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계에서는 유일한 호스피스 병동인 울산 ‘자재요양병원’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는 능행 스님이 휠체어를 타고 있는 말기 암환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요양병원 운영하는 능행 스님

 

“스님도 죽음이 두려우신가요?”

 

지난 20년 동안 수많은 죽음을 곁에서 지켜본 스님이다. 평균 사흘에 한 번씩 죽음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가 지켜본 죽음은 대부분 ‘비참한 죽음’이다. 행려병자들이나 말기 암환자들의 죽음이다. 누구의 따뜻한 위로도 없이 홀로 고독하게 죽어가는 행려병자, ‘혼절’할 만큼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 속에 죽어가는 말기 암환자들의 죽음이 일상사였다. 그러면 죽음에 익숙할까? 익숙하다면 죽음에 대해 두려움이 없지는 않을까? 오랫동안 수행했기에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스스로 근원으로 돌아갈 수행력을 갖춘 스님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 세상 들여놓았던 몸 떠나는데
어찌 아프고 힘들지 않을 수 있나

 

엄마 뱃속 태아도 7달째면
자궁 밖 삶을 준비하듯

 

그 너머의 또 다른 삶 위해
일상 속에서 죽음을
얘기하고 배우고
사랑해야

 

한 해 15만㎞씩 돌아다니며 모금
108개 병상 ‘자재병원’ 짓고
해마다 120여명 죽음 함께 살아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 31살에 출가

스님의 얼굴에 언뜻 어둠이 비친다. “처음엔 엄청 두려웠어요. 때때로 죽음이 너무나 낯설고 허망하게 느껴졌어요. 두렵고 막막해서 죽음으로부터 멀리 떠나버리고 싶었어요.” 스님은 “고통의 한계에서 이를 꽉 물고 마지막 생을 버티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하면 저들의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나 하는 고민만 남아요”라고 말한다.

 

능행 스님은 불교계에서는 유일한 호스피스 병동을 건립해 운영하고 있다. 31살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법정 스님처럼 살고 싶어 출가했다고 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고, 불교는 책을 통해 접했다. 그냥 법정 스님이 좋았다. 하지만 그는 출가 후에 한 번도 법정 스님을 직접 만나지 못했다. 조용한 산사에서 수행을 하기보다는 행려병자가 나뒹구는 병원에서 그들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다. 5~6년 하니 그런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2004년 인도에 가서 달라이 라마의 강연을 듣고 ‘발심’이 생겼다. 출가한 뒤 처음이었다. “일체중생의 죽음과 고통을 두려움 없이 바라보고 도와주겠다고 결심했어요.”

 

남편 품에서 맞은 아름다운 이별

 

자재병원 마당에서 가을을 명상하는 능행 스님.

스님은 1999년부터 정토마을 호스피스 센터를 지어 운영하고 있었다. 한 해 15만㎞를 돌아다니며 병원을 짓기 위해 일반인들과 불자들에게 호소를 했다. 지난해까지 쉼 없이 모금하고 후원받아서 울산에 새로 땅을 사고, 현대식 병원을 지었다. 108개 병상이 있는 ‘자재병원’은 7천여명의 후원자가 매달 1만~3만원씩 내는 후원금으로 운영한다.

 

한 해 스님이 보는 임종은 120명 정도. 그들의 임종만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스런 마지막 이승에서의 삶도 함께한다. “응급환자를 위해 개발된 첨단 의료기술이 응급환자가 아닌 임종단계에 있는 환자들에게 사용되면서,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이하기가 힘들어졌어요. 온갖 기계와 호스에 의지한 채 생명을 유지하니, 기계가 인간의 장기를 대신하고 있는 셈이죠. 결국 마지막 단계에서 대부분 환자들이 제대로 된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숨을 거둬요.”

 

스님에게 “혹시 아름다웠던 죽음은 없었나?” 물었다. 스님은 한 부부의 이별 장면을 이야기해줬다. 7년 전이다. 부부는 재래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소박한 삶을 살고 있었다. 아내가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3년간의 투병생활을 하다가 마지막 삶을 정리하려고 정토마을로 왔다. 아내는 너무 힘들어서 그만 몸을 놓고 훌훌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날마다 “아프더라도 같이 살자. 떠나지 마라”고 속삭이는 남편을 두고 갈 수 없었다.

 

어느 날 아내는 꿈을 꾸었다. 아름다운 소녀가 다가와 같이 가자고 해서 뒤를 따라갔더니, 깨끗한 물이 흐르고 수많은 꽃이 피어 있는 곳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곳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문득 남편에게 “간다”는 이야기를 하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꿈에서 깨어났다. 아내는 남편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여보, 그곳은 너무너무 아름다웠어. 몸이 하나도 안 아팠어. 아마 그곳이 극락세계인 것 같아. 나중에 당신도 와. 우리 그때 다시 만나자.” 가만히 듣고 있던 남편이 말했다. “그렇게 좋으면 가야지.” 남편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내에게 떠나도 좋다고 허락을 했다. 부인은 남편 품에 안겨서 잠자듯 떠났다.

 

스님은 이제는 ‘품격있는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삶에만 전략과 계획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죽음에도 전략과 계획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스님은 “태어날 때도 7개월 정도 되면 태아가 자궁 안에서 자궁 밖의 독립된 삶을 준비합니다. 죽음을 앞두고도 그렇게 또 다른 삶을 준비해야 합니다. 태아가 자궁 밖에 존재하는 밝은 빛과 아름다운 세상에 대해서 모르듯이 누구도 죽음 너머에 대해 모르지만 분명히 밝은 빛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저 그 길을 따라가면 됩니다.

 

90%가 주민증 사진을 영정으로

스님은 품격있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일상 속에서 죽음을 이야기하고 배우고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기는 첫번째 방법은 죽음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의 삶을 반복적으로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두려움과 공포에 대해 드러내놓고 이야기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안에 담아두면 더 큰 두려움과 공포로 다가오니까요.”

 

스님은 죽음을 당하지 말고 맞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세상에 들여놓았던 몸이 떠나는데 어찌 아프지 않고 힘들지 않을 수 있나요. 그것조차 견뎌야 하는 것이 이생을 받는 대가입니다.”

 

스님은 영정사진을 주민등록증에 있는 사진을 확대해 사용하는 이들이 아직도 90%가 넘는다고 한다. 그만큼 죽음에 대해 준비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한 해를 넘길 때마다 사진과 기록을 남기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훌쩍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본인이나 가족이 당황을 하지 않아요. 죽음에 대해 학교에서도 교육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나는 어떤 곳에서 죽고 싶은지, 어떤 모습으로 삶의 마지막을 보내고 싶은지’에 대해 확실한 생각을 갖게 됩니다.

 

언제 어디서 부를지라도 선뜻

 

스님은 최근 말기 침샘암으로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는 환자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선생님에게 내일은 없어요. 살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아요. 단 하루만 잘 살자고 다짐해봐요.” 그는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을 그대로 수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부인과 자식들과 하루하루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며 지냈다고 한다. 의사들은 한 달을 못 버틸 것이라고 했는데. 이미 석 달이 지났고, 병세도 크게 좋아졌다고 한다.

 

“법정 스님은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나를 부를지라도 ‘네’ 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라곤 밀려오는 거대한 죽음의 파도를 벗어날 수 없으며 삶이라는 배를 뒤로 돌릴 수 없다는 것이죠. 죽음 앞에서 우리는 모두 서툰 항해사들입니다.” 스님은 최근 자신의 호스피스 경험을 통해 겪은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담은 <숨>(마음의숲)을 펴냈다.

 

 

울산/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well/718941.html#csidxd5a08408aea97b585043254f138d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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