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그림으로 나타낼 때는 흔히 둥근 원 또는 구로 그린다. 그것은 마음이란 물건이 원만하고 둥글다는 의미보다 가장자리에서부터 가운데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자신이 알 수 있는 얕은 표면의 마음이 있고 표면 아래로 들어가면 점점 더 깊은 마음 즉 자신이 알 수 없는 마음도 있다.

마음은 지구에 비유할 수 있다. 지구의 내부를 지표, 지각, 맨틀, 외핵, 내핵으로 구분하듯이 사람의 마음도 전 오식, 의식, 말라식, 아뢰야식 등으로 구분해서 설명하는 것이 유식학이다. 전 오식이 가장 얕은 수준의 마음이라면 아뢰야식은 지구의 내핵에 해당하는 가장 깊은 마음이다. ‘내 마음은 내가 안다.’라고 할 때의 마음은 대부분 마음의 표피 정도이다. 깊은 속마음은 보통사람(범부)들은 알지 못한다. 자신의 마음을 얼마나 알고 있나 하는 정도에 따라 인격자 또는 성숙한 사람의 기준을 삼을 수도 있다. 정신치료자 소암선생은 자신을 모르는 것을 정신장애로 설명하기도 했다. 수박껍데기를 보고 수박 속을 짐작하기란 쉽지 않은 것처럼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속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다. 타인의 속마음을 짐작하는 것도 어렵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의 속마음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아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다.

유식학에서는 사람의 가장 깊은 마음을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한다. 아뢰야식은 무시이래로 즉 시작을 알 수 없는 아득히 먼 과거로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경험과 정보들이 보관되어 있는 마음이 창고이다. 보관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아뢰야식을 장식(藏識)이라고도 한다. 아득히 먼 과거, 생명의 출현에서부터 사람으로 진화해 온 모든 과정의 정신적인 산물들과 개인의 모든 경험들이 총체적으로 보관된 곳이다. 융의 분석심리학에 대비하면 콤플렉스, 개인무의식, 집단무의식,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 자기 등이 통합된 개념이다. 마음에 보관된 정보들은 화석처럼 생명을 잃은 것이 아니라 조건만 맞으면 언제든지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에서 종자, 씨앗이라고 부른다. 태어날 때 가지고 온 종자를 본유종자라 하고 태어나서 새롭게 만들어진 종자를 신훈종자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옛날 어른들이 아이들을 보고 이 놈의 종자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 바로 인간의 선천적인 기질이나 소인을 지칭할 때 쓰였던 말이다. 태어날 때부터 좋은 종자가 있는가하면 그렇지 못한 종자도 있다. 가장 최신 심리학에 해당하는 긍정심리학에서도 행복의 조건으로서 태어날 때의 행복지수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물론 태어날 때 가지고 온다고 해서 반드시 숙명적으로 비관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훈습에 의해서 종자는 변할 수도 있고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프로이드의 무의식의 개념과 아뢰야식은 자신이 모르는 마음이라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그 구성물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난다. 프로이드의 무의식 개념은 감당하기 힘들어서 억압한 것들, 외면한 것들, 트라우마 등 주로 병리적인 것들의 저장소라고 할 수 있지만 아뢰야식은 병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것, 생산적인 것, 종교적인 것 등 훨씬 다양한 것들의 저장소이다.
 
아뢰야식은 되살아날 수 있는 종자의 보따리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무수히 많은 종자들을 품고 산다. 언제 어디에서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종자는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으로 마치 물속에 잠겨있는 장애물처럼 우리의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있다.

학교로 출퇴근하는 길옆에 큰 저수지가 있었다. 항상 시퍼런 물이 가득 차 있어서 저수지 안에는 물고기들만 살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해 심한 가뭄이 들더니 저수지 물이 서서히 마르기 시작했다. 가장자리부터 바닥을 드러내더니 점점 깊은 바닥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저수지 바닥은 검은 색을 띤 진흙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상태로 열흘 정도 가뭄은 이어졌는데 무심하게 저수지 옆을 지나다니던 어느 날,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시커먼 모습의 저수지 바닥에 잔디처럼 새싹들이 파릇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깜짝 놀랐다.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난 것인가? 그 사이 어디에서 날아온 씨앗은 아닐 것이다. 진흙 속에 묻혀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오래 전부터 이미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바닥이 드러나고 햇빛을 받으면서 순식간에 싹을 틔웠다. 보통 때는 짐작할 수도 볼 수도 없었지만 씨앗은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의 마음에도 자각할 수 없는 많은 씨앗(조건)들이 숨어 있다. 마치 암을 유발하는 DNA 인자가 잠복해 있다가 자라날 환경이 되면 암을 유발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마음을 살핀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아뢰야식을 통찰하는 작업이다. 단번에 깊은 심연을 알 수는 없다. 가까운 것부터 순서에 따라 자신의 내면을 살피게 된다. 흔히 말하는 알아차림 명상은 가장 자각하기 쉬운 것부터 자신을 살피는 작업이다.

유식삼심송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유식 3)
 
불가지집수(不可知執受), 처요상여촉(處了常與觸), 작의수상사(作意受想思), 상응유사수(相應唯捨受), “아뢰야식은 그 작용을 알 수 없고, 집수와 처()와 요()의 작용도 알 수 없다. 항상 촉()과 작의와 수()와 상()과 사()로 더불어 상응하되, 오직 사수(捨受)로만 한다.”
 
아뢰야식은 작용이 미세하고 광범위하기 때문에 범부의 식견으로는 알지 못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꾸준히 마음공부를 이어가면 조금씩 아뢰야식의 종자들을 통찰하게 되고 마침내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https://mahadohi.tistory.com/entry/불교-유식학唯識學-산책3?category=485840

 

불교 유식학(唯識學) 산책(3)

[천천히 읽는 명상]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김경일 교학처장님이 들려주시는 따뜻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세요. 불교 유식학(唯識學) 산책(3)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마음을 그림으로 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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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딱지’라는 상실의 여정을 잘 표현한 그림책이 있다. 그림책의 주인공인 아이는 엄마를 잃고 아빠와 단둘이 살아 가는 과정에서 우리를 두고 간 엄마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며 엄마를 잊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엄마를 잊지 않기 위해 엄마 냄새가 새어 나가지 않게 집 안의 창문을 다 닫아 놓고, 엄마 목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귀를 막고 입을 다문다. 엄마 목소리를 듣기 위해 무릎에 난 상처를 자꾸 뜯는다. 그러다 할머니가 오셔서 엄마는 네 가슴 오목한 곳에 영원히 있다고 가르쳐 준다. 비로소 아이는 편안히 잠을 잘 수 있게 되고 무릎딱지엔 새 살이 돋아나 매끈해진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말한 죽음을 맞는 환자의 5단계(부정, 분노, 우울, 타협, 수용)가 상실의 과정을 겪는 아이에게서도 거의 그대로 나타난다. 아이의 눈을 빌려 쓴 그림책 이지만 어른이 읽어도 감동이다.

죽음은 어찌 보면 남은 사람의 몫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호스피스 병동에서 실시하고 있는 사별가족의 모임인 ‘별아람’이 많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다시 오고 싶지 않을 장소이기도 하겠지만, 어느 분에겐 고인을 추억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할 것이고 비슷한 상처를 서로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되기도 할 것이다.

제11회 ‘별아람’모임에서 이 책을 읽어 드렸다. 모두의 마음이 먹먹해졌고 사별가족은 눈물을 흘리셨다. 눈물을 시작으로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셨다. ‘저녁에 내 말을 들어 줄 사람이 없는 것이 제일 쓸쓸해요.’ ‘지금도 어디 여행 가신 것 같아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모릅니다.’ ‘부모보다 남편을 잃었을 때가 더 힘든 것 같아요.’ 등등 이 곳에서 자신의 상실감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내 소중한 사람을 위해 같이 기도해 주고 함께 추억할 수 있는 곳.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편안한 곳.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따뜻한 곳. 그래서 ‘별아람’ 사별가족모임은 참 소중하다. 그리고 그 곳에 함께할 수 있어 감사하다.

윤정숙 독서치유사


독서치유사 윤정숙님은 정기적으로 호스피스병동 환자 및 보호자들에게 책과 시를 통해 당신들의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도록 지지해주시는 호스피스전문봉사자이자 요법치료사입니다. 윤정숙님처럼 환자와 보호자들의 상실감을 어루만지고 삶의 의미를 함께 찾아가는 역할을 전문적으로 할 수 있도록 정토마을호스피스병동에선 연2회 호스피스전문자원봉사자 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나의 시간과 재능을 다른 이와 나누는 경험을 통해 보다 나은 삶의 의미를 가져보시는 건 어떠신지요.

http://www.jajae-hospital.com

 

정토마을자재요양병원

원무부장 채용 합니다... 직책 : 원무부장 2. 원무행정 경력자.. 2017.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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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인가 싶더니 벌써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 사계절은 삶이란 과정에서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선물과도 같다. 나에게 있어 사계절은 계절마다 만나는 환자분들이 다르다는 것이다. 계절이 지나갈 때마다 환자분들과의 추억도 지나가고 슬픔도 상실도 지나간다. 그러나 지나간 자리에 언제나 흔적이 남는다. 그 흔적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간직한 채 또 다른 계절을 맞이하게 된다. 사별가족 마음 안에 상실과 슬픔의 여정이 있듯이 나에게도 환자와의 만남에서 슬픔과 상실의 여정이 있다. 일상생활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임상영적돌봄가라는 역할이 때로는 생각을 많이 하게 한다.

 

어느 날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제목부터 흥미로움을 유발하게 되었고 얇은 책 두께가 마음에 들었다. 책 내용에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내게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무슨 일을 할 때 가장 좋은 때가 언제인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스승이 말하기를, 기억하시오. 가장 중요한 순간은 바로 '지금'이라는 사실을 말이오. 왜 지금이 가장 중요하겠소? 우린는 오직 '지금'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오. 오직 지금 이순간만이 우리가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라는 말이지요. 또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이오. 앞으로 그 어떤 상황에서 그 누구와 자신이 인간관계를 맺을지 모르므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함께 하는 사람이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은 함께 있는 그 사람에게 착한 일을 행하는 것이지요. 그를 위해 이 세상에 인간이 보내졌고 오직 이를 위해 인간이 이 세상에 왔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위 세가지 질문은 삶의 회고와 용서 그리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수 있는 지혜로운 방법이다. 죽음이 임박해져 왔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혼돈 속에서 살다가 급작스럽게 마무리를 한다. 삶과 죽음이 따로 있지 않듯이 매일 세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으면서 삶을 살아간다면 마지막 여정 또한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행복한 죽음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능인 │정토마을자재요양병원 영적돌봄연구실장

매미가 새벽부터 어둠이 내릴 때 까지 운다.

 

매미의 일생은 며칠이지만 그 며칠의 여정에 존재로서 해야 하는 일을 마치고 7년 동안 숙면을 위하는 것 같다.

 

작은 곤충도 그러한데 하물며 인간, 특히 출가한 사문의 길을 가는 내 입장은 가장 어두운 곳, 그 곳에 작은 등불이라도 되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20세기가 저무는 그때 "정토"맑고 깨끗한 땅, 정토마을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정토마을은 붓다의 자비실천을 원력으로 삼아 질병과 죽음 그 사이에서 발생되는 고통들을 돌보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죽음에 그 가치를 두면서 인류가 공존과 공생을 통하여 더불어 사는 평화로운 정토를 구현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정토마을은 위와 같은 목적을 실천하기 위해 '의료'와, '임상교육'이라는 두 가지의 방법을 선택하였고, 인간이 겪어 내야하는 영적고통완화에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해 나가기로 했다.

 

2000년 1월부터 호스피스완화의료시설을 청주에 준비하여 매년 100여 명이 넘는 호스피스환자의 죽음을 13년간 돌보았고, 그 시작은 현재 울산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병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다양한 측면의 임상교육이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과 마하보디교육원에서 이루어지고, 그 자원들은 또 다시 환자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에 기여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정토마을 공동체의 가치이며 영성이다.

 

1997년부터 이루어진 기부와 모금이 정토마을 공동체가 수행하는 모든 분야의 밀알이 되어 주었다.

조건없는 헌신이 담겨진 기부와 자원봉사는 현재 국경없는 민들레가 되어 해외의료봉사로 이어지고 있고, 그렇게 정토마을은 의료적 측면과 교육적 측면으로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조금씩 확장되어가고 있다.

 

붓다께서 2700년 전 인도 기원정사라는 사찰 안에 열반당이라는 호스피스시설을 지어 죽어가는 환자를 직접 보살펴드렸고, 21세기에는 정토마을공동체 사람들이 붓다의 유지를 받들어 죽어가는 이들을 보살펴주고 있다.

 

지금 정토마을은 좀 더 많은 이들, 가난한 나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질병과 죽음에 관여하여 그들의 마지막 삶의 질과 죽음의 질 향상에 기여하고자 다양한 방법으로 길을 모색하고 있다.

 

정토마을 공동체에서 함께 일하는 모두는 같은 꿈을 꾸고, 같은 가치를 가지며, 그 의미를 좋아한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 것을 가지진 않았지만, 풍요를 잃지 않는 지혜로 살아감에 만족할 줄 아는 삶을 배우고 있다.

 

이곳에서 함께 살아가는 정토마을 공동체 가족 모두에게 감사의 마음 전하며 특히 호스피스에 마음 기우려 주시는 모든 분들께 더욱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함께 우산을 쓰고 가는 이 길에 폭우가 내려도 나는 당신이 곁에 있어 더욱 힘이 납니다.

 

-능행 합장

 

마하보디교육원에서 올해 1월 5일부터 10일까지 시행되는 호스피스교육을 받기 위해 진주에서 아침 일찍 출발했다.

 

전국 각 지역에서 각자 개성이 강한 16명의 교육생들이 모였는데 이번 교육 의 주제는 “생 멸 그 사이에 핀 꽃”이었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교육을 받는 시간인 줄 알았는데 그것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철학적 의미와 불교적인 이해 등을 통해 나의 감정 밑바닥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는 여러 가지 번뇌의 찌꺼기들을 털어내고, 나를 튼튼하게 바로 세우는 작업과 내가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올바른 견해 등을 정립한 다음, 나의 죽음에 대한 깊은 사유를 하게 됨으로써, 앞으로 어떻게 살아서 나는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다.

많은 선배 봉사자님들과 스님들의 호텔식 같은 정성 어린 공양 준비와 많은 스태프들의 지원으로 무사히 교육을 마칠 수 있었음을 감사드리며 원장스님의 다양한 임상 경험을 통한 사례들을 들으면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어떤 죽음이 아름다운 죽음이며, 나는 어떻게 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그 해답을 얻게 되었다.

 

같이 교육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길 바라고 다가올 여름에 교육받게 되는 49기 교육에 우리가 선배님들께 받은 사랑을 잘 회향할 수 있길 바라며 올 여름에 다시 만날 수 있길 기대해 봅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성불하세요~

 

최인숙 │ 48기 생사의 장 수료생

 


2019년 8월 17일 부터 49기 생사의 장 교육이 시작됩니다.

 

세상을 떠난 랜디 포쉬(Randy Pausch) 교수는 건강문제로 대학을 떠나면서 동료 교수들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행한 <마지막 강의>에서 아주 감동적인 강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행한 강의 내용 전부가 감동적이었지만, 저는 그 중에서도 특히 '벽 이론(The Brick Walls Theory)'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가 언급한 '벽 이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But remember, the brick walls are there for a reason. The brick wallsare not there to keep us out. The brick walls are there to give us achance to show how badly we want something. Because the brick wallsare there to stop the people who don't want it badly enough. They'rethere to stop the other people.”
“벽돌담은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그 벽돌담은 우리를 안으로 못들어가게 하기 위해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벽돌담은 우리가 그 어떤 것을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를 보여줄 기회를 주기 위해 그곳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벽돌담은 그것을 아주 간절히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그곳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벽돌담은 다른 사람들을 저지하기 위해 그곳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Remember brick walls let us show our dedication. They are there to seperate us from the people who don't really want to achieve their childhood dreams. Don't bail. The best of the gold's at the bottom of barrels of crap.”
“벽돌담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전심전력을 보여주도록 시킨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그것은 우리들을 어린 시절의 꿈을 달성하기를 진심으로 원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과 분리시키기 위해 그곳에 존재합니다. 결코 중단하지 마십시오. 가장 좋은 황금은 쓰레기더미의 가장 밑바닥에 존재합니다.”

결국 오래 전에 꾸었던 까마득한 높이의 성벽(城 壁)은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언젠가는 넘어야할 장애물인 것이며, 이러한 장애물이 존재하는 것은 꿈을 달성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자를 테스트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모두들 망연자실(茫然自失) 주저앉아 좌절하고 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연(憤然)히 앞장서 떨치고 일어나 벽을 타고 오르며 희망(希望)을 노래 하는 자그만 담쟁이 잎 하나...

그런 담쟁이 잎들이 존재했기에 인류의 역사는 그나마 발전하는 방향으로 면면(綿綿)히 이어져 내려 왔을 것입니다.

 

담쟁이 

도종환詩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2014년 자재병원을 건립하고 푹 삶긴 풀처럼 땅을 베고 누워있을 때 저는 이 시를 만났습니다.

저는 어느 날 병원을 완공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짓놀려버린 나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병원 앞 길목에 살고 있는 담쟁이를 만나 그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아~하

담쟁이 넝쿨은 벽을 결코 뛰어 넘으려 하지 않고 천천히- 기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저 담쟁이는 벽에 살면서도 저렇게 푸른 잎을 피우는구나 생각 하니 담쟁이의 인욕과 정진의 힘에 한없이 고마운 마음이 흘러갔습니다. 어린 담쟁이의 삶의 터전은 흙 한 톨도 없고 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메마른 벽, 그 벽을 의지하여 푸른 잎을 피우며 서로 힘을 내고 있었습니다. 서로 함께 힘을 모아 의지하며 배려하고 힘이 되어주면서 벽을 넘는 모습에서 저도 또한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정토마을을 위해 기도하는 후원 가족들이 곁에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담쟁이는 뿌리로 벽을 뚫고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벽을 붙들고 포기하지 않았던 거죠.

혼자만 살 길 찾겠다고 달려가지 않고, 천개의 이파리가 손에 손을 잡고 한 발짝씩 나아가느라 저렇게 느리게 가면서도 어느 견딜 수 없이 뜨거운 날에도 말없이 벽을 오르는 담쟁이처럼 저 또한 모든 일에서 서두르지 않고 조급해 하지 않으면서 삶의 벽을 오르고 있는 듯 합니다.

메마르고 거친 회색 벽의 환경을 푸른 잎으로 덮어 주는 담쟁이처럼 정토마을을 일구는 사람들과 함께 저도 질병으로 갈라진 마른 벽을 푸른 사랑으로 덮어 가 보려합니다. 담쟁이처럼 걸어 보려합니다.

 

정토마을을 사랑하는 그대와 함께 손잡고 벽을 넘어 저 푸른 초원으로 나가보려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서 때때로 벽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권력과 물질 그리고 권위로서 벽을 파괴 할 수도 있지만, 누구나 다 행복하고 평화로운 길, 타인에게 힘이 되고 도움이 되는 길, 길 없는 길에선 사람들에게 희망의 길이 되어주길 그 길을 담을 넘는 담쟁이처럼 그렇게 걸어가 보려합니다.

정토마을 국경없는 민들레 홀씨되어 그대와 나는 지금 담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계간지 정토마을. 2019 봄호)

 

기해년 오월 능행 합장 

 

 

인도에 오면 마음이 숙연해 진다. 인도의 오지마을 라다크, 산과 산맥에 둘러싸여 뜨겁고 추운 마을이다. 많은 것을 소유하지 않아도 만족하며 자기가 맡은 일을 묵묵히 하며 살아가고 있다. 크게 동요하거나 남과 비교하지 않는 그들의 삶을 바라보면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며, 편안해 진다. 그들이 원한 것은 소박한 것들이다. 가족이 아프지 않고, 가족과 함께 하루 세끼를 해결하면 감사할 뿐이다. 더 편하고 더 나은 생활을 기대하지 않기에 마음이 편한 것 같다.  

의료봉사를 한다고 이곳을 찾았지만, 과연 우리가 얼마만큼의 도움을 줄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신세를 질뿐이라는 미안함과 그들의 소박한 삶이 아름다울 뿐이다.

 

│라다크 심장재단 병원에서의 의료봉사

 

이른 아침 일출을 받으며 떠오르는 히말라야산맥은 인간의 오만을 나무라는 듯, 우리를 겸허하게 한다. 마치, 전체에 조명을 받는 듯한 황금빛 설산과 돌산의 조화! 누가 감히 그 앞에 토를 달겠는가?

어차피 흙이 되어 돌아갈 몸들...

영원한 어머니의 커다란 자궁과 같은 산들의 둥지 라다크. 교만할 것도, 아등바등할 것도 없는 땅.

이틀간의 여정 끝에 라다크 심장재단에 도착했다. 방 배정이 될 때까지 로비 바닥에 주저 앉아 준비해 온 선글라스 수백 개를 케이스에 넣었다. 해발 3,500여 미터의 산악지대라 자외선으로부터 눈을 보호해야 하는 주민들을 위한 선물이다.

고산증 약을 복용한 후 침대에 누워 고산증 적응을 위한 휴식을 한다. 말도 많이 하면 안되고 걷기도 천천히 우아하게 하라는 능행스님의 말씀이다.

라다크는 파키스탄과의 정전이후 항상 군인들이 상주하고 있기 때문에 병원 밖 외출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양쪽 코가 콱 막힐 정도로 날씨가 건조하고, 머리가 띵하며 심한 사람은 양 손발이 저리도록 고산 증세가 심하다. 신기한 것은 3일정도 고산증 약을 복용하고 나니 몸이 적응을 하는지 견딜 만 했다.

나는 한방 팀에 배정되었고, 다음날의 진료를 위해 몇 시간에 걸쳐 미팅을 하였다. 한방의사인 한의학박사, 의사를 보좌하는 현직 간호사분이 함께 배정되었고 간호사의 보조가 내 소임이었다. 시간을 맞춰 침을 뽑고, 부황 도구를 떼고 피를 닦아 냈으며, 파스를 붙이고 쓰담쓰담 하기까지 마음을 모아 집중해야 한다. 작은 침과 일반 침은 쉽게 뽑을 수 있었으나 한 뼘 길이의 장침은 쉽게 빠지질 않는다. 특히, 허리에 꽂힌 장침의 경우 환자가 긴장하여 힘을 주면 절대 뺄 수가 없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며 부처님의 명호가 튀어 나온다.

오전에 40명, 오후에 40, 하루80명의 환자들에게 침술을 행하고, 아픈 부위를 치료한다. 약제 처방만 해도 10여 가지로 구미강활탕, 오적산, 도인승기탕, 인삼패독산, 보증익기탕, 청심연자탕, 평위산 등이다.

나와 한 팀이 된 룸메이트보살은 약제담당을 맡았다. 나이가 나보다 많은 보살은 안경을 쓰고 처방전대로 약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다. 베드가 5개 놓인 좁은 방안은 환자들의 열기와 냄새로 가득하다. 창문을 열고 싶어도 침 맞는 환자들이 찬 기운을 느끼면 안 된다는 의사선생님의 지시대로 열지 못한다. 그밖에도 치료부위 이외의 신체부위는 덮어 줄 것, 베개는 반드시 낮은 것을 사용할 것, 무릎을 치료할 환자는 무릎 밑을 받쳐 줄 것, 침 놓을 부위를 알코올 솜으로 닦을 것, 침을 뺄 때는 직각으로 빼고 피가 날 경우 반드시 마른 솜으로 눌러줄 것 등 상당히 엄격한 규정을 지키며 진료는 진행되었다. 복도를 가득 메운 환자가 차례대로 진료실에 들어오면 티벳 스님 2~3분이 현지 언어로 문진을 하신다. ‘식사는 했는지, 알러지는 없는지, 통증 부위가 어딘지 ...’ 그것을 한국에서 함께 간 비구니스님이 영어로 전해 듣고 진료팀에게 전달한다.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환자들의 옷을 벗기는 일이다. 추운지방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복을 두세 겹 껴입고 있다. 특히 유목민 보살들은 그 위에 두껍고 넓게 퍼지는 코트(?)까지 껴입고 긴 스카프 같은 천으로 허리를 꽁꽁 동여매고 있다. 그러한 복장을 해제시키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원활한 진료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일!

언어가 안 통하니 벗는 제스처를 하면서 연신 ‘Open, open!’을 외칠 수밖에 없다. 치료를 마친 이에게는 어깨를 어루만지면서 줄레, 줄레~”하면, 고맙다는 표현을 하며 약제부 쪽으로 이동한다. 챠트에 기재된 처방 외에 스님들과 연로하신 분들에게는 오메가 쓰리 3개월분과 비타민제가 추가 되었다. 무릎과 발목이 아픈 사람들에게는 파스 대신 바르는 맨소래담 한 병이 주어졌다. 나와 약제부 보살이 짜고 하는 배려였지만 의사선생님께서는 모르는 척 눈 감아 주셨다. 첫날 약재준비부터 시작하여 3일 동안 204명의 환자를 치료하였고, 점심식사도 하는둥 마는둥 밀린 환자들을 치료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루일과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니 급하게 돌아치느라 침대 모서리에 부딪친 곳이 멍으로 얼룩얼룩하다. 서로의 허리에 파스를 붙여주며 알 수 없는 행복감에 미소 짓는다.

 

게스트하우스에서의 휴식 성지(리종. 헤미스. 틱세곰파)순례

 

환상의 팀웍이라는 꼬리표 덕분에 스님들이 계시는 2층에 방을 배정 받았다. 온 몸이 무거운 상태에서 한 층을 덜 올라간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병원에서도 하얀 시트로 싼 목화 솜 이불을 배정 받았었는데, 숙소로 옮긴 후에도 룸메이트와 함께 푹신한 목화솜 이불이 덮인 더블 침대에서 꿈같은 잠을 잤다. 다른 방은 싱글 침대에 담요가 덮여있었고, 거사들은 가지고 간 침낭을 이용하여 취침에 들곤 했다.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며 너무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6시 산책길에 숙소를 못찾고 헤맬 때 출근하던 군인아저씨가 숙소 명함을 보고 게스트하우스 입구까지 데려다 주었고, 버스에 늦게 승차한 나를 위해 비구니스님이 자리를 양보해 주기도 하셨다. 910일의 여정동안 보이지 않는 힘이 항상 보호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가짐으로 임할 수 있었다.

우리는 제일 먼저 리종 린포체를 친견하였다. 리종 린포체는 1928년 라다크 마토왕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셀 수 없이 많은 밀교의 기도의식과 안거, 무문관 등을 성만하셨다.

스님은 겔룩파의 수장이시며 달라이 라마존자의 스승이시기도 하다. 린포체께서는 특별히 제주불자들을 위해 친필사인을 해주셨다.

 

 

수행의 낙원이라고 불리는 리종 곰파는 레에서 70Km서쪽 리종 마을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는 엄격한 규율과 규범을 지키는데, 아플 때 외에는 사원의 외출이 금지되어 있고, 침대와 침구의 사용이 불가하다. 일출에서 일몰 때까지 물을 떠 올 때를 제외하고는 자신들의 방을 떠나지 않는다. 소유할 수 있는 것은 바늘뿐이며 방안에서 불을 켜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여자형제나 여자손님이 손댄 물건과도 접촉이 금지되며, 여자는 절대 사원에서 머물지 못한다. 이곳에서는 여성 수행자를 비구니 스님이 아닌 촘마라고 부른다. 이 여성 수행자들은 사원에서 수행생활을 하지 못하고, 근처 출리찬수도원에서 수행하고 있다. 티벳 <사자의 서>를 쓴 파드마 삼바바(구루 린포체)-Padma sam bhava(Guru Rinpoche)도 리종 곰파에서 수행하였으며, 라다크의 왕과 왕비도 이곳을 방문하여 후원하였다고 한다.

리종 린포체의 법문을 듣기로 예정되어 있었기에 잔뜩 기대를 했지만 워낙 연로 하셔서 법문은 힘들다고 하였다. 짜이를 한 잔씩 대접 받으며 차담을 나눈 후, 스님께서 하사하시는 생기환(봉숭아 씨앗처럼 생긴 환약)을 받고 돌아 나와야 했다.

다음으로 간곳이 헤미스 곰파이다. 이곳은 주변에 식사할 곳이 없기 때문에 게스트하우스에서 주먹밥을 한 개씩 받아 가지고 갔다. ‘곰파 중의 곰파라 불리는 헤미스 곰파는 라다크 곰파 중에서 최대의 규모라고 했다. 레에서 50Km의 가까운 거리이기 때문에 그만큼 찾는 이들도 많다. ‘고독한 은둔자라는 뜻의 곰파는 보통 산중턱이나 산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찾아오는 사람도 많지 않고, 찾아오기도 쉽지 않은 곳일수록 성취도 높아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미스 곰파는 산 아래 자리 잡고 있어 곰파 입구에 다다를 때까지도 그 모습을 볼 수가 없다. 헤미스 곰파에는 높이 12m의 파드마 삼바바 상이 봉안되어 있고, 지하에는 왕실에서 조성하고 보시한 순금 장신구 등 각종 공예품과 탕카들이 소장되어 있다. 헤미스 곰파가 유명한 또 하나의 이유는 파드마 삼바바의 탄생일을 기념해 열리는 축제 때문이라고 한다. 이 축제는 라다크지역 여러 곰파의 축제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이때에는 스님들이 가면을 쓰고 Cham’이라는 춤을 추는데, 그 내용은 선신(善神)이 악신(惡神)을 무찌르는 내용으로 불교가 사람들의 마음속의 악을 무찔러 선이 승리했음을 상징한다. 특히, 이때에는 평소 볼 수 없던 대형 탕카가 공개된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하는 이 탕카는 헤미스 곰파의 건물을 전부 뒤덮을 만큼 거대하며 탕카 곳곳에 진주와 보석 등이 장식되어 있다고 한다. 때문에 이것을 보기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6~7월이 되면 이곳으로 몰려 들고 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틱세 곰파에 들렸는데, 레에서 19Km떨어진 겔룩파의 곰파이다. 틱세 곰파는 라다크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곰파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데,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버티고 있는 곰파의 모습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붉은색과 황금색 건물의 곰파를 중심으로 아래를 향해 줄지어선 하얀 집들이 마치 곰파를 호위하듯 떠 바치고 있는 느낌이다.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Potala궁과 비슷하여 작은 포탈라라고도 불리는 틱세 곰파는 15세기에 건축되어진 것으로 한때는 군사요새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 이후 수백 년에 걸쳐 법당과 요사체들이 증축 되면서 지금의 규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이곳 2층에는 화려한 보관으로 장식된 미륵부처님의 상호가 법당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가부좌로 앉아계신 부처님의 하체는 1층에 있고, 건물을 관통하여 상체만 2층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1층은 출입을 금하여 들어갈 수가 없었다. 높이가 14m이고, 미간 사이의 백호가 소라 껍데기로 되어 있으며, 커다란 장신구와 세밀한 그림을 그려 넣은 보관을 쓰신 모습이 서글서글하고 시원한 존안이다.

 

성지(라마유르, 알치 곰파)순례, 그리고 휴식

 

아침6, 일정이 시작되기 전에 산책을 나선다. 9시에 숙소에서 출발인데, 시장구경을 하다보니 시간이 임박했다. 숙소까지는 차로 20분 거리이다. 로터리에 가면 택시가 대기되어 있다고 하나 워낙 오던 길을 되돌아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진행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손을 들어 세운 차량은 야채를 배달하는 차다. 게스트하우스 명함을 보여주니 알았다고 하여 타려고하니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한다. 마음이 바쁘던 차에 아파트에서 나오는 차가 있어 택시인줄 알고 세우니 출근하는 군인장교의 차였다. 명함을 보여주고 급하다고 하니 ‘OK!’ 타라고 한다. 모르는 길을 헤매며 숙소 앞에 도착하여 100루피 짜리 새 돈을 내미니 ‘NO!’라며 사양한다. 고마운 마음에 몸에 지니고 있던 악세사리와 펜을 건네고 감사하다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일행들이 식사를 마치고 출발하기 직전이어서 급히 식당에서 토스트와 삶은 계란을 챙겨 버스에 올랐다.

오늘 일정은 어제와는 다른 반대방향에 있는 라마유르 곰파와 알치 곰파다. 레에서 3시간을 걸쳐 가야하기 때문에 버스의 앞자리에 앉았다. 버스는 인더스 강의 굽이치는 물결을 따라 계곡을 향해 달린다. 인더스 강의 강줄기가 한쪽은 파키스탄으로 흐르고, 다른 한쪽은 중국으로 흘러 들어간다. 중간 중간 넓은 바위 위에는 대포가 설치 되어있고, 군인들이 상주하는 모습이 보인다. 옆에 앉은 티벳 스님이 사진을 보여 주시며 겨울에는 이 강이 정말 맑고 깨끗했다고 설명해 주신다.

라마유르 곰파는 레에서 125Km 떨어진 해발 3510M의 고산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라마유르로 향하는 잘레비Jalebi’라는 고갯길은 우리나라의 한계령처럼 구불구불하다. 마침내 도착한 달의 계곡이라는 곳에 라마유르 곰파가 자리하고 있다. 티벳 불교전승에 의하면 붇다 생존 시에는 맑은 호수였는데, ‘먼 미래에는 호수가 사라지고 절이 들어 설 것이다고 한 아라한이 예언하였다고 한다.

라마유르 곰파는 10세기경 라다크 왕의 명령으로 린첸 잔포Rinchen Zanpo스님이 창건했다. 그 후 16세기에 이르러 나병에 걸린 라다크 왕이 스님들의 도움으로 병을 치료하고 고마움의 뜻으로 곰파를 스님들에게 보시했다고 한다. 왕은 사원을 보시하면서 세금을 면제 해 주고 곰파 주변을 성역화 하여 범죄자라 할지라도 곰파 안에서는 절대 잡아 갈 수 없도록 했다고 한다. 때문에 라다크 사람들은 지금도 이곳을 자유의 장소라고 부른다. 곰파를 둘러싼 구석구석에는 마니차가 설치되어 있어서 계속하여 옴 마니 반메훔을 염송하며 거닐게 된다.

전성기 때 이곳 라마유르 곰파에는 400여명의 스님들이 생활 했지만 지금은 20~30여명의 스님들만이 기거하고 있다. 그러나 3월과 7월경에는 100여명이 넘는 스님들이 모여 함께 기도하며 가면 춤을 추는 축제가 열린다. 3월은 지루한 겨울의 끝자락이고, 7월은 짧은 여름의 한복판이다. 혹독한 자연환경을 이겨내며 묵묵히 겨울을 보내고 있는 라다키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리고 짧은 여름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며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레에서 스리나가르 쪽으로 70Km떨어진 오지마을이다. 인더스 강변과 맞닿아 있는 이곳에 10세기 말 린첸 잔포 스님이 건립한 알치 곰파가 숨어 있다. 이곳은 법당 6개중 대웅전 격인 두캉과 숨첵, 만주리라캉, 로트사바라캉 만을 개방하고 있다. 좁은 실내에는 5.18m의 관세음보살 입상이 한 면을 높이 차지하고 있었고, 맞은편에 문수보살 입상, 그 곁에 미륵불 입상이 모셔져 있다. 우리들의 개념과는 달리 법당이라고 하지만 불상들이 모셔진 방이었다. 그 옆의 법당에 가서야 우리는 간단한 법회를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처음 보게 된 건물은 숨첵이라는 목조기둥의 3층 건물로 그리스 신전의 기둥처럼 섬세한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다. 특히, 건물 입구 위에 삼각 틀에 조각 된 문양들은 법당의 불상보다 훨씬 더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린첸 잔포 스님은 인도와 카슈미르의 17년간 유학파로 티벳에 돌아와 왕의 후원을 받아 많은 경전을 번역하고, 카슈미르 예술가 32명을 초청해 이 사원을 지었다고 한다. 건물뿐만 아니라 내부 벽면에도 천문도와 불보살상 등 각종 신장상 등이 그림으로 표현되어있고, 입상의 법의에 그려진 그림들 역시 그 섬세함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린첸 잔포 스님은 알치 곰파 외에도 라다크와 서티벳에 108개의 사원을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치 곰파의 벽화들은 카슈미르와 간다라 미술의 절묘한 만남으로 아잔타 석굴 벽화와도 종종 비교되고 있다. 대웅전격인 두캉은 알치 곰파의 보석 격으로 알치 곰파 중 그 규모가 가장 크다. 목조불상인 비로자나불(Vairocana)을 모시고 있는데, 이것은 1000년동안 살아남은 현란한 세부묘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벽화 6개중 만다라(Mandara)왕과 왕비라는 제목의 벽화도 있다. 라다크의 다른 곰파들과는 달리 알치 곰파는 잔스카르 지역 오지의 평지에 위치하여 이슬람교도들의 침입 때도 눈에 띄지 않고 무사히 지켜졌다고 한다.

안타까운 것은 흙벽으로 이루어진 건물의 벽들이 추운 겨울에는 꽁꽁 얼었다가 여름 한철 해동되니 자연스레 금이 가고 약해진다는 것이다. 한 쪽 벽의 벽화가 유실되어 보수를 하여 비슷하게 그림을 덧 씌워 놓은 것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만약 라다크를 방문하게 된다면 최우선으로 가 보아야 할 천년고찰이라 생각 된다. 4개의 법당을 모두 둘러보고 사진을 찍지 못한 아쉬움에 그림엽서를 사들고 나선다. 마당의 낮은 담장 너머로 멀리 작은 수력 발전소가 보인다. 히말라야 산맥에서 눈이 녹아내리는 물을 이용하여 전기를 생산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인도의 수도인 델리보다 물 사정이 넉넉했다는 생각이 든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일심각 │ 정토마을 라다크의료봉사단 봉사자, 제주포교사단 21

 

※제주불교신문에 기재된 글을 옮겨싣습니다.

자재병원을 소망하신 스님의 이야기

밤하늘에 별이 된 스님

무더운 어느 여름날, 호스피스 관계로 잘 알고 지내는 수녀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짐을 보면 스님 같은데 가족이 없고 임 종이 임박한 상태라면서 한번 다녀가길 원했다. 바로 다음 날 아침에 나는 서울로 향했다.

 

수녀님의 안내로 잠시 작은 방에서 여러 가지 기본적인 임상 자료를 브리핑 받고 호스피스 병실로 들어갔다. 날이 너무 더워 병실 공기가 탁하고 습했다. 창 옆 침상에는 뼈만 남은 남자분이 누워 있었는데, 수녀님이 저 분이라고 눈짓으로 말해주었다. 살포시 다가가 깡마른 손을 살며시 잡아드려도 환자는 눈도 뜨지 않았다. 느낌이 스님 같았다. 그래서 귓전에 대고 “스님!” 하고 불렀더니 그제야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셨다. 웬 비구니가 비구 손을 잡고서 있으니 ‘누구?’ 하며 놀라면서도 반가운 눈빛이었다.

 

스님이라는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 억장이 무너져 할 말을 잃어버렸다. 머리카락과 수염은 제멋대로 길어 엉망이고, 목욕은 언제 했는지 옷 속에 비늘이 뚝뚝 떨어지고, 손톱과 발톱은 길어 살을 파고들어갈 정도였다 차마 바라볼 수 없는 그 모습, 대명천지 밝은 하늘 아래 어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무엇부터 먼저 해야 하나 막막한 심정이었다. 밖에 나가 속옷, 바리깡, 면도기, 수건 등을 사왔다. 휠체어로 모시고 간신히 병실 목욕탕에서 삭발 면도하고 깨끗한 새 속옷으로 갈아입혔더니 병원 자원봉사자들이 모두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타 종교 봉사자가 나를 찾아와 정말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저희는 스님인 줄도 모르고, 기독교인 천주교인 할 것 없이 찾아와 찬송가 부르고 성경 읽어드리고 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왜 그렇게 해야 했으며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이렇게 무더운 여름날에…….’

 

나는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다. 다 씻기고 옷을 갈아입혀 자리에 눕혀 놓고 바라보니 얼마나 거룩하고 맑으신지……. 옛말에 한 다리가 천리라고 그래도 부처님의 한 제자로, 비구니에게 당신 몸을 맡기시는게 덜 서글프고 덜 비참했으리라.

 

"스님! 제가 이제 곁에 있을 거예요. 아무 염려 마세요."

 

우리는 서로 마주 눕고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법랍法臘 24년 출가 이후 지금까지 선방에서만 정진하느라 토굴 하나 장만하지 못 한 구도자였다. 지난 겨울 결제結制때 자주 잔 기침이 나서 해제하면 병원에 한 번 가봐야지 하다가 해제 후 주위에서 병원은 서울로 가야 한다고 해서 도반들이랑 함께 이곳을 왔는데 진찰 결과 폐암 말기로 진단이 나왔다고 했다.

 

"처음에는 도반 스님들이 해제비를 털어 입원했고, 도반들이 오가곤 했는데, 몸이 그저 그래서 모두 결제 들어가라고 했지. 그런데 이렇게 빨리 병이 깊어질 줄이야……."

 

올해 세속 나이가 47세. 속가에는 여동생 하나 달랑 살아 있어 가끔 왔다 가곤 했는데, 어렵게 살다 보니 요즘에는 통 못 온다고 말씀하셨다. 커다란 키에 뼈만 남은 육체의 고통……. 숨이 가빠 온몸의 땀구멍 마다 식은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전신은 산소 부족으로 청색증이 와서 피부는 파랗게 죽어가고 물 한 모금 제대로 떠 넣어주는 이가 없어 혀는 마른 논바닥처럼 갈라져 있었다. 거즈에 물을 묻혀 입속에 넣어드리고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 나를 찾았다. 병원비 문제로 직원이 올라온 것이다.

 

"450만원인데 스님 병원비는 어디로  구하면 되나요?"

 

대답이 퍼뜩 떠오르지 않았지만  "걱정 마세요. 해결할 테니……." 한 칸 토굴 형편에 이렇게 대답을 했다.

 

450만원. 시간은 없고 그 많은 돈을 어디서 구할까? 생각나는 대로 전화를 돌렸다. 차마 스님 병원비가 없어 그런다는 사정 이야기는 체면상 빼놓고 일곱 군데 전화를 해서 돈을 마련했다. 그리고 착한 어느 보살님께 스님 떠날 때 입혀줄 수의 한 벌 값까지……. 이 모든게 스님의 청정한 수행공덕이었으리라.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님. 왜 저 사람들이 와서 무례하게 굴면 나무라시지 가만히 계셨어요?"

 

스님은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서 말씀하셨다.

 

"우리나라에서 땅을 제일 많이 가진 종교가 불교인데, 중이 지 죽을 자리 하나 없어 남의 병원에 와서, 그것도 이렇게 큰 십자가 아래 누워 죽는 주제에 무슨 할 말이 있겠노? 허! 허! 내가 이래 큰 십자가 아래서 죽어나갈 줄 우예 알았노? 내가 중이믄 뭐 하겠노? 부끄러바서 눈도 뜰 수가 없었제."

 

스님의 부끄러운 마음이나 지금 내가 부끄러운 이 마음이나 같을까?

 

"스님! 제가 저 바랑 열어봐도 되지요?"

 

눈으로 그러라고 허락하셨다. 바랑을 열어 보니 가사, 장삼, 지갑, 승려증, 8만원, 통장 (120만원 들어 있었음)이 스님의 생활을 반영하듯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스님! 그동안 살아오신 짐들은요?"

 

내 물음에 고개를 흔든다. 20년 세월을 수행자로 살아온 마지막 모습이 이토록 비참할 수가……. 숨이 차서 좌불안석인 스님이 푹 꺼진 눈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시더니, 붉은 눈 속에서 눈물을 토해내셨다. 닦아도 닦아도 흘러내리던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스님을 모시고 내 토굴로 내려오고 싶었지만 형편이 그러질 못해서 더욱 죄송스럽고 안쓰러웠다. 하필이면 그 병원 십자가가 유독 컸다. 게다가 스님 머리 바로 위에 걸려 있어 마음이 더욱 불편했으리라. 침대 위로 올라가 한시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스님을 끌어안아 무릎에 누이고 작은 소리로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가는 혼자 남아……." 노래를 들려주었더니 힘없는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아주시며, 

 

"시님! 내 부탁 하나 들어주소, 꼭!"

 

"네~ 말씀하세요."

 

"나는 이렇게 십자가 아래 누워 죽지만, 우리 시님들 늙거나 병들면 편히 죽을 수 있는 병원 하나 지어주소. 시님은 할 수 있어."

 

처음 들어보는 소리에 나는 너무 놀랐다.

 

"스님, 난 못해요. 내가 의사도 간호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슨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안돼요! 스님! 병원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닐 거예요."

 

그러자, 스님은 내 손을 더욱 힘주어 잡으시며,

 

"원願을 세워요, 부처님이 계시니까. 내가 죽어서라도 도와줄게. 원만 세워! 원만 세우면 다 돼."

스님의 눈물이 내 승복 바지에 젖어들었다. 스님은 공부 중에 있는 도반들에게 자신이 죽더라도 알리지 말기를 당부하며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 후 뿌려주길 당부하셨다.

추적추적 장맛비가 내리던 오후 4시에 스님은 내 체온에 의지한 채 병든 육신을 여의고 그렇게 떠나셨다.

스님! 저 하늘에 뜬 저 별이 스님 아니신가요?

스님! 스님의 영전에 맑은 향 사루어 공양 올리오니 영원한 생명의 빛으로 사바를 밝혀주소서! 나무아미타불.

 

[능행스님 저서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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