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간소한 삶(simple living)’을 이상향으로 삼고 수많은 책과 강연을 펼쳤던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그리고 환경론자였던 스코트 니어링은 100세가 넘자 자신의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유언을 남깁니다.

- 나는 병원이 아니라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나는 의사가 나의 죽음에 배석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들은 삶에 대해서도 별로 아는 것 같지 않지만,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의 유언은 그의 임종을 지켰던 현명하고 사려 깊은 그의 아내, 헬렌 니어링에 의해서 충실히 지켜졌습니다.



서양의 경우에는 대략 19세기 후반까지,그리고 다른 동양 국가들과 우리나라의 경우 20세기 중후반까지 스코트 니어링이 누렸듯 임종시에 환자들이 가족들에 둘러싸여 애도와 작별 인사를 받으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생의 주기를 보여주는 오래된 사자성어 ‘생로병사(生老病死)’에서 보이듯,죽음은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분으로받아들여져 왔습니다. 현대 과학•의학 기술의 발전은 이러한 인식을 무너뜨렸고  ‘죽음’에 대한 인식은 ‘생의 자연스러운 귀결’에서 수치스러운 '의학적 실패’로 근원적인 변화를 겪게 됩니다. 의학적 유물론(medical materialism) 에 기반을 둔 교육을 받은 많은 의사들은 죽음을 싸워야할 적으로 인식하고 전투적 자세로 일관하다가 말기 상태에 이른환자들을 ‘실패’로 간주하고 외면하는 모습을 보여왔습니다. 결과적으로 죽음이 예견되는 말기 환자들은 병원에서 적절한 돌봄과 멀어진 채 가장 소외되고 외로운 존재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더 테레사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1973

현대적 호스피스 운동을 처음으로 시작한 영국의 시실리 손더스 여사는 I960년대 당시 의사들의 말기 환자들에 대한 태도를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 의학은완치를목표로 한다. 만일 완치시킬 수 없을 경우 의사들은 그들이 실패했다고 느낀다. 현대의학은 답이 명확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죽어가는 환자들을 위해서는 답을 찾을 수가 없다. 의사들은 말기 환자와 임종에 들어선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들은 죽어가는 환자들을 최대한 회피할 뿐만 아니라, 죽음이라는 실패를 마주 대하기를 매우 부담스러워한다.-

 

환자와 함께 있는 Dr.시실리 손더스

그녀는 이러한 현대의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 기반을 두어 1967년 런던 외곽에 성크리스토퍼 호스피스를 건립하고 죽어가는 환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돌봄을 펼치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녀가 죽어가는 환자들에 대한 전인적 돌봄을 주장하며 소개한 ‘총체적 고통(total pain)’ 이란 개념 입니다. 총체적 고통이란 것은 말기 환자들이 겪는 신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 , 사회적,영적인 부분도 포함하는 개념으로 

손더스는 이 모든 측면의 고통들에 대한 적절한 돌봄이 이루어질 때 말기 환자들이 남은생을의미 있게 보내고 평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그녀는 당시로서는 생경했던 다학제 팀(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성직자, 심리상담사 등)을 구성하여 죽어가는 환자들을 위한 현대 호스피스 완화 의료의 모델을 확립하였습니다. 이후 점차 호스피스 완학의료의 발전이 뒤따르면서 치료가 어려운 말기질환을 가진 환자와 가족을 대상으로 통증 및 신체적,심리적,사회적, 영적 고통을 완화하여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보다 전문적인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같은 시대에 시실리 손더스와 함께 말기 환자들을 위한 돌봄에 나섰던 스위스 출신의 미국인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또한,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들의 고통에 집중 하였습니다. 1968년에 발표된 ‘죽음의 순간(on Death and Dying)’이라는 책은 죽 어가는 수백 명의 말기환자들을 대상으로한 임상연구를 통해 죽어가는 환자들의 5단계 심리 이론(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를 발표하여 전 세계적인 반향 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그녀는 약 20여권에 달하는 죽음에 관한 연구 저서들을 발표하여 죽음에 대한 사회적 각성을 촉구하였고,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말기 환자들의 평화로운 죽음을 위한 호스피스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러한 죽음에 관한 연구와 업적으로 그녀는 1999년 미국의 타임지가 선정한 21세기 100대 사상가에 들기도 하였습니다.

인생의 후반기 , 학자로서 가장 절정의 순간에 올랐을 때조차도 사회적 , 학계적인 금기를 전혀 거리낌 없이 넘나들며 죽음학의 지평을 연 그녀를 감히 안다고 하거나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말년의 그녀는 임사체험자 2만명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인간은 영적 존재이며 죽음이라는 문을 통해 영원에서 영원으로 여행을 하는 존재’라는 통찰을 내놓습니다. 특히 이 임사체험 연구의 결정판인 

‘사후생 (on life after death)’은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과 지혜가 어우러져 죽음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고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임사체험 연구를 바탕으로 한 그녀의 죽음과 영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은 암에 걸린 아이에게 쓴 편지에서 잘 드러납니다.

 

우리가 지구에 보내져 

수업을 다 마치고 나면 

몸은 벗어도 좋아.

우리의 몸은

나비가 되어 날아오를 누에처럼 

아름다운 영혼을 감싸고 있는 허물이란다.

때가 되면 우리는 몸을 놓아버리고 

영혼을 해방시켜

걱정과 두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나 

신의 정원으로 돌아간단다. 

아름다운 한 마리의 자유로운

나비처럼 말이야.

 

늘 죽음을 ‘여행’에 비유했던 그녀는 1995년 심장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평생을 바쳐 연구했던 평화로운 죽음의 문으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죽음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극단적인 거부감을 느끼고,심지어 병원의 엘리베이터에 4층이라는 표현마저 하지 못하게하는 한국적 풍토에서 죽음에 대한 깊이있는 연구들은 큰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도 모든 사람들이 맞이하게 될 생물학적 종착역인 죽음을 적절히 이해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죽음에 대한 교육이 필요한 시기가 왔다고 생각됩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것이기에,죽음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삶을 이해하고 소중히 하는 태도입 니다. 죽음에 대한 진지하고 깊은 통찰은 결국 가치 있는 삶을 살아내기 위한 부단한 노력과 연결됩니다. 특히 의료인들의 경우 말기 환자와 임종에 들어선 환자들을 보다 잘 이해하고 돌보기 위해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이해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글이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을 넓히고 하루하루를 보다 의미 있는 시간들로 채우는 일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조명진 │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내과부장 (출처: 재단법인 정토사관자재회 정토마을 계간지 2018.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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