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호스피스협회가 지난 10년의 여정을 조명하고 앞으로 불교호스피스의 나아갈 길에 마음을 모으는 법석을 마련했다.
한국불교호스피스협회(협회장 능행 스님)는 10월25일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창립 10주년 기념식 및 호스피스 세미나 삶, 사람’<사진>을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전국에서 활동하는 불교호스피스 봉사자들을 격려하고 불교호스피스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높이기 위한 토대로 마련됐다.
협회장 능행 스님은 “호스피스를 실천하는 우리는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누군가의 종착역에서 삶을 놓고 떠나가는 이의 차가워지는 손을 잡아주며 식어가는 그의 마음을 품어안고 저녁마다 서쪽바다에서 피어나는 불꽃같은 삶을 살아내고 있다”며 “여러분이 실천하는 이 보살행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수행자의 길이다. 누구나 갈수있지만 아무나 갈 수 없는이 길을 기꺼이 가고 있는 여러분의 고귀한 선행에 찬탄한다”고 봉사자들을 격려했다.
스님은 이어 “불교호스피스의 시작은 미약했지만 많은 스님들과 봉사자들의 노력으로 호스피스협회 10주년이라는 오늘을 맞이하게 됐다”며 “사회적 고통과 특히 더 이상 치유할 수 없는 질병으로 발생하는 다차원적인 영적고통을 완화하고 보다 더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한 불교호스피스협회의 노력에 격려와 관심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협회 고문 지현 스님은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두려워하는 임종환자들 곁에서 그분들을 행복한 세계로 인도하는 호스피스 봉사자, 관계자 모두가 이 시대의 보살이자 꽃이며 생명의 희망”이라고 치하했다.
최윤선 한국호스피스완화의료학회 이사장은 “불교호스피스는 우리의 정서와 문화에 맞게 돌봄을 제공하고 있는 곳”이라며 “앞으로도 자비심과 사랑으로 환자를 돌보고 용기와 지혜로 모든 일들을 헤쳐나가 달라. 완화의료학회도 제도나 각종 세미나 등과 관련해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기념식에 앞서 진행된 세미나 ‘삶, 사람’은 공연을 통해 불교호스피스를 이해하고 삶을 돌아보는 시간으로 마련됐다. 백문 김기종의 찻잎, 대금, 소연주 등을 시작으로 살풀이춤(조현화), 연극하는사람들의 장작극 ‘무제-생으로부터의 침몰’ 등이 감동을 선사했다.
이어 진행된 시상식에서는 영적돌봄가팀이 조계종 포교원장상을, 부산지부 환희호스피스봉사단 부산대병원팀이 The아름다운사람 봉사상 단체부문을, 울산지부 최정순 봉사자가 개인부문에 선정돼 수상했다.
한국불교호스피스협회 10주년 기념식에서 포교원장 지홍스님이 협회 영적돌봄가팀으로 활동하는 능인스님 등 9명에게 포교원장상을 수여하고 있다.
말기암 환자들과 함께 해 온 불교호스피스협회 10주년을 자축하고 향후 협회 발전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축제의 장이 펼쳐졌다.
한국불교호스피스협회(협회장 능행스님)는 10월25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문화공연장에서 창립 10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조계종 포교원장 지홍스님, 초대 한국불교호스피스협회장 지현스님을 비롯해 전국에서 호스피스 활동을 하고 있는 스님과 자원봉사자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기념식에서 포교원장 지홍스님은 한국불교호스피스협회 영적돌봄가팀으로 활동 중인 능인스님 등 9명에게 포교원장상을 수여하며 활발한 활동을 당부했다. 협회장 능행스님은 호스피스 현장에서 헌신한 부산지부 환희호스피스봉사단 부산대병원팀에 ‘The 아름다운 사람 봉사상’ 단체부문상을, 울산지부 최정순 봉사자와 부산지부 김명자 봉사자에 개인부문상을 수여하며 노고를 치하했다.
기념식에서 앞서 ‘삶, 사람’ 호스피스 세미나는 10주년을 축하하는 공연과 연극 등 문화행사로 펼쳐졌다. 대금연주와 살품이춤에 이어 호스피스 활동을 펼치고 있는 자원봉사자들이 무대에 올라 연극을 선보여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와 함께 한마음선원 한마음합창단도 음성공양을 선보이며 협회 10주년을 축하했다.
포교원장 지홍스님은 “한국불교호스피스협회 창립이 벌써 10년이 됐다. 1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지금은 연간 600여 명이 넘는 회원들이 호스피스 봉사를 하거나 협회를 지원하는 다양한 역할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죽음을 앞둔 불자와 가족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일 뿐만 아니라 완화의료와 관련된 법과 제도개선을 위해 더욱 노력해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에 앞서 협회장 능행스님은 “호스피스를 실천하는 우리는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누군가의 종착역에서 삶을 놓고 떠나가는 이의 차가워지는 그 손을 잡아주며 불꽃같은 삶을 살아내고 있다. 한국불교호스피스협회 10년의 여정을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며 “앞으로 사회적 고통과 더 이상 치유될 수 없는 질병으로 발생하는 다차원적인 영적고통을 완화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고 밝혔다.
협회장 능행스님이 부산지역 환희호스피스봉사단 부산대병원팀에 'The 아름다운 사람 봉사상' 단체부문상을 수상하고 있다.
봉사자랑 이야기가 길어져 예불시간을 10분 놓치신 스님께서는 늦은 것이 마음에 걸려 투정을 하시는 게다.
“그럼 개구리보고 저녁 예불하라고 할까요?”
내 말에 우리 스님 웃으신다.
“아이고 개구리가 어떻게...?”
“그럼 어여 가서 예불 하세요.”
“몰라~! 싫어 나 못 해 못 해~!”
“그럼 오늘 예불은 하지 말지 뭐...”
“왜...?”
“기도하기 싫은 거 부처님께서 다 아시고 계실 테니까...”
“오늘은 쉬세요.”
“안돼~!”
큰소리로 말씀하시며 일어나시더니 가만 가만 법당으로 가신다. 그리고는 목탁 소리가 난다.
또르륵- 또르륵 똑 똑...
죽음 속에서 죽음을 돌보시는 분, 우리 성오스님, 당신은 환자가 아니란다.
우리 성오 스님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4년 전으로 올라가야 한다.
스님께서는 아주 특별한 불치질환 판정을 받으셨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 제방을 두루 다니시면서 공부를 하시었다. 그러다가 어느 여름안거를 들어가시었는데, 공양시간에 뇌혈관과 심장판막이 터져서 바루를 손에 든 채 대중방에서 쓰러지셨다.
병원 중환자실에서 얼마 동안 계셨는데, 의료진들이 `살릴 수가 없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고 어른 스님들께 전하셨다고 한다.
'카타야수 동맥염' 우리나라에 500명밖에 없는 생존기간 5년 선고형 불치병이다. 혈관이 이유 없이 뚝뚝 끓어지는 질병이다. 안거 중인 선방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 정토마을로 오시었다.
그때 진단서에는, 약 1주 정도의 생존가능성이 기재되어 있었다. 식사로는 멀건 물죽을 호스를 통해 코로 주입되었고, 소변, 대변, 의식, 기억력, 인지능력, 사지불능, 신체적 정신적 모든 기능이 상실되어 버렸다.
그렇게 나는 스님의 임종 맞을 준비를 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 일주일, 보름, 한달... 스님께서는 기적처럼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하시었다. 혈관이 터지는 병이라서 주사 한 대를 놓을 수가 없는 처지였다. 사그라지는 잿더미 속에 빨딱거리는 작은 불씨 하나 부채로 부치고 또 부치며 불꽃을 살려내기 시작하였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6개월 만에 코에서 줄을 빼고 입으로 식사를 드시는 연습을 하시기 시작하였다.
깨어나고 보니 막막한 것은 오른쪽 팔다리가 기능을 다 상실한 것이었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것은 기억력 상실과 인지능력 상실이었다. 모든 기억력이 담긴 뇌신경 세포가 뇌혈관 출혈로 몽땅 제 기능을 상실한 것이었다. 오른쪽 전신마비로 더욱 불편하고 수시로 발작을 하시고 부정맥 등 심장판막도 터지고 상태는 늘 벼랑 끝이었다.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이파리가 되어 하루하루 그렇게 생명을 이어갔다. 말씀도 못 하시고 글자도 다 잊어버리시고 팔다리고 못 쓰시고, 기억력도 반 이상 상실된 채 또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차츰, 차츰, 차츰.... 인지능력이 살아나면서(분별심) 우울증과 조울증에 수시로 시달리면서 정신적인 고통까지 겸하게 되었다. 자신의 모습에서 사람으로서 그리고 승려로서 모든 역할과 관계가 상실되고 존재의 의미마저 퇴색되어가고 있음을 아시고는 비참한 당신의 처지가 너무나 서글퍼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죽고 싶다. 죽어야 한다는 절망 속에서 우울증에 시달리시던 우리 성오 스님께서는 그래도 늘 나의 의지처였다. 상의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그래도 우리 둘은 참 좋은 도반이었다. 눈으로 말했고 마음으로 통했다. 생각과 튀어나오는 어설픈 말들은 늘 따로따로이지만 우리는 다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날 홀로 두시지 않으시고 좋은 스승을 곁에 두어 주시었다.
성오 스님~!
당신을 통하여 부처님께서는 나에게 새로운 소임이 있음을 알게 하시었습니다. 스님의 모습을 통하여 장기적으로 투병이 필요한 스님들의 고통과 그들의 삶의 질을 생각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성오 스님이 내 곁에 계시지 않았다면 요양병원의 필요성과 구체적인 기획, 시설방안, 심리적 정신적 이해, 운영에 대한 대책, 열정과 의무감, 이런 것들이 강하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장기적으로 긴 투병이 필요한 스님들의 처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구도자로서의 삶으로 끝까지 이어질 수 있는 대책과 방안으로 고심하게 되는 나를 봅니다.
"성오스님! 당신은 나에게 보살로 오시었구려." 스님의 여윈 몸을 감싸 안아봅니다.
여러 스님들의 장기 투병모습을 여기저기서 자주 보고 느끼면서 고심고심 끝에 '그래 천일기도를 해보자' 마음 먹었다.
그러나 ‘천일기도 해주실 스님 오실까?’ 하고 1년을 기다려 보았지만 스님들께서는 오시면 떠나실 뿐이었다. 봉사를 오신 스님들도 사나흘만에 모두 바랑을 메고 떠나기 바빴고, 성오스님과 나는 그런 스님들의 뒷모습에 떠날 수 있음에, 부러운 눈길을 던지곤 했다.
어느 날 나는 성오스님께 매달렸다.
병원을 잘 건립해 보겠으니 스님께서 천일기도를 해달라고 말이다. 투정 반, 억지 반 그렇게 거듭 실랑이를 했다.
한글도 다 잊어버리고, 반야심경 한 구절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 우리스님, 두돌박이 아기 말 배우듯이 더듬거리는 스님, “못해~”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성오 스님께 말씀드렸다.
“이제 법당은 스님께서 맡아서 천 일 기도를 올려주세요.”
스님께서는 천일기도에 대한 부담감과 할 수 없다는 포기심리에서 오는 갈등 때문에 한참을 괴로워하셨다. 나는 모르는 체 천일기도 입재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대중들에게 천일기도는 성오스님께서 하실거라고 발표하였다. “몰라~! 몰라~!” 아이처럼 왼쪽 손만 흔드셨다.
모두들 무리라고 했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커다란 좌목탁 하나를 샀다. 법당에 놓아드리고 어설픈 왼손에 목탁체를 쥐어드리면서 말했다.
“나는 이제 법당에 천일 동안 들어오지 않을 테니 그리 아셔요.”
가슴이 저려오는 걸 참으면서 법당을 나왔다.
절도 못 하시고, 합장도 안 되고, 다리도 말 안 듣고, 말도 제대로 안 나오고, 글도 모르는데 어찌 기도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왜 나라고 무리인 줄을 몰랐을까. 그러나 억지를 부리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성오스님에게는 환자로서의 생존보다는 승려로서의 생존에 대한 의미가 더욱 크기에, 나는 그 이후로부터 특별한 날이 아니면 법당에 들어가지 않았다. 힘없는 손에 목탁을 들려놓고 처음에는 사시기도 때마다 문 뒤에 숨어 서서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부모나 형제였더라면, 그 가슴은 더욱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아픔이 되었으리라. 문 뒤에 숨어 혼자 눈물을 눌러 닦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흩어져 버린 쪼가리 기억들, 오만가지 문구들이 더듬거리는 소리에 튀어나왔다.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지만 그래도 목탁소리는 똑딱 똑딱 흘러나왔다.
환자복으로 법당에 가시어 그 목탁 채 몇 번이고 집어던지시며 울며불며 기억을 찾아 헤매시던 우리 스님, 정토마을 가족들은 성오 스님께서 기도하고 나오시면 아낌없는 격려와 칭찬을 해드렸다.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스님과 함께 기도 동행에 나서주시는 순주 보살님...
성오 스님과 순주 보살님 두 분은 신체 증상이 비슷하시다.
그래도 순주보살님은 기도하시는 스님 뒷등에 눕기도 하시고 벽을 기대고 앉기도 하시며 기도 동행이 되어주신다. 그 이후로 우리 스님은 할 수 없이 많은 공부를 시작해야 했다.
기도 끝나시면 천수경 반야심경 사경 하시고 ㄱ-ㄴ-ㅁ-ㅂ-부터 읽고 쓰기 공부를 시작하였다. 한 마디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어도 스님 기도에 우리는 만족스러웠다. 세월이 흘러갔다. 눈물과 고통들 속에서 어느새 800일 기도 천도의식 날짜를 함께 의논할 수 있게 된 우리는 서로 너무 행복하다.
이제 성오스님께서는 법당에 가시면 가사를 걸치시고 기도할 수 있으며, 천수경 반야심경 그리고 영단에 법성계까지 치신다. 제사를 지내야 할 때는 곁에서 한쪽 손으로 목탁을 쳐주시며, 하루 두 번 기도시간은 꼭 법당에 계신다.. 초도 갈고, 자원봉사자들에게 법당청소 지시도 하시는 스님이시다.
“혜란씨- 청수물 주세요-” 이렇게 말씀도 하신다.
이제는 천수경 소리도 제법 옛 소리를 찾아가고, 아랫방에 내려오시어 옛날, 차 우려내시던 솜씨로 차도 한 잔 만들어 건네주시며 살포시 웃어주시는 그 미소에 나는 너무 큰 행복을 느낀다.
우리는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태산이다. 늦은 밤 귀가하게 되면 스님 방에는 불이 밝혀져 있다. 내 차 소리가 들려야 비로소 불을 끄시고 잠자리에 드시는 고마운 도반 성오스님! 기도 중에도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시면서 목탁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
엊그제는 늦은 밤 내 방으로 내려오시었다.
빨간 봉투 2매에 십만 원씩을 담아서, 삐뚤삐뚤 글씨로 이렇게 쓰시어 보관하라신다.
1) 성오 스님 입관할 때 수고하시는 분께 보시해 주세요.
2) 해동사문 비구니 성오, 아미타 부처님 전에 불전 올립니다.
이러실 때마다 나는 슬펐다.
`왜 저렇게 서두르실까?'
이렇게 쓴 글씨봉투가 벌써 3개째다.
`날 혼자 이렇게 버려두시고 당신 혼자 먼저 가시면 알아서 하라'고 협박도 하지만, 그때마다 웃음을 허공으로 날리신다. `관자재병원 다 지을 때까지 내 곁에 있어 달라'고 늘 애원한다.
이 산중에 衆이라곤 당신과 나 둘뿐인데...
다른 스님들께서는 오고 싶을 때 왔다가 가고 싶을 때 언제라도 떠나가시지만 우리 둘은 이 모든 것 버리고 떠날 길이 없다.
어젯밤에는 둘이서 차 한 잔 하면서 감사드렸다. 성오 스님께서도 자신의 기도 원력으로 모든 것이 잘 되어가노라고 좋아하신다.
이제는 내가 없어도, 병실 환자를 위해 힘없이 아래로 처지는 오른손을 잡아 쥐고 기도해 주신다.
매일 힘들어 하시는 환자 곁에 가시어 이야기도 들려주시고 기도하실 때 축원도 잘 해주신다. 사지 말짱한 어느 스님 못지않게 당신의 자리를 이렇게 채워 가신다.
출가 승려는 어떤 경우에 처하더라도 수행자로서의 역할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늘 생각한다. 병중에 있을 때라도 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하시면서(이것이 정진이다) 존재하는 것(생명의 존엄성을 상실하지 않는 것이다.) 요즘에는 혼자 살살 산책도 하시고 봉사자들하고 담소도 나누어 주신다.
성오스님.
그는 역시 구도자였다. 언제까지나...
800일, 우리 성오스님 기도하시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을까?
항상 경상 옆에는 커다란 손수건 하나가 놓여 있다.
그래도 나는 늘 모르는 척 지나쳐 나온다.
아무리 힘들어 해도 기도품을 덜어주지 않는 내가 미울 때도 있겠지만 환자이기 이전에 당신은 승려이기에...
요번 800일 기도 축제 때는 우리 성오 스님께서 아마도 4년 만에 처음으로 장삼에 가사를 수하시고 여러분을 반겨 맞아 주실 겁니다. 너무나 장하시고 거룩하시지요.
당신께서는 `한 오년 더 살아 병원 다 짓는 것 보시고 떠나시겠다'고 하시지만 여러분 기도해 주세요. 스님이 성오 스님을 정말 편안히 모시고 오늘의 고생스러움에 보답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서둘러 준비하시는 모습에... 늘 걱정입니다.
그래도 천진한 웃음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천도재에서 성오 스님을 만나는 분들께서는 붓다를 만나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죽음을 돌보아 주시는 분...
1. 기원전 3세기 인도 아쇼카 대왕의 아들 마힌다 스님이 불교전파를 위해 스리랑카에 오면서 부처님 진신사리의 일부를 스리랑카 세루빌라寺에 봉안
2. 1923년 힌두교의 난입으로 폐허가 되어있던 세루빌라寺 복원 시 부처님진신사리를 발굴하였고 스리랑카 고고학자의 검증을 받아 콜롬보 다투말루寺로 이운
3. 2015년 10월 불교병원 건립 원력으로 다투말루寺에서 석가여래 치아사리를 정토마을에 기증하기로 결정
4. 2016년 3월 스리랑카 대통령궁 및 다투말루寺에서 치아사리 이운의식 봉행하고 3월 21일 정토마을에 석가여래 치아사리를 봉안함.
"부처님의 고귀한 인연법에 합장여밉니다."
성지를 순례하는 걸음걸음마다
3월 16일 인천공항에서 스님 10분과 재가자 55명 총 65명이 출발하여 스리랑카 최대의 도시 콜롬보에 새벽 4시10분 도착하였다. 탐진치로 물든 가슴들이 평화로운 불국토 붓다의 나라로 날아온 것이다. 한국에선 깊은 잠에 빠져있을 새벽시간에 꽃목걸이를 목에 걸고 성대한 환영을 받게 되니 감사하면서도 송구스런 마음이 었다. 이날, 아누라다푸라의 스리마하보리수가 있는 ‘이수루무니 아사원’에서부터 순례가 시작되었다.
이수루무니아사원
아쇼카왕의 딸 상가밋따가 인도에서 가져와 심었고 2300년이 넘은 보리수는 순례자들의 기도를 온전히 받아들일 것만 같은 강력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간달라마 호텔과 담불라 황금 동굴사원
간달라마 호텔은 자연 그대로의 밀림 속에 지은 5성급 호텔로 긴 여정의 피로를 풀기에 탁월했고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담불라 황금 동굴사원에는 수많은 불상과 벽화들은 중요한 인류문화유산으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캔디, 스리랑카 중부의 도시
영국 식민지 시대 마지막 싱할라왕조의 역사가 남아있는 이 도시의 신성한 기운과 캔디 사람들의 보존 노력 덕분에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불치사
불치사는 종교적 의미가 강한 사원이지만 건축디자인 또한 수려했다. 심할라 전통 건축양식의 진수를 체험할 수 있는 스리랑카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듯하다.
불치사의 내부에는 좌우로 그림과 함께 부처님 진신사리를 이운해 온 설명이 상세하게 적혀있어 불치 사의 역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이 곳이 볼거리가 아닌 삶 그 자체였다.
여행 이튿날, 불치사 정문 바로 앞에 위치한 퀸스호텔에서 묵기로 하였다.
고단한 여정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는데 창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점점 선명 해졌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15분 전. 커튼을 걷고 밖을 내다보니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불치사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궁금한 마음에 그 행렬 속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남녀노소 불문한 흰 옷의 물결, 옆 골목에는 꽃을 파는 꽃마차행렬이 장관이고 누구든지 꽃을 사서 받쳐 들고는 환희에 찬 얼굴 표정이다.
부처님 사리를 친견하고 공양을 올린 뒤에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스리랑카 불자들의 불법승 섬김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었다.
경황없이 일행 속에 합류한 나는 아무런 공양을 준비하지 못했다.
빈 두 손을 받쳐 들고 부처님 진신사리 앞에 귀의하였다.
‘이 허공같은 빈 마음 뿐 입니다. 부처님께 온전히 공양 올립니다. 부처님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의 참 불자가 되겠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내 손에 연꽃이 올려졌다.
눈을 뜨고 바라보니 옆에 있던 불자가 빙긋 웃어 보인다. 공양물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나에게 공양물을 건네준 것이다. 새벽녘, 불치사 경내에서의 일들은 나에게 환희로움 그 자체였다.
시기리아
거대한 바위 위에 건설된 궁전, 시기리아는 세계문화유산이자 세계8대 불가사의로 선정된 관광명소로 부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카사파1세가 그 복수를 하려는 형제를 경계하여 바위 위에 궁전을 지은 후 그 안에서 자살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페라데니아 국립식물원
캔디의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 약 18만명으로 1821년 식물원으로 문을 열었으며 그때까지는 14세기의 왕 파라쿠라마 바후3세가 왕비를 위해 만든 정원으로 유명하다. 이곳의 다양한 수목과 꽃, 호수가 순례단의 피로를 풀어주었다.
스리랑카 대부분 국민들은 불교를 생활의 일부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흰 옷을 곱게 차려입고 부처님께 바칠 꽃을 사서 그 더위 속에 줄을 지어 서있는 모습에서 설렘으로 가득 차있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스리랑카 왕조의 정통성이 담겨있는 부처님의 치아사리가 모셔져있기 때문인 것 같다.
왕권을 가지고 싶은 자는 치아사리를 갖고 있어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수도를 옮길 때마다 늘 함께 옮겼다. 스리랑카 사리절 주지 소눗따라 스님께서는 모시고 예경하던 사리를 우리에게 전하며 능행스님께서 기도를 열심히 하여 많은 분들을 이롭게 해달라는 부탁에 말씀을 해주셨고 마하트리 빌라 쓰리세느 스리랑카 대통령과 불교장관 사리띠두스만따께서도 세계평화와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그리고 스리랑카와 한국의 우호관계가 돈독하도록 기도해달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한국에서 모신 인연으로 두 나라가 더욱 친분이 두터워졌다고 기뻐하였다.
“지갑 좀 열어보소.”
성지순례의 마지막 날, 마지막 일정.
부처님 진신사리 이운식과 스리랑카 불교병원 기공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원장스 께서 봉지를 들고 앞차, 뒤차를 다니시며 쓰고 남은 돈 다 여기에 넣어 달라신다. 원장스님의 마음을 왜 이해하지 못하랴. 병원건립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고자 하는 스님의 마음이 우리 순례단에게 보살행을 실천할 수 있는 가르침이 되어왔다. 서슴지 않고 내어 모인 보시금을 보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부처님, 부처님, 부처님
부처님 치아사리를 이운해 친견하는 일에 함께함은 다겁생래 쌓이고 쌓여 석화가 된 업장이 녹아지고 무명이 타파된다고 하셨지요. 이번 진신사리 이운식에 동참하신 이차인연 공덕으로 모든 분들이 나 하나의 행복보다는 더 많은 이들에게 안락을 줄 수 있는 큰 회향으로 남게 하소서. 그리고 모든 업장이 소멸되고 지혜는 증장되어 구경에 꼭 해탈로 이어지는 원인되게 하소서.
이번 순례와 부처님 진신사리 이운식을 여법하게 마칠 수 있도록 모든 진행을 맡아 애써주신 스리랑카 정부와 통역과 안내를 맡아 도와주신 완샤스님과 여러분의 스님들께 감사합니다. 정말 한 생을 살며 받아보기 힘든 최고의 예우를 받았으나 지면을 빌어 인사 올리는 무례함을 용서하소서. 살면서 평생 잊지 않고 갚겠습니다.
끝으로 여법한 회향까지 대중을 외호해주시며 수고해주신 정토마을 회주이신 수환큰스님, 자재요양병원 원장 능행스님께 진심을 다해 감사드리며 그 외 도감스님을 비롯하여 함께 애쓰신 대중스님들과 법인가족들 너무나 고맙습니다.
2005년도이었을 것이다. 큰 태풍과 폭우로 뒷산이 무너져 토사가 건물 안까지 밀려들어온 적이 있다. 지금은 병원 새 건물인데 당시에는 공장건물의 사무동이 있어서 일층은 호스피스 교육장과 숙소로 사용하고 2층은 법당과 집무실 그리고 공양간이 있었다. 그때 거사들이 모여 들어 토사를 며칠에 걸쳐 치웠던 기억이 난다.
대만의‘자제공덕회’를 모델로 한 정념회…
정념회는 2005년 9월 30일 발족되었다.
원장스님이 당시 늘 다니던 봉사자들을 차 한 잔 하자고하여 많은 분이 저녁에 모여 들었다. 차를 마시다가 모임의 필요성을 말씀하시며 모임을 만들고 회칙을 정하게 되었다. 원장스님은 대만의‘자제공덕회’를 잘 알고 있었고, ‘자제공덕회’를 롤모델로 삼아 그런 봉사단체가 필요하다면서 단체를 만들게 된 것이다.
지금의 정념회가 있기까지…
그때 모였던 사람들은 충북 청원의 정토마을까지 달려가서도 봉사를 하던 사람들이었다.
부산, 마산, 대구, 울산, 포항 등 각기 사는 곳이 달랐지만 정토마을 홈페이지에서 서로 만나 일이 생기면 달려가고는 하였다.
원장스님이 지금의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이 들어선 울산 언양의 병원부지를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매입을 하였다 보니 늘 힘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 멤버들은 청국장이나 메주 등을 만들어 팔아서 이익금을 보태기도 하고, 원장스님은 전국의 큰 행사가 있으면 다른 스님들과 함께 병원 건축에 대한 홍보를 위해 다녔다. 그럴때는 우리 회원들이 동참하여 스님이 쓰신 책도 판매하고 병원홍보 전단지도 돌리는 방법 등으로 후원자 발굴을 하기도 하였다. 그 회원들이 모여 지금의 정념회가 만들어졌고, 지금까지도 정토마을 병원의 각종 행사 등에 참여하고 있다.
지금은 정토마을의 모든 건물들이 난방이 되지만 그때는 드럼통에 나무를 넣어 난방을 하였다.
그래서 봄에는 공양간 앞의 텃밭을 일구고, 여름이면 비 피해가 있지 않도록 배수로를 정비하였고, 가을이면 뒷산에 올라가 땔감을 구해다가 장작을 만들어 쌓아 놓고, 겨울이면 김장을 하고, 장을 담그고……
한 해에 두 번 정도는 행사가 있었다. 산사음악회며 기공식 등등. 그때마다 밤을 새워가며 음식을 준비하고 다음날 배식과 정리정돈까지 하였다. 매월 둘째 일요일에는 법회를 보고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원장스님이 직접 법문을 하였다. 모임 초기에는 회원이 60~70여명 정도 되어서 지금의 교육관이 꽉 찼었는데, 병원 건물의 건축이 시작되면서 공사기금을 마련하고자 원장스님은 차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전국을 다니시다 보니 법회를 챙기지 못하게 되었고, 그때의 회원들도 이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되다 보니 지금의 활동인원은 크게 많지가 않다.
십년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까닭…
십년을 함께 할 수 있었던 힘은 남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우리병원을 짓는다는 생각을 하였기에 꾸준히 이어져온 것이란 생각이 든다. 병원 준공과 개원이란 감격도 잠시 잠깐, 환자가 채워지지 않아 빈 병실이 많다는 소리에 안타까웠는데, 이제는 병실이 부족하다는 말에 안도하면서도 병실을 필요로 하는 모든 분들이 시설을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정토마을은 앞으로 병원도 증축해야 하고 법당불사도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 다시 팔을 걷어붙여야 되겠다. 하지만 스님은 더 넓은 시야를 가지신 것 같다. “이제는 병원도 좋지만 아프리카나 물 없는 나라에 우물을 한 개라도 파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니 부응을 하도록 해야겠다.(2015.여름)
어떤 모습이 아름다운노년의 모습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만난 것이‘호스피스’라는 것이다.
살아내면서 가장 두렵고도 알기 어려운 것이 죽음이다. 죽음이란 상황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황하고 놀랍고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댈 것이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런 당황스런 죽음의 상황에서 조금이나마 놀라고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고 죽음의 옆에서도 여유로울 수 있는 마음그릇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일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호스피스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다.
지난여름 호스피스교육을 받았다. 그러면서 자재요양병원에서 3일간의 실습 을 하게 되었다. 우린 먼저 중환자실로 향했고, 도울 거리를 찾게 되었다. 중환자실 환자들의 목욕날,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냥 환자를 씻기는 데 손을 보탰다. 그렇게 3일간 환자목욕 시키는 일을 도울 수 있었다. 구석구석 문질러 드렸더니 어르신들이 시원하고 때가 싹 씻긴 것 같아 좋다고 해주셨다. 그런 칭찬에 더 힘을 내어 정성껏 어르신들의 몸을 닦아 드렸다. 아직 서툴렀지만 몸을 맡겨주시는 분들께 듣는 칭찬에 뿌듯함을 느끼며 힘든 줄 모르고 하게 되었다.
목욕봉사를 하면서 ‘늙어 가면서 내 몸 하나 내 힘으로 건사하지 못하고 남의 손에 맡겨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어떨까?’하고 생각해보게 되었다. 궁극적으로 봉사라는 것은 남보다도 나 자신을 위한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나를 위한 것이 남을 위한 것이며, 남을 위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것임을 이번 자재병원에서의 실습을 통해 다시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우리네 인생은 서로 도와가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 같다. 지금 내가 이렇게 조금이나마 보태게 된 힘이, 결국 내 인생의 막바지에 누군가의 도움으로 내게 다가오게 될 거란 생각을 멈출 수 없다.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도록 서로의 공간을 조금씩 내어줄수 있는 마음씨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름답게 늙어가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그렇게 아름답게 늙어가고 싶다. 힘을 보탤 수 있을 때 충분히 정성껏 돌보아 드리도록 해야겠다. 그것이 내 노년을 위한 저축이며, 아름다운 노년을 위한 준비가 될 것이다.
얼마 전 정토마을에 상담을 받으러 온 환자분이 있었다. 그 환자분의 허탈한 웃음 소리가 아직까지 내 귓가에 맴돌며 지워지지 않고 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상담 좀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너무 젊고 생생했다. 게다가 잘 생기고 총명해 보였다.
"가족 중에 누가 아프신가요?"
물음에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아픕니다."
"아니, 어디가요?"
"아……. 저, 그게……. 지난 금요일 날에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적잖게 놀랐지만 본인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 레절레 흔들었다.
"어디가 많이 아프세요?"
"아~ 얼마 전부터 만사가 피곤하고 소화도 잘 안 되는 것 같아서 병원에 갔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며 큰 병원으로 가라고 의뢰서를 써주었어요."
"저기, 올해 몇 살이세요?"
"경자생이에요, 마흔다섯 됐어요."
‘어이구,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노.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난 속으로 큰 한숨을 쉬었다.
"큰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보니, 글쎄 췌장암 말기라네요. 그는 ‘허허’하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혹시 암이 다른 데로 전이됐나요?"
"간도 이상이 있다고 하네요. 지금은 수술, 방사선, 항암제도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합니다."
"가족은요?"
"아내와 아들 둘에 딸 하나가 있고, 부모님을 모시고 삽니다. 제가 외동아들이거 든요."
외동아들이란 말에 나의 가슴은 더욱 아팠다.
"가족 중에는 누가 알지요?"
"아직 아무도 몰라요. 특히 아내는 저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거든요. 이제 겨우 서른일곱밖에 안 됐어요."
"제가 무엇을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사실은, 제가 무작정 찾아왔습니다.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어서요. 휴가를 냈습니다. 여기서 좀 있으면서 계획을 잡아보려고요."
"생존 기간은 얼마나 되시는지요?"
"의사가 오래가면 6개월이고 아니면 3개월 정도라고 하네요. 저는 아직 그 누구도 죽는 것을 실제로 본 적이 없습니다." "무엇을 계획하시려고요?"
"글쎄요, 아직 아무것도. 제가 무엇을 계획해야 하나요?"
입술이 하얗게 말라서 타들어가던 환자는 뜨거운 차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나서 중얼거렸다.
"이럴 경우엔 어떻게 하면 되나요?"
"가족들에게 말씀드려야지요."
"스님, 아직은 안 됩니다. 정말 이런 병 걸리면 죽기는 죽는 겁니까? 정말 고칠 수 없나요? 3일 동안 인터넷을 다 찾아봤는데 모르겠어요.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전 어떻게 하면 되나요, 네? 죽는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돼요. 안 그래요 스님? 꿈을 꾸는 것 같아요."
"아이들이 몇 살인가요?"
"제가 공부하느라 좀 늦었습니다. 하나는 초등학생, 또 하나는 유치원생입니다. 여기서 좀 머물면 안 될까요?"
정말 사형 선고를 받고 곧바로 달려온 환자 같지 않은 환자. 우리는 두 시간 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당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가족들에게도 보내드릴 수 있는 준비가 필요했기에 조금이라도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도록 서울에 있는 대체의학 전문 시설로 보내드렸다. 침착하게 투병하기로 약속하고 그는 서둘러 서울로 떠났다. 그 잘 생긴 눈에 눈물을 흘리며 웃는 웃음소리.
"허~허~허~허~허~"
"거사님, 우리 만나지 맙시다. 꼭 성공하세요. 그리고 제가 필요할 때엔 언제든 전화 주세요. 거사님은 이제 혼자가 아니랍니다. 아시죠?"
나는 그의 친구가 되어주기로 했다. 어디까지 함께 가주어야 할까. 그를 보내고 났는데도 자꾸만 그의 씁쓸하고도 허허로운 웃음이 머릿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지금 그 친구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