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학(唯識學)은 불교의 여러 사상들 가운데서 매우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흔히 구사론을 8년 공부하고 유식학을 3년 동안 공부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이렇게 어려운 유식학을 공부하고 실천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식학을 공부하는 목적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전식득지(轉識得智)이다. 번뇌와 경험에 물든 마음 즉 염정심을 지혜의 마음으로 바꾼다는 뜻이다. 지혜의 마음이란 영리하고 똑똑하고 지식으로 가득 찬 마음이 아니라 청정심 즉 깨끗한 마음, 텅 빈 마음을 뜻한다. 사람들은 텅 빈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번뇌와 욕망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판단하고 평가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중생이다. 그것이 왜 문제이고, 왜 잘못된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유식학을 공부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살면 된다. 중생의 삶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자극에 대해서 화를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심하게 웃어넘기는 사람도 있다. 낮선 사람에게서이 바보야!” 하는 말을 들었을 때도 사람에 따라 반응은 달라질 수 있다. 반응의 차이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며 그것을 주관적인 인식이라고 한다. 무시당한 경험이 많은 사람은 화를 더 많이 낼 것이고 무시당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보다 가볍게 대응할 수도 있다. 마음속에는 다양한 경험들이 쌓여 있고 경험을 통해서 상처도 입게 된다.
 
탐진치(貪瞋癡) 삼독에서 비롯된 마음에 걸리는 것과 마음의 상처를 극복한 것이 청정심이다. 청정심은 착각 없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즉 여여하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다. 물든 마음을 청정한 마음, 지혜의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 유식학의 목적이다.

정신분석학은 마음을 크게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분하지만 유식학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말라식(末那識), 아뢰야식(阿賴耶識) 등 모두 여덟 가지로 구분한다. 구유식학파에서는 불성에 해당하는 아마라식(菴摩羅識)을 상정하여 구식(九識)으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아마라식은 식의 실성이며 진여성이기 때문에 이를 제외하고 범부의 정신 세계인 팔식만을 설명하고 있다. 범부의 정신세계인 팔식 즉 염정심을 지혜의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 전식득지이다.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을 전오식(前五識)이라 하는데 전오식은 눈, , , , 피부의 다섯 가지 감각에서 발생하는 알아차림 즉 인식작용을 말한다. 전오식이 작용할 때는 눈과 귀 등 다섯 가지 감각작용이 동시에 작용하기도 하고 하나씩 단독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대상으로 삼는 것은 물질, 소리, 냄새, , 감촉(色聲香味觸)의 다섯 가지이다. 감각기관이 인식활동을 할 때에 그 주체가 되는 것을 근()이라고 한다.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의 다섯 가지이며 근()이 인식하는 마음을 식이라고 하여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이라고 한다.

전오식은 다른 식들에 비해 인식활동이 단순하고 품성도 얕기 때문에 통칭하여 전오식이라 부르고, 이들이 대상을 인식할 때는 어떠한 사려분별도 요하지 않고 오직 눈앞에 있는 대상만을 직감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이 감각기관들 중에 한 가지라도 오염이 되거나 손상을 입으면, 그 분야만큼은 직감이나 추리, 억측으로 인하여 인식에 오류나 손상이 발생하게 된다.
 
다음은 의식(육식)에 대한 설명이다. 의식은 전오식(, , , , )이 인식한 내용을 총괄적으로 판단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감촉 등과 같은 감각은 의식이라는 마음을 만날 때 비로소 그 내용이 인식된다. 잠든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고막이 작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식은 대상을 알아차림하는 작용을 하므로 요별능변식이라고 한다. 의식이 일어날 때는 두 가지 양상을 보이는데, 5가지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을 오구의식(五俱意識)이라 하고, 의식이 단독으로 일어나는 것을 독두의식(獨頭意識)이라 한다. 독두의식을 예로 들면, 눈을 감고 혼자 상상을 하면서 일어나는 의식이다. 독두의식도 독산(獨散)의식과 정중(定中)의식으로 구분한다. 독산의식은 홀로 떠도는 의식이고 정중의식은 선정 속의 의식을 말한다.

다음은 말라식이다. 말라식의 특성은 항심사량(恒審思量)이다. 항심사량은 항상 살피고 득실을 계산하고 따지는 작용을 하는 마음이다. 본래 청정하고 생멸이 없는 진여열반을 등지고 중생심을 일으키는 마음이 말라식이다.
말라식은 어떻게 사량하는가? 사량이란 연려(緣慮), 관찰, 분별, 집취(執取)의 뜻으로 오직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만 하는 것으로 아탐(我貪), 아애(我愛)하는 분별사량의 주체로서 수행자가 반드시 넘어야 할 관문이다. 말라식에는 번뇌의 뿌리가 숨어 있다. 의식으로 아무리 번뇌를 극복한다고 해도 말라식의 근본번뇌를 제거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번뇌에 휩싸일 수가 있다. 아치(我癡),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 등으로 자성(自性)을 장애하여 성불을 막고, ()에 집착하여 업을 일으키고 생멸의 고통을 탐닉하여 스스로 고뇌를 자초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아치는 어리석음의 뜻으로 라는 상에 집착함으로써 생기는 어리석음이다. 탐진치의 삼독을 일으켜서 해탈을 방해함으로써 아치는 번뇌 가운데 가장 근본이 된다. 아견은 몸과 마음을 라고 여기고 여기에 집착하여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는 어리석음이다. 아집이라고도 한다. 일체만법에는 가 없으나 헛되이 에 집착함으로서 일어나는 번뇌이다. 아만은 교만하고 오만하여 남을 무시함으로서 남에게 존경받지 못하고, 자신을 낮출 수 없으므로 정진하지 못하게 된다. 아애는 번뇌에 물든 자신을 사랑하고 집착하는 작용이다.
말라식은 사량하고 에 집착함으로서 항상 4번뇌의 바탕이 되고 집착으로 인해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말라식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여 악업을 짓게 되므로 염오식(染汚識) 또는 염오의(染汚意)라고 한다. 아뢰야식에 대한 설명은 다음으로 미룬다.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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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유식학(唯識學) 산책(2)

[천천히 읽는 명상]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김경일 교학처장님이 들려주시는 따뜻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세요. 불교 유식학(唯識學) 산책(2)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유식학(唯識學)은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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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제시 다사|원네스 유니버스티

척하기
자신의 내면 안으로 깊이 들어가게 되면 고통이 사실과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며, 그때 우리의 주의는 내면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고통은 오로지 우리의 관점에 의해서 있습니다. 내면 안으로 들어오면 뭔가를 숨기려고 하는 과정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누가 나를 방문했다고 칩시다. 나는 일 때문에 바쁘고 그 방문한 사람은 직설적이고 말 많은 사람입니다. 게다가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나가라고 얘기할 수도 없어서 그분이 방문하면 어쨌든 초대하고 들어오라고 하고 예의가 바르게 차도 대접하고 좋은 대화를 나누려고 애쓰고 노력합니 다. 그런데 속으로는 저 사람이 눈치를 채고 빨리 나가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에게는 착하고 예의바른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면서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올바른 행동인가요? 그렇습니다. 이것은 예의이며 이렇게 행동해야 합니다. 이 순간까지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문제가 시작되는 시점은 그가 나가고 문을 닫는 순간부터입니다. ‘나는 참 착한 사람이었어. 나는 그를 배려했고 나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 바가 없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입니까?
상대방과 대화를 나눌 때 내면 안으로 주의를 기울인다면 보여주는 것과 다른 것이 내면 안에서 일어남을 알 수 있습니다. 내면 안으로 주의를 기울이면 내면에 대화가 일어남을 우리는 흔히 보게 됩니다. ‘이 사람이 왜 찾아왔지? 내 시간 낭비하면 안 되는 데 빨리 갔으면 좋겠다.’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게 되면 우리는 자신에게 진솔한 사람이 아니며 자신에게 거짓말을 늘어놓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남에게 거짓말하는 경우보다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예를 들어, 층계를 걷다가 앞의 사람이 미끄러지는 것을 넘어지지 않게 도와주었다면 사고적으로 그를 도와준 것일 뿐입니다. 만약 선택권이 있었다면 그를 돕지 않았을 겁니다. 그 사람을 돕는 순간 우리는 이렇게 느낍니다. ‘나는 참 자비로운 사람이야.’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입니까?

이미지 보존하기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대화가 일어남을 보게 됩니다. 즉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아름다운 이미지를 보전하고 노력하는 애씀에 대한 대화를 보게 되는 것이죠. 이 두 가지로 첫째는 나에 대해 남이 좋은 이미지를 받기를 바라며, 둘째는 내가 좋은 이미지를 보존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에너지는 이미지를 보존하고 유지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개척하기 위하여 소모되며 질주하게 됩니다.
왜 우리가 상처를 받습니까? 어떠한 상황이나 누군가가 나의 어떤 이미지를 무너뜨리려 할 때 우리는 상처를 받습니다. 
인도인을 대상으로 하는 과정 중 삿상이라는 것이 진행되었습니다. 삿상에서는 노래도 부르고 여러 가지 세션을 하면서 행사를 진행하는 과정인데, 참여자 중 어떤 여성이 앞에 앉아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성스러운 노래를 부르는데 그녀는 눈을 감고 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잠이 왔습니다. 그녀는 잠 오는 것을 참다가 눈물이 살짝 나면서 눈물이 주루룩 볼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이벤트가 끝난 후 그녀를 본 주변의 사람들이 그녀에게 “우리는 성스러운 당신의 얼굴을 보았다. 당신은 너무 헌신적인 모습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그 칭찬에 솔직하게 얘기할 수가 없었고 “감사하다.”고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이 자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네 번이나 이것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사람들이 다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게 자비심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 혼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반복성에 의해 그녀는 신성의 사랑의 상태로 자신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녀는 세션 중에 정말 행동으로 꾸벅 졸고 말았습니다. 이를 본 주변의 사람들이 “너 잠을 자고 있었구나. 너 계속 이렇게 잠자고 있었니?”라고 말했고 그녀는 폭발적으로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너희들이 헌신성에 대해 아느냐. 어떻게 나에게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느냐.”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서서히 믿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결국엔 내가 그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어떠한 상황이든 이미지를 파괴시키는 것이 등장하면 우리는 고통스러워합니다.

진실과 직면하기
여정을 해가는 과정에서 바라볼 것은 ‘정말 내가 진솔한가.’입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붙들고 있는 이미지를 보기 시작하면, 얼마나 우리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려 하는지를 보게 되며 우리의 진정한 나를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주변의 ‘늘 남을 돕는 사람들’은 남의 요청에 대해 거절을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난 참 좋은 사람이야. 잘 도와주고 자비로운 사람이야.’ 그런데 그게 사실입니까? 
이럴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거절하면 그가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끊임없이 거절을 못하고 남을 도울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자신 안에 들어가 진솔하다면 이는 자비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바탕으로 한 자비라는 것임을 그는 보게 될 것입니다. 사실은 두렵기 때문에 남을 돕는 것인데, 그 사람이 ‘나는 자비로운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진실이 아닌 이미지를 붙잡고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하면 삶, 상황이나 사람이 위협하고 파괴하려고 하는 것이 들이닥칠 수도 있습니다. 바깥세상의 사람들은 당연히 이미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영성을 추구하는 자로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더 많은 고통을 만드는 것입니다.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이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너무도 쉽습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섬기고 위로 바라보니까요. 
우리 자신과 접촉하고 자신에 대해서 진솔해지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진솔해지면 보이는 것은 ‘내가 만들어낸 이미지와 그 이미지를 보호하려는 엄청난 애씀’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들여다볼 때 두 번째 단계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진솔해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내 모습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진솔한 나와 진솔하지 못한 나가 있습니다. 이 둘은 내면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 교육관 안으로 들어와서 부처님께 절을 하면서 우리의 마인드는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오늘 저 사람과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무슨 얘기를 할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다른 생각은 흔히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는 현상 입니다. 그리고 이때의 진실은, 육체적인 절일 뿐 진정 우리가 절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직면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깁니다. 이 사실을 직면하면 어떤 일이 생기나요? 이것을 직면하는 순간 이러한 것이 나타납니다. ‘내가 진솔하지 않았다면 나는 좋지 않은 스님이라는 뜻인가? 나의 모든 노력과 수련이 다 쓸모없는 행동이라는 것인가?’라는 소리들이 들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이 만들어낸 수많은 이미지들이 파괴될까봐 그 진실을 바라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심하고 주의를 기울이면 나는 진솔하게 절을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러한 우리 자신에 대한 사실을 수용해야 이 여정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아니면 우리가 만들어낸 사실이 아닌 이미지의 세계에 막히게 됩니다. 막히면 노력과 애씀은 이미지를 보존하고 지키는 것에만 사용될 것입니다. 그래서 진솔한 나는 그 사실을 밝혀내려 하고, 진솔하지 않은 나는 그 사실을 덮어두고 억누르려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진솔하지 못한 내가 진솔한 나를 억누르게 되고 우리 안의 억눌려진 나가 나로서 남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솔한 나에게 주의를 기울입니다. 우리가 지키려는 이미지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갖고 있는 근본적 두려움은 이미지들이 파괴될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지를 통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지가 없다면 우리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미지가 모두 파괴되면 그 자리에 뭐가 남나요? 이미지들 밑바탕에는 뭐가 남나요?
만약 이미지들 하나하나를 파괴시키고 그것을 초월한 상태의 우리를 본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뭔가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그냥 있는 그 상태입니다.
삶은 우리가 0(제로, 無)가 될 때까지 이미지를 파괴시키려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싸우고 저항합니다. 우리는 생존하려고 하고 지키려는 메커니즘이 작동해서 이미지들을 방어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진솔해지면 이미지들이 생존하려고 하는 그 실행 과정을 보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무지는 ‘나는 이 이미지들이다.’ 를 믿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각하기 시작하면 이미지가 생존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기존의 지키려는 이미지들도 수없이 있지만 우리는 살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끝 없이 생성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이미지에 묶여 있거나 막혀 있으면 결과적으로 더 이상 아무런 배움이 일어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묶여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진실은 ‘지금 내가 무엇이냐.’입니다. 그러나 도대체 우리가 찾는 진실 은 무엇인가요? 절대적인 진실이 있습니까? 이 순간의 사실(진실)은 무엇일까요?
만약 지금 현재 이기적인 느낌이 있다면 그것이 사실이고 진실입니다. 현재에 존재하고 있는 진실을 넘어서서 더 대단한 무슨 진실을 찾고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지금 우리가 진솔해진다면, 내면을 진솔하게 들여다본다면, 그러면 대부분 하고 있는 작업, 보이게 되는 것은 이미지를 애쓰면서 보호하고 지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신을 잠시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무엇이고 어떤 이미지를 지키려고 애쓰는지 들여다보십시오. 이것을 찾는 방법은 쉽습니다. 상황과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은 지키려는 이미지 때문입니다. 불편을 느끼거나 상처를 받을 때는 어떠한 이미지가 위협을 받았을 때입니다. 
묶여 있는 이미지가 무엇인지 주의를 기울여보세요. 착한 사람, 사랑스런 사람의 이미지를 갖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늘 사실은 아닙니다. 때로는 착한 사람일 때도 있지만 때로는 착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둘러싼 이미지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고통은 이미지를 지키려는 애씀에서 옵니다. 나는 똑똑한 사람이라는 이미지일 수도 있고, 나는 진솔한 사람이라는 이미지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를 지키는 데 우리의 대부분의 에너지는 소모됩니다.
이미지를 정당화시키는 여러 가지 설명거리를 마인드는 늘어놓을 것입니다. 그러면 마인드는 애써서 우리 자신에게 보여주려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착하고 똑똑한 사람인가에 대한 예제와 상황들을 보여주며 이미지를 보호하려 애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키려는 이미지들을 누군가 위협할 때 우리는 화를 내고 상처를 받습니다.

참나 알기
지키고 방어하고자 하는 이미지들을 볼 수 있다면, 더 깊이 들어가서 이미지들 뒤 배경에 무엇이 있는지 보게 되며, 결국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게 되면 그것이 아픔을 줍니다. 이때 마인드는 회피하려고 여러 가지 철학을 늘어 놓고 부연설명을 할 것입니다. 이 이미지들 뒤 배경에 숨어있는 것과 접촉을 하게 되면 그것이 진실입니다. 
저는 12년 전 다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직자로서 화를 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매우 화가 많은 사람이었지만 화를 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성직자로서 좋은 모양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일 ‘화를 없애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관찰한 것은 분노로부터 벗어나려고 기도를 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온다는 것입니다. 화가 난 이유는 아무도 나에게 도움을 안 주는 느낌이었기 때문입니다. 제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것 같아 더 화가 났고, 제 자신이 화가 많은 것에 또 화가 났습니다. 
그날도 분노로부터 자유롭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문득 기도 과정에서 물었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 화를 내고 있습니까?” 그리고 스스로 통찰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내가 왜 화를 내면 안 되는 거지? 화가 나면 그게 어떻다는 거야?’ 그리고 그 다음 저는 이완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완하게 된 것은 분노가 많은 사람임을 알고 편안함을 느끼기 시작하면서부터였습니다. 화를 많이 가지고 있음을 알고도 싸우지 않으면 고통과 갈등은 없습니다. 그 전에는 이렇게 생각 했습니다. ‘나는 화를 내는 그런 사람의 이미지가 있으면 안 돼. 이러한 성품은 버려야 돼.’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제 자신과 싸우고 세상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화가 없는 척하는 이미지를 계속 지켜나가면서 남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제 자신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보호하고 지키려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화가 많은 나는 이것 외에 무슨 다른 것이 될 수 있을까요? ‘이게 나다. 화가 많은 내가 나다.’임을 인정하는 것이 수용입니다. 
자신 안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기를 바라는 애씀과의 싸움이 있습니다. 나는 끊임없이 다른 것이 되기 위해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주 미묘하게 그 작업이 일어납니다. 마인드는 조용히 당신에게 속삭입니다. ‘조금만 더하면 자유로워질 거야. 이건 가능하다. 변화란 가능해.’ 그것이 마인드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재잘 거리는 소리입니다. 왜냐하면 마인드는 변화를 통해서 생존하기 때문입니다. 마인드는 ‘여기까지 갈 수 있다.’고 끊임없이 이상적인 미래를 보여줍니다. 마인드는 ‘자유로워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끊임없이 상상합니다. 마인드가 우리를 붙잡고 있는 마지막 밧줄은 “너 바뀔 수 있어. 내가 널 도와줄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걸 믿고 자유를 향해 한 스텝 가려 하고 마인드는 우리를 지배합니다. 마인드는 우리의 진실과 직면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마인드는 사실로부터 우리를 점점 더 멀어지게 하려고 합니다.

참나를 찾아서
자유란 지금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수용할 때입니다. 수용이란 무엇인가요? 수용을 한다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요? ‘그래, 나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수용해.’ 이것이 수용인가요? 성품이 나타날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수용일까요?
우리가 심리적으로 뭔가 되려는 과정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을 하고자 하는 필요성이고, 둘째는 사랑을 받고자 하는 필요성입니다. 다시 말해, 남들을 사랑해야 하는 필요성과 그리고 남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의 필요성입니다. 남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선한 모습을 보이고 ‘좋다 나쁘다’는 마인드 차원의 형성입니다. 내면에서는 좋은 쪽을 선택하려 합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좋은 사람이 되려 하나요? 그것은 칭찬받고 사랑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칭찬받고 사랑받으면 우리 자신을 사랑할 가능성이 생긴다고 믿기 때문입니 다. 상대방이 칭찬해주면 우리는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칭찬해줘서 기분 좋은 게 사실입니까? 상대방이 인정해줄 때 그때 나는 내 자신을 사랑할 가능성이 생깁니다. 오로지 우리는 자신이 자신을 사랑했을 때 기분이 좋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칭찬 할 때 ‘나도 괜찮은 인간이구나. 나 자신에게 사랑을 줘도 되겠구나.’ 하고 사랑을 주기 때문에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 사랑해주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남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려는 끊임없는 욕망만 지속하게 됩니다. 즉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을 때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도움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한 남자가 여성에게 “난 너를 사랑한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 남자가 진짜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겁니까? 그가 실제로 전달하려고 하는 것은 뭡니까? 그것은 “나를 사랑해줘.”입니다. 소위 말하는 모든 사랑은 사랑을 받으려는 욕망일 뿐입니다. 사랑과 인정 을 받으려는 욕망, 내가 중요한 인물이 되려는 욕망, 그리고 이러한 욕망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좋은 이미지들을 형성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스럽게 만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화장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화장한 얼굴만 보면서 그 예쁜 얼굴이 자신이라고 믿기 시작합니다. 이미지라고 불리는 것은 내면에 화장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수용은 있는 그대로 내가 다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게 합니다.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한 욕망은 끝을 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분노가 있는 사람인데 분노가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고통스럽습니다. 분노가 없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그것이 수용입니다. 여기서는 적극 적인 수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이기심을 인정해.’ 하는 것은 수용이 아닙니 다. 말을 통해 선언을 하면서 일어나는 것은 수용이 아닙니다. 내가 나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싸우지 않을 때 그게 수용입니다. 
수용이란 ‘그저 그렇다.’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보기 위해서 우선 봐야 하는 것은 얼마나 내가 끊임없이 이미지를 만들며 지키려 하는지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사랑을 받고자 하는 욕망과 남을 사랑하고자 하는 욕망도 옵니다. 남을 사랑하면 나 자신을 사랑할 가능성이 생긴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남을 사랑하려는 애씀 속에서 실패를 하고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조건 없이 상대방을 사랑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고통이란 사이클에 묶이는 것입니 다. 우리는 남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아름다움은 나를 사랑하게 되면 밖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평온이 있습니다. 자신과 평온이 있으면 세상 전체와 평온을 느끼게 됩니다. 
상대방을 사랑하려고 애쓰고 노력하는한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오히려 나 자신의 이미지만 형성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부분만을 사랑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바꾸려고 합니다. 우리 안에는 끊임없이 갈등이 일어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 부분만 바뀐다면 나는 사랑을 받을 값어치가 있고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가 사랑스럽게 바뀌게끔 하는 노력이 시작됩니다. 우리의 주변에 있는 영성적인 수련 자체가 우리 자신을 바꾸려는 데 치중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끝이 있습니까?
사랑이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조건이 붙어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을 수용하기 위해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수용이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절대 수용하지 못한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 자신과 싸우고 있고 바꾸려고 애쓰는지 자각하게 되면 그것이 수용의 시작입니 다. 우리 자신을 얼마나 사랑해주지 않고 있는지를 자각하는 것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수용하든 안 하든 어차피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08년 5월 23~24일 마하보디교육원 주관으로 이루어진 ‘스님들 을 위한 의식과 영성교육’의 내용을 게재합니다.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물질문명 시대에 정작 우리 인간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학교수, 총장, 국회의원, 큰 기업 사장, 큰스님, 작은스님, 아이, 어른 등 수천수만 가지 사연을 안고 사는 수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그런 현상적인 요소들과 상관없이 각각 달랐습니다. 제가 본 많은 죽음들은 제게 삶을 통찰하는 지혜를 주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꿈에서 꿈을 꾸면서 꿈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의 꿈은 죽음이 목전에 와서야 비로소 깨어지게 됩니다. 그 이전에는 꿈을 깰 수가 없어요. 내가 죽을 것이라는 것은 생각하면서 살아요. 그렇지만 실제로 내가 죽을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너무나 부족합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내가 오늘밤에 죽을 수 있어.’라고 인식하고 사는 분들은 과연 몇 분이나 있을까요?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인식해서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만약 우리가 ‘오늘 밤에라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집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생활하는 관점이 달라지고, 나에게 주어지는 한순간을 대면하는 나의 의도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꿈속에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시간을 한정 없이 주면서 언제까지 살 것이라고 최면을 겁니다. 그러나 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같이 죽을 수 있습니다. 오늘밤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죽어지면 대우주는 사라집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무도 인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욕망에 끄달려서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원망하고, 애정으로 애욕으로 뒤범벅이 된 삶을 살다가 결국 죽을병에 걸리고, 병에 걸렸다 해도 죽을 거라는 걸 인식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죽음이 목전에 와서 숨을 헐떡이면서 사대가 무너질 때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꿈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그때는 우리 인생이 너무 늦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꿈을 꾸게 되다가 종착역에 가서야 만나게 되는데 그때는 너무나 조급하고 초라하고 비참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 앞에는 대기업의 회장도 소용없어요. 저는 돈이 많으면 죽을 때도 잘 죽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그걸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죽음은 너무나 냉혹하고 정직하고 진실합니다. 죽음은 여러분이 죽어가는 3개월, 6개월, 1년 안에 여러분들이 살아온 일생의 결과를 오롯이 다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것은 내가 심어놓은 농작물과 같습니다. 돈이 많고, 권력이 있고, 명예가 있을수록 그 죽음은 더 외롭고 처절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자식이 열 명이 있어도 죽음 앞에서는 소용없습니다.

하나, 사랑하면서 살아가기
우리나라에서 일 년에 암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8만 명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암으로 판명되는 사람은 12만 명입니다. 남성 환자의 3명에 한 사람, 여성 환자의 5명에 한 사람이 암환자입니다. 내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 삶의 가치와 의미를 어디에 두고 살아가는지에 따라서 내가 고통스러울 때, 위기에 있을 때, 죽어갈 때에 삶을 마무리하는 결과가 달라지게 됩니다.
너무 잘살려고 애쓰지 마세요. 대충사세요. 좀 둥글둥글하고 소통이 가능하고 여유 있는 사람이 되세요. 여러분 모두가 여러분의 자식도 품어주지만 남의 자식도 품어줄 수 있는 가슴을 가지고 살아가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1년에 100여 명의 죽어가는 사람을 지켜보면서 제가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인간 존재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죽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말 한 마디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정직할 것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내 자신을 사랑할 때 남도 사랑할 수 있습니 다.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가 없어요. 죽음의 순간에 많은 이들이 가장 후회스러워했던 것은 돈도 권력도 명예도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야 할 수 있는 안타까운 그 말 한마디, “내가 사람을 사랑하지 못했다.” 였습니다. 온 가슴으로 나와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세상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한 것에 대해 가장 후회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세요? 머리로 사랑하지 말고 가슴으로 사랑하세요. 머리로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그것은 그저 생각하는 거예요. 사랑은 가슴으로 하는 것이며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정적으로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에요. 온 가슴으로 사랑을 하게 되면 용서하지 못할 것이 없고, 화해하지 못할 것이 없고, 꼴을 봐주지 못할 것이 없고,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고, 사랑하지 못하는 존재가 결코 없답니다. 가슴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세요. 그래서 죽을 때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후회하는 사람이 되지 마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둘, 나누면서 살아가기
여러분들이 소유하고 공유하고 사용하고 있는 것을, 그 중에서 1%만 세상으로 되돌려주세요. 왜냐하면 우리가 사용하는 산소, 땅, 이 모든 현상이 공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티끌 하나도 공짜가 아니에요. 여러분은 여러분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천지만물이 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고, 내가 존재하면서 천지만물이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편안히 살고, 나 혼자만 생각하고, 내 가족만 생각하고, 내 인생만 생각하는 삶은 참 재미없고 빡빡한 삶이면서 동시에 여러분이 언젠가는 갚아야 할 많은 빚들이 그 속에 녹아 있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대가없는 사랑을 받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다 못 갚으면 다음 생, 그 다음 생까지도 갚아야 되겠지요. 그렇다면 차라리 살면서 건강할 때 이 세상과 함께 공유하고, 여러분도 대가 없이 조건 없이 나눠줄 줄 아는 큰 가슴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자기 자신에게 인색한 사람은 다른 이에게도 인색합니다. 돈이 아무리 많더라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건강할 때 이 세상과 소통하고 공유하면서 살다가 죽음을 맞을 때 고통 없이 죽어가는 죽음은 겸허하기까지 합니다.

셋, 돌보면서 살아가기
지금 이 시대는 죽음의 문화가 상실되어 가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삶의 가치도 생명의 존엄성도 상실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죽음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부모가 밖에서 돌아가시고 하면 업고 집으로 뛰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집에서 죽고 싶어도 병원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어떻게 죽어야 하고, 죽은 사람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하는가에 대해서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해봅시다.
적어도 죽음은 안전해야 합니다. 죽음이 안전하게 보호받는 사회가 삶을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사회입니다. 내 죽음이 안전하지 못한 것은 우리가 죽음을 안전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죽어가는 사람을 돌볼 때 죽어가는 사람이 온전히 깨어서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잘 돌봐주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에 산파가 돕는 것보다 100배 이상 더 깊이, 더 섬세하게 죽어가는 사람을 돌봐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을 전혀 돌보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변의 부모나 누구라도 죽음이 안전하도록 깨어서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음을 맞이하도록 가르치는 선생님도 어른들도 없습니다. 죽음이 안전하도록 죽음을 바로 알고 나와 내 주변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죽음의 가치가 바로서야 삶의 가치가 바로 설 수 있다고 봅니다.
살 가능성보다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많은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사랑하지 못해서 후회하면서 죽지 않도록 지금부터 가슴으로 사랑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이 세상에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아주 조금이라도 나누면서 살아가면 참 아름다운 삶이 될 것입니다. 나와 내 가족, 모든 이들의 안전한 죽음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후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재단법인 정토사관자재회 계간지 정토마을 2009.겨울호)

 

호스피스 봉사

 

경주 동국대 봉사갔을 때

50대 위암 말기 남자환자

죽음의 문턱에서 헤매고 있었다.

부인이 안타까워하는 것은

없는 집 장남으로 태어나 모진고생 끝에

동생들 뒷바라지 끝내고 자식들 다 잘 키워놓고

이제야 살만한데 암이란 게 달라붙어

세상을 마감할 날만 기약 없이 기다릴 뿐

그의 아내 안타까워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한 달이 지난 후 한통의 전화

여보세요. 아주머니, 우리 아저씨 가셨어요.

아이고, 예 서운하시지요.

모든 것 다 정리하고

아줌마 생각나서 전화 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잠깐 내가 행복하고 싶어서 한 일일 뿐인데

봉사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음성 꽃동네 갔을 때 지체장애 아동 병동, 여덟살 박이 여자아이

걷지도 못하고 기어 다니는데

이틀간 대리모 교실에 공부하러 갈 때 물리치료 갈 때 따라다니며

오히려 내가 정을 받아서 정이 많이 들었다.

꼭 안으며 엄마 엄마 볼에 뽀뽀 세례까지

떠나올 때 옷자락을 잡고

엄마 가지마.

엄마의 정이 목말라 엄마의 품이 그리워...

떠나오면서 뒤돌아서 얼마나 울었는지

3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그 모습 생각하면 가승이 찡...

 

봉사하기보다 내가 봉사받는 기분

내가 행복해지니까 말이다.

봉사라는게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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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1년 여름, 진말숙 보살님께서 봉사 소감을 정토마을 계간지에 실어주신 내용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 엄마.

엄마의 죽음으로 상처를 입은 소년이 그 상처를 #치유 해나가는 과정을,

그 아이의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그림책 #무릎딱지

"

나는 엄마의 냄새를 잊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엄마 냄새는 자꾸 사라진다.

나는 엄마 냄새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집 안의 창문들을 꼭꼭 닫았다.

아빠는 투덜댔다. 지금은 여름이고, 날씨가 너무 더우니까.

거기다 아빠는 이제 나한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니까.

"

- 책 '무릎딱지' 중에서...-

#정토마을자재요양병원 호스피스병동에는

떠날, 그리고 남겨질 소중한 가족이

지나온 삶을 회고하고,

서로의 사랑을 재확인하며

함께 삶의 의미를 찾는 여정 중에 있답니다.

우리의 삶에서 #상실 은 누구나 겪게되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과정은 고통과 슬픔이 동반하지요.

무더운 여름날에 엄마냄새를 잊지 않기위해 창문을 꼭 닫아버린 남자아이.

소년의 앞으로의 여정이 궁금하시다면?

정토마을자재요양병원 로비에 들려

무더위도 식히고 무릎딱지 그림책도 읽어보아요.

2019년 7월 22일 부터 7월 30일 까지

#정토마을자재요양병원 로비 입구에서 무릎딱지 그림책 전시회를 진행합니다.

개인성장을 위한 나의 목표는 일어나는 분노를 즉시 알아차리고 그것을 생활 속에서 완화시키는 것으로, 매일 10회 이상 거울을 보고 호탕하게 웃으며, 항상 눈을 크게 뜨고 미소를 지으며,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즉각 알아차리며, 우리 각자의 몸과 마음이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었다.

CPE 성찰 과정을 통해 성장과 변화를 얻기 위해 교육기간 동안 주로 운전을 하면서 의식적으로 크게 웃는 연습을 했는데, 처음에는 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으며 내가 듣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어색했다. “웃으면 좋아진다.”는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지만 개인 성장을 위한 첫 번째 목표로 웃는 것을 정했으므로 웃어서 좋아질 것으로 믿기로 했다. 처음에는 일부러 웃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웃음을 만들기 위해 주로 출퇴근 하면서 또는 마하보디교육원을 왔다 갔다 하면서 운전 중에 다양한 종류의 소리를 내면서 또 고함을 지르면서 크게 웃으려고 노력했다. 왼손으로 핸들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허벅지나 운전대 선반을 치면서 흥을 돋우었다. 또 아침저녁으로 샤워를 하면서 소리를 좀 낮추어 웃는 연습을 했으며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거울을 보면서 소리를 내지 않고 입을 활짝 벌리어 웃거나 미소를 짓는 연습을 했다. CPE교육이 끝나가는 지금, 많은 사람들이 나의 얼굴이 매우 밝아졌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고 나 자신 얼굴을 직접 보지 않고도 어느 강도의 표정으로 웃고 있는가를 느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아침에 공원을 산책 중에도 자연스럽게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걸어가는 자신을 보면서 흐뭇해하기도 하며, 집에서 염불을 하거나 참선을 하거나 절을 할 때마다 벽지의 무늬를 보면서 자주 미소를 띤다. 벽지 속의 그림이 연꽃과 흡사하기도 하고 손발이 아주 많은 벌레와 같기도 한데 전체 모습은 눈과 입을 크게 벌리고 활짝 웃는 것 같은 형상으로 그것을 볼 때 마다 나의 입은 벌어지고 기분이 매우 좋다. 먼저 웃어야 뒤에 웃을 일이 생기고 또한 마음이 편해진다는 항간의 이야기를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인간관계에서 변한 것은 아내와의 사이에서 나도 모르게 화를 내거나 내 주장을 세우는 일이 없어진 것 같다. 오히려 아내가 인상을 써도 아무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음을 보고 있다. 또 내가 미소 띤 얼굴을 자주하니 아내도 마음이 편해졌는지 나에게 가까이 오는 횟수가 늘고 있다. 나의 의견을 낼 때도 명령하는 식이 아닌 상대방의 의견을 물어보는 방식으로 조금 바뀌었다. 예를 들면, 전에는 ‘본가에 먼저 가라. 내가 나중에 갈게.’ 였는데 요즘은 ‘어쩔래? 갈래?’ 하고 물었을 때 ‘오늘은 집에 있고 싶다.’고 하면 ‘그렇게 하라.’는 식이다.

한편, 오랜 기간(약 10년) 매우 불편하게 지내던 같은과 동료 교수에게 일주일 동안 모두 여섯 번을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하다가 결국에는 전화를 걸어 “저는 지난 일을 다 흘러 보내고 서로 편안하게 지내고 싶은데 교수님의 의사는 어떠하십니까?” 하고 물어 지금은 서로 편하게 잘 지내고 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이전보다는 훨씬 많이(?) 형성되었다. 예를 들면, 2학기 교육대학원 수업이 있는 첫날, 학생들이 모두 책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1학기의 연속이고 또 나의 평상시의 강의 방침을 알고 있는 학생들의 이러한 행동은 일종의 계획된 집단 반항의 표시이다. 학생들의 이런 행동에 대해 CPE 교육을 받기 전과는 달리 나의 표정은 웃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왜 책을 준비하지 않았느냐?” 하는 나의 질문에 학생들은 긴장된 얼굴을 하면서도 가벼운 미소를 띠고 말이 없다. “좋다. 그렇다면 수업을 하는 대신에 1학기에 나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이야기를 들어보자.” 하고 제안을 하였다. 내가 제안을 하자마자 6명의 학생이 마음의 상처를 받은 사실을 적나라하게 이야기를 했다.

 

여학생 1 : 제가 문제를 풀고 있는데 교수님께서 바로 제 뒤에서 “이기 바보가?” 하고 말씀 하셨어요. 마음이 좀 그랬어요.

나의 즉답 : 아이고 그랬나? 내가 지금 사과할게. 미안하다.

남학생 1 : 저는 4학년 총대할 때 한 번, 그리고 교수님 연구실에 문제 푼 것을 질문하러 갔을 때 한 번, 칠판에 문제를 잘못 풀었을 때 한 번, 모두 세 번에 걸쳐 교수님께서 고함을 치시고 꾸중을 심하게 하셔서 가슴이 많이 아팠어요.

나의 답 : 어짜노? 내가 진짜 잘못했다. 미안하다. 그런데 너 지금은 장족의 발전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제?

남학생 1 : (웃으면서) 예. 그것은 그렇습니다. 사실 꾸중을 들은 후에야 열심히 했습니다.

여학생 2 : 저희들 1학기에 수업하는 날 거의 밥을 먹지 못했어요. 긴장이 되어서……. 하도 고함을 치시고 숙제도 많이 내시고 꾸중도 많이 하셔서…….

 

나로 인해 상처를 받은 모든 학생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빌었다. 마지막에는 서로 함께 웃으면서 마음의 상처를 다 씻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사실, 고의로 고함을 지르고 꾸중 일변도의 수업을 하는 이유는 있다. 임용고사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그룹을 지어서 수학문제를 풀고 발표를 하여 점검을 받아야만 학습의 효율을 올릴 수 있기 때문에 학습을 느슨하게 하는 것은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 어렵다. 물론 부드럽게 하면서 학습 효과를 올릴 수 있는 교수법이 제일 좋겠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서 그것은 거의 불가능했었다. 하지만 이번 CPE교육을 통해서 지혜로운 방법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다고 생각한다. 부드럽게 웃으면서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고도 학생들을 격려하면서 최대한의 학 습효과를 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스스로 기대가 된다.

CPE그룹 안에서나 임상의 현장에서 또는 공동체 안에서 서운한 감정이나 분노가 일어나지 않았고, 미소 뛴 얼굴이 자연스럽게 유지되었지만,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그들의 비언어적 행동을 관찰하고 역동성을 읽는 것에는 소홀히 하였다. 특히 자식들에 대한 나의 욕심이 제거되지 않아 나의 삼업(三業)을 미리 보고 방지하는 능력은 만족할 만큼 발달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아직 딸아이에게는 욕심과 절망이 교차해서 그런지 맑은 미소가 나오지 않는다. 그 애에게 자연스럽게 편안한 웃음이 나오는 그날이 나의 목표가 완성되는 날일 것 같다. 또한 아직까지도 그룹원들의 비언어적 행동을 관찰하여 그들의 역동성을 읽고 표현하는 것에 매우 서툴다. 어떤 물건이나 혹은 상황[色]에 대해 서운한 감정이나 분노[受]가 일 어나면 그것을 즉시 알아차리고[싸띠, sati] 생각[想]이 아닌 감정[受, 느 낌]을 솔직하게 부드럽게 그리고 이성적으로 표현하는 습관을 몸에 익히려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지금부터 그 점을 실천하는 데 최선을 다하여 관찰력과 표현력을 상승시킬 것이다.(2009. CPE 여름학기 참여후기)

 

이병수|경성대학교 수학과 교수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은 좀처럼 카메라를 내려놓지 않는다. 약속된 방송날짜, 방송시간에 반드시 프로그램을 송출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다. 그 업계의 규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어라도 찍어서 무어라도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이기에 호시탐탐 무언가를 담기 위해 늘 카메라를 들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방송분량’을 어떻게든 카메라에 담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CJB 청주방송 창사11주년 특집 휴먼기획 <호스피스 병동에서 삶을 만나다>를 촬영하기 위해 정토마을을 처음 찾았을 때도 당연히 우리 손에는 배터리가 가득 충전된 카메라가 두 대씩이나 들려 있었다.

하지만 카메라를 들고 찾아든 낯선 방송국 손님들에게 정토마을이 처음으로 베푼 것은 방송 분량이 될 법한 그 무언가가 아니었다. 마침 그날은 정토마을의 거실을 넓히는 공사를 하기 위해 거실의 짐을 밖으로 옮겨 나르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우리는 바로 카메라를 내려놓고 무거운 짐들을 밖으로 나르는 일부터 해야만 했다. 초여름 날씨에 온몸이 구슬땀에 젖었다. 당시에는 적잖게 당황스러운 기분이었으나 그렇게 정토마을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탤 수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 훗날 오히려 감사했다. 정토마을을 찾고 정토마을의 일상을 조금이라도 체험 하게 되는 이라면 그 누구라도 나의 이 감사하는 마음을 공감할 수 있으리라.

그날부터 시작해서 수 개월에 걸친 정토마을 취재를 끝낼 때까지 결국 우리의 카메라는 평소의 부지런을 별로 발휘하지 못했다. 우린 정토마을을 취재하고 촬영하기보다는 정토마을에있는 마지막 가는 이들의 아름다운 마지막 삶을 함께 살아보고자 했다. 카메라는 스위치 한번 제대로 켜지지 않은 채로 거실 한쪽 구석에 처박히기 일쑤였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로서 그런 무모함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은 정토마을의 환자들이 겪어내는 삶의 마지막 길이 결국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반드시 겪어야 하는 길이라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취재의 대상이기보다는 함께 하고 함께 겪어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이었다.

 

어느 날 정토마을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땅바닥을 기어가는 개미를 너무나도 환하고 천진난만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위암말기의 환자라는 사실을 접하고 난 뒤에도 그를 결코 환자로 대할 수 없었다. 건강하기도 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구만리인 나마저도 짓지 못할 그 환하고 천진난만한 표정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표정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지금도 이따금 고민을 한다.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 나는 과연 그런 아름다운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어떻게 일생을 살면서 후회를 남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리석음이 우리 삶의 필연적 배경 중 하나인 이상 수많은 실수를 짓고 남기면서 살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삶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지나온 삶을 참으로 행복했던 시간들로 돌아보고 기억할 수 있다면 그 죽음은 슬픈 것만은 아닐 것이다. 정토마을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그에게서 가슴속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지나온 삶을 마치 소설에나 나올 법한 행복한 시간들이었다고 회고했다. 그의 지나온 삶이 과연 어떠했는지 낱낱이 알 수는 없었으나 편안한 표정으로 그런 이야기를 들려줄 땐 사실 부러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인생의 목표라 해서 뭐 거창할 필요가 있겠는가. 죽음에 임박해서 나 참 행복하게 살았노라고 회고해도 좋을 만큼 살아내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을 만하지는 않은가.

정토마을을 찾은 어떤 자원봉사자는 그를 만나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정토마을에서 조금 더 지내보면 그 눈물을 거둘 수 있으리라. 삶의 진실에 보다 가까워지고 행복의 비결과 만나는 기쁨에 점점 더 익숙해질 테니까 말이다. 나 역시 그를 보며 눈물지은 적 있었으나 그것은 그가 안쓰러워서가 아니라 그 아름다운 사람과 영원히 작별하는 것이 안타까워서였고, 그 아름다운 사람이 사랑했던 모든 것들과 영원히 작별을 고하며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그 무엇이든 욕심낼 것이 아니라 사랑해야 한다. 그걸 구별하지 못해 어리석고 삶이 아프다. 지혜롭게 잘 살고 싶은 마음이다. 빛깔 곱던 어느 가을날 그는 떠났다. 소원대로 극락에 갔으리라 믿는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결국 찾아든다. 누구나 무조건 겪게 된다. 그게 두려워서 대부분 자신의 삶에서 죽음이라는 것을 밀어내려고만 한다. 삶의 입장에서 볼 때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은 불편한 진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을 제대로 바라보아야 삶이 제대로 보인다. 삶은 준비할 틈이 주어지지 않은 채로 시작되지만 다행히도(?) 죽음은 준비하고 공부할 시간이 주어지기도 한다. 살기도 바쁜데 죽음을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가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배운 죽음은 품질이 다르다. 또한 죽음을 배우면 삶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진다. 그 삶이 많이 남았던 짧게 남았던 관계없다. 나는 정토마을에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삶을 배웠다. 죽음에 임박한 환자들이 모여사는 호스피스 시설에서 삶을 배웠다니 이러한 기막힌 역설을 믿을 수 있을까.

지금도 정토마을 마당 어딘가에는 자그마한 개미가 기어다니고 있을 것이다. 그 개미를 바라보며 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정토마을이다. 그 행복의 비결이 함께하는 곳이 바로 정토마을이다. 그 비결은 죽음을 바로 보고 바로 대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록 삶이 바쁠지라도 정토마을에서 살아볼 일이다. 비록 늘 일손이 부족한 곳이지만 무언가를 도우려 발을 들여놓기보다는 그들의 마지막 삶을 함께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머물러 볼 일이다. 그 얼마 되지 않는 경험으로 모든 삶의 순간들이 행복해지는 기적이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분명 일생을 통해 삶이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들은 더욱 많아지리라. 참고로 작년 여름보다 넓어진 정토마을의 거실에는 새로 들여놓은 고화질 TV가 있다. 그 TV를 환자들과 함께 시청해볼 것을 추천한다. 부쩍 가까워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가슴에 담긴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정토마을을 나설 때는 마당 어디에선가 기어다니고 있을 개미 한 마리를 반드시 찾아볼 일이다. 그리고 이전과는 변화된 자신의 표정을 반드시 살필 것. 이쯤 되면 세상에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 어디 개미 한 마리뿐이겠는가.(재단법인 정토사관자재회 정토마을 계간지 2009. 여름호)


 

김한기|CJB 청주방송 프로듀서

※CJB 청주방송 창사 11주년 특집 휴먼기획, <호스피스 병동에서 삶을 만나다>(2008년 11월 28일 방영)로 한국PD연합회(회장 김영희)가 주는 제105회 이달의 PD상을 수상하였다.

 

http://www.jajae-hospital.com

 

정토마을자재요양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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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jajae-hospital.com

 

불교 유식학(唯識學) 산책①

 

불교 유식학은 중관학(中觀學)과 더불어 대승불교 사상의 두 기둥이라 불릴 정도로 중요한 가르침이다. 중관학은 흔히 공사상(空思想)이라 하여 불교신자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다. 공사상을 집약해서 나타낸 것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며 그 중에서도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은 공사상을 가장 함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대부분의 불교의식에서는 반야심경을 독송한다. 그래서 공사상은 일반인들에게도 낯설지 않다. 그러나 유식사상은 불교인들에게조차도 잘 알려진 것이 아니다.

유식학은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활용적이고 실천적인 사상이다. 보통사람(중생)들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살아간다. 그것이 중생들의 속성이다. 욕망은 삶의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고통의 근원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욕망을 추구하는 삶은 갈등과 대립 그리고 투쟁은 피할 수가 없다. 자신과 타인, 자신과 세상과의 갈등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도 근원은 욕망이다. 욕망의 근원이 무엇이며 욕망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해 주는 가르침이 유식사상이다.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불교사상이며 또한 보편적인 사상이기도 하다.

 

공사상은 진리 그 자체이다. 우주의 근본은 텅 빈, 공이다. 다만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현상들이 나타난 것으로 연기의 법칙으로 설명한다. 유식사상은 진리에 이르는 길을 통찰하게 하고 나아가 욕망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상세하게 안내하는 가르침이다. 진리 자체를 배우고 이해하여 남들에게 전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식과 이론은 배워서 타인들에게 전달하면 된다. 그러나 자신이 진리에 이르는 것은, 달리 말하면 자신 안에서 진리를 구현하는 것은, 스스로 공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진리 자체를 말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며 자비를 베풀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많지만 실제로 자신이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드물다.

 

유식(唯識)이란 오직 마음이란 뜻이다. 글자의 의미는 오직 안다는 뜻이지만 안다는 것의 심리적 의미는 인식이다. 인식은 마음의 작용이며 마음의 작용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주관적 인식이라고 하고 자기 마음대로 인식하기 때문에 착각이라고 한다. 그것이 오해와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인식은 존재하기 어렵다. 달걀을 달걀이라고 알아차릴 수는 있지만 달걀에 대한 의미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다. 개개인의 인식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종자(성품)와 개인적 경험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현대물리학에서 밝히고 있는 물질의 최소단위는 원자핵이다. 원자핵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전자나 원자핵을 구성하는 양성자나 중성자 등은 움직이는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관찰하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다. 고정불변의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현상과 작용 그리고 갈등과 대립 등도 보는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르게 인식된다. 주관적인 인식이 존재할 뿐이다. 예측할 수 없는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도 자국의 입장에서는 당연하고 옳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주관적인 인식이다. 주관적인 인식의 근원은 마음이며 욕망이다. 마음을 알고, 마음이 움직이는 원리를 알면 갈등의 근원을 이해할 수가 있다. 유식사상은 마음이 움직이는 원리를 설명하고 순간순간 요동치는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려서 열반(마음의 평화)에 이르게 하며 나아가 개인은 물론 사회, 국가 간의 갈등도 해소할 수 있는 지혜를 담고 있는 사상이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을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보편적인 질문으로 받아들여서 질문에 대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해답을 찾으려고 밤을 새우며 노력한다면 그것은 부질없는 헛수고가 될 것이다. 마음에 대한 공부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을 알아보았자 본인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견(知見)만 늘어날 뿐이다. 오로지 본인 자신의 주관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타인의 수고를 슬쩍 차용한다 해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 따라서 마음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나의 마음은 무엇인가?’라고 바꾸어야 비로소 올바른 과제가 되고, 넘어야 할 산을 구체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나의 마음은 무엇인가?’에 대한 살핌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성찰이 된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자신을 아는 정도(의식성)에 따라 마음공부의 진전을 평가할 수도 있고, 정신장애의 심각성 정도를 구분할 수도 있다.

 

유식학은 마음에 관한 학문이고 자신의 마음을 살피게 하는 가르침이며 나아가 진정한 자유인, 참된 도인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이다. ‘천천히 읽는 명상 코너는 앞으로 유식학을 통한 자기 통찰과 자기 심리치유에 관한 내용을 연재할 계획이다. 같은 길을 걷는 도반들은 이 코너가 끝날 때까지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놓치지 않고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이어가길 바란다. 나무 불법승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출처: https://mahadohi.tistory.com/entry/불교-유식학唯識學-산책1?category=485840 [웹진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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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보디교육원 - 추가모집- 대학원 전문가과정 (2019. 8.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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