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목적은 매 순간 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각자 자신의 삶이 그렇게 된 데 대한

모든 책임이 본인에게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매 순간 자신의 삶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위치에 있다면

자신의 생각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는 점을 명심하세요.

문제는 사람들이나 장소나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생각에 있습니다.

 

- 이하레 아카라 휴렌 -

 

 

나는 누구일까?

내가 있기는 한가?

여기 있는 이것은 그럼 누구야?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

내가 좀 더 나은 집에서 태어났다면 달랐을까?

내가 좀 더 배웠으면 더 나았을까?

나는 왜 저들만큼 못하는 걸까?

내가 뭘 하면 잘할 수 있을까?

나의 전부를 이해해주는 단 한 사람, 엄마도 이젠 세상에 없어.

땅 위로 솟은 느낌이야. 붕 떴어.

나는 누구지?

내가 왜 여기에 있을까?

내가 여기에 있기는 한 건가?

그럼 여기 있는 이것은 누구야?

누가 제발 좀 속 시원히 가르쳐 줬으면 좋겠어…….

스님 좀 가르쳐 줘요…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요.

 

이것이 CPE를 만나기 전 그리고 만나고부터 내 안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경험의 과정들이다. 가끔은 새로 태어난 것 같기도 하고 가끔은 가슴 안에 있었던 미쳐 몰랐던 나를 흔들어 깨운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나를 성장시킨 것 같기도 하다. 과거의 어느 시점에 머물러 만들어진 요지 부동이었던 나의 관점과 신념들을 대면하고 다시 관점을 바꾸고 새로운 신념으로 대체하면서 오감으로 모든 것들에 대해 짜릿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고 지난날의 나에 대해 자책보다는 연민의 눈으로 바라 보게 될 줄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나 자신을 끊임없이 용기를 갖고 바라 볼 수 있게 지지와 박수를 주신 슈퍼바이져 능행스님…

스님께선 때로는 매서운 독수리처럼, 때로는 엄격하거나 냉정한 선생님처럼, 때로는 장난끼 넘치는 친구처럼, 때로는 내면의 아이를 자랄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지지해주는 엄마처럼, 안전한 자리를 제공해줌으로써 내면의 아이가 “나는 불안했었구나.”라는 사실을 인지하게끔 이끌어 주셨다.

슈퍼바이져와 함께한 시간을 이미지로 표현하자면 호박을 넝쿨째 날려주신 날도 있었고, 함께 대화를 하다 보면 마치 보물창고에 들어 갔다 나온 듯한 날도 있었다. 그리고 어떨땐 쪄 죽을 듯이 숨이 턱턱 막히고 오도 가도 못하게 막아대는 이미지도 연상이 된다. 그룹원들 하나하나의 거울이 되어 삶에 걸림이 되는 것을 스스로 풀어 나갈 수 있게 열정을 가지고 늦은 저녁까지 기다려 주심에 합장 삼배를 드린다. 그리고 화끈하게 지지해주고 또 다른 나를 즉석에서 경험하게 하고 공부하게 도와준 그룹원들에게 마음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고마움을 전해 본다.

(재단법인 정토사관자재회 2010년 겨울호)

 

이명현 | CPE 2010년 여름학기 수료생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CPE센터문의 : 010-7109-7600

┃프로그램 소개

①기본과정 (16주, 320시간 이상)

②전문가 과정 (1년, 800시간 이상)

③지도자 과정 (1년, 800시간 이상)

*봄학기 : 3~6월

*가을학기 : 9~12월

 

┃국경없는민들레, 7월 인도 라다크 레서 의료봉사

울산 정토마을 국경없는민들레가 다가오는 7월 8~17일 인도 라다크(Ladakh) 레(Leh) 지역으로 의료봉사를 떠난다. 사진은 지난해 의료구호활동 사진.

민들레는 바람을 타고 벽을 넘어 어디든 정착해 꽃을 피운다. ‘국경없는민들레’는 민들레처럼 국경을 넘어 의료봉사로 부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창립됐다. 국경없는민들레는 울산 정토마을이 운영하는 해외의료구호사업단으로 의료지원이 절실한 오지마을을 방문, 지원하고 있다.

라다크 심장재단 병원서 활동
전문 봉사인력 40명 의료지원
의료물품과 생활용품도 전달
11월에는 9박10일 스리랑카로

울산 정토마을(이사장 능행) 국경없는민들레가 오는 7월 8~17일 인도 라다크(Ladakh) 레(Leh) 지역으로 의료봉사를 떠난다.

레는 해발고도 3,520m 고산 지대로 4개월의 여름(6월~9월)과 8개월의 긴 겨울(10월~5월)이 있다. 겨울에는 기온이 영하 20도 이하로 떨어지며 눈으로 인해 주요 도로가 통제된다. 작은 티베트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가지고 있지만 의료시설 및 환경은 열악해 지원이 필요하다.

국경없는민들레는 레 지역에 위치한 ‘라다크 심장재단’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의료봉사를 진행한다. 라다크 심장재단은 이사장 초겔 스님이 라다크 고산지대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위해 세운 의료재단이다.

라다크를 비롯한 히말라야 지역은 고산지대로 기압이 낮아 심장 기능이 중요하다. 몸에 피를 보내야하는 심장의 기능과 역할이 다른 지역보다 많이 요구된다. 라다크 지역 고산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심장 판막이 닫히지 않는 병에 걸려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기도 하며, 특히 어린이들의 심장병 발병율이 높다.

 

인도 보드가야에 방문한 국경없는민들레

국경없는민들레 의료봉사팀은 승가 10여 명을 포함해 양방과 한방 전문의료진, 홍보 봉사팀 등 40명이 동참한다. 전문 의료장비를 직접 가져가 체계적으로 진찰하고 문진으로 예방 및 치료에 집중할 계획이다.

한국에서 마련한 의료 물품 및 생활품도 지원한다. 의료물품은 어린이종합영양제, 칼슘제, 영양제, 철분제, 오메가3, 파스, 구충제 등이며 생활용품은 겨울 보온에 필요한 털장갑, 모자, 양말, 겨울점퍼, 넥워머 등이다.

국경없는민들레는 미얀마, 보드가야를 비롯해 해외 오지를 중심으로 의료활동을 펼쳐왔으며 이번 라다크는 의료구호 활동 4회째를 맞는다. 1년에 한 번씩 구호활동을 진행했지만 올해부터는 두 번으로 횟수는 늘리고 다가올 11월 11일에는 9박10일 일정으로 스리랑카로 떠난다. 국경없는민들레는 구체적인 의료구호사업을 위해 서비스뿐 아니라 진료소를 세우고 의료 사업을 확대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국경없는민들레는 의료 외 미용 봉사 및 생활품 후원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

정토마을 사무국 김현아 팀장은 “정토마을 비전이 ‘인류와 일체 생명의 평화적 공존에 기여한다’이다”며 “국경없는민들레는 해외 의료 구호 사업으로 이타행을 실천하고 평화에 기여하고자 한다”고 전했다.

아울러 국경없는민들레는 해외 구호사업 후원 동참도 독려했다. 후원은 의료약품 및 각 나라특성에 맞는 생활 용품 등으로 하면 된다. (052)255-8588

하성미 기자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현대불교신문(http://www.hyunbulnews.com)

유식학(唯識學)은 불교의 여러 사상들 가운데서 매우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흔히 구사론을 8년 공부하고 유식학을 3년 동안 공부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이렇게 어려운 유식학을 공부하고 실천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식학을 공부하는 목적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전식득지(轉識得智)이다. 번뇌와 경험에 물든 마음 즉 염정심을 지혜의 마음으로 바꾼다는 뜻이다. 지혜의 마음이란 영리하고 똑똑하고 지식으로 가득 찬 마음이 아니라 청정심 즉 깨끗한 마음, 텅 빈 마음을 뜻한다. 사람들은 텅 빈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번뇌와 욕망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판단하고 평가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중생이다. 그것이 왜 문제이고, 왜 잘못된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유식학을 공부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살면 된다. 중생의 삶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자극에 대해서 화를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심하게 웃어넘기는 사람도 있다. 낮선 사람에게서이 바보야!” 하는 말을 들었을 때도 사람에 따라 반응은 달라질 수 있다. 반응의 차이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며 그것을 주관적인 인식이라고 한다. 무시당한 경험이 많은 사람은 화를 더 많이 낼 것이고 무시당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보다 가볍게 대응할 수도 있다. 마음속에는 다양한 경험들이 쌓여 있고 경험을 통해서 상처도 입게 된다.
 
탐진치(貪瞋癡) 삼독에서 비롯된 마음에 걸리는 것과 마음의 상처를 극복한 것이 청정심이다. 청정심은 착각 없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즉 여여하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다. 물든 마음을 청정한 마음, 지혜의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 유식학의 목적이다.

정신분석학은 마음을 크게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분하지만 유식학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말라식(末那識), 아뢰야식(阿賴耶識) 등 모두 여덟 가지로 구분한다. 구유식학파에서는 불성에 해당하는 아마라식(菴摩羅識)을 상정하여 구식(九識)으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아마라식은 식의 실성이며 진여성이기 때문에 이를 제외하고 범부의 정신 세계인 팔식만을 설명하고 있다. 범부의 정신세계인 팔식 즉 염정심을 지혜의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 전식득지이다.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을 전오식(前五識)이라 하는데 전오식은 눈, , , , 피부의 다섯 가지 감각에서 발생하는 알아차림 즉 인식작용을 말한다. 전오식이 작용할 때는 눈과 귀 등 다섯 가지 감각작용이 동시에 작용하기도 하고 하나씩 단독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대상으로 삼는 것은 물질, 소리, 냄새, , 감촉(色聲香味觸)의 다섯 가지이다. 감각기관이 인식활동을 할 때에 그 주체가 되는 것을 근()이라고 한다.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의 다섯 가지이며 근()이 인식하는 마음을 식이라고 하여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이라고 한다.

전오식은 다른 식들에 비해 인식활동이 단순하고 품성도 얕기 때문에 통칭하여 전오식이라 부르고, 이들이 대상을 인식할 때는 어떠한 사려분별도 요하지 않고 오직 눈앞에 있는 대상만을 직감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이 감각기관들 중에 한 가지라도 오염이 되거나 손상을 입으면, 그 분야만큼은 직감이나 추리, 억측으로 인하여 인식에 오류나 손상이 발생하게 된다.
 
다음은 의식(육식)에 대한 설명이다. 의식은 전오식(, , , , )이 인식한 내용을 총괄적으로 판단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감촉 등과 같은 감각은 의식이라는 마음을 만날 때 비로소 그 내용이 인식된다. 잠든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고막이 작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식은 대상을 알아차림하는 작용을 하므로 요별능변식이라고 한다. 의식이 일어날 때는 두 가지 양상을 보이는데, 5가지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을 오구의식(五俱意識)이라 하고, 의식이 단독으로 일어나는 것을 독두의식(獨頭意識)이라 한다. 독두의식을 예로 들면, 눈을 감고 혼자 상상을 하면서 일어나는 의식이다. 독두의식도 독산(獨散)의식과 정중(定中)의식으로 구분한다. 독산의식은 홀로 떠도는 의식이고 정중의식은 선정 속의 의식을 말한다.

다음은 말라식이다. 말라식의 특성은 항심사량(恒審思量)이다. 항심사량은 항상 살피고 득실을 계산하고 따지는 작용을 하는 마음이다. 본래 청정하고 생멸이 없는 진여열반을 등지고 중생심을 일으키는 마음이 말라식이다.
말라식은 어떻게 사량하는가? 사량이란 연려(緣慮), 관찰, 분별, 집취(執取)의 뜻으로 오직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만 하는 것으로 아탐(我貪), 아애(我愛)하는 분별사량의 주체로서 수행자가 반드시 넘어야 할 관문이다. 말라식에는 번뇌의 뿌리가 숨어 있다. 의식으로 아무리 번뇌를 극복한다고 해도 말라식의 근본번뇌를 제거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번뇌에 휩싸일 수가 있다. 아치(我癡),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 등으로 자성(自性)을 장애하여 성불을 막고, ()에 집착하여 업을 일으키고 생멸의 고통을 탐닉하여 스스로 고뇌를 자초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아치는 어리석음의 뜻으로 라는 상에 집착함으로써 생기는 어리석음이다. 탐진치의 삼독을 일으켜서 해탈을 방해함으로써 아치는 번뇌 가운데 가장 근본이 된다. 아견은 몸과 마음을 라고 여기고 여기에 집착하여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는 어리석음이다. 아집이라고도 한다. 일체만법에는 가 없으나 헛되이 에 집착함으로서 일어나는 번뇌이다. 아만은 교만하고 오만하여 남을 무시함으로서 남에게 존경받지 못하고, 자신을 낮출 수 없으므로 정진하지 못하게 된다. 아애는 번뇌에 물든 자신을 사랑하고 집착하는 작용이다.
말라식은 사량하고 에 집착함으로서 항상 4번뇌의 바탕이 되고 집착으로 인해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말라식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여 악업을 짓게 되므로 염오식(染汚識) 또는 염오의(染汚意)라고 한다. 아뢰야식에 대한 설명은 다음으로 미룬다.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https://mahadohi.tistory.com/entry/%EB%B6%88%EA%B5%90-%EC%9C%A0%EC%8B%9D%ED%95%99%E5%94%AF%E8%AD%98%E5%AD%B8-%EC%82%B0%EC%B1%852?category=485840

 

불교 유식학(唯識學) 산책(2)

[천천히 읽는 명상]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김경일 교학처장님이 들려주시는 따뜻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세요. 불교 유식학(唯識學) 산책(2)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유식학(唯識學)은 불교..

mahadohi.tistory.com

 

라제시 다사|원네스 유니버스티

척하기
자신의 내면 안으로 깊이 들어가게 되면 고통이 사실과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며, 그때 우리의 주의는 내면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고통은 오로지 우리의 관점에 의해서 있습니다. 내면 안으로 들어오면 뭔가를 숨기려고 하는 과정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누가 나를 방문했다고 칩시다. 나는 일 때문에 바쁘고 그 방문한 사람은 직설적이고 말 많은 사람입니다. 게다가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나가라고 얘기할 수도 없어서 그분이 방문하면 어쨌든 초대하고 들어오라고 하고 예의가 바르게 차도 대접하고 좋은 대화를 나누려고 애쓰고 노력합니 다. 그런데 속으로는 저 사람이 눈치를 채고 빨리 나가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에게는 착하고 예의바른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면서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올바른 행동인가요? 그렇습니다. 이것은 예의이며 이렇게 행동해야 합니다. 이 순간까지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문제가 시작되는 시점은 그가 나가고 문을 닫는 순간부터입니다. ‘나는 참 착한 사람이었어. 나는 그를 배려했고 나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 바가 없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입니까?
상대방과 대화를 나눌 때 내면 안으로 주의를 기울인다면 보여주는 것과 다른 것이 내면 안에서 일어남을 알 수 있습니다. 내면 안으로 주의를 기울이면 내면에 대화가 일어남을 우리는 흔히 보게 됩니다. ‘이 사람이 왜 찾아왔지? 내 시간 낭비하면 안 되는 데 빨리 갔으면 좋겠다.’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게 되면 우리는 자신에게 진솔한 사람이 아니며 자신에게 거짓말을 늘어놓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남에게 거짓말하는 경우보다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예를 들어, 층계를 걷다가 앞의 사람이 미끄러지는 것을 넘어지지 않게 도와주었다면 사고적으로 그를 도와준 것일 뿐입니다. 만약 선택권이 있었다면 그를 돕지 않았을 겁니다. 그 사람을 돕는 순간 우리는 이렇게 느낍니다. ‘나는 참 자비로운 사람이야.’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입니까?

이미지 보존하기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대화가 일어남을 보게 됩니다. 즉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아름다운 이미지를 보전하고 노력하는 애씀에 대한 대화를 보게 되는 것이죠. 이 두 가지로 첫째는 나에 대해 남이 좋은 이미지를 받기를 바라며, 둘째는 내가 좋은 이미지를 보존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에너지는 이미지를 보존하고 유지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개척하기 위하여 소모되며 질주하게 됩니다.
왜 우리가 상처를 받습니까? 어떠한 상황이나 누군가가 나의 어떤 이미지를 무너뜨리려 할 때 우리는 상처를 받습니다. 
인도인을 대상으로 하는 과정 중 삿상이라는 것이 진행되었습니다. 삿상에서는 노래도 부르고 여러 가지 세션을 하면서 행사를 진행하는 과정인데, 참여자 중 어떤 여성이 앞에 앉아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성스러운 노래를 부르는데 그녀는 눈을 감고 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잠이 왔습니다. 그녀는 잠 오는 것을 참다가 눈물이 살짝 나면서 눈물이 주루룩 볼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이벤트가 끝난 후 그녀를 본 주변의 사람들이 그녀에게 “우리는 성스러운 당신의 얼굴을 보았다. 당신은 너무 헌신적인 모습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그 칭찬에 솔직하게 얘기할 수가 없었고 “감사하다.”고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이 자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네 번이나 이것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사람들이 다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게 자비심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 혼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반복성에 의해 그녀는 신성의 사랑의 상태로 자신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녀는 세션 중에 정말 행동으로 꾸벅 졸고 말았습니다. 이를 본 주변의 사람들이 “너 잠을 자고 있었구나. 너 계속 이렇게 잠자고 있었니?”라고 말했고 그녀는 폭발적으로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너희들이 헌신성에 대해 아느냐. 어떻게 나에게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느냐.”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서서히 믿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결국엔 내가 그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어떠한 상황이든 이미지를 파괴시키는 것이 등장하면 우리는 고통스러워합니다.

진실과 직면하기
여정을 해가는 과정에서 바라볼 것은 ‘정말 내가 진솔한가.’입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붙들고 있는 이미지를 보기 시작하면, 얼마나 우리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려 하는지를 보게 되며 우리의 진정한 나를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주변의 ‘늘 남을 돕는 사람들’은 남의 요청에 대해 거절을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난 참 좋은 사람이야. 잘 도와주고 자비로운 사람이야.’ 그런데 그게 사실입니까? 
이럴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거절하면 그가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끊임없이 거절을 못하고 남을 도울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자신 안에 들어가 진솔하다면 이는 자비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바탕으로 한 자비라는 것임을 그는 보게 될 것입니다. 사실은 두렵기 때문에 남을 돕는 것인데, 그 사람이 ‘나는 자비로운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진실이 아닌 이미지를 붙잡고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하면 삶, 상황이나 사람이 위협하고 파괴하려고 하는 것이 들이닥칠 수도 있습니다. 바깥세상의 사람들은 당연히 이미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영성을 추구하는 자로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더 많은 고통을 만드는 것입니다.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이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너무도 쉽습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섬기고 위로 바라보니까요. 
우리 자신과 접촉하고 자신에 대해서 진솔해지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진솔해지면 보이는 것은 ‘내가 만들어낸 이미지와 그 이미지를 보호하려는 엄청난 애씀’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들여다볼 때 두 번째 단계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진솔해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내 모습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진솔한 나와 진솔하지 못한 나가 있습니다. 이 둘은 내면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 교육관 안으로 들어와서 부처님께 절을 하면서 우리의 마인드는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오늘 저 사람과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무슨 얘기를 할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다른 생각은 흔히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는 현상 입니다. 그리고 이때의 진실은, 육체적인 절일 뿐 진정 우리가 절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직면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깁니다. 이 사실을 직면하면 어떤 일이 생기나요? 이것을 직면하는 순간 이러한 것이 나타납니다. ‘내가 진솔하지 않았다면 나는 좋지 않은 스님이라는 뜻인가? 나의 모든 노력과 수련이 다 쓸모없는 행동이라는 것인가?’라는 소리들이 들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이 만들어낸 수많은 이미지들이 파괴될까봐 그 진실을 바라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심하고 주의를 기울이면 나는 진솔하게 절을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러한 우리 자신에 대한 사실을 수용해야 이 여정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아니면 우리가 만들어낸 사실이 아닌 이미지의 세계에 막히게 됩니다. 막히면 노력과 애씀은 이미지를 보존하고 지키는 것에만 사용될 것입니다. 그래서 진솔한 나는 그 사실을 밝혀내려 하고, 진솔하지 않은 나는 그 사실을 덮어두고 억누르려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진솔하지 못한 내가 진솔한 나를 억누르게 되고 우리 안의 억눌려진 나가 나로서 남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솔한 나에게 주의를 기울입니다. 우리가 지키려는 이미지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갖고 있는 근본적 두려움은 이미지들이 파괴될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지를 통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지가 없다면 우리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미지가 모두 파괴되면 그 자리에 뭐가 남나요? 이미지들 밑바탕에는 뭐가 남나요?
만약 이미지들 하나하나를 파괴시키고 그것을 초월한 상태의 우리를 본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뭔가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그냥 있는 그 상태입니다.
삶은 우리가 0(제로, 無)가 될 때까지 이미지를 파괴시키려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싸우고 저항합니다. 우리는 생존하려고 하고 지키려는 메커니즘이 작동해서 이미지들을 방어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진솔해지면 이미지들이 생존하려고 하는 그 실행 과정을 보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무지는 ‘나는 이 이미지들이다.’ 를 믿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각하기 시작하면 이미지가 생존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기존의 지키려는 이미지들도 수없이 있지만 우리는 살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끝 없이 생성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이미지에 묶여 있거나 막혀 있으면 결과적으로 더 이상 아무런 배움이 일어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묶여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진실은 ‘지금 내가 무엇이냐.’입니다. 그러나 도대체 우리가 찾는 진실 은 무엇인가요? 절대적인 진실이 있습니까? 이 순간의 사실(진실)은 무엇일까요?
만약 지금 현재 이기적인 느낌이 있다면 그것이 사실이고 진실입니다. 현재에 존재하고 있는 진실을 넘어서서 더 대단한 무슨 진실을 찾고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지금 우리가 진솔해진다면, 내면을 진솔하게 들여다본다면, 그러면 대부분 하고 있는 작업, 보이게 되는 것은 이미지를 애쓰면서 보호하고 지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신을 잠시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무엇이고 어떤 이미지를 지키려고 애쓰는지 들여다보십시오. 이것을 찾는 방법은 쉽습니다. 상황과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은 지키려는 이미지 때문입니다. 불편을 느끼거나 상처를 받을 때는 어떠한 이미지가 위협을 받았을 때입니다. 
묶여 있는 이미지가 무엇인지 주의를 기울여보세요. 착한 사람, 사랑스런 사람의 이미지를 갖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늘 사실은 아닙니다. 때로는 착한 사람일 때도 있지만 때로는 착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둘러싼 이미지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고통은 이미지를 지키려는 애씀에서 옵니다. 나는 똑똑한 사람이라는 이미지일 수도 있고, 나는 진솔한 사람이라는 이미지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를 지키는 데 우리의 대부분의 에너지는 소모됩니다.
이미지를 정당화시키는 여러 가지 설명거리를 마인드는 늘어놓을 것입니다. 그러면 마인드는 애써서 우리 자신에게 보여주려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착하고 똑똑한 사람인가에 대한 예제와 상황들을 보여주며 이미지를 보호하려 애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키려는 이미지들을 누군가 위협할 때 우리는 화를 내고 상처를 받습니다.

참나 알기
지키고 방어하고자 하는 이미지들을 볼 수 있다면, 더 깊이 들어가서 이미지들 뒤 배경에 무엇이 있는지 보게 되며, 결국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게 되면 그것이 아픔을 줍니다. 이때 마인드는 회피하려고 여러 가지 철학을 늘어 놓고 부연설명을 할 것입니다. 이 이미지들 뒤 배경에 숨어있는 것과 접촉을 하게 되면 그것이 진실입니다. 
저는 12년 전 다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직자로서 화를 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매우 화가 많은 사람이었지만 화를 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성직자로서 좋은 모양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일 ‘화를 없애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관찰한 것은 분노로부터 벗어나려고 기도를 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온다는 것입니다. 화가 난 이유는 아무도 나에게 도움을 안 주는 느낌이었기 때문입니다. 제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것 같아 더 화가 났고, 제 자신이 화가 많은 것에 또 화가 났습니다. 
그날도 분노로부터 자유롭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문득 기도 과정에서 물었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 화를 내고 있습니까?” 그리고 스스로 통찰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내가 왜 화를 내면 안 되는 거지? 화가 나면 그게 어떻다는 거야?’ 그리고 그 다음 저는 이완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완하게 된 것은 분노가 많은 사람임을 알고 편안함을 느끼기 시작하면서부터였습니다. 화를 많이 가지고 있음을 알고도 싸우지 않으면 고통과 갈등은 없습니다. 그 전에는 이렇게 생각 했습니다. ‘나는 화를 내는 그런 사람의 이미지가 있으면 안 돼. 이러한 성품은 버려야 돼.’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제 자신과 싸우고 세상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화가 없는 척하는 이미지를 계속 지켜나가면서 남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제 자신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보호하고 지키려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화가 많은 나는 이것 외에 무슨 다른 것이 될 수 있을까요? ‘이게 나다. 화가 많은 내가 나다.’임을 인정하는 것이 수용입니다. 
자신 안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기를 바라는 애씀과의 싸움이 있습니다. 나는 끊임없이 다른 것이 되기 위해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주 미묘하게 그 작업이 일어납니다. 마인드는 조용히 당신에게 속삭입니다. ‘조금만 더하면 자유로워질 거야. 이건 가능하다. 변화란 가능해.’ 그것이 마인드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재잘 거리는 소리입니다. 왜냐하면 마인드는 변화를 통해서 생존하기 때문입니다. 마인드는 ‘여기까지 갈 수 있다.’고 끊임없이 이상적인 미래를 보여줍니다. 마인드는 ‘자유로워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끊임없이 상상합니다. 마인드가 우리를 붙잡고 있는 마지막 밧줄은 “너 바뀔 수 있어. 내가 널 도와줄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걸 믿고 자유를 향해 한 스텝 가려 하고 마인드는 우리를 지배합니다. 마인드는 우리의 진실과 직면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마인드는 사실로부터 우리를 점점 더 멀어지게 하려고 합니다.

참나를 찾아서
자유란 지금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수용할 때입니다. 수용이란 무엇인가요? 수용을 한다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요? ‘그래, 나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수용해.’ 이것이 수용인가요? 성품이 나타날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수용일까요?
우리가 심리적으로 뭔가 되려는 과정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을 하고자 하는 필요성이고, 둘째는 사랑을 받고자 하는 필요성입니다. 다시 말해, 남들을 사랑해야 하는 필요성과 그리고 남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의 필요성입니다. 남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선한 모습을 보이고 ‘좋다 나쁘다’는 마인드 차원의 형성입니다. 내면에서는 좋은 쪽을 선택하려 합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좋은 사람이 되려 하나요? 그것은 칭찬받고 사랑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칭찬받고 사랑받으면 우리 자신을 사랑할 가능성이 생긴다고 믿기 때문입니 다. 상대방이 칭찬해주면 우리는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칭찬해줘서 기분 좋은 게 사실입니까? 상대방이 인정해줄 때 그때 나는 내 자신을 사랑할 가능성이 생깁니다. 오로지 우리는 자신이 자신을 사랑했을 때 기분이 좋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칭찬 할 때 ‘나도 괜찮은 인간이구나. 나 자신에게 사랑을 줘도 되겠구나.’ 하고 사랑을 주기 때문에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 사랑해주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남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려는 끊임없는 욕망만 지속하게 됩니다. 즉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을 때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도움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한 남자가 여성에게 “난 너를 사랑한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 남자가 진짜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겁니까? 그가 실제로 전달하려고 하는 것은 뭡니까? 그것은 “나를 사랑해줘.”입니다. 소위 말하는 모든 사랑은 사랑을 받으려는 욕망일 뿐입니다. 사랑과 인정 을 받으려는 욕망, 내가 중요한 인물이 되려는 욕망, 그리고 이러한 욕망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좋은 이미지들을 형성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스럽게 만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화장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화장한 얼굴만 보면서 그 예쁜 얼굴이 자신이라고 믿기 시작합니다. 이미지라고 불리는 것은 내면에 화장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수용은 있는 그대로 내가 다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게 합니다.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한 욕망은 끝을 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분노가 있는 사람인데 분노가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고통스럽습니다. 분노가 없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그것이 수용입니다. 여기서는 적극 적인 수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이기심을 인정해.’ 하는 것은 수용이 아닙니 다. 말을 통해 선언을 하면서 일어나는 것은 수용이 아닙니다. 내가 나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싸우지 않을 때 그게 수용입니다. 
수용이란 ‘그저 그렇다.’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보기 위해서 우선 봐야 하는 것은 얼마나 내가 끊임없이 이미지를 만들며 지키려 하는지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사랑을 받고자 하는 욕망과 남을 사랑하고자 하는 욕망도 옵니다. 남을 사랑하면 나 자신을 사랑할 가능성이 생긴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남을 사랑하려는 애씀 속에서 실패를 하고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조건 없이 상대방을 사랑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고통이란 사이클에 묶이는 것입니 다. 우리는 남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아름다움은 나를 사랑하게 되면 밖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평온이 있습니다. 자신과 평온이 있으면 세상 전체와 평온을 느끼게 됩니다. 
상대방을 사랑하려고 애쓰고 노력하는한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오히려 나 자신의 이미지만 형성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부분만을 사랑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바꾸려고 합니다. 우리 안에는 끊임없이 갈등이 일어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 부분만 바뀐다면 나는 사랑을 받을 값어치가 있고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가 사랑스럽게 바뀌게끔 하는 노력이 시작됩니다. 우리의 주변에 있는 영성적인 수련 자체가 우리 자신을 바꾸려는 데 치중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끝이 있습니까?
사랑이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조건이 붙어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을 수용하기 위해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수용이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절대 수용하지 못한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 자신과 싸우고 있고 바꾸려고 애쓰는지 자각하게 되면 그것이 수용의 시작입니 다. 우리 자신을 얼마나 사랑해주지 않고 있는지를 자각하는 것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수용하든 안 하든 어차피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08년 5월 23~24일 마하보디교육원 주관으로 이루어진 ‘스님들 을 위한 의식과 영성교육’의 내용을 게재합니다.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물질문명 시대에 정작 우리 인간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학교수, 총장, 국회의원, 큰 기업 사장, 큰스님, 작은스님, 아이, 어른 등 수천수만 가지 사연을 안고 사는 수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그런 현상적인 요소들과 상관없이 각각 달랐습니다. 제가 본 많은 죽음들은 제게 삶을 통찰하는 지혜를 주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꿈에서 꿈을 꾸면서 꿈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의 꿈은 죽음이 목전에 와서야 비로소 깨어지게 됩니다. 그 이전에는 꿈을 깰 수가 없어요. 내가 죽을 것이라는 것은 생각하면서 살아요. 그렇지만 실제로 내가 죽을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너무나 부족합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내가 오늘밤에 죽을 수 있어.’라고 인식하고 사는 분들은 과연 몇 분이나 있을까요?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인식해서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만약 우리가 ‘오늘 밤에라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집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생활하는 관점이 달라지고, 나에게 주어지는 한순간을 대면하는 나의 의도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꿈속에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시간을 한정 없이 주면서 언제까지 살 것이라고 최면을 겁니다. 그러나 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같이 죽을 수 있습니다. 오늘밤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죽어지면 대우주는 사라집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무도 인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욕망에 끄달려서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원망하고, 애정으로 애욕으로 뒤범벅이 된 삶을 살다가 결국 죽을병에 걸리고, 병에 걸렸다 해도 죽을 거라는 걸 인식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죽음이 목전에 와서 숨을 헐떡이면서 사대가 무너질 때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꿈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그때는 우리 인생이 너무 늦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꿈을 꾸게 되다가 종착역에 가서야 만나게 되는데 그때는 너무나 조급하고 초라하고 비참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 앞에는 대기업의 회장도 소용없어요. 저는 돈이 많으면 죽을 때도 잘 죽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그걸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죽음은 너무나 냉혹하고 정직하고 진실합니다. 죽음은 여러분이 죽어가는 3개월, 6개월, 1년 안에 여러분들이 살아온 일생의 결과를 오롯이 다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것은 내가 심어놓은 농작물과 같습니다. 돈이 많고, 권력이 있고, 명예가 있을수록 그 죽음은 더 외롭고 처절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자식이 열 명이 있어도 죽음 앞에서는 소용없습니다.

하나, 사랑하면서 살아가기
우리나라에서 일 년에 암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8만 명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암으로 판명되는 사람은 12만 명입니다. 남성 환자의 3명에 한 사람, 여성 환자의 5명에 한 사람이 암환자입니다. 내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 삶의 가치와 의미를 어디에 두고 살아가는지에 따라서 내가 고통스러울 때, 위기에 있을 때, 죽어갈 때에 삶을 마무리하는 결과가 달라지게 됩니다.
너무 잘살려고 애쓰지 마세요. 대충사세요. 좀 둥글둥글하고 소통이 가능하고 여유 있는 사람이 되세요. 여러분 모두가 여러분의 자식도 품어주지만 남의 자식도 품어줄 수 있는 가슴을 가지고 살아가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1년에 100여 명의 죽어가는 사람을 지켜보면서 제가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인간 존재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죽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말 한 마디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정직할 것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내 자신을 사랑할 때 남도 사랑할 수 있습니 다.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가 없어요. 죽음의 순간에 많은 이들이 가장 후회스러워했던 것은 돈도 권력도 명예도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야 할 수 있는 안타까운 그 말 한마디, “내가 사람을 사랑하지 못했다.” 였습니다. 온 가슴으로 나와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세상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한 것에 대해 가장 후회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세요? 머리로 사랑하지 말고 가슴으로 사랑하세요. 머리로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그것은 그저 생각하는 거예요. 사랑은 가슴으로 하는 것이며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정적으로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에요. 온 가슴으로 사랑을 하게 되면 용서하지 못할 것이 없고, 화해하지 못할 것이 없고, 꼴을 봐주지 못할 것이 없고,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고, 사랑하지 못하는 존재가 결코 없답니다. 가슴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세요. 그래서 죽을 때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후회하는 사람이 되지 마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둘, 나누면서 살아가기
여러분들이 소유하고 공유하고 사용하고 있는 것을, 그 중에서 1%만 세상으로 되돌려주세요. 왜냐하면 우리가 사용하는 산소, 땅, 이 모든 현상이 공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티끌 하나도 공짜가 아니에요. 여러분은 여러분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천지만물이 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고, 내가 존재하면서 천지만물이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편안히 살고, 나 혼자만 생각하고, 내 가족만 생각하고, 내 인생만 생각하는 삶은 참 재미없고 빡빡한 삶이면서 동시에 여러분이 언젠가는 갚아야 할 많은 빚들이 그 속에 녹아 있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대가없는 사랑을 받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다 못 갚으면 다음 생, 그 다음 생까지도 갚아야 되겠지요. 그렇다면 차라리 살면서 건강할 때 이 세상과 함께 공유하고, 여러분도 대가 없이 조건 없이 나눠줄 줄 아는 큰 가슴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자기 자신에게 인색한 사람은 다른 이에게도 인색합니다. 돈이 아무리 많더라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건강할 때 이 세상과 소통하고 공유하면서 살다가 죽음을 맞을 때 고통 없이 죽어가는 죽음은 겸허하기까지 합니다.

셋, 돌보면서 살아가기
지금 이 시대는 죽음의 문화가 상실되어 가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삶의 가치도 생명의 존엄성도 상실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죽음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부모가 밖에서 돌아가시고 하면 업고 집으로 뛰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집에서 죽고 싶어도 병원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어떻게 죽어야 하고, 죽은 사람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하는가에 대해서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해봅시다.
적어도 죽음은 안전해야 합니다. 죽음이 안전하게 보호받는 사회가 삶을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사회입니다. 내 죽음이 안전하지 못한 것은 우리가 죽음을 안전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죽어가는 사람을 돌볼 때 죽어가는 사람이 온전히 깨어서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잘 돌봐주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에 산파가 돕는 것보다 100배 이상 더 깊이, 더 섬세하게 죽어가는 사람을 돌봐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을 전혀 돌보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변의 부모나 누구라도 죽음이 안전하도록 깨어서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음을 맞이하도록 가르치는 선생님도 어른들도 없습니다. 죽음이 안전하도록 죽음을 바로 알고 나와 내 주변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죽음의 가치가 바로서야 삶의 가치가 바로 설 수 있다고 봅니다.
살 가능성보다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많은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사랑하지 못해서 후회하면서 죽지 않도록 지금부터 가슴으로 사랑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이 세상에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아주 조금이라도 나누면서 살아가면 참 아름다운 삶이 될 것입니다. 나와 내 가족, 모든 이들의 안전한 죽음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후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재단법인 정토사관자재회 계간지 정토마을 2009.겨울호)

우리는 모두 잠자듯 편안한 죽음을 원한다. 그러나 전체 사망자의 76.2%가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하고 있고 그 비율은 계속 높아지고 잇는 현실이다. 우리 모두는 잠자듯 편안한 죽음을 원한다.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https://youtu.be/sIEdP76y7W4

 

 

호스피스 봉사

 

경주 동국대 봉사갔을 때

50대 위암 말기 남자환자

죽음의 문턱에서 헤매고 있었다.

부인이 안타까워하는 것은

없는 집 장남으로 태어나 모진고생 끝에

동생들 뒷바라지 끝내고 자식들 다 잘 키워놓고

이제야 살만한데 암이란 게 달라붙어

세상을 마감할 날만 기약 없이 기다릴 뿐

그의 아내 안타까워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한 달이 지난 후 한통의 전화

여보세요. 아주머니, 우리 아저씨 가셨어요.

아이고, 예 서운하시지요.

모든 것 다 정리하고

아줌마 생각나서 전화 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잠깐 내가 행복하고 싶어서 한 일일 뿐인데

봉사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음성 꽃동네 갔을 때 지체장애 아동 병동, 여덟살 박이 여자아이

걷지도 못하고 기어 다니는데

이틀간 대리모 교실에 공부하러 갈 때 물리치료 갈 때 따라다니며

오히려 내가 정을 받아서 정이 많이 들었다.

꼭 안으며 엄마 엄마 볼에 뽀뽀 세례까지

떠나올 때 옷자락을 잡고

엄마 가지마.

엄마의 정이 목말라 엄마의 품이 그리워...

떠나오면서 뒤돌아서 얼마나 울었는지

3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그 모습 생각하면 가승이 찡...

 

봉사하기보다 내가 봉사받는 기분

내가 행복해지니까 말이다.

봉사라는게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이 온다.

 

------------------

*이 글은 2011년 여름, 진말숙 보살님께서 봉사 소감을 정토마을 계간지에 실어주신 내용입니다.

 

https://youtu.be/KEOwcnmTBkw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