닦아도 흘러내리던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스님을 모시고 내 토굴로 내려오고 싶었지만 형편이 그러질 못해서 더욱 죄송스럽고 안쓰러웠다. 하필이면 그 병원 십자가가 유독 컸다. 게다가 스님 머리 바로 위에 걸려 있어 마음이 더욱 불편했으리라. 침대 위로 올라가 한시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스님을 끌어안아 무릎에 누이고 작은 소리로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가는 혼자 남아……." 노래를 들려주었더니 힘없는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아주시며, 

 

"시님! 내 부탁 하나 들어주소, 꼭!"

 

"네~ 말씀하세요."

 

"나는 이렇게 십자가 아래 누워 죽지만, 우리 시님들 늙거나 병들면 편히 죽을 수 있는 병원 하나 지어주소. 시님은 할 수 있어."

 

처음 들어보는 소리에 나는 너무 놀랐다.

 

"스님, 난 못해요. 내가 의사도 간호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슨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안돼요! 스님! 병원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닐 거예요."

 

그러자, 스님은 내 손을 더욱 힘주어 잡으시며,

 

"원願을 세워요, 부처님이 계시니까. 내가 죽어서라도 도와줄게. 원만 세워! 원만 세우면 다 돼."

스님의 눈물이 내 승복 바지에 젖어들었다. 스님은 공부 중에 있는 도반들에게 자신이 죽더라도 알리지 말기를 당부하며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 후 뿌려주길 당부하셨다.

추적추적 장맛비가 내리던 오후 4시에 스님은 내 체온에 의지한 채 병든 육신을 여의고 그렇게 떠나셨다.

스님! 저 하늘에 뜬 저 별이 스님 아니신가요?

스님! 스님의 영전에 맑은 향 사루어 공양 올리오니 영원한 생명의 빛으로 사바를 밝혀주소서! 나무아미타불.

 

[능행스님 저서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중에서]

┃국경없는민들레, 7월 인도 라다크 레서 의료봉사

울산 정토마을 국경없는민들레가 다가오는 7월 8~17일 인도 라다크(Ladakh) 레(Leh) 지역으로 의료봉사를 떠난다. 사진은 지난해 의료구호활동 사진.

민들레는 바람을 타고 벽을 넘어 어디든 정착해 꽃을 피운다. ‘국경없는민들레’는 민들레처럼 국경을 넘어 의료봉사로 부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창립됐다. 국경없는민들레는 울산 정토마을이 운영하는 해외의료구호사업단으로 의료지원이 절실한 오지마을을 방문, 지원하고 있다.

라다크 심장재단 병원서 활동
전문 봉사인력 40명 의료지원
의료물품과 생활용품도 전달
11월에는 9박10일 스리랑카로

울산 정토마을(이사장 능행) 국경없는민들레가 오는 7월 8~17일 인도 라다크(Ladakh) 레(Leh) 지역으로 의료봉사를 떠난다.

레는 해발고도 3,520m 고산 지대로 4개월의 여름(6월~9월)과 8개월의 긴 겨울(10월~5월)이 있다. 겨울에는 기온이 영하 20도 이하로 떨어지며 눈으로 인해 주요 도로가 통제된다. 작은 티베트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가지고 있지만 의료시설 및 환경은 열악해 지원이 필요하다.

국경없는민들레는 레 지역에 위치한 ‘라다크 심장재단’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의료봉사를 진행한다. 라다크 심장재단은 이사장 초겔 스님이 라다크 고산지대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위해 세운 의료재단이다.

라다크를 비롯한 히말라야 지역은 고산지대로 기압이 낮아 심장 기능이 중요하다. 몸에 피를 보내야하는 심장의 기능과 역할이 다른 지역보다 많이 요구된다. 라다크 지역 고산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심장 판막이 닫히지 않는 병에 걸려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기도 하며, 특히 어린이들의 심장병 발병율이 높다.

 

인도 보드가야에 방문한 국경없는민들레

국경없는민들레 의료봉사팀은 승가 10여 명을 포함해 양방과 한방 전문의료진, 홍보 봉사팀 등 40명이 동참한다. 전문 의료장비를 직접 가져가 체계적으로 진찰하고 문진으로 예방 및 치료에 집중할 계획이다.

한국에서 마련한 의료 물품 및 생활품도 지원한다. 의료물품은 어린이종합영양제, 칼슘제, 영양제, 철분제, 오메가3, 파스, 구충제 등이며 생활용품은 겨울 보온에 필요한 털장갑, 모자, 양말, 겨울점퍼, 넥워머 등이다.

국경없는민들레는 미얀마, 보드가야를 비롯해 해외 오지를 중심으로 의료활동을 펼쳐왔으며 이번 라다크는 의료구호 활동 4회째를 맞는다. 1년에 한 번씩 구호활동을 진행했지만 올해부터는 두 번으로 횟수는 늘리고 다가올 11월 11일에는 9박10일 일정으로 스리랑카로 떠난다. 국경없는민들레는 구체적인 의료구호사업을 위해 서비스뿐 아니라 진료소를 세우고 의료 사업을 확대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국경없는민들레는 의료 외 미용 봉사 및 생활품 후원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

정토마을 사무국 김현아 팀장은 “정토마을 비전이 ‘인류와 일체 생명의 평화적 공존에 기여한다’이다”며 “국경없는민들레는 해외 의료 구호 사업으로 이타행을 실천하고 평화에 기여하고자 한다”고 전했다.

아울러 국경없는민들레는 해외 구호사업 후원 동참도 독려했다. 후원은 의료약품 및 각 나라특성에 맞는 생활 용품 등으로 하면 된다. (052)255-8588

하성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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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현대불교신문(http://www.hyunbu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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