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마을 공양간의 하루는 오전 5시 50분에 시작된다. 어두운 새벽, 대문을 열고 공양간을 향해 달려오는 자애 보살님과 학사 공부에 매진하면서 불화를 그리는 처녀 현영 보살님이 대중 공양을 책임지고 있다. 그리고 정토마을의 귀여운 두 명의 행자님들이 함께한다. 비록 설거지와 식사 때 필요한 그릇들을 정리해 주는 정도이지만, 공양간의 화사한 꽃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매일 아침 7시, 대중 목탁 소리와 함께 공양간의 식사는 두 줄로 나누어 뷔페로 차려진다. 한 곳은 스님용으로 노스님과 비구니스님들, 티벳 스님들과 행자님과 객 스님들이 드시고, 다른 한곳에는 재가자들이 편안하게 드실 수 있도록 차려진다. 학교에 가시는 티벳 스님들의 도시락까지 챙겨야 하는 하루 중 가장 분주한 아침이 끝나고 나면 공양간 식구들은 각자의 방에서 잠시 쉼을 가지게 되고, 오전 10시가 되면 다시 북적거리며 많은 대중이 먹을 점심 준비가 시작된다. 점심 공양은 아침과 달리 많은 양의 식사가 준비된다. 스님들과 직원뿐 아니라, 병원의 보호자들과 점심시간 공양간에 오시는 손님들을 위한 따뜻한 밥상이 정성껏 차려진다. 저녁에는 따뜻한 국과 두 가지의 새 반찬 정도로 하루 중 가장 간단한 공양으로 공양간의 일과를 마무리한다. 이렇게 일과를 마치고 각자의 집과 방으로 돌아가는 시간은 밤하늘에 별들이 초롱초롱 자신을 뽐내는 시간, 행복함이 묻어 있는 오늘을 마무리한다. 정토마을의 금차원 공양간은 행사나 기도가 있을 때는 초비상이 된다. 행사마다 나가야 하는 음식의 종류가 다르다 보니 정토마을의 공양간은 늘 바쁜 오늘을 보낸다. 얼마 전 정토마을은 2박 3일 동안 일 년 양식이 될 김장을 담갔다. 2,200포기 배추와 열무김치, 석박지, 동치미, 백김치를 했다. 첫날은 배추 자르기와 절이기, 둘째 날은 배추 씻어 물빼기와 모든 재료 씻어 썰기, 셋째 날은 양념 버무리기와 각종 김치 담기, 김치 저장소로 옮기기, 정리정돈을 기준으로 정토마을의 김장은 끝이 났다. 2박 3일 동안 공양간에는 그야말로 폭탄 맞은 것처럼 난장판이었지만 봉사자분들의 도움을 보태며 그 많은 봉사자와 직원들의 공양을 묵묵히 맛나게 만들어 올릴 수 있었다.
김장을 마치고 쉴 새도 없이 운문사 학인 스님들을 위한 ‘생사의 장’ 5박 6일 교육이 시작되었다. 70명의 학인 스님과 대중의 끼니를 준비하면서 숨 고를 새 없는 분주한 공양간이었지만, 준비된 공양을 맛있게 먹고 있는 후배들의 모습을 보며 행복감과 뿌듯한 마음이 샘솟아 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5박 6일 동안 공양간에서 함께 해주신 봉사자 보살님과 거사님들의 손길에서 따뜻함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렇게나 많은 인원을 위한 공양을 하루도 아닌 여러 날을 무사히 올릴 수 있었다는 것이 그저 감사해진다. 평소보다 이른 새벽 4시 30분부터 공양 준비를 하고, 더 늦은 마무리를 해야 했던 날들이 힘들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미소를 잃지 않고 서로를 위하며 행복하게 공양을 만드는 공양간 식구들이 있어 행복한 오늘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정토마을의 공양간은 숨쉬고 있는 인정과 사랑이 샘솟는 곳으로 서로를 사랑하며 행복한 꿈을 만든다. 이 따뜻한 공간에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정토마을 계간지 2020. 1월호)
정토마을은 자재요양병원 건립불사를 위해 법화경을 소의경전삼아 2008년 11월 12일, 천일기도 독송 법회를 대법당에서 입재봉행 하였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법화경 천일 철야기도와 법화경 독송 21일 장좌기도를 끊임없이 봉행하면서 정토마을은 명실공히 법화도량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2008.11.12 법화경 철야정진 입재법문 무비 큰스님 「당신은 부처님」
"오늘 법문은 약왕보살 본사품에서 말씀하신 법화경의 공덕과 위대함을 일깨워주는 내용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수왕화보살이여 마치 모든 시내와 개천과 강들의 모든 물 가운데는 바다가 제일이듯 이 법화경도 그와 같아서 모든 여래가 말씀하신 경 가운데 가장 깊고 크니라 -」
불교계의 열악하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이러한 고귀한 자비심을 실현하고자 하는 스님과 신도님들을 격려하고 칭찬하고자 여기에 왔습니다. 자재요양병원을 짓고 어려운 이웃에게 도움을 주며 이 세상에 신선하고 새로운 불교의 참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이러한 여러분의 자비 의지를 뚜렷하고 명확하게 해주기 위해서 늦은 밤에 법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
대만 자재공덕회 증엄스님
"용기도 믿음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 불가능이나 무능은 없어요. 하려고 하지 않는 그 마음이 오직 두려울 뿐, 지혜로 인생의 참뜻을 찾고 끈기로 한국 자재병원의 불사를 꾸려나가시길 기원합니다. "
법화경 천일기도 500일 성오스님
세상을 사는 데는 두 가지의 힘이 있는데 그것은 업의 힘과 원의 힘이라고 합니다. 업의 힘은 무명심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원의 힘은 청정한 마음(본성)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모름지기 불자는 원력으로 살기를 발원해야 합니다. 아무리 육도를 윤회하더라도 반드시 깨달음에 이르는 보살행을 할 것이라고 원력을 세우고 정진하면 그에 상응하는 수행의 좋은 선연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 살면서 업보로 이 몸을 받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공덕을 지었기에 사람의 몸을 받고 법화행자가 되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다행이고 축복인 일입니다. 이렇듯 경을 읽고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고 예배하면 수많은 불보살님이 이 도량과 그 가정에 강림하고 감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자리에는 삿된 그 어떤 마군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고 예경하기를 중생계가 다하고 허공계가 다하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법화경을 독송하고 서원을 세워 병원을 건립하여 여러 중생이 영적인 행복과 건강이 있기를 바라는 것은 무루의 공덕입니다. 병원을 세워 영적인 편안을 추구한다는 소리를 듣고 많이 기뻤습니다. 많은 병원이 있지만, 임종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맞이하면서 내 생의 삶을 준비하는 것은 축복된 불사입니다. 병원불사가 나와 더불어 내가 알고 있는 주변의 모든 지인도 함께 동참할 수 있도록 뜨거운 기도와 발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불사가 장애 없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부처님의 가피가 이루어져 연화정토를 만드는 일에 적극 동참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법화경 천일기도 700일 무비 큰스님
법화경에서는 부처님을 출현시킨 스승이 제바달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법화경을 보지 않으면 참 불자가 되지 못합니다. 만약에 법화경이 없었다면 제바달다는 영원한 적이고 용서받지 못할 극악무도한 인간이었을 것입니다. 법화경의 제바달다품은 우리가 생을 거듭하여 살아가는 마당에 나를 해치려하고 모함하고 아프게 하는 주변의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해서 가르침을 주는 것입니다. 제바달다는 천왕여래가 되리라 하는 것이 수기하는 것입니다. 법화경은 삼 분의 이가 수기입니다. 수기는 부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지막 메시지라고 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부처님이 되기까지는 오직 제바달다 덕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이러한 법화경의 고귀하고 깊은 의미를 현실에서 한껏 활용하기 위해서 깊이 사유하고 실천하여 내 의식 속에 바로 새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자재병원 불사 순례의 길
2011.10.23~25 관세음보살의 화현이신 달라이라마 존자님의 특별법문 동참자들께 병원불사를 위한 시멘트 모연집과 명함을 전달하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인도 땅까지 진출하여 역사적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건립을 위한 후원자 모시기 운동에 힘을 모았다. 한 분 한 분의 소중한 인연은 그렇게 삶의 마지막 종착역에서 고통받는 환우와 그 가족들, 그리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사랑과 희망이 되어주었다.
2012.04.01 자재요양병원 기공식 통도사 주지 원산 큰스님과 수불 큰스님을 비롯해 제방의 대덕 큰스님들을 모시고 첫 삽을 뜨는 기공식에 후원자들과 안국선원 신도 2천 5백 명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었다. 의료기기모연과 108병상모연이 활발하게 시작되었고 시멘트 권선문이 후원자께 전달되었다. 한 방울의 물이 모여 바다를 이루듯, 작은 복이 쌓이고 쌓여 법계를 장엄할 공덕이 되어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이라는 모습으로 피어났다.
법화경 21일 장좌기도 매년 정초 24시간 법화경 독경이 이어지는 21일 장좌기도가 봉행된다. 국태민안, 가정의 평화를 위한 기도로써 소망을 이루게 하고 복력과 공덕이 증장되며 업장이 소멸되는 제불보살님의 가피가 충만한 장좌기도는 음력 정월보름 동해 바닷가에서 방생으로 회향한다.
3차 법화산림 고승초청 대법회 3차 천일기도는 큰스님들을 모시고 법화경 강설을 들었다. 법화경 기도 중에 스리랑카 대통령으로부터 부처님 진신사리를 받아 이운식을 하게 되었다. 법화경 천일기도 고승초청 대법회 회향식을 하는 날, 천 일 동안 동참하시어 독송한 공덕을 진리의 핵인 법화경 한 품, 한 품에 꿰어 108염주를 만들어 보내드렸다.
티벳 겔룩파 큰 스승 샤르빠 최제 롭상 도르제 린포체 초청 법화경 정토마을에서만 만날 수 있는 구전 특별대법회, 린포체께서는 구전 없이 천 번 독경하는 것보다 구전을 받고 한 번 독경하는 것이 더 수승한 공덕이라고 말씀하셨다.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신 붓다의 구전 전승에 따라 구전을 내려주시는 것이며 현생에서 얻어지는 가장 큰 공덕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차에 걸친 법화경 천일기도 회향을 하고 1년에 걸쳐 반산스님께서 법화경 전품을 강설해 주셨다.
2014.06.15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개원 법화경 천 일 기도의 힘으로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이 여법한 개원식을 성황리에 거행하였다. 10년의 법화경 기도를 이어오는 동안 많은 일을 이뤄냈다. 함께 울고 웃었던 모든 여정이 너무나도 소중한 역사가 되었음을 실감하게 한다.
2007년 봄 정토마을 승가공동체 소의 경전을 얻기 위해서 석가세존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신 인도 보드가야 대탑을 돌며 오체투지 15일 기도 중이었습니다. 한국법화정사 도림스님께서 보드가야 성지순례 여정에서 기도 중이었던 나를 만나 전해주셨던 법화경이 정토마을 승가공동체 소의 경전으로 결정하게 되므로, 정토마을에서는 무비큰스님의 번역본인 한글법화경을 허락받아서 제작유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2011년 음력정월, 21일 법화경독송 장좌기도를 시작하여, 10년의 여정 안에서 정토마을 사부대중들은 자재요양병원을 건립하고 다차원적인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펼쳐왔습니다. 또한 매년장좌기도를 비롯하여 매월 법화경을 독송하면서 국내외 의료지원을 통한 일체중생들의 행복과 이익, 평화적 공존을 위해서 육바라밀 수행을 실천해 왔습니다.
2020년 정토마을이 법화경독송 10주년을 맞이합니다. 영남알프스 산맥 그 중심에 위치한 간월산에 법화의 꽃이 만개하고 꽃비가 되어 시방법계에 비 내리 듯 하여 중인도 마가다국 왕사성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해 주셨던 사생의 자부이신 석가세존진신사리법신궁전건축불사를 하게 되는 고귀한 인연이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경자년 정월 법화경 독송 장좌21일기도 회향을 하면서 석가세존진신사리 보궁건축불사를 원만히 성취하여 일체중생이 안락하고 평화롭기를 기원하면서 5차 법화삼매참법 천일기도를 봉행합니다.
정토마을과 함께 하시는 사부대중들은 법화경 독송과 법화삼매참회기도를 통하여 수 겁 생을 걸쳐 지어온 자신의 악업을 정화하고, 자유롭고 만족스러운 삶으로 재구성 하시는 인연 받으시길 바랍니다.
영산회상의 모든 불보살님들의 자비광명이 이 기도를 봉행하시는 모든 분들의 마음에서 빛으로 현현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1. 기원전 3세기 인도 아쇼카 대왕의 아들 마힌다 스님이 불교전파를 위해 스리랑카에 오면서 부처님 진신사리의 일부를 스리랑카 세루빌라寺에 봉안
2. 1923년 힌두교의 난입으로 폐허가 되어있던 세루빌라寺 복원 시 부처님진신사리를 발굴하였고 스리랑카 고고학자의 검증을 받아 콜롬보 다투말루寺로 이운
3. 2015년 10월 불교병원 건립 원력으로 다투말루寺에서 석가여래 치아사리를 정토마을에 기증하기로 결정
4. 2016년 3월 스리랑카 대통령궁 및 다투말루寺에서 치아사리 이운의식 봉행하고 3월 21일 정토마을에 석가여래 치아사리를 봉안함.
"부처님의 고귀한 인연법에 합장여밉니다."
성지를 순례하는 걸음걸음마다
3월 16일 인천공항에서 스님 10분과 재가자 55명 총 65명이 출발하여 스리랑카 최대의 도시 콜롬보에 새벽 4시10분 도착하였다. 탐진치로 물든 가슴들이 평화로운 불국토 붓다의 나라로 날아온 것이다. 한국에선 깊은 잠에 빠져있을 새벽시간에 꽃목걸이를 목에 걸고 성대한 환영을 받게 되니 감사하면서도 송구스런 마음이 었다. 이날, 아누라다푸라의 스리마하보리수가 있는 ‘이수루무니 아사원’에서부터 순례가 시작되었다.
이수루무니아사원
아쇼카왕의 딸 상가밋따가 인도에서 가져와 심었고 2300년이 넘은 보리수는 순례자들의 기도를 온전히 받아들일 것만 같은 강력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간달라마 호텔과 담불라 황금 동굴사원
간달라마 호텔은 자연 그대로의 밀림 속에 지은 5성급 호텔로 긴 여정의 피로를 풀기에 탁월했고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담불라 황금 동굴사원에는 수많은 불상과 벽화들은 중요한 인류문화유산으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캔디, 스리랑카 중부의 도시
영국 식민지 시대 마지막 싱할라왕조의 역사가 남아있는 이 도시의 신성한 기운과 캔디 사람들의 보존 노력 덕분에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불치사
불치사는 종교적 의미가 강한 사원이지만 건축디자인 또한 수려했다. 심할라 전통 건축양식의 진수를 체험할 수 있는 스리랑카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듯하다.
불치사의 내부에는 좌우로 그림과 함께 부처님 진신사리를 이운해 온 설명이 상세하게 적혀있어 불치 사의 역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이 곳이 볼거리가 아닌 삶 그 자체였다.
여행 이튿날, 불치사 정문 바로 앞에 위치한 퀸스호텔에서 묵기로 하였다.
고단한 여정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는데 창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점점 선명 해졌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15분 전. 커튼을 걷고 밖을 내다보니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불치사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궁금한 마음에 그 행렬 속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남녀노소 불문한 흰 옷의 물결, 옆 골목에는 꽃을 파는 꽃마차행렬이 장관이고 누구든지 꽃을 사서 받쳐 들고는 환희에 찬 얼굴 표정이다.
부처님 사리를 친견하고 공양을 올린 뒤에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스리랑카 불자들의 불법승 섬김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었다.
경황없이 일행 속에 합류한 나는 아무런 공양을 준비하지 못했다.
빈 두 손을 받쳐 들고 부처님 진신사리 앞에 귀의하였다.
‘이 허공같은 빈 마음 뿐 입니다. 부처님께 온전히 공양 올립니다. 부처님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의 참 불자가 되겠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내 손에 연꽃이 올려졌다.
눈을 뜨고 바라보니 옆에 있던 불자가 빙긋 웃어 보인다. 공양물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나에게 공양물을 건네준 것이다. 새벽녘, 불치사 경내에서의 일들은 나에게 환희로움 그 자체였다.
시기리아
거대한 바위 위에 건설된 궁전, 시기리아는 세계문화유산이자 세계8대 불가사의로 선정된 관광명소로 부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카사파1세가 그 복수를 하려는 형제를 경계하여 바위 위에 궁전을 지은 후 그 안에서 자살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페라데니아 국립식물원
캔디의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 약 18만명으로 1821년 식물원으로 문을 열었으며 그때까지는 14세기의 왕 파라쿠라마 바후3세가 왕비를 위해 만든 정원으로 유명하다. 이곳의 다양한 수목과 꽃, 호수가 순례단의 피로를 풀어주었다.
스리랑카 대부분 국민들은 불교를 생활의 일부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흰 옷을 곱게 차려입고 부처님께 바칠 꽃을 사서 그 더위 속에 줄을 지어 서있는 모습에서 설렘으로 가득 차있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스리랑카 왕조의 정통성이 담겨있는 부처님의 치아사리가 모셔져있기 때문인 것 같다.
왕권을 가지고 싶은 자는 치아사리를 갖고 있어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수도를 옮길 때마다 늘 함께 옮겼다. 스리랑카 사리절 주지 소눗따라 스님께서는 모시고 예경하던 사리를 우리에게 전하며 능행스님께서 기도를 열심히 하여 많은 분들을 이롭게 해달라는 부탁에 말씀을 해주셨고 마하트리 빌라 쓰리세느 스리랑카 대통령과 불교장관 사리띠두스만따께서도 세계평화와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그리고 스리랑카와 한국의 우호관계가 돈독하도록 기도해달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한국에서 모신 인연으로 두 나라가 더욱 친분이 두터워졌다고 기뻐하였다.
“지갑 좀 열어보소.”
성지순례의 마지막 날, 마지막 일정.
부처님 진신사리 이운식과 스리랑카 불교병원 기공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원장스 께서 봉지를 들고 앞차, 뒤차를 다니시며 쓰고 남은 돈 다 여기에 넣어 달라신다. 원장스님의 마음을 왜 이해하지 못하랴. 병원건립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고자 하는 스님의 마음이 우리 순례단에게 보살행을 실천할 수 있는 가르침이 되어왔다. 서슴지 않고 내어 모인 보시금을 보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부처님, 부처님, 부처님
부처님 치아사리를 이운해 친견하는 일에 함께함은 다겁생래 쌓이고 쌓여 석화가 된 업장이 녹아지고 무명이 타파된다고 하셨지요. 이번 진신사리 이운식에 동참하신 이차인연 공덕으로 모든 분들이 나 하나의 행복보다는 더 많은 이들에게 안락을 줄 수 있는 큰 회향으로 남게 하소서. 그리고 모든 업장이 소멸되고 지혜는 증장되어 구경에 꼭 해탈로 이어지는 원인되게 하소서.
이번 순례와 부처님 진신사리 이운식을 여법하게 마칠 수 있도록 모든 진행을 맡아 애써주신 스리랑카 정부와 통역과 안내를 맡아 도와주신 완샤스님과 여러분의 스님들께 감사합니다. 정말 한 생을 살며 받아보기 힘든 최고의 예우를 받았으나 지면을 빌어 인사 올리는 무례함을 용서하소서. 살면서 평생 잊지 않고 갚겠습니다.
끝으로 여법한 회향까지 대중을 외호해주시며 수고해주신 정토마을 회주이신 수환큰스님, 자재요양병원 원장 능행스님께 진심을 다해 감사드리며 그 외 도감스님을 비롯하여 함께 애쓰신 대중스님들과 법인가족들 너무나 고맙습니다.
2005년도이었을 것이다. 큰 태풍과 폭우로 뒷산이 무너져 토사가 건물 안까지 밀려들어온 적이 있다. 지금은 병원 새 건물인데 당시에는 공장건물의 사무동이 있어서 일층은 호스피스 교육장과 숙소로 사용하고 2층은 법당과 집무실 그리고 공양간이 있었다. 그때 거사들이 모여 들어 토사를 며칠에 걸쳐 치웠던 기억이 난다.
대만의‘자제공덕회’를 모델로 한 정념회…
정념회는 2005년 9월 30일 발족되었다.
원장스님이 당시 늘 다니던 봉사자들을 차 한 잔 하자고하여 많은 분이 저녁에 모여 들었다. 차를 마시다가 모임의 필요성을 말씀하시며 모임을 만들고 회칙을 정하게 되었다. 원장스님은 대만의‘자제공덕회’를 잘 알고 있었고, ‘자제공덕회’를 롤모델로 삼아 그런 봉사단체가 필요하다면서 단체를 만들게 된 것이다.
지금의 정념회가 있기까지…
그때 모였던 사람들은 충북 청원의 정토마을까지 달려가서도 봉사를 하던 사람들이었다.
부산, 마산, 대구, 울산, 포항 등 각기 사는 곳이 달랐지만 정토마을 홈페이지에서 서로 만나 일이 생기면 달려가고는 하였다.
원장스님이 지금의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이 들어선 울산 언양의 병원부지를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매입을 하였다 보니 늘 힘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 멤버들은 청국장이나 메주 등을 만들어 팔아서 이익금을 보태기도 하고, 원장스님은 전국의 큰 행사가 있으면 다른 스님들과 함께 병원 건축에 대한 홍보를 위해 다녔다. 그럴때는 우리 회원들이 동참하여 스님이 쓰신 책도 판매하고 병원홍보 전단지도 돌리는 방법 등으로 후원자 발굴을 하기도 하였다. 그 회원들이 모여 지금의 정념회가 만들어졌고, 지금까지도 정토마을 병원의 각종 행사 등에 참여하고 있다.
지금은 정토마을의 모든 건물들이 난방이 되지만 그때는 드럼통에 나무를 넣어 난방을 하였다.
그래서 봄에는 공양간 앞의 텃밭을 일구고, 여름이면 비 피해가 있지 않도록 배수로를 정비하였고, 가을이면 뒷산에 올라가 땔감을 구해다가 장작을 만들어 쌓아 놓고, 겨울이면 김장을 하고, 장을 담그고……
한 해에 두 번 정도는 행사가 있었다. 산사음악회며 기공식 등등. 그때마다 밤을 새워가며 음식을 준비하고 다음날 배식과 정리정돈까지 하였다. 매월 둘째 일요일에는 법회를 보고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원장스님이 직접 법문을 하였다. 모임 초기에는 회원이 60~70여명 정도 되어서 지금의 교육관이 꽉 찼었는데, 병원 건물의 건축이 시작되면서 공사기금을 마련하고자 원장스님은 차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전국을 다니시다 보니 법회를 챙기지 못하게 되었고, 그때의 회원들도 이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되다 보니 지금의 활동인원은 크게 많지가 않다.
십년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까닭…
십년을 함께 할 수 있었던 힘은 남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우리병원을 짓는다는 생각을 하였기에 꾸준히 이어져온 것이란 생각이 든다. 병원 준공과 개원이란 감격도 잠시 잠깐, 환자가 채워지지 않아 빈 병실이 많다는 소리에 안타까웠는데, 이제는 병실이 부족하다는 말에 안도하면서도 병실을 필요로 하는 모든 분들이 시설을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정토마을은 앞으로 병원도 증축해야 하고 법당불사도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 다시 팔을 걷어붙여야 되겠다. 하지만 스님은 더 넓은 시야를 가지신 것 같다. “이제는 병원도 좋지만 아프리카나 물 없는 나라에 우물을 한 개라도 파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니 부응을 하도록 해야겠다.(2015.여름)
진정한 구도자, 이 분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20여년 이라는 시간을 오직 치유할 수 없는 병에 걸린 이들을 위해 바치신 분, 바로 능행스님이시다. 스님을 처음 만나 뵌 건 방송회의 차 자재요양병원을 찾아가서였다.
죽음에 대해 평소 생각해본 적 없던 나는 처음 ‘지금 이 순간’ 이라는 프로그램의 작가를 맡게 됐을 때 사실 걱정이 먼저 앞 섰다. 누구나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무섭고 두려운 느낌이 들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죽음은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능행스님을 만나기 전인 불과 몇 달 전까지, 20대의 난 그렇게 생각했다.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곳이었다. 병원을 이야기하면서 아름답다는 표현이 조금 아이러니할 수도 있지만 내가 그 곳에서 느낀 것은 그 표현이 딱 알맞은 것 같다. 하나같이 밝은 미소를 띄고 계시던 호스피스 봉사자 분들, 심지어 심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고 계실 오가는 환자분들의 표정에서 더는 아픔이 아닌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회의를 마치고 능행스님은 PD님과 나를 임종을 앞두신 한 보살님이 계신 곳으로 인도하셨다. 병실 안, 침상 위에 누워 계신 보살님은 암 환자이신 듯 했다.
방송을 통해서나 본 모습처럼 무척이나 야위셨고, 마치 돌아가신 것처럼 잠들어 계셨다. 하지만 스님은 그 분이 아직 떠나신 게 아니라고 했다. 임종하시는 분의 모습을 처음 본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고, 마음속으로나마 그 분의 극락왕생을 발원했다. 그런데 그 분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의 표정이 저렇게 편안해보이시는 걸까?’
죽음에 대한 어떤 두려움, 공포, 슬픔 등의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마치 행복한 여행을 떠나시는 것처럼 그 분은 그런 표정으로 편안히 누워계셨다.
병실을 나와 점심공양을 하기 위해 가려다가 한 젊은 보살님을 만났다. 많이 운 듯한 눈에 잠을 주무시지 못한 것 같은 얼굴을 보아 환자의 보호자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보살님을 따라 들어간 한 병실, 그 곳엔 얼핏 보아도 20대로 밖에 보이지 않는 남자 환자분이 침상에 누워 계셨다.
‘내 또래인 것 같은데 저렇게 젊은 사람이 왜 이 곳에……’나는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능행스님은 누워 있는 환자의 손을 잡으시고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셨고, 환자분은 스님께 마치 “괜찮아요.”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환자분의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식을 먼저 보내야하는 부모님의 마음이 느껴져서였을까? 안타까움에 가슴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그 날, 자재요양병원을 가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능행스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난 어쩌면 아직도 죽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난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능행스님을 만나고,‘지금 이 순간’작가인 지금의 나는 너무나 행복하다.
그 언젠가 죽음이 내 앞에 다가왔을 때 나는 웃으며 말할 것이다. 기다리고 있었노라고, 잘 살다 떠난다고……
한치 앞을 모르는 것이 우리들 인생이고, 누구나 죽음은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현재 건강한 것에 감사하고 지금 이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면서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고 싶어졌다. 누군가가 말했듯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그렇게.[2014.봄]
2005년 늦은 가을 선배로부터 책을한권 선물 받았다. 능행스님이 쓰신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불심이 깊은 선배라 “또 스님이 지은 책이네~”하고 별 호기심 없이 책장을 넘기다가 가슴을 벅차게 만든 무언가에 한바탕 울며, 간호사로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간호대학을 졸업 후 종합병원에서 보냈던 3년 동안 조직사회의 치열하고 삭막함에 실망하였고 사람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게 되면서, ‘다시는 간호사 일을 하지 않으리라’다짐했다. 그리고 언어 치료사로서의 새로운 삶을 찾게 되었다.
자폐, 구순구개파열, 뇌성마비, 정서장애, 지능지체 아동에게 언어를 가르치면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서울, 대구 등 배움의 기회도 찾아다니면서, 조그마한 성과에 기뻐하고 감사하며 보냈었다. 물질적으로 풍족하지 못했으나, 내 인생에서 정신적으로 가장 충만하고 행복한 5년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경제적 독립이 필요했고, 사회가 요구하는 사회인이 되기 위해서는 봉사가 아닌 직업이 필요했다. 다시 시작된 간호사 일은 뚜렷한 방향의식 없이 단지 직업인으로서의 생활이었다.
매너리즘이란 마약에 중독되어 살아온 16년은 안락함만 추구하며 살았었다. 맛있는 것을 찾고,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곳만 돌아다니며, 지금 이 순간 행복하게 지내는게 최선이라 여기며 미래에 대한 생각을 접고 현재의 시간을 즐겼다.
문득 고개 드는 허허로움……
과감히 종지부를 찍는다. 내가 무얼 하고 싶었는지 기억이 났다. 가족과 헤어져 살아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내 맘을 충족시킬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이윤이 목적이 아닌 병원.
후원자의 손길로 15년 동안의 염원이 이루어진 곳.
18년 동안 능행스님의 원력으로 세워진 곳.
이곳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일하는 직원이 행복해야 한다며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부족한 기자재나 임금을 마련하기 위해 탁발을 떠나시는 원장스님의 뒷모습에서 경이로움이 느껴지고 후원자의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곳이라며 휴지 한 조각, 물 한 방울, 전기 하나 라도 아끼려는 직원들에게서 감사하는 마음이 느껴지고, 먼 곳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깨끗이 청소를 하고, 환자의 식사, 목욕수발, 산책을 도와주는 봉사자들에게서 행복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난 하염없이 마음이 수그러든다.
이제 나는 호스피스를 담당하는 간호사 생활을 준비 중이다. 이 병원을 선택한 목적이고 이유이기도 하다. 아직은 너무 부족하고 배울게 많은 준비생이지만, 내가 살아가는 나머지 생의 보람이기를 바라며 이 길을 시작했다.
나는 간호사로서 그 분들의 남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멀리 가시는 그날까지 그 때를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안위를 도모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가지게 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분들에게 동반자가 되어 무섭지도 외롭지도 않게 하고 싶다.
호스피스는 진정 구도의 길이며 수행의 길이어서 멋진 수행자가 되는 것이라는 능행스님의 말씀처럼 이 길을 통하여 내가 그 분들을 돕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그 분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멀리 가는 그날을 편안하게 안식과 함께 맞을 수 있기를 바란다.
주위 모든 사람들이 함께 웃으며 이 길을 걸었으면 한다.
오늘도 환자들은 암이라는 무거운 병을 지니고 어쩌면 마지막 입원이 될 수 있는 인생의 마지막 묵어가는 여관에 속속 도착한다. 자재요양병원으로……[2013.가을]
이경화 님은 현재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병동 팀장 소임을 맡고 있습니다. 위에 글은 병원이 개원한 2013년 호스피스병동을 준비하며 정토마을 계간지에 실어주신 글을 8년이 지난 지금 다시 옮겨 실었습니다.
「간호사로서 환자들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주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며 큰 사명이기도 합니다. 2013년 병원 개원당시부터 현재 요양병원 호스피스시범사업기관으로 선정되어 10병상을 운영하기 까지 떠나는 이와 떠나보내야 할 사람들의 가슴 아픈 사연들로 함께 상실감을 경험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임종 후 8시간, 엄숙하며 애틋한 그 시간까지 그동안의 삶의 의미를 담아 아름답게 마무리 할 수 있도록 함께 동행하겠습니다.」
정토마을 교육원에 들어서면 환한 미소로 반갑게 맞이하는 똑순이 이영실(법명. 별리) 부장이 있다. 자신의 속명 보다는‘별리’라는 법명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소탈한 성품의 그녀는 기관의 부장이라는 직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권위를 찾아 볼 수 없이 온몸으로 일을 한다.
그런 그녀가 능행스님과의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07년 9월 정토마을 마하보디에 입사하면서 부터다. 그녀는 입사 이전까지 이주노동자 인권을 위한 활동을 도왔다. 그렇게 열정을 다했던 5년의 활동을 접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딸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던 어느 날, 우연히 공중파를 통해 능행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다큐 ‘삶의 끝에서 길을 묻다.’를 접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 놓여있는 환자들과 그들을 돌보는 능행스님을 발견하게 된 것 이다.
당시 이영실 부장의 눈에는 스님의 열정도 돋보였지만 무엇보다 그 뒤에 드리워진 고독의 긴 그림자가 보였기에 잔잔한 여운은 오래도록 그녀의 뇌리에서 떠나질 않더란다. 그 진한 감동을 안고 지내던 2년 뒤, 우연히 신문에서 정토마을 직원 공개 채용 광고를 보고 반가움과 벅찬 기대로 응시를 하게 되었다고. 물론, 감사하게도 합격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정토마을과 이영실 부장의 본격적인 인연이 주어진 것이었다.
마하보디 교육원은 그녀가 입사하던 2007년 9월 개원을 했고 지금의 자재요양병원 자리에는 문을 닫은 허름한 공장 건물만 있었으니 불모지나 다름 없는 모습이었다. “그 막막한 시절에 하나 둘 봉사를 오신 분들이 자발적으로 자원봉사단을 꾸렸어요. 교육원 개원까지 불철주야 헌신해 주신 분들은 1호 봉사단 ‘정념회’였어요. 말 그대로 밤을 새우며 행사를 준비해 주셨기에 초창기 교육원은 기반을 다질 수 있었던 겁니다. 이름을 한분 한분 거명할 수는 없지만 정념회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며 초기의 상황을 차분히 들려주고 있었다.
연일 병원의 개원 업무와 법인의 업무 등 과중한 일상에서도 눈살 한번 찡그리는 법이 없는 그녀에게 “가장 큰 보람으로 다가서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라고 물었다.
주저 않고 들려주는 말, “교육을 이수한 수료생들, 스탭들이 하나 되어 서로 교감을 느끼는 순간 입니다. 그 순간은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의중을 읽을 수 있으며 ‘참 이 길을 잘 선택했구나.’라는 환희심으로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끼지요.”라며 환하게 웃는다.
그리고는 기억에 남는 순간을 낱낱이 들려주었다. “교육원 개원식 때의 일입니다. 개원 며칠을 앞두고 한통의 전화를 받았지요. 어느 비구스님이셨습니다. 스님은 ‘몸이 불편하지만 개원식에 꼭 참석하고 싶다. 강원도에서 가는데 위치를 알려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개원 당일 건강이 허락지 않아 못 가게 되었다는 통보였지요. 허나 정토마을에 꼭 가고 싶다는 말씀과 함께 산골의 토굴에서 생활하는 당신에게 소식지 보디사트바를 보내달라는 부탁을 하셨습니다.
그때로부터 7년이 흐른 지금도 스님은 가끔 전화를 주시곤 하는데 그때마다 스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비단, 그 스님 뿐만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그런 유사한 전화를 해 주시거나 격려를 보내주시기에 임직원들은 지칠 줄 모르고 원장 능행스님과 운명을 함께 할 수 있지 싶습니다.”며 잔잔하게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이제 마하보디교육원은 불교호스피스교육으로 그 명성이 자자하다. 이유인즉, 올해로 불교전문 호스피스교육이 20년을 넘었고 그 수료생들 또한 2천여 명에 이르러 그들은 생과 사를 넘나드는 현장에서 최고의 손길을 펼치고 있다. 선배가 되고 후배가 다시 태어나는 오랜 전통이 이곳 교육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바로 그 불교호스피스교육의 역사와 노하우를 이영실 부장의 입을 통해 듣게 되는데 그녀의 애정과 자랑을 옮기자면 이러하다. “20년 전통의 독보적인 비법은 전통과 변화의 경계를 아우르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시대에 아날로그를 사용하면 뒤떨어진다는 생각으로는 창의적이지도 않으며 전통을 지킬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두 가지가 고루 섞이어 시너지 효과를 내게 될 때라야 어느 분야든 빛을 발하게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저희 공동체는 자원봉사자와 후원자가 이루어내고 지속 가능하도록 큰 버팀목이 돼 주고 있는 특별한 공동체입니다.”라며 교육원의 현재와 미래를 꼼꼼히 짚어주는 그녀이다.
그런 이영실 부장에게 바람을 물어봤다. “공동체의 가치와 사명을 우리가 맡은 소임에 담아 가꾸고 키워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이 숭고한 정신이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일입니다. 제가 그 일원으로서 자비를 실천하고 생명을 존중하며 의식을 성장시켜나가는 진정한 정토인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녀의 모습에서 굳은 결의가 느껴지며 참 아름답고도 귀한 존재라는 생각에 마음은 한량 없이 높아지고 있었다. 마치 청량한 바람을 몰고 온 가을 하늘처럼.[2013.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