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오늘을 살아냈지만

살다 보면 뜻하지 않는 다양한 문제들에 부딪히게 되지요. 몸과 마음은 피로와 스트레스, 정신적인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길을 잃고 헤매게 되는 요즘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시작을 어떻게 준비하고 계신가요?

'쉬다 명상'은 삶의 방식을 새롭게 디자인하여 가치 있는 인생으로 재구성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만드는 방법을 경험 할 수 있도록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하나. 새로운 시작을 위해 가장 먼저 할 일, 자기를 돌보는 것

자신의 현재 상태를 정확하게 발견하고, 그동안 소진되고 낭비되어온 노력에 대하여 살펴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둘. 나를 만나는 나의 시간

내가 가진 문제의 근본 원인을 찾고 해결해 나감으로써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깊이 성찰하게 하며,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부분에 집중하여 올바른 노력을 통하여 온전한 성공을 경험하도록 안내할 것입니다.

셋. 시작되는 행복한 변화

'쉬다 명상'은 다시 만나게 될 2020년부터의 삶을 보다 더 나은 삶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 성공하는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가는 방법을 배우기 위함입니다.

-정토마을 마하보디교육원장 능행 합장


'쉬다 명상'이 당신께 드리는 선물

⊙ 몸과 마음의 피로와 스트레스로부터 탈출

⊙ 감정으로 오염된 몸과 마음의 정화

⊙ 정신적 트라우마와 소진 회복

⊙ 근원적 생명력의 재생

⊙ 자기성장과 자기돌봄


▼▼▼'쉬다 명상' 수행 신청 바로가기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fRJ0aRgAo7Uxzuw-urPzTuRz43EznOyfiS2hVLoKsSLa1pUQ/viewform?usp=sf_link

 

'쉬다 명상' 지원서

마하보디교육원에서는 2016년부터 2019년까지 4안거에 걸쳐 영적 치유 에너지를 강화하는 프로그램 솔마더(Soul mother)가 진행중입니다. 2020년 솔마더(Soul mother)를 준비하며 조금 일찍 여러분과 만나고 싶은 마음에 준비된 ‘쉬다 명상’ 프로그램. 몸과 마음의 피로와 스트레스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분들, 감정으로 오염된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싶으신 분들, 정신적 트라우마와 소진을 회복하고 싶으신 분들, 근원적 생명력의 재생을 원하시는

docs.google.com

 

어느 한 순간도 소중하지 않은 때가 없었노라

불교 호스피스교육 2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오르면, 정토마을 공동체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 한다. 정토마을 공동체는 돌봄과 수행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의료와 교육으로 사회에 공헌하려는 비영리 단체다. 정토마을 공동체는 1988년 불교 봉사단체 ‘자비회’라는 15명의 봉사자로 시작하여 1989년 5월 말기환자를 대상으로 호스피스활동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임종까지 동행 하는 호스피스 영적 돌봄은 전문적인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였고, 그리하여 4년 후 1993년 5월 아미타호스피스회를 창립하여 불교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불교전문 호스피스교육을 실시 하면서 현재까지 2,000명의 수료생을 배출하였다.

교육에 있어 정통이 있다는 것은 적어도 인기에 편승하지 않고 교육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때문에 불교 호스피스교육에 함께 했던 강사진, 진행요원, 수료생 모두 20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한 사람으로서 서로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교육생을 지지하러 방문한 선배는 “어느 한 순간도 소중하지 않은 때가 없었노라”고 회상에 잠긴 말을 간혹 남기고 간다. 그 순간의 감동을 다시 느끼고 싶은 듯하다.

 

Are you happy ?

불교호스피스를 처음 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스피스=네가티브(부정적)로 인식한다. 죽음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깊은 고찰이 필요한 지점이다.

불교 호스피스교육 20년 역사를 이끌어 오신 능행스님(정토마을 재단이사장)께서는 언제부터인가 대중들에게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하신다.

수없이 많은 환자들을 통해 죽음을 지켜보신 스님께서 행복하냐고 물으시면, 사람들은 멈칫 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람들은 “행복은 무지개 너머에 있다.”라는 보편적인 결론을 잘 알고 있지만 멈칫하게 되고 끝내는 다양한 답을 한다. 하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불교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도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답하지 못한다.

2010년 11월, H 대학교에서 능행스님께서 ‘행복’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게 되었다. 그날 스님은 청년들에게 불교적 관점에서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강연 내용을 일부 요약하여 실어 보았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일시적이고 감상적인 관심만 보일 뿐 죽음을 대화의 주제로 삼는 것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며, 또 그런 주제를 입에 담는 것조차 민망한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무관심이 이미 죽음에 대해 확고하고 초연한 자세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다고 보기도 어렵다. 사람들이 죽음의 문제를 외면하는 이유는 죽음에 대해 초연하기 때문이 아니라 4층을 F층이라 부르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죽음은 부정이요, 금기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죽음을 꺼리고 혐오하거나 죽음에 대한 언급조차 금기시 할 것이 아니라, 인간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을 대비하는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하여 죽음에 대한 지식과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과 그 가족들을 돕는 방법 등을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교육은 노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 모두에게 해당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죽음이란 바탕 위에 삶이란 집을 짓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과 동행하는 삶 위에 눈부신 빛이 있다. 이것은 자신의 삶에 스스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긍정적 사고의 관점이다.”(능행스님 강연 내용中)

 

강의가 끝나고 스님은 다시 청년들에게 물었다.

 

“행복하십니까?”

 

질문에 죽음이 배제되지 않기를 바라며 함께 강연장을 나왔다. 불교호스피스교육 20년 호스피스를 하고 있는 혹은 경험했던 우리에게 다시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행복하십니까?” 

 

[2013.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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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로 보는 호스피스교육의 역사


http://mahaedu.org/

 

마하보디교육원

--> --> 바로가기 자재요양병원 재단법인 정토마을(카페) 한국불교호스피스협회(카페) 웹진'마음'

mahaedu.org

 

검사, 그리고 암 판정

2006년 12월경부터 치질이 항문에서 조금 삐져나와서 움직일 때마다 항문이 시깃시깃하다던 아내가 치질 수술을 하자고 했다.

2007년 3월 치질 수술을 위해 인근에 있는 병원에 들렀다. 진찰을 하던 의 사는 단박에 ‘치질이 아닌 것 같다’면서 큰 병원으로 가서 진단과 조직 검사를 받아보라고 하였다. 놀랍지만 그래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큰 병원에서 검사를 받은 결과 직장암 말기였고, 이미 간과 폐까지 전이되어 있으며, 항암치료는 큰 의미가 없다고 하였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애써 마음을 진정해 보았다.

‘그래, 70살에 생길 것이 30년 빨리 왔을 뿐이다. 맘 굳게 먹자.’

그러나 직장 노동조합 사무총장을 맡고 있었던 나는 귀가가 늦어졌으며, 아내를 제대로 보살펴주지 못했다. 더구나, 2006년 1월 사무총장에 당선된 뒤부터 그만두라는 아내와 다투고 난 후 1개월 침묵, 어떤 경우에는 2~3개월간 아내와의 침묵이 계속되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안팎으로 힘들었고, ‘이 짓을 계속해야 하나’ 고민도 많이 했다.

마음이 힘들 때마다 절에 가서 108배 하고, 금강경 읽고, 아내를 향해 마음이 누그러지길 발원하였다. 그래도 나의 번민은 계속 쌓여만 갔다.

 

제25기 불교호스피스 교육 받으며

2006년 여름에 읽었던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책을 떠올리면서 인터넷에서 ‘정토마을’을 검색하게 되었고, 제25차 불교호스피스교육이 2007년 8월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 어쩌면 지금 내 마음을 잡아줄지도 모르겠구나.’

기대를 걸고 신청을 하여 교육을 받게 되었다.

교육받는 동안 내내 아내의 ‘직장암’에 대한 생각과 이러한 아내의 암 투병을 어떤 자세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 그리고 앞으로 이 사태를 애들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가 화두였고,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내 아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나는 내 아내에게 내 맘을 이해시켜 보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나는 어쩌면 그렇게 내 아내에게 나그네였고, 아내에게 가까이 가지 못한 방관자였을까.’

그런 자각과 함께 아내와의 다툼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리고 현재의 병 원인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나에 대한 스트레스가 주범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아내에 대한 연민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능행스님은 교육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분노하고, 타인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등 자신을 파괴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을 서럽게 했으며, 자신을 외롭게 했습니다. 자신을 못났다고 했으며, 자신을 쓸모없다고 했습니다. 밖으로 밖으로만 매달렸던 것입니다. 오장이 살아남기 위해, 육체가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가! 자신의 존재를 꼬옥 온몸으로 안아주시기 바랍니다.’

이 법문을 듣고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내 자신에 대한 미안함에 눈물을 쏟으며 참회하였다. 내가 바깥으로만 끌려 다니며 사는 동안 아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 자신의 아집을 본 것에 감사하며

나는 5남 1녀 중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누님은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시집을 갔다. 우리 집에 여자라고는 단지 엄마 혼자였다. 밤늦게 일을 하고 집에 들어와도 누구 하나 밥을 해놓지 않아서 엄마가 그 지친 몸으로 밥도 하고 방청소도 하였다.

나는 자라면서 여자에 대한 배려와 여자들의 생각, 여자들이 말하는 법 등을 배우지 못했다. 그냥 내가 잘해주면 될 것이다. 이렇게만 생각하였다.

큰애 임신 중에 시원한 것 먹고 싶다는 아내 말에 나는 고작 아이스크림을 사주었고, 추석이나 설날 시골에 가는 날이면, 아내가 내게 “나는 시금치의 ‘시’자도 싫어한다.”고 말하면, 버럭 화를 내면서 “왜 시골만 가려고 하면 그렇게 말을 하느냐? 차라리 시골 가지 말자.” 이렇게 말을 해버렸고, 그 말로 인해 명절 내내 서로가 기분이 좋지 않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자를 싫어한다는 말은 아내가 남편에게 위로받고 싶어서 그냥 하는 말이었는데 그땐 정말 몰랐다. “그래, 나한테 시집 와서 힘들지, 그리고 시골에 가면 당신이 일을 많이 해야 될 거야. 힘들어도 참어.” 이렇게 말하고 위로 했어야 했는데, 그때 나는 아내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을 내려버려서 잦은 다툼이 일어났던 것이다.

 

입원, 수술, 그리고 부처님 가피

2007년 12월 19일 새벽, 결국 항문으로 변이 나오지 못하던 것이 위태로워지면서 조선대학교 응급실로 직행하였고, 오전에 능행스님과 전화 통화 후 곧바로 일산에 있는 동국대학교 불교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직장암으로 항문이 막혀 대장 속에 변이 쌓여 있는 것이 극에 달한 것이었다. 장은 본능적으로 운동을 하여 항문 쪽으로 보내는데, 항문이 막혀 있어서, 육안으로도 보면 딴딴하게 굳어서 볼록한 것이 보였다.

2007년 12월 21일 새벽, 내내 부풀어 올라온 배를 부여잡고 진통제 투여와 고통을 호소하는 마누라 손을 잡은 채 가슴을 조이다가 아침을 맞았다. 참으로 우리는 많은 말들을 나누었고, 아내의 착한 마음도 보았으며 내 자신의 아 집도 보았다. 오후에 수술 준비를 위해 간호사님들이 병실로 들어왔을 때, 그저 수술(대장에서 변을 빼내기 위한 장루 수술임)이 잘 되길 바랄 뿐이었다. 3시간 수술이 끝났다는 연락을 받고 회복실에 달려가서 아내 얼굴을 보니 너무 좋았다.

빙긋 웃는 아내가 그냥 고마웠다. 나는 ‘이게 반가움일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비죽이 흘러나오는 웃음으로 아내를 보았다. 너무 잘된 수술이었다. 모두가 부처님 가피와 여러 도반들의 기도 덕택인 것 같았다. 아내의 수술 사실이 호스피스 동문방에 알려진 후 아침 7시와 저녁 10시에 ‘찰나기도’를 간절히 해주신 스님들과 동문님들께 어떻게 감사함을 표해야 할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는 아직도 완벽하게 아내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종종 아내는 내게 독설을 퍼붓는다. 그래도 감사하다. 수술 전까지의 2박 3일의 시간은 나와 아내의 현생의 업이 녹았던 시간이었으며, 연애시절 그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그때만은 이 세상 모두가 청정해 보였었다. 아내는 내게 아버지 같은 남편의 모습을 기대한 것 같았으나, 나는 언제나 내 몸 편하고 싶은 마음에 빠져 아내에게 보채기만 하는 어린 남편이었다. 하염없이 참회의 눈물이 흘렀다.

 

질병, 수행의 도구로 삼아

2007년 12월 19일 수요일 새벽부터 12월 21일 금요일 집사람이 입원하여 장루(腸瘻) 수술이 끝날 때까지, 이렇게 많은 도반님들의 쾌유 기도를 느껴보니 부처님의 가피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깊고 깊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스스로 내 삶의 명심문을 만들었다.

“부처님 뜻대로 베풀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아내의 아픔을 계기로 부처님 말씀에 의지하며 더욱더 부지런히 정진 수행하겠습니다. 함께 공유하고, 함께 나누고, 아내와 즐겁게 웃어보겠습니다. 모든 인연에게 회향하며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나의 도반과 일체 중생들이 아픔에서 벗어나 부처님 전 복짓기 발원 합니다.”

 

장용열│25기 호스피스

 

 

마하보디교육원에서 올해 1월 5일부터 10일까지 시행되는 호스피스교육을 받기 위해 진주에서 아침 일찍 출발했다.

 

전국 각 지역에서 각자 개성이 강한 16명의 교육생들이 모였는데 이번 교육 의 주제는 “생 멸 그 사이에 핀 꽃”이었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교육을 받는 시간인 줄 알았는데 그것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철학적 의미와 불교적인 이해 등을 통해 나의 감정 밑바닥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는 여러 가지 번뇌의 찌꺼기들을 털어내고, 나를 튼튼하게 바로 세우는 작업과 내가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올바른 견해 등을 정립한 다음, 나의 죽음에 대한 깊은 사유를 하게 됨으로써, 앞으로 어떻게 살아서 나는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다.

많은 선배 봉사자님들과 스님들의 호텔식 같은 정성 어린 공양 준비와 많은 스태프들의 지원으로 무사히 교육을 마칠 수 있었음을 감사드리며 원장스님의 다양한 임상 경험을 통한 사례들을 들으면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어떤 죽음이 아름다운 죽음이며, 나는 어떻게 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그 해답을 얻게 되었다.

 

같이 교육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길 바라고 다가올 여름에 교육받게 되는 49기 교육에 우리가 선배님들께 받은 사랑을 잘 회향할 수 있길 바라며 올 여름에 다시 만날 수 있길 기대해 봅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성불하세요~

 

최인숙 │ 48기 생사의 장 수료생

 


2019년 8월 17일 부터 49기 생사의 장 교육이 시작됩니다.

 

라제시 다사|원네스 유니버스티

척하기
자신의 내면 안으로 깊이 들어가게 되면 고통이 사실과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며, 그때 우리의 주의는 내면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고통은 오로지 우리의 관점에 의해서 있습니다. 내면 안으로 들어오면 뭔가를 숨기려고 하는 과정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누가 나를 방문했다고 칩시다. 나는 일 때문에 바쁘고 그 방문한 사람은 직설적이고 말 많은 사람입니다. 게다가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나가라고 얘기할 수도 없어서 그분이 방문하면 어쨌든 초대하고 들어오라고 하고 예의가 바르게 차도 대접하고 좋은 대화를 나누려고 애쓰고 노력합니 다. 그런데 속으로는 저 사람이 눈치를 채고 빨리 나가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에게는 착하고 예의바른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면서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올바른 행동인가요? 그렇습니다. 이것은 예의이며 이렇게 행동해야 합니다. 이 순간까지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문제가 시작되는 시점은 그가 나가고 문을 닫는 순간부터입니다. ‘나는 참 착한 사람이었어. 나는 그를 배려했고 나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 바가 없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입니까?
상대방과 대화를 나눌 때 내면 안으로 주의를 기울인다면 보여주는 것과 다른 것이 내면 안에서 일어남을 알 수 있습니다. 내면 안으로 주의를 기울이면 내면에 대화가 일어남을 우리는 흔히 보게 됩니다. ‘이 사람이 왜 찾아왔지? 내 시간 낭비하면 안 되는 데 빨리 갔으면 좋겠다.’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게 되면 우리는 자신에게 진솔한 사람이 아니며 자신에게 거짓말을 늘어놓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남에게 거짓말하는 경우보다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예를 들어, 층계를 걷다가 앞의 사람이 미끄러지는 것을 넘어지지 않게 도와주었다면 사고적으로 그를 도와준 것일 뿐입니다. 만약 선택권이 있었다면 그를 돕지 않았을 겁니다. 그 사람을 돕는 순간 우리는 이렇게 느낍니다. ‘나는 참 자비로운 사람이야.’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입니까?

이미지 보존하기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대화가 일어남을 보게 됩니다. 즉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아름다운 이미지를 보전하고 노력하는 애씀에 대한 대화를 보게 되는 것이죠. 이 두 가지로 첫째는 나에 대해 남이 좋은 이미지를 받기를 바라며, 둘째는 내가 좋은 이미지를 보존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에너지는 이미지를 보존하고 유지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개척하기 위하여 소모되며 질주하게 됩니다.
왜 우리가 상처를 받습니까? 어떠한 상황이나 누군가가 나의 어떤 이미지를 무너뜨리려 할 때 우리는 상처를 받습니다. 
인도인을 대상으로 하는 과정 중 삿상이라는 것이 진행되었습니다. 삿상에서는 노래도 부르고 여러 가지 세션을 하면서 행사를 진행하는 과정인데, 참여자 중 어떤 여성이 앞에 앉아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성스러운 노래를 부르는데 그녀는 눈을 감고 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잠이 왔습니다. 그녀는 잠 오는 것을 참다가 눈물이 살짝 나면서 눈물이 주루룩 볼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이벤트가 끝난 후 그녀를 본 주변의 사람들이 그녀에게 “우리는 성스러운 당신의 얼굴을 보았다. 당신은 너무 헌신적인 모습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그 칭찬에 솔직하게 얘기할 수가 없었고 “감사하다.”고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이 자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네 번이나 이것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사람들이 다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게 자비심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 혼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반복성에 의해 그녀는 신성의 사랑의 상태로 자신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녀는 세션 중에 정말 행동으로 꾸벅 졸고 말았습니다. 이를 본 주변의 사람들이 “너 잠을 자고 있었구나. 너 계속 이렇게 잠자고 있었니?”라고 말했고 그녀는 폭발적으로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너희들이 헌신성에 대해 아느냐. 어떻게 나에게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느냐.”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서서히 믿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결국엔 내가 그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어떠한 상황이든 이미지를 파괴시키는 것이 등장하면 우리는 고통스러워합니다.

진실과 직면하기
여정을 해가는 과정에서 바라볼 것은 ‘정말 내가 진솔한가.’입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붙들고 있는 이미지를 보기 시작하면, 얼마나 우리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려 하는지를 보게 되며 우리의 진정한 나를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주변의 ‘늘 남을 돕는 사람들’은 남의 요청에 대해 거절을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난 참 좋은 사람이야. 잘 도와주고 자비로운 사람이야.’ 그런데 그게 사실입니까? 
이럴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거절하면 그가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끊임없이 거절을 못하고 남을 도울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자신 안에 들어가 진솔하다면 이는 자비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바탕으로 한 자비라는 것임을 그는 보게 될 것입니다. 사실은 두렵기 때문에 남을 돕는 것인데, 그 사람이 ‘나는 자비로운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진실이 아닌 이미지를 붙잡고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하면 삶, 상황이나 사람이 위협하고 파괴하려고 하는 것이 들이닥칠 수도 있습니다. 바깥세상의 사람들은 당연히 이미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영성을 추구하는 자로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더 많은 고통을 만드는 것입니다.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이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너무도 쉽습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섬기고 위로 바라보니까요. 
우리 자신과 접촉하고 자신에 대해서 진솔해지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진솔해지면 보이는 것은 ‘내가 만들어낸 이미지와 그 이미지를 보호하려는 엄청난 애씀’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들여다볼 때 두 번째 단계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진솔해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내 모습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진솔한 나와 진솔하지 못한 나가 있습니다. 이 둘은 내면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 교육관 안으로 들어와서 부처님께 절을 하면서 우리의 마인드는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오늘 저 사람과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무슨 얘기를 할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다른 생각은 흔히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는 현상 입니다. 그리고 이때의 진실은, 육체적인 절일 뿐 진정 우리가 절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직면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깁니다. 이 사실을 직면하면 어떤 일이 생기나요? 이것을 직면하는 순간 이러한 것이 나타납니다. ‘내가 진솔하지 않았다면 나는 좋지 않은 스님이라는 뜻인가? 나의 모든 노력과 수련이 다 쓸모없는 행동이라는 것인가?’라는 소리들이 들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이 만들어낸 수많은 이미지들이 파괴될까봐 그 진실을 바라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심하고 주의를 기울이면 나는 진솔하게 절을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러한 우리 자신에 대한 사실을 수용해야 이 여정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아니면 우리가 만들어낸 사실이 아닌 이미지의 세계에 막히게 됩니다. 막히면 노력과 애씀은 이미지를 보존하고 지키는 것에만 사용될 것입니다. 그래서 진솔한 나는 그 사실을 밝혀내려 하고, 진솔하지 않은 나는 그 사실을 덮어두고 억누르려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진솔하지 못한 내가 진솔한 나를 억누르게 되고 우리 안의 억눌려진 나가 나로서 남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솔한 나에게 주의를 기울입니다. 우리가 지키려는 이미지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갖고 있는 근본적 두려움은 이미지들이 파괴될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지를 통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지가 없다면 우리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미지가 모두 파괴되면 그 자리에 뭐가 남나요? 이미지들 밑바탕에는 뭐가 남나요?
만약 이미지들 하나하나를 파괴시키고 그것을 초월한 상태의 우리를 본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뭔가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그냥 있는 그 상태입니다.
삶은 우리가 0(제로, 無)가 될 때까지 이미지를 파괴시키려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싸우고 저항합니다. 우리는 생존하려고 하고 지키려는 메커니즘이 작동해서 이미지들을 방어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진솔해지면 이미지들이 생존하려고 하는 그 실행 과정을 보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무지는 ‘나는 이 이미지들이다.’ 를 믿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각하기 시작하면 이미지가 생존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기존의 지키려는 이미지들도 수없이 있지만 우리는 살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끝 없이 생성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이미지에 묶여 있거나 막혀 있으면 결과적으로 더 이상 아무런 배움이 일어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묶여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진실은 ‘지금 내가 무엇이냐.’입니다. 그러나 도대체 우리가 찾는 진실 은 무엇인가요? 절대적인 진실이 있습니까? 이 순간의 사실(진실)은 무엇일까요?
만약 지금 현재 이기적인 느낌이 있다면 그것이 사실이고 진실입니다. 현재에 존재하고 있는 진실을 넘어서서 더 대단한 무슨 진실을 찾고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지금 우리가 진솔해진다면, 내면을 진솔하게 들여다본다면, 그러면 대부분 하고 있는 작업, 보이게 되는 것은 이미지를 애쓰면서 보호하고 지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신을 잠시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무엇이고 어떤 이미지를 지키려고 애쓰는지 들여다보십시오. 이것을 찾는 방법은 쉽습니다. 상황과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은 지키려는 이미지 때문입니다. 불편을 느끼거나 상처를 받을 때는 어떠한 이미지가 위협을 받았을 때입니다. 
묶여 있는 이미지가 무엇인지 주의를 기울여보세요. 착한 사람, 사랑스런 사람의 이미지를 갖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늘 사실은 아닙니다. 때로는 착한 사람일 때도 있지만 때로는 착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둘러싼 이미지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고통은 이미지를 지키려는 애씀에서 옵니다. 나는 똑똑한 사람이라는 이미지일 수도 있고, 나는 진솔한 사람이라는 이미지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를 지키는 데 우리의 대부분의 에너지는 소모됩니다.
이미지를 정당화시키는 여러 가지 설명거리를 마인드는 늘어놓을 것입니다. 그러면 마인드는 애써서 우리 자신에게 보여주려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착하고 똑똑한 사람인가에 대한 예제와 상황들을 보여주며 이미지를 보호하려 애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키려는 이미지들을 누군가 위협할 때 우리는 화를 내고 상처를 받습니다.

참나 알기
지키고 방어하고자 하는 이미지들을 볼 수 있다면, 더 깊이 들어가서 이미지들 뒤 배경에 무엇이 있는지 보게 되며, 결국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게 되면 그것이 아픔을 줍니다. 이때 마인드는 회피하려고 여러 가지 철학을 늘어 놓고 부연설명을 할 것입니다. 이 이미지들 뒤 배경에 숨어있는 것과 접촉을 하게 되면 그것이 진실입니다. 
저는 12년 전 다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직자로서 화를 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매우 화가 많은 사람이었지만 화를 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성직자로서 좋은 모양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일 ‘화를 없애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관찰한 것은 분노로부터 벗어나려고 기도를 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온다는 것입니다. 화가 난 이유는 아무도 나에게 도움을 안 주는 느낌이었기 때문입니다. 제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것 같아 더 화가 났고, 제 자신이 화가 많은 것에 또 화가 났습니다. 
그날도 분노로부터 자유롭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문득 기도 과정에서 물었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 화를 내고 있습니까?” 그리고 스스로 통찰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내가 왜 화를 내면 안 되는 거지? 화가 나면 그게 어떻다는 거야?’ 그리고 그 다음 저는 이완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완하게 된 것은 분노가 많은 사람임을 알고 편안함을 느끼기 시작하면서부터였습니다. 화를 많이 가지고 있음을 알고도 싸우지 않으면 고통과 갈등은 없습니다. 그 전에는 이렇게 생각 했습니다. ‘나는 화를 내는 그런 사람의 이미지가 있으면 안 돼. 이러한 성품은 버려야 돼.’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제 자신과 싸우고 세상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화가 없는 척하는 이미지를 계속 지켜나가면서 남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제 자신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보호하고 지키려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화가 많은 나는 이것 외에 무슨 다른 것이 될 수 있을까요? ‘이게 나다. 화가 많은 내가 나다.’임을 인정하는 것이 수용입니다. 
자신 안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기를 바라는 애씀과의 싸움이 있습니다. 나는 끊임없이 다른 것이 되기 위해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주 미묘하게 그 작업이 일어납니다. 마인드는 조용히 당신에게 속삭입니다. ‘조금만 더하면 자유로워질 거야. 이건 가능하다. 변화란 가능해.’ 그것이 마인드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재잘 거리는 소리입니다. 왜냐하면 마인드는 변화를 통해서 생존하기 때문입니다. 마인드는 ‘여기까지 갈 수 있다.’고 끊임없이 이상적인 미래를 보여줍니다. 마인드는 ‘자유로워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끊임없이 상상합니다. 마인드가 우리를 붙잡고 있는 마지막 밧줄은 “너 바뀔 수 있어. 내가 널 도와줄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걸 믿고 자유를 향해 한 스텝 가려 하고 마인드는 우리를 지배합니다. 마인드는 우리의 진실과 직면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마인드는 사실로부터 우리를 점점 더 멀어지게 하려고 합니다.

참나를 찾아서
자유란 지금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수용할 때입니다. 수용이란 무엇인가요? 수용을 한다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요? ‘그래, 나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수용해.’ 이것이 수용인가요? 성품이 나타날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수용일까요?
우리가 심리적으로 뭔가 되려는 과정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을 하고자 하는 필요성이고, 둘째는 사랑을 받고자 하는 필요성입니다. 다시 말해, 남들을 사랑해야 하는 필요성과 그리고 남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의 필요성입니다. 남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선한 모습을 보이고 ‘좋다 나쁘다’는 마인드 차원의 형성입니다. 내면에서는 좋은 쪽을 선택하려 합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좋은 사람이 되려 하나요? 그것은 칭찬받고 사랑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칭찬받고 사랑받으면 우리 자신을 사랑할 가능성이 생긴다고 믿기 때문입니 다. 상대방이 칭찬해주면 우리는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칭찬해줘서 기분 좋은 게 사실입니까? 상대방이 인정해줄 때 그때 나는 내 자신을 사랑할 가능성이 생깁니다. 오로지 우리는 자신이 자신을 사랑했을 때 기분이 좋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칭찬 할 때 ‘나도 괜찮은 인간이구나. 나 자신에게 사랑을 줘도 되겠구나.’ 하고 사랑을 주기 때문에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 사랑해주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남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려는 끊임없는 욕망만 지속하게 됩니다. 즉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을 때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도움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한 남자가 여성에게 “난 너를 사랑한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 남자가 진짜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겁니까? 그가 실제로 전달하려고 하는 것은 뭡니까? 그것은 “나를 사랑해줘.”입니다. 소위 말하는 모든 사랑은 사랑을 받으려는 욕망일 뿐입니다. 사랑과 인정 을 받으려는 욕망, 내가 중요한 인물이 되려는 욕망, 그리고 이러한 욕망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좋은 이미지들을 형성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스럽게 만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화장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화장한 얼굴만 보면서 그 예쁜 얼굴이 자신이라고 믿기 시작합니다. 이미지라고 불리는 것은 내면에 화장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수용은 있는 그대로 내가 다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게 합니다.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한 욕망은 끝을 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분노가 있는 사람인데 분노가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고통스럽습니다. 분노가 없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그것이 수용입니다. 여기서는 적극 적인 수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이기심을 인정해.’ 하는 것은 수용이 아닙니 다. 말을 통해 선언을 하면서 일어나는 것은 수용이 아닙니다. 내가 나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싸우지 않을 때 그게 수용입니다. 
수용이란 ‘그저 그렇다.’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보기 위해서 우선 봐야 하는 것은 얼마나 내가 끊임없이 이미지를 만들며 지키려 하는지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사랑을 받고자 하는 욕망과 남을 사랑하고자 하는 욕망도 옵니다. 남을 사랑하면 나 자신을 사랑할 가능성이 생긴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남을 사랑하려는 애씀 속에서 실패를 하고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조건 없이 상대방을 사랑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고통이란 사이클에 묶이는 것입니 다. 우리는 남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아름다움은 나를 사랑하게 되면 밖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평온이 있습니다. 자신과 평온이 있으면 세상 전체와 평온을 느끼게 됩니다. 
상대방을 사랑하려고 애쓰고 노력하는한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오히려 나 자신의 이미지만 형성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부분만을 사랑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바꾸려고 합니다. 우리 안에는 끊임없이 갈등이 일어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 부분만 바뀐다면 나는 사랑을 받을 값어치가 있고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가 사랑스럽게 바뀌게끔 하는 노력이 시작됩니다. 우리의 주변에 있는 영성적인 수련 자체가 우리 자신을 바꾸려는 데 치중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끝이 있습니까?
사랑이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조건이 붙어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을 수용하기 위해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수용이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절대 수용하지 못한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 자신과 싸우고 있고 바꾸려고 애쓰는지 자각하게 되면 그것이 수용의 시작입니 다. 우리 자신을 얼마나 사랑해주지 않고 있는지를 자각하는 것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수용하든 안 하든 어차피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08년 5월 23~24일 마하보디교육원 주관으로 이루어진 ‘스님들 을 위한 의식과 영성교육’의 내용을 게재합니다.

라제시 다사|원네스 유니버스티

원네스란 다양한 차원에 의해서 존재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여러 차원에서 의 분리심과 경계심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분리심으로부터 언어별, 국가별 분리 등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분리심이 없어지고 통합되면 하나됨이 이루 어진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보는 관점의 하나됨이란 내면적 인 경험이고 변화라고 보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바깥세상이 아니라, 내면의 상 태에서 세상을 어떠한 관점으로 보느냐 경험하느냐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됨이란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지요. 자신의 여러 가지 면을 수용하게 되면 그것이 하나됨으로 이루어질 때 다른 것을 보는 것이 달라집니다.
저는 12년간 수천 명의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고 또한 더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아 왔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싸우지 않게 되었으며, 더 이상 갈등 안에서 애쓰고 있지 않고, 갑작스럽게 자기 주변의 사람들과 세상과의 연결성을 맺는 것에 수월함을 느끼게 되는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원네스의 목표 중 하나는 인류에게 어떠한 조건도 없는 자유로움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모두가 그 자유를 향 해서 달려갑니다. 자유를 얻기 위해 명상, 혹은 경전을 통해서, 또는 남을 도와주면서 우리는 달려왔습니다. 저 역시도……
자유라는 과정을 향해서 가게 되면 늘 시작은 고통의 시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 다. 그리고 우리는 고통에 친숙합니다.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란 무엇인가요?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은 내 자신에 대한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고 우리 삶에서 그것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를 다양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자아가 있다면, 모든 사물을 그대로 봐줄 수 있는 것이 자유이며, 자신의 욕구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것도 자유입니다. 불교는 아싸바스(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철학적인 자아로부 터 해방되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다시 말해 자유란 사람마다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습 니다. 그렇지만 공통적으로는 —자유로움을 얻게 된다면— 누구든지 모든 것들과의 연 결성이 깊어집니다. 자신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주변 사람들이나 세상과도 깊은 관계가 이루어지고, 자연과의 관계도 그리고 고차원의 의식과의 관계도 깊어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어떠한 길을 선택해서 그 행로를 갈 때 우리는 죄악의 성품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그 길을 걸어갑니다. 그리고 마음으 로부터 해방을 얻어 간섭받지 않고 작용받지 않는 단계로 가기 위해서 그 행로를 진행 합니다.
마음이 중단되는 고요함까지 어떻게 가며, 또한 그 고요함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인가 요? 자유로워지는 것은 누구나 중요하다고 느끼며 가능하다고도 여깁니다. 그런데 무 엇이 그것을 가로막나요? 가로막는 것은 바로 무지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에 주의를 기 울인다면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가능합니다. 자유로움을 성취하기 위한 핵심은 주시입 니다. 그리고 주시를 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은 특정된 감정의 집착입니다.
감정의 집착을 원네스에서는 ‘충전’이라고 말합니다. 경험에 의한 집착에 충전이 남 아있으면 그것이 고통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주시하고 자각하게 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예를 들면 증오심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화가 나는 이유는 저 사람이 저렇게 하기 때문이야.”라고요. 그런데 상대방이 어떻게 해서 내가 화가 나는 것이 사실입니까?


고통은 관점에 있다.
자유라는 것을 향해가는 과정의 첫 출발은 고통에서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고통의 챔피언들입니다. 그 의미는 자신이 겪은 고통에 대해 공부를 해왔다는 얘기입니 다. 고통은 무엇인가요? 육체적 심리적으로 아는 경험이며 불편한 경험들입니다. 그리 고 둑카라는 존재성의 고통이고 영적인 고통도 있습니다. 고통은 아주 아픕니다. 뿐만 아니라 나에게 방해를 주고 불편함을 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고통을 겪습니까? 고통을 겪는 이유는 무지에 빠져있기 때문입니 다. 가정하고 있는 무지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가정 중의 하나는 상대방이 책임요소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통이란 남 탓을 하는 과정입니다. 내면에 일어나는 ‘기분 나쁨’에 대해 남 탓을 하며 부연 설명하는 과정이 바로 고통입니다. 남에 대해서는 지배 하거나 해명하려 들고, 자신에게는 변명이라는 부연 설명들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고통을 멈추게 합니까? 그러한 과정 자체가 모두 고통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고통의 핵심은 아예 들여다보지도 못합니다. 그저 그 과정 속에 빠져 있게 됩니다.
고통이란 것은 끝내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통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는 고통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상대방과 상황이 고통의 원인이라고 믿는 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상대방과 상황에게 주의가 묶여서 주의가 밖으로 빠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황을 바꾸고 사람을 끊임없이 바꾼다 고 우리의 고통이 종료됩니까?
바가완께서는 고통이란 ‘관점’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고통은 ‘상대방이나 상황이 고통의 책임요소’라고 보는 무지 때문이며, 상대방이 책임요소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현실이 되었을 때 고통을 들여다보고 주시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상대는 고통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제가 어떤 분에게 “당신은 매우 똑똑하시고 영리하십니다. 진리에 가까우십니다.”라고 했는데 그분은 그 말에 상처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 면 그분은 그 자신이 똑똑하고 진리에 맞다고 믿은 적이 없기 때문에 제 말을 놀린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분의 고통은 저와 무관합니다. 고통이 사실 에 있다면 모든 사람에게 사실은 고통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넌 바보 같다.”라고 말해도 기분이 좋은 사람도 있거든요. 고통이란 ‘바보 같다’라 는 말과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이란 우리가 그 상황과 사람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느냐에 의해 일어납니 다. 이것을 자각하고 알아차리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습니 다. 바라보고 알아차리는 순간 모든 외부요소가 잘라지듯이 주의가 더 이상 그리로 가 지 않습니다. 더 이상 밖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고통이란 우리의 관점에 있으 니까요. 그런데 좋은 관점에 있다고 자유로운가요? 좋은 관점은 나쁜 관점이 형성될 수 있기 때문에 진실이 아닙니다. 관점 자체가 바로 고통입니다. 어떠한 관점이든 이것 은 주장이며, 주장을 하게 되는 순간 당신이 그것이 됩니다. 그것에 당신이 묶이고 당신 이 그 관점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고통이 됩니다.

고통의 회피
어떻게 관점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우리 과거의 경험에 충전이 있는 한 관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충전은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일어납니다. 이 해결되지 않은 경험은 끊임없이 마무리 지으 려고 계속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부족하고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느낌을 지닌 사람은 그 지닌 상태로 삶을 이어가며, 색안경을 끼고 그것을 투사하게 됩니다. 그러면 서 그 색으로 세상을 봅니다. 그리고 살면서 어떠한 이유를 들이대서라도 사랑을 못 느끼고 거부당했다고 호소합니다. 과거의 경험이 완전하게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입니 다. 그러나 어떠한 것이든 완전하게 완성되게 경험하면 그것은 아이처럼 깡충깡충 뛰고 싶을 정도의 기쁨과 환희로움을 줍니다. 상대방이 요소라고 생각하는 것은 고통을 지속 시킵니다. 그러나 어떠한 변화를 주려하지 않고 남의 탓도 하지 않고 부연 설명하지 않으면 그것이 고통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고통도 완전하게 경험하면 기쁨과 환희로 전환됩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마음은 절대로 이렇게 해내기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부연 설명을 계속합니다. ‘분석하면 안 돼’도 분석이며 ‘비교하면 안 돼’도 비교입니다. 그리 고 ‘생각을 없애야 해’도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마음을 끝낼 수 있을까요? 고통을 온전히 경험하기 위해서는 도망하고 있는 그 자체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 의 성품은 ‘도망치기’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은 절대적으로 아픔을 경험하 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픔을 경험하면 그것이 환희를 주는 것이 사실입니 다. 고통이 다가오는 순간 즉각적인 반응은 회피입니다. 육체적 물리적 방법으로도 회 피하고, 영화과 음악 그리고 일로도 회피하고, 뿐만 아니라 철학을 사용하기까지 합니 다. ‘그래, 어차피 삶이란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지. 모든 것을 똑같이 경험해야지. 고통이란 삶의 일부분이야. 고통이 있어야 성장하는 것이니까 더 많은 고통이 있어야 해.’라고 하면서요. 마인드가 하고 있는 것은 끊임없는 회피입니다. 주의를 몰입하는 것이 불가능하면 고통을 끝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회피함을 자각하면 고통 속에 있으면서 고통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고통이다. 고통이다.’ 하면서 고통을 경험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회피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한마디 던지면 상처를 받고 가슴에 불편함을 느낍니다. 이와 비슷한 배움을 통 해 ‘고통을 경험하면 환희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마인드는 ‘경험해야 해.’라고 하며 마인드가 그 경험을 경험하려고 노력합니다. 마인드는 생각이 흐르고 있는 과정입니다. 다른 생각이 들어오면 마인드는 ‘지금 올 때가 아니야. 나는 고통을 경험해야 해.’라고 편집부 특집_라제시 다사 39 집착하고 놓질 않습니다.
아픔을 진정 경험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픔은 육체적 아픔을 온전하게 일어나도록 허용하고 자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인드가 작용하여 ‘물 한잔을 경험해야 해.’라 고 생각하면 물이 경험이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애씀입니다. 온전히 마인드가 작용하 면 애씀이 일어나고 애씀은 아픔으로부터 자신을 멀어지게 합니다. 만약에 진실이 개념 으로 사용되고 철학으로 활용되면 그것은 아픔으로부터 멀어지는 수단인 동시에 회피 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인드는 아주 똑똑하기 때문에 회피를 잘합니다.
또한 마인드는 수용의 개념을 이용해서 회피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인도에서는 갠지스강을 향해서 여행하는 행사가 있습니다. 거기에 가서 자기의 성품을 바치는 것이 행사의 일부입니다. 
어떤 사람이 참여하고 와서 말합니다. “나는 분노를 버리고 왔어.”라고요. 그런데 사 람들이 자꾸 와서 묻습니다. “너 정말 분노를 버리고 왔니?” 그런데 그렇게 같은 질문이 계속되고 마침내 다섯 번째의 사람이 질문했을 때, 그 사람은 화를 내면서 말합니다. “내가 이미 말을 했잖아. 내가 분노를 버리고 왔다고!”

고통의 수용
수용이 개념으로 있는 한 마인드는 그것을 활용합니다. 이것이 회피가 아닌지 회피인 지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요? 진정한 수용이 일어나면 어떠한 설명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삶은 그냥 흐르는 것이야.’라고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수용이 진정 일어나면 그때는 그 말 자체도 언급이 안 됩니다. 오로지 있는 것은 아픔뿐 어떠한 생각 이 붙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일어나려면 자각의 힘이 엄청 강력해야 합니다.
고통으로부터 회피하는 과정이 고통입니다. 정당화시키고 틀에 맞추어 편안함을 받 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진정한 고통이 아니라 도망치는 과정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호랑이가 있다고 합시다.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그렇죠. 당연히 도망치는 거죠. 제가 제일 먼저 도망칠 겁니다. 호랑이가 쫒아오면 맨발로 옷도 챙겨 입지 못하고 30분, 40분, 엄청나게 뜁니다. 그때 누군가 “너 지금 어떠냐?”고 묻습니다. “나는 고통스럽 다.”고 대답하죠. 그가 또 묻습니다. “무엇이 고통스럽냐?” 나는 “저 호랑이 때문에 고 통스럽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봅시다. 호랑이가 저를 건드렸습니까? 저를 먹었습니까? 때렸습니까? 한 번도 그런 사실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입니다. 호랑이는 언젠가 저를 먹을 것입니다. 어차피 먹힘을 당할 바에는 지금 먹히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고통은 우리 안에 있는 무엇이 무너질 때입니다. 그것을 직면하지 못하니까 방어하고 보호하려고 애씁니다. 호랑이가 당신을 바로 먹으면 당신은 죽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죽으면 그것이 당신 삶의 시작입니다. 우리 안에서 죽는 것은 아나만입니다. 아나만은 자신의 왜곡된 관점, 즉 가면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자아의 일부가 죽는 것입니다. 그러 면 자유로워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일부가 죽는 것을 허용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방어적이고 공격적으로 나갑니다. 먹어버리게 허용한다면 호랑이는 제 할 일을 했기 때문에 없어집니다.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이란 고통으로부터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때입니다. 왜냐하면 고통을 경험하면 기쁨으로 전환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먹힘을 당하는 순간 완전히 끝납니다. 고통의 관점 자체가 끝납니다. 자신이 고통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자신을 먹어버리는 것입니다. 도망가는 것을 자각 하십시오. 자각하는 순간 더 이상 뛰지 않습니다. 자각 자체가 고통을 경험하는 것입니 다. 그것이 온전한 경험입니다. 고통의 관점이 고통 경험을 가로막을 뿐입니다. 딱 한 번 먹힘을 당하면 호랑이가 올 때마다 가만히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경험 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것이든 온전히 경험하면 남는 여유는 환희와 기쁨입니다. 고통으로부터 성공 적으로 도망치면 한숨은 쉬지만 그것은 잠시 동안 잘 도망친 것입니다. 물론, 처음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도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두려움 극복의 두 가지 방법은 첫째, 이 두려움이 마인드가 사용하는 회피 방법임을 통찰하는 것입니 다. 그리고 둘째, 이 과정에서 나는 홀로가 아니며, 나는 부처님의 가피를 받고 갈 수 있다는 용기와 가피를 경험하면서 극복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자면, 마치 아이들이 엄마 뒤에 숨어서 강아지를 만지듯이 말입니다.

※2008년 5월 23~24일 마하보디교육원 주관으로 이루어진 ‘스님들을 위한 의식과 영성교육’의 내용을 게재합니다.

나는 2017년 1월에 생사의 장 불교호스피스교육을 마친 후, 같이 교육을 받은 도반의 권유로 교육 내용도 모른 채 솔마더에 참여하게 되었고, 2017년 4월부터 11월까지 8개월 동안 한 달에 한 번 진행되는 수업과정을 빠짐없이 참여하면서 솔마더들은 함께 영적 키움을 하게 되었다. 수업은 이론적인 배움을 하고, 개념을 정립하면서 실습으로 이어지는 패턴으로 진행되었다.

위뭇타 찌타 아디묵타로 대상과 하나 됨의 이치를 듣고 바로 현장으로 나가 대상과 하나 됨을 연습하고 스승님께 확인을 받고, 또 배운 것을 호스피스 병동에 가서 실습을 하면서 더욱더 넓어지고 성장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방법인 위뭇타 찌타 아디묵타가 생활에 녹아들만큼 익숙해지며서 무아無我의 상태를 자주,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대상과 일치되면서 "내가 저것과 둘이 아니구나. 같은 것이구나."를 깨달았다.

이원성의 구분이 없게 되는 일을 자주 겪으면서 나의 파동과 대상과의 파동이 합쳐지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 것을 느끼며 어떤 생명, 무생명의 물체에게 까지도 묵타를 실현하니 만법이 둘이 아닌 법공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경전에 있는 그대로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는 뜻도 그것이 어떻게 내고 쓰는 것인지도 일상화 되어갔다.

그리고 이렇게 몸에 녹아든 이치를 차크라 디아나를 통해서 에너지화시켜 머리로 알기보다 몸에 익히게 되고, 아난다 만달라 명상을 통해서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육체가 겉으로는 있지만 그 본질이 에너지 통로를 통한 빛의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할 때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거대한 빛과 하나가 되어 통합이 일어나는지도 체험할 수 있었다.

솔마더 8개월 과정을 진행하면서 나 스스로가 에너지의 고양된 변화와 카르마의 변화를 느낄 수가 있었고 또한 나의 현실적 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함께 왔다. 나의 내적 성장이 이루어짐에 따라 나에게 고민 상담을 하는 사람이 늘어갔고, 직장에서도 동료들과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들을 함께 보내면서 타인을 도우려는 마음이 함께 일어났다. 그렇게 생활을 하다 보니 직장에서의 성과도 크게 나타나서 모두가 만족하는 직장분위기로 변해가는 것이 확연히 느껴지면서 '내 주변 모두가 보살이 되어가고 있구나.' 솔마더를 하면서 나 한 면의 의식의 성장의 밝기로 인해 주변이 모두 밝아지고 같이 파동해 나간다는 것을 느끼면서 '모두가 함께 보살이 되는 유토피아가 가능하겠구나.'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8개월 동안 진행된 이 수행을 지도하여 주신 스승님과 주말마다 수업진행을 열심히 도와주신 교육원 직원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8개월을 함께 멋지고 아름답게 수행한 18명의 도반님들께 묵타를 보낸다.

 

*솔마더soul mother는 영적 치유 에너지를 강화하는 훈련 프로그램으로 2016년부터 마하보디교육원에서 시작되었으며, 능행스님께서 지도하여 주십니다. 

 

(출처 : 재단법인 정토사관자재회 정토마을 계간지 2018년 봄호)

매일매일 뿌연 서울하늘의 미세먼지와 겨울의 마지막의 아쉬움을 시기 하듯 매섭게 몰아치는 여분의 추위를 뒤로 하고 남쪽으로 달려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으로 향했다. 학인시절 능행스님께서 불교호스피스 병원 건립을 하시겠다고 운문사에 오셔서 홍보를 하시고, 많은 스님들이 마음을 모으던 그 시절의 회상이 내 앞을 지나가고 기대 이상으로 반듯하게 우뚝 자리잡은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의 전경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7년간의 외국생활을 하고 너무나 빨리 변해버리는 한국이라는 사회에 적응도 못한 채 지난 늦여름 한국으로 귀국하자마자 나는 병원 법당 소임을 맡았다. 소임을 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부터 마주하게 된 세상의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는 분의 처절함과 쓸쓸함을 바 라보면서 난 가슴이 턱 하니 막히는 것 같았다. 그들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건지, 어떤 마음과 말이 그분의 절망을 돌려 편안함을 줄 수 있을지 지금까지 내가 배우고 느껴온 모든 것을 동원해도 얻을 수 없는 그 해답에 난 죄스러웠다. 나의 무력함과 무능함에 좌절하고 그분들의 슬픔에 동화되어 한없는 우울함으로 퇴근 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던 그날을 잊을 수 없다. 그날 이후 난 병원에서 활동하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교육을 꼭 받아야겠다는 간절함이 생겼고 승려연수라는 형식을 빌려 호스피스교육에 동참했다. 

 

2박 3일이라는 승려연수 교육과정으로의 호스피스교육, 사람들의 죽음을 준비하는 호스피스라는 과정이 어찌 그 짧은 시간으로 충분하겠는가? 수없는 반문도 하였다. 호스피스는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고 내가 만나는 많은 분들은 목숨이 끊어지는 임종기도의 순간에도 생의 집착을 놓지 못하고 간절하게 마지막까지 스님의 기도에 의지하여 삶의 동아줄을 부여잡는 사람들인데 난 무엇을 배워야 할까?

 

하지만, 이번 교육의 인연으로 중요한 한 가지를 배웠다. 이 호스피스교육은 내가 배워서 누군가를 위해서, 어떤 소임을 살기 위해서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임을 깨달았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이라는 고통, 모든 이는 죽음에 이른다는 문제에 대하여 난 과연 어떻게 죽어갈 것이고, 수행자로서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배우는 것이 이 교육이었다. 부처님께서 그리고 수많은 선지식들께서 고구정녕하게 제시하신 그 최후의 방법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이 교육이고 나뿐만이 아니라 불자의 수행으로서 이생에서의 마지막 수행으로서 그 회향의 순간을 직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되새기고 정리하게 되는 시간이 되었음에 감사하다. 인간의 삶에서 생노병사라는 가장 기본적인 과정에서 불제자로서 어떻게 바라보고 다스리고 정진해 갈 것인지에 대한 공부를 그 동안 잊고 있었음을 반성했다. 

 

우리 불자들, 아니 우리들 모두 잘 살고자 기도에 매달리지만 잘 죽는 것에는 기도의 마음을 내지 못한다. 모두가 갖고 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 죽음 이후에 대한 두려움으로 많은 종교적 가치관과 관념들이 생겼고 사람들은 그것에 의지해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죽음에 대한 준비로써 이 교육은 절대로 간과되어서는 안 될 교육이라고 모든 분들에게 최대한 많이 알리고 싶다. 

난 오늘도 겨울을 지나 또 다른 봄으로 죽을 날을 위해 달려가고 있다.

 

선봉 │ 승려연수교육 불교호스피스 영적돌봄 2기 교육을 수료하신 선봉스님의 후기 글을 옮겨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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