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돌봄가팀 포교원장상…부산지부 부산대병원팀 봉사상 단체부문 수상

한국불교호스피스협회 10주년 기념식에서 포교원장 지홍스님이 협회 영적돌봄가팀으로 활동하는 능인스님 등 9명에게 포교원장상을 수여하고 있다.

말기암 환자들과 함께 해 온 불교호스피스협회 10주년을 자축하고 향후 협회 발전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축제의 장이 펼쳐졌다.

한국불교호스피스협회(협회장 능행스님)는 10월25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문화공연장에서 창립 10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조계종 포교원장 지홍스님, 초대 한국불교호스피스협회장 지현스님을 비롯해 전국에서 호스피스 활동을 하고 있는 스님과 자원봉사자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기념식에서 포교원장 지홍스님은 한국불교호스피스협회 영적돌봄가팀으로 활동 중인 능인스님 등 9명에게 포교원장상을 수여하며 활발한 활동을 당부했다. 협회장 능행스님은 호스피스 현장에서 헌신한 부산지부 환희호스피스봉사단 부산대병원팀에 ‘The 아름다운 사람 봉사상’ 단체부문상을, 울산지부 최정순 봉사자와 부산지부 김명자 봉사자에 개인부문상을 수여하며 노고를 치하했다.

기념식에서 앞서 ‘삶, 사람’ 호스피스 세미나는 10주년을 축하하는 공연과 연극 등 문화행사로 펼쳐졌다. 대금연주와 살품이춤에 이어 호스피스 활동을 펼치고 있는 자원봉사자들이 무대에 올라 연극을 선보여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와 함께 한마음선원 한마음합창단도 음성공양을 선보이며 협회 10주년을 축하했다.

포교원장 지홍스님은 “한국불교호스피스협회 창립이 벌써 10년이 됐다. 1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지금은 연간 600여 명이 넘는 회원들이 호스피스 봉사를 하거나 협회를 지원하는 다양한 역할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죽음을 앞둔 불자와 가족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일 뿐만 아니라 완화의료와 관련된 법과 제도개선을 위해 더욱 노력해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에 앞서 협회장 능행스님은 “호스피스를 실천하는 우리는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누군가의 종착역에서 삶을 놓고 떠나가는 이의 차가워지는 그 손을 잡아주며 불꽃같은 삶을 살아내고 있다. 한국불교호스피스협회 10년의 여정을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며 “앞으로 사회적 고통과 더 이상 치유될 수 없는 질병으로 발생하는 다차원적인 영적고통을 완화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고 밝혔다.

협회장 능행스님이 부산지역 환희호스피스봉사단 부산대병원팀에 'The 아름다운 사람 봉사상' 단체부문상을 수상하고 있다.

호스피스 자원봉사자들이 연극을 선보인 후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한마음선원 한마음합창단의 음성공양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엄태규 기자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https://kbha.kr/

 

(사)한국불교호스피스협회

자비와 지혜를 바탕으로 행복한 삶과 평온한 죽음을 돌봅니다.동행,돌봄,배웅

kbha.kr

┃국경없는민들레, 7월 인도 라다크 레서 의료봉사

울산 정토마을 국경없는민들레가 다가오는 7월 8~17일 인도 라다크(Ladakh) 레(Leh) 지역으로 의료봉사를 떠난다. 사진은 지난해 의료구호활동 사진.

민들레는 바람을 타고 벽을 넘어 어디든 정착해 꽃을 피운다. ‘국경없는민들레’는 민들레처럼 국경을 넘어 의료봉사로 부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창립됐다. 국경없는민들레는 울산 정토마을이 운영하는 해외의료구호사업단으로 의료지원이 절실한 오지마을을 방문, 지원하고 있다.

라다크 심장재단 병원서 활동
전문 봉사인력 40명 의료지원
의료물품과 생활용품도 전달
11월에는 9박10일 스리랑카로

울산 정토마을(이사장 능행) 국경없는민들레가 오는 7월 8~17일 인도 라다크(Ladakh) 레(Leh) 지역으로 의료봉사를 떠난다.

레는 해발고도 3,520m 고산 지대로 4개월의 여름(6월~9월)과 8개월의 긴 겨울(10월~5월)이 있다. 겨울에는 기온이 영하 20도 이하로 떨어지며 눈으로 인해 주요 도로가 통제된다. 작은 티베트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가지고 있지만 의료시설 및 환경은 열악해 지원이 필요하다.

국경없는민들레는 레 지역에 위치한 ‘라다크 심장재단’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의료봉사를 진행한다. 라다크 심장재단은 이사장 초겔 스님이 라다크 고산지대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위해 세운 의료재단이다.

라다크를 비롯한 히말라야 지역은 고산지대로 기압이 낮아 심장 기능이 중요하다. 몸에 피를 보내야하는 심장의 기능과 역할이 다른 지역보다 많이 요구된다. 라다크 지역 고산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심장 판막이 닫히지 않는 병에 걸려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기도 하며, 특히 어린이들의 심장병 발병율이 높다.

 

인도 보드가야에 방문한 국경없는민들레

국경없는민들레 의료봉사팀은 승가 10여 명을 포함해 양방과 한방 전문의료진, 홍보 봉사팀 등 40명이 동참한다. 전문 의료장비를 직접 가져가 체계적으로 진찰하고 문진으로 예방 및 치료에 집중할 계획이다.

한국에서 마련한 의료 물품 및 생활품도 지원한다. 의료물품은 어린이종합영양제, 칼슘제, 영양제, 철분제, 오메가3, 파스, 구충제 등이며 생활용품은 겨울 보온에 필요한 털장갑, 모자, 양말, 겨울점퍼, 넥워머 등이다.

국경없는민들레는 미얀마, 보드가야를 비롯해 해외 오지를 중심으로 의료활동을 펼쳐왔으며 이번 라다크는 의료구호 활동 4회째를 맞는다. 1년에 한 번씩 구호활동을 진행했지만 올해부터는 두 번으로 횟수는 늘리고 다가올 11월 11일에는 9박10일 일정으로 스리랑카로 떠난다. 국경없는민들레는 구체적인 의료구호사업을 위해 서비스뿐 아니라 진료소를 세우고 의료 사업을 확대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국경없는민들레는 의료 외 미용 봉사 및 생활품 후원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

정토마을 사무국 김현아 팀장은 “정토마을 비전이 ‘인류와 일체 생명의 평화적 공존에 기여한다’이다”며 “국경없는민들레는 해외 의료 구호 사업으로 이타행을 실천하고 평화에 기여하고자 한다”고 전했다.

아울러 국경없는민들레는 해외 구호사업 후원 동참도 독려했다. 후원은 의료약품 및 각 나라특성에 맞는 생활 용품 등으로 하면 된다. (052)255-8588

하성미 기자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현대불교신문(http://www.hyunbulnews.com)

https://youtu.be/KEOwcnmTBkw

 

 

https://youtu.be/bhQj0WkeeoE

 

 

불교계에서는 유일한 호스피스 병동인 울산 ‘자재요양병원’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는 능행 스님이 휠체어를 타고 있는 말기 암환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요양병원 운영하는 능행 스님

 

“스님도 죽음이 두려우신가요?”

 

지난 20년 동안 수많은 죽음을 곁에서 지켜본 스님이다. 평균 사흘에 한 번씩 죽음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가 지켜본 죽음은 대부분 ‘비참한 죽음’이다. 행려병자들이나 말기 암환자들의 죽음이다. 누구의 따뜻한 위로도 없이 홀로 고독하게 죽어가는 행려병자, ‘혼절’할 만큼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 속에 죽어가는 말기 암환자들의 죽음이 일상사였다. 그러면 죽음에 익숙할까? 익숙하다면 죽음에 대해 두려움이 없지는 않을까? 오랫동안 수행했기에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스스로 근원으로 돌아갈 수행력을 갖춘 스님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 세상 들여놓았던 몸 떠나는데
어찌 아프고 힘들지 않을 수 있나

 

엄마 뱃속 태아도 7달째면
자궁 밖 삶을 준비하듯

 

그 너머의 또 다른 삶 위해
일상 속에서 죽음을
얘기하고 배우고
사랑해야

 

한 해 15만㎞씩 돌아다니며 모금
108개 병상 ‘자재병원’ 짓고
해마다 120여명 죽음 함께 살아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 31살에 출가

스님의 얼굴에 언뜻 어둠이 비친다. “처음엔 엄청 두려웠어요. 때때로 죽음이 너무나 낯설고 허망하게 느껴졌어요. 두렵고 막막해서 죽음으로부터 멀리 떠나버리고 싶었어요.” 스님은 “고통의 한계에서 이를 꽉 물고 마지막 생을 버티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하면 저들의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나 하는 고민만 남아요”라고 말한다.

 

능행 스님은 불교계에서는 유일한 호스피스 병동을 건립해 운영하고 있다. 31살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법정 스님처럼 살고 싶어 출가했다고 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고, 불교는 책을 통해 접했다. 그냥 법정 스님이 좋았다. 하지만 그는 출가 후에 한 번도 법정 스님을 직접 만나지 못했다. 조용한 산사에서 수행을 하기보다는 행려병자가 나뒹구는 병원에서 그들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다. 5~6년 하니 그런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2004년 인도에 가서 달라이 라마의 강연을 듣고 ‘발심’이 생겼다. 출가한 뒤 처음이었다. “일체중생의 죽음과 고통을 두려움 없이 바라보고 도와주겠다고 결심했어요.”

 

남편 품에서 맞은 아름다운 이별

 

자재병원 마당에서 가을을 명상하는 능행 스님.

스님은 1999년부터 정토마을 호스피스 센터를 지어 운영하고 있었다. 한 해 15만㎞를 돌아다니며 병원을 짓기 위해 일반인들과 불자들에게 호소를 했다. 지난해까지 쉼 없이 모금하고 후원받아서 울산에 새로 땅을 사고, 현대식 병원을 지었다. 108개 병상이 있는 ‘자재병원’은 7천여명의 후원자가 매달 1만~3만원씩 내는 후원금으로 운영한다.

 

한 해 스님이 보는 임종은 120명 정도. 그들의 임종만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스런 마지막 이승에서의 삶도 함께한다. “응급환자를 위해 개발된 첨단 의료기술이 응급환자가 아닌 임종단계에 있는 환자들에게 사용되면서,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이하기가 힘들어졌어요. 온갖 기계와 호스에 의지한 채 생명을 유지하니, 기계가 인간의 장기를 대신하고 있는 셈이죠. 결국 마지막 단계에서 대부분 환자들이 제대로 된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숨을 거둬요.”

 

스님에게 “혹시 아름다웠던 죽음은 없었나?” 물었다. 스님은 한 부부의 이별 장면을 이야기해줬다. 7년 전이다. 부부는 재래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소박한 삶을 살고 있었다. 아내가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3년간의 투병생활을 하다가 마지막 삶을 정리하려고 정토마을로 왔다. 아내는 너무 힘들어서 그만 몸을 놓고 훌훌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날마다 “아프더라도 같이 살자. 떠나지 마라”고 속삭이는 남편을 두고 갈 수 없었다.

 

어느 날 아내는 꿈을 꾸었다. 아름다운 소녀가 다가와 같이 가자고 해서 뒤를 따라갔더니, 깨끗한 물이 흐르고 수많은 꽃이 피어 있는 곳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곳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문득 남편에게 “간다”는 이야기를 하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꿈에서 깨어났다. 아내는 남편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여보, 그곳은 너무너무 아름다웠어. 몸이 하나도 안 아팠어. 아마 그곳이 극락세계인 것 같아. 나중에 당신도 와. 우리 그때 다시 만나자.” 가만히 듣고 있던 남편이 말했다. “그렇게 좋으면 가야지.” 남편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내에게 떠나도 좋다고 허락을 했다. 부인은 남편 품에 안겨서 잠자듯 떠났다.

 

스님은 이제는 ‘품격있는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삶에만 전략과 계획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죽음에도 전략과 계획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스님은 “태어날 때도 7개월 정도 되면 태아가 자궁 안에서 자궁 밖의 독립된 삶을 준비합니다. 죽음을 앞두고도 그렇게 또 다른 삶을 준비해야 합니다. 태아가 자궁 밖에 존재하는 밝은 빛과 아름다운 세상에 대해서 모르듯이 누구도 죽음 너머에 대해 모르지만 분명히 밝은 빛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저 그 길을 따라가면 됩니다.

 

90%가 주민증 사진을 영정으로

스님은 품격있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일상 속에서 죽음을 이야기하고 배우고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기는 첫번째 방법은 죽음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의 삶을 반복적으로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두려움과 공포에 대해 드러내놓고 이야기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안에 담아두면 더 큰 두려움과 공포로 다가오니까요.”

 

스님은 죽음을 당하지 말고 맞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세상에 들여놓았던 몸이 떠나는데 어찌 아프지 않고 힘들지 않을 수 있나요. 그것조차 견뎌야 하는 것이 이생을 받는 대가입니다.”

 

스님은 영정사진을 주민등록증에 있는 사진을 확대해 사용하는 이들이 아직도 90%가 넘는다고 한다. 그만큼 죽음에 대해 준비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한 해를 넘길 때마다 사진과 기록을 남기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훌쩍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본인이나 가족이 당황을 하지 않아요. 죽음에 대해 학교에서도 교육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나는 어떤 곳에서 죽고 싶은지, 어떤 모습으로 삶의 마지막을 보내고 싶은지’에 대해 확실한 생각을 갖게 됩니다.

 

언제 어디서 부를지라도 선뜻

 

스님은 최근 말기 침샘암으로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는 환자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선생님에게 내일은 없어요. 살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아요. 단 하루만 잘 살자고 다짐해봐요.” 그는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을 그대로 수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부인과 자식들과 하루하루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며 지냈다고 한다. 의사들은 한 달을 못 버틸 것이라고 했는데. 이미 석 달이 지났고, 병세도 크게 좋아졌다고 한다.

 

“법정 스님은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나를 부를지라도 ‘네’ 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라곤 밀려오는 거대한 죽음의 파도를 벗어날 수 없으며 삶이라는 배를 뒤로 돌릴 수 없다는 것이죠. 죽음 앞에서 우리는 모두 서툰 항해사들입니다.” 스님은 최근 자신의 호스피스 경험을 통해 겪은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담은 <숨>(마음의숲)을 펴냈다.

 

 

울산/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well/718941.html#csidxd5a08408aea97b585043254f138d010 

 

https://youtu.be/AaGuDqJrCMI

 

 

책상 한편에 약 봉지가 수북했다. "웬 약이 이렇게 많으냐"고 묻자 능행(能行·49)스님이 말했다.

"2003년에 말기 암환자를 돌보다 감염됐어요. 환자가 뽑아놓은 주삿바늘에 찔렸거든요. 더러 있는 일이에요."

이 비구니는 작년 8월 급성 저혈압으로 쓰러져 심장이 멎을 뻔 했다. 올 5월까지 병원을 들락거렸다.

그는 "과로로 죽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하고 느꼈다.

무슨 일을 하기에 스님이 과로사까지 생각했을까?

환자들은 그를 살아있는 '약사보살'이라 부른다. 1999년 그가 지은 호스피스 '정토마을'에서 1000명이 넘는 말기 암환자들이 생을 마쳤다. 11일 창단되는 한국불교호스피스협회의 2000여 호스피스 중 1500명이 그를 거쳐갔다.

"누가 시킨 일이었다면 그이와 원수가 됐을 거야. 일이 힘드니 중이 이렇게 늙었지." 그런데도 호스피스 일을 멈출 수 없다고 했다. "나도 궁금해. 아마 전생(前生)에서부터 이 일을 해왔나 봐."

10년 전 충북 청원군 미원면에 정토마을이 생길 때 20가구 주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시설을 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입구에 개 70마리를 키우고 트랙터로 길을 막기도 했다. 나중에는 군 주민들까지 확성기를 들고 쳐들어와 스님을 고소했다. 시위는 그 뒤로도 3년간 계속됐다. 스님은 30여 차례 경찰과 검찰에 불려갔다.

"혐오시설이라고 무조건 반대할 땐 화도 났지만 나중엔 '아,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죽음을 두려워 하는구나'하고 오히려 이해하게 됐어요." 1993년 서른셋의 나이로 출가한 그 역시 죽음이 두렵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이듬해 한 신도 남편을 병문안 갔다. 췌장암에 걸린 환자는 그 후 닷새 만에 사망했다. "복수(腹水)가 차 배만 불러 있고 새까맣게 타 있던 모습이 너무 무서웠어요.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그때 처음 본 거예요."

그때 그는 '세상은 고통의 바다(苦海)'라는 부처님 말씀을 이해했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암 환자들을 보며 그는 "'저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어찌하면 좋을까' '죽음의 질을 좀 더 나아지게 할 수 없을까' 생각했다"고 했다.

부처가 세상에 들어가 깨달음을 얻었듯 그때부터 능행도 절 밖으로 나갔다. 첫 방문지는 소록도였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코가 으깨진 사람들도 웃더라고요. 이 안에서도 미소가 있고 행복이 있구나, 느낀 거예요."

알코올 중독자, 지체장애자, 불치병 환자를 찾아 오웅진 신부의 음성 꽃동네에 갔다. 그곳을 찾은 스님은 능행이 처음이었다. 더 힘들고 아픈 사람들을 찾아 부산 의료원 행려 병동까지 내려가 먹고 자며 환자들을 돌봤다.

얇디얇은 이불이라지만 말기 환자들에게는 그 무게감이 천근만근처럼 느껴진다. 스님은“세탁을 자주 하다보니 이불도 금세 헐어버린다”며 쌀쌀해지는 날씨를 걱정한다.

능행은 가난한 사람들은 편안하게 죽을 곳도 없다는 걸 알았다. 1997년 한 천주교 병원에서 폐암으로 숨져 가던 스님이 "스님들 편히 죽을 수 있는 병원 하나 세워달라"고 유언을 남기자 호스피스 시설을 만들기로 했다.

"한 편의 소설이었다"는 탁발(托鉢)이 그때 시작됐다. 동냥을 하러 혈혈단신 전국을 떠돈 것이다. "절에서 수행은 언제 하느냐"고 묻자 "동냥 다니는 게 나에게는 수행이었다"고 했다.

1년에 15만㎞씩 전국의 절과 기업인, 시장 바닥까지 가리지 않고 뛰었다. 1000원을 내놓는 상인들부터 100만원씩 도움을 주는 큰 스님들까지 우선 2200만원을 모아 지금의 땅 계약부터 했다. 2년에 한 대씩, 지금까지 5대를 폐차시켰다. 2000년 10월 조립식 건물로 정토마을을 개원할 때까지 들어간 3억원을 그렇게 모았다. 현재 15개 병상에 직원 10여명이 있는 정토마을은 환자 가족들의 후원금으로 운영된다.

1년이면 100여명의 말기 환자들이 이곳에서 마지막을 보낸다. 그 많은 죽음을 지켜보면 어떤 깨달음이 올까? 스님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모든 죽음을 보면 안타깝다는 생각뿐"이라고 했다.

"80이 돼도 난 아직 아니라고 하지 '그래, 나 이제 갈 때 됐다'고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왜 지금 죽어야 하는지 모르고 조금만 더 살고 싶다고 울부짖을 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마음 아파요."

그는 돌이켜 보기도 싫을 만큼 '힘든 죽음' 뒤에는 모두 돈이라는 욕망을 놓지 못한 공통점이 있다고도 했다. 스님은 "15년간 여유롭고 흔쾌하게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채 20명이 안 됐다"고 했다.

"평생 화장실 청소와 바느질로 자식을 키운 70대 할머니가 있었어요. 아름다운 세상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는지 손 흔들고 가시더라고요. 자제분들과 같이 손 흔들어 드렸어요. 경이로웠어요."

4년 전엔 40대 남자가 위암 3기 때 들어왔다. 치료비 부담으로 남은 가족에 누가 될까 아무 치료도 않고 마지막을 보내러 왔다고 했다. 그는 오히려 수능을 앞둔 고3 딸에게 문병도 못 오게 하며 전화로 응원했다.

"우리 딸 파이팅! 우리 딸 잘할 수 있어! 아빠는 잘 있으니까 수능 끝나고 보자." 수능 당일 그는 죽어가면서도 사력(死力)을 다해 전화기를 붙잡았다. "우리 딸 오늘 힘내야 돼? 아빠는 괜찮으니까 수능 끝나면 바로 내려와."

내색하지 않고 딸을 응원한 그는 시험이 끝나갈 무렵 "스님, 제가 할 일은 이제 다 끝났네요"란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능행은 "자식 사랑하는 마음으로 책임을 다했기 때문인지 표정도 평온했다"고 했다.

스님의 바람은 한 가지다. 고통과 아픔으로 범벅된 죽음이 아닌 맑고 여유로운 죽음이 더 많아지는 것이다. 2005년 베스트셀러가 된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라는 호스피스 사례집도 그래서 펴냈다.

청각 장애인 아버지를 뒀던 능행은 의사가 되려 했다. 아버지처럼 몸이 불편하고 치유할 수 없는 질병을 가진 사람을 고쳐주고 싶었다. 그는 "의사는 아니지만 치유할 수 없는 환자를 돌봐주고 있는 점에서는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에서 또 다른 일을 벌이고 있다. 호스피스를 양성하는 교육 기관과 함께 정토마을에서 수용할 수 없었던 더 많은 환자를 위해 병원을 지으려 한다.

신현종 기자 shin69@chosun.com,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0/09/2009100901302.html

1997년 여름 능행 스님에게 급한 연락이 왔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온 전화였다. 임종 직전의 환자 한 분을 돌봐줬으면 한다는 전갈이었다. 많은 종교인이 찾아와도 도통 반응이 없는 묘한 분이라는 얘기와 함께….

■ 능행 스님, 법당 겸 병동 세워 봉사

세상에나. 머리가 헝클어지고 뼈만 남은 환자를 씻겨놓고 보니 스님이었다. 출가 뒤 24년 선방에서 정진하느라 토굴 하나 장만 못했다는 얘기와 함께 그는 비구니 능행 스님의 손목을 부여잡고 간곡한 부탁을 했다.

"비구니 스님. 나는 이렇게 죽어가지만 나중에 병원 하나 세워주소. 내가 죽어서라도 도와줄게…."

이틀 뒤 스님 시신을 벽제 화장터에서 태우고 돌아오는 길에 능행 스님은 서원 하나를 세웠다. "그래. 진정 수행다운 수행, 부처님 가르침에 합당한 보살행에 전념하리라. 죽어가는 이들과 함께 수행을 하는 호스피스(임종을 앞둔 환자의 평화로운 죽음을 돕는 봉사) 수행을 할 수 있도록 병동을 세우리라."

충북 청원군 미원면 구녀산 기슭의 정토마을. 밤이 되면 쏟아지는 별빛이 유난이 고운 이곳이 바로 그런 내력을 안고 2000년에 세워진 법당 겸 병동이다. 물론 3년 모금활동이 큰 보탬이 됐다.

89년 이후 충북 음성군 꽃동네 등을 돌며 봉사했던 능인 스님의 호스피스운동이 자기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린 곳이기도하다. 또한 불교계 최초의, 또한 유일한 독립 호스피스 센터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동안 정토마을은 '아미타호스피스 운동'의 센터로 자리 잡았다.

아미타 호스피스란 기존 호스피스운동에 불교 아미타 신앙(중생을 건지려는 아미타부처와 정토를 믿는 타력신앙)을 결부한 현대적 봉사수행을 말한다.

실제로 이곳에선 한 해 두 차례 스님.불자 대상으로 호스피스 교육이 이뤄진다. 200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에 '불교호스피스연합'을 결성한 데도 정토마을의 역할이 컸다.

그러면 삶과 죽음이 무시로 오가는 공간 정토마을의 실제는 어떨까. 의외로 소박하다. 크지않은 아미타 법당 한 채와 그 옆의 팬션처럼 보이는 병동이 전부다. 의사 두 명, 간호사 네 명, 병상은 15개 규모다.

"우리네 삶은 빗방울처럼 한차례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산다고 하는 것은 죽음 이전의 한시적인 존재일 뿐입니다. 요즘 품위 있는 죽음을 의미하는 웰다잉(Well-Dying), 웰엔딩(Well-Ending)이 자주 거론되지만, 호스피스 운동이야말로 그런 취지를 현실에 옮기는 가장 훌륭한 봉사이자 수행입니다. 질병과 죽음을 경험하면서 인간의 두려움과 외로움을 보살피고 돕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호스피스야말로 '수행의 꽃'이라고 봅니다."

스님은 거듭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한다'(上求菩堤, 下化衆生)는 불교의 대승 정신에 호스피스운동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스님의 활동은 아직은 사회봉사에 소극적인 불교계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크게 시사적이다. 불교계도 80년대 이후 질병.빈곤 등 사회복지에 눈을 많이 돌리고 있으나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말하긴 아직 이른 편이다.

스님은 자신의 이런 신앙관과 정토마을 활동은 담은 단행본 '섭섭하지 않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도솔)를 다음주 초 펴낸다. 몸이 크게 아파 병석에 누웠던 2년 전 문득 '누군가 이런 수행을 이어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과 함께 하나 둘 메모해둔 원고가 바탕이 됐다. 그간의 활동을 일기체 형식으로 적어 얘기가 생생하고, 그런 만큼 설득력도 크다.

조우석 문화전문기자

[출처: 중앙일보] 호스피스로 피어난 '수행의 꽃'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