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을 졸업하기도 전부터 원주소임을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민과 갈등으로 지내던 어느 날,

사리암과 북대암 그리고 내원암, 청신암을 종횡무진하면서 바람결에 고민과 갈등을 날려 보내고 운문사 대웅전 앞에 서서 부처님과의 독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깨끗하고 홀가분했다. 그렇게 웃음과 함께 찾아든 따뜻함은 정토마을의 원주소임에 희망을 안겨 주었다.

 

이렇게 시작한 원주소임이 벌써 7개월을 달리고 있다. 어디에서부터 출발해야 할지 의문이었지만 지금은 시속 80km로 안정적인 속도로 달리고 있는 소임과 공양간이다. 

처음에는 저온 창고에 있는 식자재를 보면서 식단을 짜기 시작했다. 무엇이 저온 창고에서 숨 쉬고 있는지를 파악해야 했고 재고 조사를 하면서 우리 식구들이 어떤 먹거리를 잘 먹는지를 파악해야 했기에 늘 저온 창고와 함께였다.

안정을 찾은 지금은 일주일 식단을 미리 정하여 놓고 보살님들이 다음 끼니에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알고 재료의 전처리를 할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되면서 여유와 평온이 함께하는 공양간으로 재탄생하였다.

 

그와 더불어 정토마을 공양간에 바뀐 것이 있다면 매주 별좌가 탄생한다는 것이다. 보살님 세분이 돌아가면서 한 파트씩 별좌로서 음식을 만들고 다른 두 분은 전처리하면서 별좌를 도와주는 시스템이다. 처음에는 조금 힘들었지만, 지금은 알아서 별좌 놀이를 즐기고 있다. 우리 공양간에 이 방법을 선택한 이유는 각자의 개성이 있고 손맛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각자의 맛과 조금 더 나은 맛의 조화와 화합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번 주 별좌보살님이 다양한 재료로 맛을 내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지원과 보시를 받아서 요리를 할 수 있도록 하며, 생일공양이나 감사의 공양, 기타 다양한 공양이 들어오면 그 공양에 맞는 요리들이 사시 때 대중들을 기다린다.

 

정토마을의 공양간은 스님들만의 공간이 아니므로 직원, 문병 오신 가족이나 친인척들도 공양 시간이 되면 누구나 오셔서 공양을 드실 수 있다. 

오신채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우리 공양간의 음식은 밖에서 먹는 음식과는 차이가 크게 있다. 그리고 요즘 채소는 대부분 정토마을 밭일을 도맡아 하시는 도감스님이 애지중지하며 키우는 상추, 쑥갓, 고추, 오이, 가지, 깻잎들을 무치고, 볶고, 찌고, 생으로 내는 등 다양한 요리로 대중들에게 찾아간다.

또한 일주일에 1번씩 잔치국수, 짜장, 카레, 떡볶이 등 별식으로 우리 대중이 즐겁게 함께 공양을 할 수 있도록 계절 먹거리로 입맛을 달랜다. 

입맛 없는 무더위 속에서 보양식으로 삼계탕을 먹으며 더위를 식혀야 하는 여름이 지나고 나면 살랑살랑 바람 불어오는 가을이 찾아온다. 이렇게 찾아오는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 불리는 만큼 과일, 곡식, 채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앞 다투어 뽑내고자 공양간으로 줄지어 찾아온다. 이렇게 찾아들어 오는 우리의 먹거리들은 계절에 맞게 변신을 하며 오늘도 변함없이 정토마을 대중들을 기다린다. 

 

 태감 │정토마을 원주스님

 

호스피스 봉사

 

경주 동국대 봉사갔을 때

50대 위암 말기 남자환자

죽음의 문턱에서 헤매고 있었다.

부인이 안타까워하는 것은

없는 집 장남으로 태어나 모진고생 끝에

동생들 뒷바라지 끝내고 자식들 다 잘 키워놓고

이제야 살만한데 암이란 게 달라붙어

세상을 마감할 날만 기약 없이 기다릴 뿐

그의 아내 안타까워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한 달이 지난 후 한통의 전화

여보세요. 아주머니, 우리 아저씨 가셨어요.

아이고, 예 서운하시지요.

모든 것 다 정리하고

아줌마 생각나서 전화 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잠깐 내가 행복하고 싶어서 한 일일 뿐인데

봉사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음성 꽃동네 갔을 때 지체장애 아동 병동, 여덟살 박이 여자아이

걷지도 못하고 기어 다니는데

이틀간 대리모 교실에 공부하러 갈 때 물리치료 갈 때 따라다니며

오히려 내가 정을 받아서 정이 많이 들었다.

꼭 안으며 엄마 엄마 볼에 뽀뽀 세례까지

떠나올 때 옷자락을 잡고

엄마 가지마.

엄마의 정이 목말라 엄마의 품이 그리워...

떠나오면서 뒤돌아서 얼마나 울었는지

3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그 모습 생각하면 가승이 찡...

 

봉사하기보다 내가 봉사받는 기분

내가 행복해지니까 말이다.

봉사라는게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이 온다.

 

------------------

*이 글은 2011년 여름, 진말숙 보살님께서 봉사 소감을 정토마을 계간지에 실어주신 내용입니다.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은 좀처럼 카메라를 내려놓지 않는다. 약속된 방송날짜, 방송시간에 반드시 프로그램을 송출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다. 그 업계의 규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어라도 찍어서 무어라도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이기에 호시탐탐 무언가를 담기 위해 늘 카메라를 들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방송분량’을 어떻게든 카메라에 담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CJB 청주방송 창사11주년 특집 휴먼기획 <호스피스 병동에서 삶을 만나다>를 촬영하기 위해 정토마을을 처음 찾았을 때도 당연히 우리 손에는 배터리가 가득 충전된 카메라가 두 대씩이나 들려 있었다.

하지만 카메라를 들고 찾아든 낯선 방송국 손님들에게 정토마을이 처음으로 베푼 것은 방송 분량이 될 법한 그 무언가가 아니었다. 마침 그날은 정토마을의 거실을 넓히는 공사를 하기 위해 거실의 짐을 밖으로 옮겨 나르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우리는 바로 카메라를 내려놓고 무거운 짐들을 밖으로 나르는 일부터 해야만 했다. 초여름 날씨에 온몸이 구슬땀에 젖었다. 당시에는 적잖게 당황스러운 기분이었으나 그렇게 정토마을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탤 수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 훗날 오히려 감사했다. 정토마을을 찾고 정토마을의 일상을 조금이라도 체험 하게 되는 이라면 그 누구라도 나의 이 감사하는 마음을 공감할 수 있으리라.

그날부터 시작해서 수 개월에 걸친 정토마을 취재를 끝낼 때까지 결국 우리의 카메라는 평소의 부지런을 별로 발휘하지 못했다. 우린 정토마을을 취재하고 촬영하기보다는 정토마을에있는 마지막 가는 이들의 아름다운 마지막 삶을 함께 살아보고자 했다. 카메라는 스위치 한번 제대로 켜지지 않은 채로 거실 한쪽 구석에 처박히기 일쑤였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로서 그런 무모함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은 정토마을의 환자들이 겪어내는 삶의 마지막 길이 결국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반드시 겪어야 하는 길이라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취재의 대상이기보다는 함께 하고 함께 겪어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이었다.

 

어느 날 정토마을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땅바닥을 기어가는 개미를 너무나도 환하고 천진난만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위암말기의 환자라는 사실을 접하고 난 뒤에도 그를 결코 환자로 대할 수 없었다. 건강하기도 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구만리인 나마저도 짓지 못할 그 환하고 천진난만한 표정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표정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지금도 이따금 고민을 한다.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 나는 과연 그런 아름다운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어떻게 일생을 살면서 후회를 남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리석음이 우리 삶의 필연적 배경 중 하나인 이상 수많은 실수를 짓고 남기면서 살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삶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지나온 삶을 참으로 행복했던 시간들로 돌아보고 기억할 수 있다면 그 죽음은 슬픈 것만은 아닐 것이다. 정토마을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그에게서 가슴속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지나온 삶을 마치 소설에나 나올 법한 행복한 시간들이었다고 회고했다. 그의 지나온 삶이 과연 어떠했는지 낱낱이 알 수는 없었으나 편안한 표정으로 그런 이야기를 들려줄 땐 사실 부러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인생의 목표라 해서 뭐 거창할 필요가 있겠는가. 죽음에 임박해서 나 참 행복하게 살았노라고 회고해도 좋을 만큼 살아내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을 만하지는 않은가.

정토마을을 찾은 어떤 자원봉사자는 그를 만나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정토마을에서 조금 더 지내보면 그 눈물을 거둘 수 있으리라. 삶의 진실에 보다 가까워지고 행복의 비결과 만나는 기쁨에 점점 더 익숙해질 테니까 말이다. 나 역시 그를 보며 눈물지은 적 있었으나 그것은 그가 안쓰러워서가 아니라 그 아름다운 사람과 영원히 작별하는 것이 안타까워서였고, 그 아름다운 사람이 사랑했던 모든 것들과 영원히 작별을 고하며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그 무엇이든 욕심낼 것이 아니라 사랑해야 한다. 그걸 구별하지 못해 어리석고 삶이 아프다. 지혜롭게 잘 살고 싶은 마음이다. 빛깔 곱던 어느 가을날 그는 떠났다. 소원대로 극락에 갔으리라 믿는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결국 찾아든다. 누구나 무조건 겪게 된다. 그게 두려워서 대부분 자신의 삶에서 죽음이라는 것을 밀어내려고만 한다. 삶의 입장에서 볼 때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은 불편한 진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을 제대로 바라보아야 삶이 제대로 보인다. 삶은 준비할 틈이 주어지지 않은 채로 시작되지만 다행히도(?) 죽음은 준비하고 공부할 시간이 주어지기도 한다. 살기도 바쁜데 죽음을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가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배운 죽음은 품질이 다르다. 또한 죽음을 배우면 삶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진다. 그 삶이 많이 남았던 짧게 남았던 관계없다. 나는 정토마을에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삶을 배웠다. 죽음에 임박한 환자들이 모여사는 호스피스 시설에서 삶을 배웠다니 이러한 기막힌 역설을 믿을 수 있을까.

지금도 정토마을 마당 어딘가에는 자그마한 개미가 기어다니고 있을 것이다. 그 개미를 바라보며 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정토마을이다. 그 행복의 비결이 함께하는 곳이 바로 정토마을이다. 그 비결은 죽음을 바로 보고 바로 대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록 삶이 바쁠지라도 정토마을에서 살아볼 일이다. 비록 늘 일손이 부족한 곳이지만 무언가를 도우려 발을 들여놓기보다는 그들의 마지막 삶을 함께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머물러 볼 일이다. 그 얼마 되지 않는 경험으로 모든 삶의 순간들이 행복해지는 기적이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분명 일생을 통해 삶이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들은 더욱 많아지리라. 참고로 작년 여름보다 넓어진 정토마을의 거실에는 새로 들여놓은 고화질 TV가 있다. 그 TV를 환자들과 함께 시청해볼 것을 추천한다. 부쩍 가까워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가슴에 담긴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정토마을을 나설 때는 마당 어디에선가 기어다니고 있을 개미 한 마리를 반드시 찾아볼 일이다. 그리고 이전과는 변화된 자신의 표정을 반드시 살필 것. 이쯤 되면 세상에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 어디 개미 한 마리뿐이겠는가.(재단법인 정토사관자재회 정토마을 계간지 2009. 여름호)


 

김한기|CJB 청주방송 프로듀서

※CJB 청주방송 창사 11주년 특집 휴먼기획, <호스피스 병동에서 삶을 만나다>(2008년 11월 28일 방영)로 한국PD연합회(회장 김영희)가 주는 제105회 이달의 PD상을 수상하였다.

 

http://www.jajae-hospital.com

 

정토마을자재요양병원

원무부장 채용 합니다... 직책 : 원무부장 2. 원무행정 경력자.. 2017.07.28

www.jajae-hospital.com

 

도감스님

올해는 텃밭과 함께 씨름하고 땀을 흘리며 산 획기적인 한해였다. 농사짓는 것에 익숙지 못한 만큼 에피소드도 많았다. 특히 나를 만나 너무 고생스러웠을 무시(무)의 삶을 생각하니 비죽이 웃음이 난다. 하기야 그도 내 생각이다. 내가 고생스러웠고 간이 조마조마했고 부끄러워서 쥐구멍에 숨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김장을 하려보니 무시가 얼마나 잘되었는지 부끄러웠던 일은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만 북태산만큼 커진 때문이다.

 

지난여름에 겨울 김장 준비로 무씨를 젊은 스님들과 함께 뿌렸다. 삼십 센티 간격으로 무씨를 두서너 개씩 넣고 새싹이 나길 아무리 기다려도 새싹이 올라오질 않았다. 나는 씨를 너무 깊이 넣었거나 아니면, 너무 얕게 넣어서 새가 다 물어간 것 같다면서 스님들과 함께 앉아서 걱정을 하였다. 그래서 다시 씨를 뿌리기로 마음먹고 있는데, 마침 어떤 분이 오시더니 “비닐을 씌우고 씨를 뿌려야 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젊은 스님들을 데리고 나가서 비닐을 씌우고 구멍을 뚫어 씨를 넣었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누군가 오더니 “무밭에 비닐 씌운 것은 생전 처음 봤다.”고 하면서 “북(흙을 북돋움)은 어떻게 주려고 하느냐?”고 물으며 허허 웃는 것이 아닌가. 저녁에 다시 젊은 스님들을 데리고 나가서 비닐을 벗기느라 그날은 기운이 다 빠져버렸다. 부끄러워서 “무” 소리만 들어도 경기(驚氣)를 할 지경이었다. 손님이 와도 밭에 갈까봐 걱정이 태산이었다. 밭에서 일을 하다가도 손님이 오는 소리만 나면 밭에 올까 무서워 큰소리로 “안녕하세요? 거기 계세요. 내 나갈 테니…….” 하고는 정신없이 밭에서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할 짓이 아니다 싶어서 곰곰이 생각을 하였다. 무를 어떻게든 크게 만들어서 밭이 시퍼렇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 나의 화두였다.

결국 고민 끝에 무를 모종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또 젊은 스님들을 데리고 나가서 삼십 센티 간격으로 퍼져 있는 사이사이에 무를 모종해서 심었다. 심고 나니 푸릇푸릇한 것이 풍성해 보여서 왠지 안심이 되었다. 그랬는데, 이번엔 누군가가, “스님, 무는 모종하는 게 아니래요. 모종하면 죽는 다네요.”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절망했고 이젠 정말로 무 농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밭에 가지 않기만을 부처님 전에 기도했다. 이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원장스님께서 가끔 무밭에 물을 주시며 나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소가 뒷걸음질 치다 뭐를 밟는다더니……. 공을 들인 것이 없는데 무가 저 혼자서 그냥 쑥 커버린 것이었다. 원장스님이 밭에 갔다 오시더니 깜짝 놀라며 나를 찾으셨다. 단지 삼십 센티 간격을 준 것밖에 없는데 무가 사람 넓적다리보다 더 크게 자라 있었다. 그렇게 감사하고 행복할 수가 없었다.

“무시야! 잘 자라줘서 고맙다."

 

그렇게 잘 자라준 무를 뽑아서 크기별로 분류해 놓았다. 넓적다리만한 것은 저장도 해놓고 오그락지(무말랭이)도 만들 것이다. 그리고 중간치는 동치미를 담으려고 한다. 크기가 얼마나 적당한지 동치미에 맞춤형 무시가 되었다. 그리고 제일 작은 것은 다싯물 내는 용으로 쓰려고 금강지 보살님과 의논 중이다.

“스님, 시장에 가보니 우리 무시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디더.”

금강지 보살의 말에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 같았다.

“무시야! 잘 자라줘서 정말 고맙다."

(2008. 겨울 정토마을 계간지)

 

도운 │정토마을 도감

1998년 12월 28일, 청주 정토마을 기공식을 시작으로 1999년 1월,조립식 60평의 독립형 호스피스 시설이 마련되었다.

나를 어여삐 보아 당신 며느리로 받아주신 시아버님을 폐암이라는 무서운 병으로 아무 준비 없이 저세상으로 떠나보내고 허전하고 슬픈 마음을 달래기 힘들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능행스님을 만나 병원 중환자실 봉사도 하고 독거노인도 돕고 결식아동도 도우며 다른 사람을 위해 마음과 시간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꽃동네로 실습과 견학을 가서 만난 호스피스병동의 환자가 반가워하며 자주 오라는 말과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빨리 호스피스병동을 마련하여 스님과 헤어지기 싫어하시는 환자를 모시고 살아야지.’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그해 초파일 컵등(cup燈)을 만들어 법주사, 동학사 입구에서 불자들에게 나누어주면서 호스피스요양원 필요성을 홍보하던 일, 호스피스환자를 위한 바자회에서 미역과 다시마 김 젓갈을 팔아 기금을 마련하던 일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어렵사리 부지 매입하고, 차가운 초겨울 날씨에 물도 전기도 없는 산자락에서 스님은 어디서 용케 컨테이너 한대 끌어다 놓으시고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나이는 거꾸로 먹었는지……, 아직도 철이 덜 든 저는 눈물이 핑 돌도록 스님이 안쓰러워도 철야기도 한번 동참할 마음을 내지 못했습니다. 십여 년 능행스님과 함께한 세월 가운데 그때가 가장 힘들었고 후회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스님의 기도 원력과 피나는 노력으로 이루어진 정토마을, 지금이 있기까지의 어려웠던 사연을 어떻게 제 짧은 글재주로 다 표현하겠습니까. 조립식으로 대충 건물이 세워지고 첫 환자가 입소할 때만 해도 우리는 해냈다는 환희로움에 가슴이 떨렸습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환희로움이 공포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을 마감하는 환자 들과의 생활은 정말 내 마음을 삭막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죽음, 저런 죽음, 또 죽음……,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뛰쳐나가고 싶었습니다. 활기와 희망이 넘치는 사람 속에서 나도 생동감 있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 갈등 속에 괴로워하던 어느 날이었습니 다. 능행스님께서 기운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하셨습니다.

“부장님, 시내를 다 돌아도 석류가 없대요. 도공스님이 석류가 잡숫고 싶다는데 국산은 철이 아니라 없고, 수입은 과수농가 시위로 중지되었다네요. 어쩌면 좋아요?

먼 곳에서 세미나 참석에 지치시고 하루 종일 운전하시고 힘드실 텐데도 불구하고 편찬으신 도공스님 드릴 석류를 사신다고 시내를 헤매고 계실 스님을 생각하니 정신이 번뜩 났습니다. ‘내가 너무 나만 생각했구나. 나만 이곳에서 탈출하면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정말로 어려워도 참고 묵묵히 견디는 정토식구들과 능행스님이 눈에 안 밟히고 살 수 있을까?’ 이러한 자책감과 번뇌와 갈등이 저를 보이지 않는 사슬로 얽어매는 것 같았습니다. 만약 정토의 환자들과 가족들, 그리고 스님을 두고 떠난다 하더라도 정토에 대한 그리움과 후회를 견딜 자신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제일 솔직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1993년, 호스피스교육이 시작되었고, 교육수료생들과 독거노인과 결식아동을 돕는 일을 시작하였다.

‘그래, 여기서 행복을 찾자. 이곳에 몸과 마음을 의지하는 환자들에게 내가 조그마한 힘이 되어보자.'

건강한 이가 죽음을 기다리는 이의 하루하루를 생각하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마음도 몸도 지치고 힘든 환자들의 안식처가 되어보고자 하는 의지는 저에게 큰 버팀목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는 행복하길 추구하고 죽을 때는 아름답게 죽기를 희망할 것입니다. 사랑 속에 살면서도 행복을 모르고 자신이 하는 일을 스스로 낮게 만들어 스스로의 가치를 떨어뜨리기도 합니다. 행복하게 일을 하는 사람에게서는 밝고 따뜻한 기운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일을 즐겁고 재미있게 하면서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행복주머니를 선물하고 싶습니다.

행복의 진리는 지극히 단순한데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제 자신을 사랑하고 저를 아는 모든 이가 저를 사랑해 주는 것 같다고 느낄 때 행복합니다. 지금 저는 매우 행복합니다. 언제든지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는 도량 안에서 생활할 수 있어 감사하고, 산소 호흡기에 의지한 환자를 보면 나 스스로 호흡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봄․여름․가을․겨울 변화하는 자연을 바라보며 일할 수 있어 감사하고, 정토를 아끼는 많은 후원가족 여러분들이 있어 감사합니다. 감사할 일이 많아 너무너무 행복합니다.(2008년 겨울, 정토마을 계간지)

 

김희자(무량심) │청주 정토마을 팀장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