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한편에 약 봉지가 수북했다. "웬 약이 이렇게 많으냐"고 묻자 능행(能行·49)스님이 말했다.

"2003년에 말기 암환자를 돌보다 감염됐어요. 환자가 뽑아놓은 주삿바늘에 찔렸거든요. 더러 있는 일이에요."

이 비구니는 작년 8월 급성 저혈압으로 쓰러져 심장이 멎을 뻔 했다. 올 5월까지 병원을 들락거렸다.

그는 "과로로 죽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하고 느꼈다.

무슨 일을 하기에 스님이 과로사까지 생각했을까?

환자들은 그를 살아있는 '약사보살'이라 부른다. 1999년 그가 지은 호스피스 '정토마을'에서 1000명이 넘는 말기 암환자들이 생을 마쳤다. 11일 창단되는 한국불교호스피스협회의 2000여 호스피스 중 1500명이 그를 거쳐갔다.

"누가 시킨 일이었다면 그이와 원수가 됐을 거야. 일이 힘드니 중이 이렇게 늙었지." 그런데도 호스피스 일을 멈출 수 없다고 했다. "나도 궁금해. 아마 전생(前生)에서부터 이 일을 해왔나 봐."

10년 전 충북 청원군 미원면에 정토마을이 생길 때 20가구 주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시설을 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입구에 개 70마리를 키우고 트랙터로 길을 막기도 했다. 나중에는 군 주민들까지 확성기를 들고 쳐들어와 스님을 고소했다. 시위는 그 뒤로도 3년간 계속됐다. 스님은 30여 차례 경찰과 검찰에 불려갔다.

"혐오시설이라고 무조건 반대할 땐 화도 났지만 나중엔 '아,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죽음을 두려워 하는구나'하고 오히려 이해하게 됐어요." 1993년 서른셋의 나이로 출가한 그 역시 죽음이 두렵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이듬해 한 신도 남편을 병문안 갔다. 췌장암에 걸린 환자는 그 후 닷새 만에 사망했다. "복수(腹水)가 차 배만 불러 있고 새까맣게 타 있던 모습이 너무 무서웠어요.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그때 처음 본 거예요."

그때 그는 '세상은 고통의 바다(苦海)'라는 부처님 말씀을 이해했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암 환자들을 보며 그는 "'저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어찌하면 좋을까' '죽음의 질을 좀 더 나아지게 할 수 없을까' 생각했다"고 했다.

부처가 세상에 들어가 깨달음을 얻었듯 그때부터 능행도 절 밖으로 나갔다. 첫 방문지는 소록도였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코가 으깨진 사람들도 웃더라고요. 이 안에서도 미소가 있고 행복이 있구나, 느낀 거예요."

알코올 중독자, 지체장애자, 불치병 환자를 찾아 오웅진 신부의 음성 꽃동네에 갔다. 그곳을 찾은 스님은 능행이 처음이었다. 더 힘들고 아픈 사람들을 찾아 부산 의료원 행려 병동까지 내려가 먹고 자며 환자들을 돌봤다.

얇디얇은 이불이라지만 말기 환자들에게는 그 무게감이 천근만근처럼 느껴진다. 스님은“세탁을 자주 하다보니 이불도 금세 헐어버린다”며 쌀쌀해지는 날씨를 걱정한다.

능행은 가난한 사람들은 편안하게 죽을 곳도 없다는 걸 알았다. 1997년 한 천주교 병원에서 폐암으로 숨져 가던 스님이 "스님들 편히 죽을 수 있는 병원 하나 세워달라"고 유언을 남기자 호스피스 시설을 만들기로 했다.

"한 편의 소설이었다"는 탁발(托鉢)이 그때 시작됐다. 동냥을 하러 혈혈단신 전국을 떠돈 것이다. "절에서 수행은 언제 하느냐"고 묻자 "동냥 다니는 게 나에게는 수행이었다"고 했다.

1년에 15만㎞씩 전국의 절과 기업인, 시장 바닥까지 가리지 않고 뛰었다. 1000원을 내놓는 상인들부터 100만원씩 도움을 주는 큰 스님들까지 우선 2200만원을 모아 지금의 땅 계약부터 했다. 2년에 한 대씩, 지금까지 5대를 폐차시켰다. 2000년 10월 조립식 건물로 정토마을을 개원할 때까지 들어간 3억원을 그렇게 모았다. 현재 15개 병상에 직원 10여명이 있는 정토마을은 환자 가족들의 후원금으로 운영된다.

1년이면 100여명의 말기 환자들이 이곳에서 마지막을 보낸다. 그 많은 죽음을 지켜보면 어떤 깨달음이 올까? 스님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모든 죽음을 보면 안타깝다는 생각뿐"이라고 했다.

"80이 돼도 난 아직 아니라고 하지 '그래, 나 이제 갈 때 됐다'고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왜 지금 죽어야 하는지 모르고 조금만 더 살고 싶다고 울부짖을 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마음 아파요."

그는 돌이켜 보기도 싫을 만큼 '힘든 죽음' 뒤에는 모두 돈이라는 욕망을 놓지 못한 공통점이 있다고도 했다. 스님은 "15년간 여유롭고 흔쾌하게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채 20명이 안 됐다"고 했다.

"평생 화장실 청소와 바느질로 자식을 키운 70대 할머니가 있었어요. 아름다운 세상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는지 손 흔들고 가시더라고요. 자제분들과 같이 손 흔들어 드렸어요. 경이로웠어요."

4년 전엔 40대 남자가 위암 3기 때 들어왔다. 치료비 부담으로 남은 가족에 누가 될까 아무 치료도 않고 마지막을 보내러 왔다고 했다. 그는 오히려 수능을 앞둔 고3 딸에게 문병도 못 오게 하며 전화로 응원했다.

"우리 딸 파이팅! 우리 딸 잘할 수 있어! 아빠는 잘 있으니까 수능 끝나고 보자." 수능 당일 그는 죽어가면서도 사력(死力)을 다해 전화기를 붙잡았다. "우리 딸 오늘 힘내야 돼? 아빠는 괜찮으니까 수능 끝나면 바로 내려와."

내색하지 않고 딸을 응원한 그는 시험이 끝나갈 무렵 "스님, 제가 할 일은 이제 다 끝났네요"란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능행은 "자식 사랑하는 마음으로 책임을 다했기 때문인지 표정도 평온했다"고 했다.

스님의 바람은 한 가지다. 고통과 아픔으로 범벅된 죽음이 아닌 맑고 여유로운 죽음이 더 많아지는 것이다. 2005년 베스트셀러가 된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라는 호스피스 사례집도 그래서 펴냈다.

청각 장애인 아버지를 뒀던 능행은 의사가 되려 했다. 아버지처럼 몸이 불편하고 치유할 수 없는 질병을 가진 사람을 고쳐주고 싶었다. 그는 "의사는 아니지만 치유할 수 없는 환자를 돌봐주고 있는 점에서는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에서 또 다른 일을 벌이고 있다. 호스피스를 양성하는 교육 기관과 함께 정토마을에서 수용할 수 없었던 더 많은 환자를 위해 병원을 지으려 한다.

신현종 기자 shin69@chosun.com,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0/09/2009100901302.html

1997년 여름 능행 스님에게 급한 연락이 왔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온 전화였다. 임종 직전의 환자 한 분을 돌봐줬으면 한다는 전갈이었다. 많은 종교인이 찾아와도 도통 반응이 없는 묘한 분이라는 얘기와 함께….

■ 능행 스님, 법당 겸 병동 세워 봉사

세상에나. 머리가 헝클어지고 뼈만 남은 환자를 씻겨놓고 보니 스님이었다. 출가 뒤 24년 선방에서 정진하느라 토굴 하나 장만 못했다는 얘기와 함께 그는 비구니 능행 스님의 손목을 부여잡고 간곡한 부탁을 했다.

"비구니 스님. 나는 이렇게 죽어가지만 나중에 병원 하나 세워주소. 내가 죽어서라도 도와줄게…."

이틀 뒤 스님 시신을 벽제 화장터에서 태우고 돌아오는 길에 능행 스님은 서원 하나를 세웠다. "그래. 진정 수행다운 수행, 부처님 가르침에 합당한 보살행에 전념하리라. 죽어가는 이들과 함께 수행을 하는 호스피스(임종을 앞둔 환자의 평화로운 죽음을 돕는 봉사) 수행을 할 수 있도록 병동을 세우리라."

충북 청원군 미원면 구녀산 기슭의 정토마을. 밤이 되면 쏟아지는 별빛이 유난이 고운 이곳이 바로 그런 내력을 안고 2000년에 세워진 법당 겸 병동이다. 물론 3년 모금활동이 큰 보탬이 됐다.

89년 이후 충북 음성군 꽃동네 등을 돌며 봉사했던 능인 스님의 호스피스운동이 자기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린 곳이기도하다. 또한 불교계 최초의, 또한 유일한 독립 호스피스 센터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동안 정토마을은 '아미타호스피스 운동'의 센터로 자리 잡았다.

아미타 호스피스란 기존 호스피스운동에 불교 아미타 신앙(중생을 건지려는 아미타부처와 정토를 믿는 타력신앙)을 결부한 현대적 봉사수행을 말한다.

실제로 이곳에선 한 해 두 차례 스님.불자 대상으로 호스피스 교육이 이뤄진다. 200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에 '불교호스피스연합'을 결성한 데도 정토마을의 역할이 컸다.

그러면 삶과 죽음이 무시로 오가는 공간 정토마을의 실제는 어떨까. 의외로 소박하다. 크지않은 아미타 법당 한 채와 그 옆의 팬션처럼 보이는 병동이 전부다. 의사 두 명, 간호사 네 명, 병상은 15개 규모다.

"우리네 삶은 빗방울처럼 한차례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산다고 하는 것은 죽음 이전의 한시적인 존재일 뿐입니다. 요즘 품위 있는 죽음을 의미하는 웰다잉(Well-Dying), 웰엔딩(Well-Ending)이 자주 거론되지만, 호스피스 운동이야말로 그런 취지를 현실에 옮기는 가장 훌륭한 봉사이자 수행입니다. 질병과 죽음을 경험하면서 인간의 두려움과 외로움을 보살피고 돕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호스피스야말로 '수행의 꽃'이라고 봅니다."

스님은 거듭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한다'(上求菩堤, 下化衆生)는 불교의 대승 정신에 호스피스운동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스님의 활동은 아직은 사회봉사에 소극적인 불교계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크게 시사적이다. 불교계도 80년대 이후 질병.빈곤 등 사회복지에 눈을 많이 돌리고 있으나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말하긴 아직 이른 편이다.

스님은 자신의 이런 신앙관과 정토마을 활동은 담은 단행본 '섭섭하지 않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도솔)를 다음주 초 펴낸다. 몸이 크게 아파 병석에 누웠던 2년 전 문득 '누군가 이런 수행을 이어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과 함께 하나 둘 메모해둔 원고가 바탕이 됐다. 그간의 활동을 일기체 형식으로 적어 얘기가 생생하고, 그런 만큼 설득력도 크다.

조우석 문화전문기자

[출처: 중앙일보] 호스피스로 피어난 '수행의 꽃'

나는 2017년 1월에 생사의 장 불교호스피스교육을 마친 후, 같이 교육을 받은 도반의 권유로 교육 내용도 모른 채 솔마더에 참여하게 되었고, 2017년 4월부터 11월까지 8개월 동안 한 달에 한 번 진행되는 수업과정을 빠짐없이 참여하면서 솔마더들은 함께 영적 키움을 하게 되었다. 수업은 이론적인 배움을 하고, 개념을 정립하면서 실습으로 이어지는 패턴으로 진행되었다.

위뭇타 찌타 아디묵타로 대상과 하나 됨의 이치를 듣고 바로 현장으로 나가 대상과 하나 됨을 연습하고 스승님께 확인을 받고, 또 배운 것을 호스피스 병동에 가서 실습을 하면서 더욱더 넓어지고 성장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방법인 위뭇타 찌타 아디묵타가 생활에 녹아들만큼 익숙해지며서 무아無我의 상태를 자주,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대상과 일치되면서 "내가 저것과 둘이 아니구나. 같은 것이구나."를 깨달았다.

이원성의 구분이 없게 되는 일을 자주 겪으면서 나의 파동과 대상과의 파동이 합쳐지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 것을 느끼며 어떤 생명, 무생명의 물체에게 까지도 묵타를 실현하니 만법이 둘이 아닌 법공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경전에 있는 그대로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는 뜻도 그것이 어떻게 내고 쓰는 것인지도 일상화 되어갔다.

그리고 이렇게 몸에 녹아든 이치를 차크라 디아나를 통해서 에너지화시켜 머리로 알기보다 몸에 익히게 되고, 아난다 만달라 명상을 통해서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육체가 겉으로는 있지만 그 본질이 에너지 통로를 통한 빛의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할 때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거대한 빛과 하나가 되어 통합이 일어나는지도 체험할 수 있었다.

솔마더 8개월 과정을 진행하면서 나 스스로가 에너지의 고양된 변화와 카르마의 변화를 느낄 수가 있었고 또한 나의 현실적 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함께 왔다. 나의 내적 성장이 이루어짐에 따라 나에게 고민 상담을 하는 사람이 늘어갔고, 직장에서도 동료들과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들을 함께 보내면서 타인을 도우려는 마음이 함께 일어났다. 그렇게 생활을 하다 보니 직장에서의 성과도 크게 나타나서 모두가 만족하는 직장분위기로 변해가는 것이 확연히 느껴지면서 '내 주변 모두가 보살이 되어가고 있구나.' 솔마더를 하면서 나 한 면의 의식의 성장의 밝기로 인해 주변이 모두 밝아지고 같이 파동해 나간다는 것을 느끼면서 '모두가 함께 보살이 되는 유토피아가 가능하겠구나.'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8개월 동안 진행된 이 수행을 지도하여 주신 스승님과 주말마다 수업진행을 열심히 도와주신 교육원 직원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8개월을 함께 멋지고 아름답게 수행한 18명의 도반님들께 묵타를 보낸다.

 

*솔마더soul mother는 영적 치유 에너지를 강화하는 훈련 프로그램으로 2016년부터 마하보디교육원에서 시작되었으며, 능행스님께서 지도하여 주십니다. 

 

(출처 : 재단법인 정토사관자재회 정토마을 계간지 2018년 봄호)

1982년 ‘간소한 삶(simple living)’을 이상향으로 삼고 수많은 책과 강연을 펼쳤던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그리고 환경론자였던 스코트 니어링은 100세가 넘자 자신의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유언을 남깁니다.

- 나는 병원이 아니라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나는 의사가 나의 죽음에 배석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들은 삶에 대해서도 별로 아는 것 같지 않지만,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의 유언은 그의 임종을 지켰던 현명하고 사려 깊은 그의 아내, 헬렌 니어링에 의해서 충실히 지켜졌습니다.



서양의 경우에는 대략 19세기 후반까지,그리고 다른 동양 국가들과 우리나라의 경우 20세기 중후반까지 스코트 니어링이 누렸듯 임종시에 환자들이 가족들에 둘러싸여 애도와 작별 인사를 받으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생의 주기를 보여주는 오래된 사자성어 ‘생로병사(生老病死)’에서 보이듯,죽음은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분으로받아들여져 왔습니다. 현대 과학•의학 기술의 발전은 이러한 인식을 무너뜨렸고  ‘죽음’에 대한 인식은 ‘생의 자연스러운 귀결’에서 수치스러운 '의학적 실패’로 근원적인 변화를 겪게 됩니다. 의학적 유물론(medical materialism) 에 기반을 둔 교육을 받은 많은 의사들은 죽음을 싸워야할 적으로 인식하고 전투적 자세로 일관하다가 말기 상태에 이른환자들을 ‘실패’로 간주하고 외면하는 모습을 보여왔습니다. 결과적으로 죽음이 예견되는 말기 환자들은 병원에서 적절한 돌봄과 멀어진 채 가장 소외되고 외로운 존재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더 테레사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1973

현대적 호스피스 운동을 처음으로 시작한 영국의 시실리 손더스 여사는 I960년대 당시 의사들의 말기 환자들에 대한 태도를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 의학은완치를목표로 한다. 만일 완치시킬 수 없을 경우 의사들은 그들이 실패했다고 느낀다. 현대의학은 답이 명확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죽어가는 환자들을 위해서는 답을 찾을 수가 없다. 의사들은 말기 환자와 임종에 들어선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들은 죽어가는 환자들을 최대한 회피할 뿐만 아니라, 죽음이라는 실패를 마주 대하기를 매우 부담스러워한다.-

 

환자와 함께 있는 Dr.시실리 손더스

그녀는 이러한 현대의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 기반을 두어 1967년 런던 외곽에 성크리스토퍼 호스피스를 건립하고 죽어가는 환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돌봄을 펼치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녀가 죽어가는 환자들에 대한 전인적 돌봄을 주장하며 소개한 ‘총체적 고통(total pain)’ 이란 개념 입니다. 총체적 고통이란 것은 말기 환자들이 겪는 신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 , 사회적,영적인 부분도 포함하는 개념으로 

손더스는 이 모든 측면의 고통들에 대한 적절한 돌봄이 이루어질 때 말기 환자들이 남은생을의미 있게 보내고 평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그녀는 당시로서는 생경했던 다학제 팀(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성직자, 심리상담사 등)을 구성하여 죽어가는 환자들을 위한 현대 호스피스 완화 의료의 모델을 확립하였습니다. 이후 점차 호스피스 완학의료의 발전이 뒤따르면서 치료가 어려운 말기질환을 가진 환자와 가족을 대상으로 통증 및 신체적,심리적,사회적, 영적 고통을 완화하여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보다 전문적인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같은 시대에 시실리 손더스와 함께 말기 환자들을 위한 돌봄에 나섰던 스위스 출신의 미국인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또한,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들의 고통에 집중 하였습니다. 1968년에 발표된 ‘죽음의 순간(on Death and Dying)’이라는 책은 죽 어가는 수백 명의 말기환자들을 대상으로한 임상연구를 통해 죽어가는 환자들의 5단계 심리 이론(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를 발표하여 전 세계적인 반향 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그녀는 약 20여권에 달하는 죽음에 관한 연구 저서들을 발표하여 죽음에 대한 사회적 각성을 촉구하였고,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말기 환자들의 평화로운 죽음을 위한 호스피스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러한 죽음에 관한 연구와 업적으로 그녀는 1999년 미국의 타임지가 선정한 21세기 100대 사상가에 들기도 하였습니다.

인생의 후반기 , 학자로서 가장 절정의 순간에 올랐을 때조차도 사회적 , 학계적인 금기를 전혀 거리낌 없이 넘나들며 죽음학의 지평을 연 그녀를 감히 안다고 하거나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말년의 그녀는 임사체험자 2만명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인간은 영적 존재이며 죽음이라는 문을 통해 영원에서 영원으로 여행을 하는 존재’라는 통찰을 내놓습니다. 특히 이 임사체험 연구의 결정판인 

‘사후생 (on life after death)’은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과 지혜가 어우러져 죽음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고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임사체험 연구를 바탕으로 한 그녀의 죽음과 영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은 암에 걸린 아이에게 쓴 편지에서 잘 드러납니다.

 

우리가 지구에 보내져 

수업을 다 마치고 나면 

몸은 벗어도 좋아.

우리의 몸은

나비가 되어 날아오를 누에처럼 

아름다운 영혼을 감싸고 있는 허물이란다.

때가 되면 우리는 몸을 놓아버리고 

영혼을 해방시켜

걱정과 두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나 

신의 정원으로 돌아간단다. 

아름다운 한 마리의 자유로운

나비처럼 말이야.

 

늘 죽음을 ‘여행’에 비유했던 그녀는 1995년 심장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평생을 바쳐 연구했던 평화로운 죽음의 문으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죽음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극단적인 거부감을 느끼고,심지어 병원의 엘리베이터에 4층이라는 표현마저 하지 못하게하는 한국적 풍토에서 죽음에 대한 깊이있는 연구들은 큰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도 모든 사람들이 맞이하게 될 생물학적 종착역인 죽음을 적절히 이해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죽음에 대한 교육이 필요한 시기가 왔다고 생각됩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것이기에,죽음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삶을 이해하고 소중히 하는 태도입 니다. 죽음에 대한 진지하고 깊은 통찰은 결국 가치 있는 삶을 살아내기 위한 부단한 노력과 연결됩니다. 특히 의료인들의 경우 말기 환자와 임종에 들어선 환자들을 보다 잘 이해하고 돌보기 위해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이해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글이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을 넓히고 하루하루를 보다 의미 있는 시간들로 채우는 일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조명진 │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내과부장 (출처: 재단법인 정토사관자재회 정토마을 계간지 2018. 여름호)

 

시린 계절이 아무리 머물고 싶어 해도
계절의 순환에 손들고 떠나듯,
여기저기 색색의 꽃들이 마음에 훈풍을 불어 넣습니다.
정토마을 가족과 민들레 후원가족 모두의 가정에
봄기운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_사전답사팀에서 송인영 올림

세계평화를 위하여 오체투지를 하며 기도하는 일행을 만나 발원이 꼭 성취되기를 기원드렸습니다.
정토마을 이사장 능행스님께서 라다크의 수행자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학교를 방문하여 그들을 격려하고 물품을 전달하였습니다.

높은 고도와 추위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지만 약간의 설레임 속에 불편함 없는 본진 의료봉사를 위한 답사보고서 작성에 대한 기준을 정하고서 인도행 비행기에 올랐다. 십여 시간의 비행에 이어 국내선 라다크 행으로 갈아타고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시선을 창 밖으로 향하니 온통 설국이다.

매스컴에서만 보던 히말라야 그대로의 모습이다.

영토의 대부분이 해발 3,500이상의 고산지대에 위치한 북인도 라다크 지방은 인도에 병합되기 전까진 티벳의 영토였기에 인도의 어느 한 지방이라기 보다는 티벳 본고장에 와있는 느낌을 다분히 받았다. 주민들의 사는 모습은 마치 우리나라의 70년대와 비슷해 보였으나 해발이 높고 대부분이 척박한 땅으로 이루어진 지역이며 일년 중 7개월이 겨울로 그 기간 동안은 항공을 제외한 다른 교통수단이 두절되는 지역이어서 다소 한가롭기까지 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행복의 조건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물질이나 부가 아닌 마음으로부터 받는 위안, 즉 정해진 기준이 아닌 자신의 잣대로 바라보는 세상이 가장 행복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생각하여 일정을 시작했다. 처처 부처인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건 위대한 종교의 힘이었다. 온통 희디 흰 양털 솜을 뒤덮고 있는 히말라야산맥의 웅장함 언저리엔 험한 고행을 일상으로 삼고 사는 지역민들의 삶에 적지만 힘이 되어드리고 주민들은 물론 현지의 열악한 환경에서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하시는 스님들께도 잠시나마 건강을 챙겨볼 수 있는 기회를 드리고자 한다.

 

우리의 이런 자그마한 봉사가 우리 자신의 삶과 무관하지 않고 그 결과 자신의 삶은 물론 생각이 건강해진다는 진실이 우리 가슴속에 자리를 잡아가지 않나 생각한다. 라다크 의료봉사를 진행하면서 우리에게 큰 힘이 됨은 물론 현지에서 오로지 봉사정신 하나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초겔스님을 통해 진정한 자비심과 봉사를 보았으며 불심으로 이루어진 삶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사람존중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의료현실은 말 그대로 현저하게 낮은 수준이었다. 병원의 숫자도 열악하지만 1년에 7개월 정도가 눈 덮인 겨울인 관계로 이동이 힘들며 거주지가 밀집하지 않고 산개해있어서 병원을 찾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많이 힘들어 보였다.

주민들이 밀집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그나마 기본적인 의료가 유지되는 듯 보였으나 여타 지역은 교통이나 이동거리를 감안 하고 발생하는 진료비용을 생각하면 질병이나 상해로 병원을 찾기는 현실적으로 힘들어 보였다. 이번에 이루어지는 우리 정토마을의 국제의료봉사가 라다크의 낙후된 의료환경과 진료당사자는 물론 의료현실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램을 가져보게 된다.

일정은 7월 8일부터 9박 10일에 걸쳐 이루어지게 되며 그 기간은 라다크 지방의 여름절기에 해당되어 그나마 일년 중 가장 생활이 활기찬 시기라고 한다.

의료봉사를 진행하면서 현지주민 및 진료환자에게 전할 수 있는 정토마을 가족님들의 정성어린 후원을 기다리며 정토마을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한다. 끝으로 마무리가 아름다운 의료봉사가 되기를 처처에 늘 같이 계시는 부처님께 기도한다.

 

‘사람은 사람이 사는 곳에서 살아야 하나보다’ 라는 어느 시인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단순히 시 한 줄의 의미가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은 다 세상이구나 라는 평범한 진리를 생각했으며 늘 자신만의 잣대로 정한 이상을 추구하는 우리네 삶을 다시 한 번 성찰하고 행복의 기준을 새롭게 각인한 답사였습니다.

 

출처 │재단법인 정토사관자재회 정토마을 계간지 2019년 봄호

매일매일 뿌연 서울하늘의 미세먼지와 겨울의 마지막의 아쉬움을 시기 하듯 매섭게 몰아치는 여분의 추위를 뒤로 하고 남쪽으로 달려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으로 향했다. 학인시절 능행스님께서 불교호스피스 병원 건립을 하시겠다고 운문사에 오셔서 홍보를 하시고, 많은 스님들이 마음을 모으던 그 시절의 회상이 내 앞을 지나가고 기대 이상으로 반듯하게 우뚝 자리잡은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의 전경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7년간의 외국생활을 하고 너무나 빨리 변해버리는 한국이라는 사회에 적응도 못한 채 지난 늦여름 한국으로 귀국하자마자 나는 병원 법당 소임을 맡았다. 소임을 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부터 마주하게 된 세상의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는 분의 처절함과 쓸쓸함을 바 라보면서 난 가슴이 턱 하니 막히는 것 같았다. 그들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건지, 어떤 마음과 말이 그분의 절망을 돌려 편안함을 줄 수 있을지 지금까지 내가 배우고 느껴온 모든 것을 동원해도 얻을 수 없는 그 해답에 난 죄스러웠다. 나의 무력함과 무능함에 좌절하고 그분들의 슬픔에 동화되어 한없는 우울함으로 퇴근 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던 그날을 잊을 수 없다. 그날 이후 난 병원에서 활동하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교육을 꼭 받아야겠다는 간절함이 생겼고 승려연수라는 형식을 빌려 호스피스교육에 동참했다. 

 

2박 3일이라는 승려연수 교육과정으로의 호스피스교육, 사람들의 죽음을 준비하는 호스피스라는 과정이 어찌 그 짧은 시간으로 충분하겠는가? 수없는 반문도 하였다. 호스피스는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고 내가 만나는 많은 분들은 목숨이 끊어지는 임종기도의 순간에도 생의 집착을 놓지 못하고 간절하게 마지막까지 스님의 기도에 의지하여 삶의 동아줄을 부여잡는 사람들인데 난 무엇을 배워야 할까?

 

하지만, 이번 교육의 인연으로 중요한 한 가지를 배웠다. 이 호스피스교육은 내가 배워서 누군가를 위해서, 어떤 소임을 살기 위해서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임을 깨달았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이라는 고통, 모든 이는 죽음에 이른다는 문제에 대하여 난 과연 어떻게 죽어갈 것이고, 수행자로서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배우는 것이 이 교육이었다. 부처님께서 그리고 수많은 선지식들께서 고구정녕하게 제시하신 그 최후의 방법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이 교육이고 나뿐만이 아니라 불자의 수행으로서 이생에서의 마지막 수행으로서 그 회향의 순간을 직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되새기고 정리하게 되는 시간이 되었음에 감사하다. 인간의 삶에서 생노병사라는 가장 기본적인 과정에서 불제자로서 어떻게 바라보고 다스리고 정진해 갈 것인지에 대한 공부를 그 동안 잊고 있었음을 반성했다. 

 

우리 불자들, 아니 우리들 모두 잘 살고자 기도에 매달리지만 잘 죽는 것에는 기도의 마음을 내지 못한다. 모두가 갖고 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 죽음 이후에 대한 두려움으로 많은 종교적 가치관과 관념들이 생겼고 사람들은 그것에 의지해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죽음에 대한 준비로써 이 교육은 절대로 간과되어서는 안 될 교육이라고 모든 분들에게 최대한 많이 알리고 싶다. 

난 오늘도 겨울을 지나 또 다른 봄으로 죽을 날을 위해 달려가고 있다.

 

선봉 │ 승려연수교육 불교호스피스 영적돌봄 2기 교육을 수료하신 선봉스님의 후기 글을 옮겨 싣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에는 수많은 별들이 존재한다.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별들이 사라졌다 나타난다.

말기 암환자가 통증과 고통 안에서 쉼표를 찍고 방문하는 곳이 호스피스 병동이다. 말기암 환자들은 진단 받은 후 육체적 치료에 몰입하다 보니 마음은 뒷전 이었다는 말씀을 종종 하신다. 그러나 몸과 마음은 실과 바늘처럼 따라다닌다. 어찌 육체만 돌본다고 마음까지 치유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병동에서는 몸과 마음을 모두 돌보는 곳이다. 몸에 집중하느라 삶의 의미를 놓쳐 버린 상실된 마음과 그동안 “왜 하필 나인가?”에 대한 분풀이도 이곳에서는 충분히 토해 낼 수 있다. 왜냐하면 이곳은 위기에 처한 분들을 사랑으로 품어줄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 작가가 이런 글을 써 내려갔다. “말기암 진단을 받은 한 여성이 충격을 받고 심한 슬픔과 분노에 사로 잡혔다.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방문한 영적 스승에게 조언을 청하자 스승이 말했다. “그것을 그렇게 큰일로 만들지 말아요.” 암에 걸린 것은 불행한 사건이지만, 그것을 스스로 더 크게 확대시켜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이다. 암은 자신의 일부일 뿐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암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자 두려움과 싸우던 에너지가 생명력으로 바뀌어 스스로 치유하기 시작한다.

 

위 글을 읽고 많은 생각에 잠겼다. 그토록 고통에만 중점을 두고 해결하려 했던 지난 시간에 대하여 깊이 사유 할 수 있었던 글이었다. 호스피스팀원들은 위기에 처한 환자와 그의 가족들이 안정감을 갖고 혼란스럽고 힘든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다. 다학제팀으로 구성된 호스피스팀(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영적돌봄가, 자원봉사자)은 전문성을 갖추고 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증상과 마음의 변화에 촉각을 세우고 그들과 함께 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이뤄질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있어 좀 더 희망을 가져 보려하는 환자에게는 희망의 요구를 있는 그대로 경청하려 노력한다. 이곳은 자신의 삶 자체를 인생수업으로 생각한다. 우리의 인생수업은 참으로 값지다. 그래서 조심스럽다. 문득 살아있는 나에게 답을 알렸다. 누군가 나를 고통으로 상상하기 이전에 나는 오늘 무척 행복하다. 우리 모두 주문처럼 매일 외워야 할 문장인 것 같다. 

 

능인 │ 자재요양병원 영적돌봄연구실장

 

불교사!, 과연 짧은 시간에 수천 년의 역사를 얼마나 꺼 집어 낼 수 있을까?라는 의문과 고작 오래 전 교과서에서 배운 불교의 사상이 자비라는 것과 우리나라에 전해진 루트에 따라 남방불교 북방불교로 구분한다는 정도의 지극히 단편적인 나의 지식으로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갖게 했던 것은 부담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단박에 원하는 답을 다 구하지 못한다면 마음을 비우고 가벼운 마음으로 듣자라고 생각으로 강의를 듣게 되었지만 여전히 불교에 대한 강의는 낯설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최종석 교수님의 불교사 강의는 진행 될수록 제 생각이 바뀌게 했습니다. 간결하면서 그 선이 분명하다는 느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교단에서 오랜 기간 강의를 통해 몸에 밴 경험이겠지요. 시간이 지날수록 흥미진진하고 재미 있었습니다. 강의 기법에 매료되었던 탓인지 순간순간 강의 내용을 열심히 쫓아갔었지만 저에게는 앞뒤의 정리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산파가 애를 대신 낳는 게 아니다라는 말씀은 저에게는 순간 지나가는 한 줄기 불빛 같았었습니다. 그 순간의 불빛이 지금까지 구체적으로 접근해 보지 못한 불교에 대한 여러 궁금증을 깨우는 불씨가 된다면 다음에 시간을 갖고 공부를 하면 되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강의는 한결 가볍게 듣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강의가 있었던 그 며칠 후 과연 불교사를 어떻게 접근해 볼까? 잠시 생각하다가 우선 인터넷을 통해 몇 가지 궁금증을 풀어 보기로 좋을 듯해 첫째는 원시불교는 붓다가 어떠한 시대적 배경에서 수행과 깨달음을 통해 원시불교가 성립 되어졌고, 원시 불교의 경전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가? 두 번째는 활발한 전파 과정에서 상좌부와 대중 부두 2개의 부파(部派)가 주장하는 교리상의 견해가 무엇인가? 세 번째는 대승 불교가 종래의 관점을 혁신한 수행관은 무엇인가? 네 번째는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발전은 개인 수행과 대중의 구원을 우선으로 하는 교리상의 차이 무엇일까? 다섯 번째는 불교의 발생지 인도에서의 불교 가 쇠퇴해 가는 환경은 어떠했는가? 여섯 번째는 밀교가 성립 발전의 배경은 인도 불교 쇠퇴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하나하나 답을 찾아 가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갸우뚱 거리도 했습니다만 결국은 역사라는 것이 시간의 흐름과 단편적이 방향성 무시할 수 없다는 점과 이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불교사 특강이 불교사의 이해가 종교적 접근보다 한 발짝 비켜난 문화사를 배우는 기분이 들었다는 것은 스스로의 공부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계기가 되어 불교에 대한 마음을 여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강의 중간중간에 화두를 던져 주셨던 말씀 중에 바라밀다심경의 핵심은 공덕을 쌓는 것이고 바라밀다경은 답안지가 아니라 문제지다란 말씀 가슴에 새겨 봅니다.

 

열강해 주신 최 교수님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함께 해주셨던 모든 불자님들께도 부처님의 자비가 늘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출처: https://mahadohi.tistory.com/category/마음이 머문 자리 [웹진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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