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대륜왕 삼계주 萬代輪王 三界主

만대에 전륜성왕 삼계의 주인이시여

쌍림시멸 기천추雙林示滅 幾千秋

쌍림에서 입멸하신후 수천년 가을이 오고갔어도

진신사리 금유재眞身舍利 今猶在

진신사리가 지금 여기 모셔 있으니

보사군생 예불휴普使群生 禮不休

널리 중생으로 하여금 예배가 쉬지아니하네

<자장율사의 불탑게>

 

진신사리가 정토마을로 오기까지

 

1. 기원전 3세기 인도 아쇼카 대왕의 아들 마힌다 스님이 불교전파를 위해 스리랑카에 오면서 부처님 진신사리의 일부를 스리랑카 세루빌라寺에 봉안

 

2. 1923년 힌두교의 난입으로 폐허가 되어있던 세루빌라寺 복원 시 부처님진신사리를 발굴하였고 스리랑카 고고학자의 검증을 받아 콜롬보 다투말루寺로 이운

 

3. 2015년 10월 불교병원 건립 원력으로 다투말루寺에서 석가여래 치아사리를 정토마을에 기증하기로 결정

 

4. 2016년 3월 스리랑카 대통령궁 및 다투말루寺에서 치아사리 이운의식 봉행하고 3월 21일 정토마을에 석가여래 치아사리를 봉안함.

 

"부처님의 고귀한 인연법에 합장여밉니다."

 

성지를 순례하는 걸음걸음마다

3월 16일 인천공항에서 스님 10분과 재가자 55명 총 65명이 출발하여 스리랑카 최대의 도시 콜롬보에 새벽 4시10분 도착하였다. 탐진치로 물든 가슴들이 평화로운 불국토 붓다의 나라로 날아온 것이다. 한국에선 깊은 잠에 빠져있을 새벽시간에 꽃목걸이를 목에 걸고 성대한 환영을 받게 되니 감사하면서도 송구스런 마음이 었다. 이날, 아누라다푸라의 스리마하보리수가 있는 ‘이수루무니 아사원’에서부터 순례가 시작되었다.


이수루무니아사원

아쇼카왕의 딸 상가밋따가 인도에서 가져와 심었고 2300년이 넘은 보리수는 순례자들의 기도를 온전히 받아들일 것만 같은 강력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간달라마 호텔과 담불라 황금 동굴사원

간달라마 호텔은 자연 그대로의 밀림 속에 지은 5성급 호텔로 긴 여정의 피로를 풀기에 탁월했고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담불라 황금 동굴사원에는 수많은 불상과 벽화들은 중요한 인류문화유산으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캔디, 스리랑카 중부의 도시

영국 식민지 시대 마지막 싱할라왕조의 역사가 남아있는 이 도시의 신성한 기운과 캔디 사람들의 보존 노력 덕분에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불치사

불치사는 종교적 의미가 강한 사원이지만 건축디자인 또한 수려했다. 심할라 전통 건축양식의 진수를 체험할 수 있는 스리랑카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듯하다.

불치사의 내부에는 좌우로 그림과 함께 부처님 진신사리를 이운해 온 설명이 상세하게 적혀있어 불치 사의 역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이 곳이 볼거리가 아닌 삶 그 자체였다.

여행 이튿날, 불치사 정문 바로 앞에 위치한 퀸스호텔에서 묵기로 하였다.

고단한 여정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는데 창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점점 선명 해졌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15분 전. 커튼을 걷고 밖을 내다보니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불치사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궁금한 마음에 그 행렬 속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남녀노소 불문한 흰 옷의 물결, 옆 골목에는 꽃을 파는 꽃마차행렬이 장관이고 누구든지 꽃을 사서 받쳐 들고는 환희에 찬 얼굴 표정이다.

부처님 사리를 친견하고 공양을 올린 뒤에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스리랑카 불자들의 불법승 섬김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었다.

 

경황없이 일행 속에 합류한 나는 아무런 공양을 준비하지 못했다.

빈 두 손을 받쳐 들고 부처님 진신사리 앞에 귀의하였다.

‘이 허공같은 빈 마음 뿐 입니다. 부처님께 온전히 공양 올립니다. 부처님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의 참 불자가 되겠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내 손에 연꽃이 올려졌다.

눈을 뜨고 바라보니 옆에 있던 불자가 빙긋 웃어 보인다. 공양물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나에게 공양물을 건네준 것이다. 새벽녘, 불치사 경내에서의 일들은 나에게 환희로움 그 자체였다.


시기리아

거대한 바위 위에 건설된 궁전, 시기리아는 세계문화유산이자 세계8대 불가사의로 선정된 관광명소로 부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카사파1세가 그 복수를 하려는 형제를 경계하여 바위 위에 궁전을 지은 후 그 안에서 자살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페라데니아 국립식물원

캔디의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 약 18만명으로 1821년 식물원으로 문을 열었으며 그때까지는 14세기의 왕 파라쿠라마 바후3세가 왕비를 위해 만든 정원으로 유명하다. 이곳의 다양한 수목과 꽃, 호수가 순례단의 피로를 풀어주었다.


스리랑카 대부분 국민들은 불교를 생활의 일부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흰 옷을 곱게 차려입고 부처님께 바칠 꽃을 사서 그 더위 속에 줄을 지어 서있는 모습에서 설렘으로 가득 차있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스리랑카 왕조의 정통성이 담겨있는 부처님의 치아사리가 모셔져있기 때문인 것 같다.

 

왕권을 가지고 싶은 자는 치아사리를 갖고 있어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수도를 옮길 때마다 늘 함께 옮겼다. 스리랑카 사리절 주지 소눗따라 스님께서는 모시고 예경하던 사리를 우리에게 전하며 능행스님께서 기도를 열심히 하여 많은 분들을 이롭게 해달라는 부탁에 말씀을 해주셨고 마하트리 빌라 쓰리세느 스리랑카 대통령과 불교장관 사리띠두스만따께서도 세계평화와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그리고 스리랑카와 한국의 우호관계가 돈독하도록 기도해달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한국에서 모신 인연으로 두 나라가 더욱 친분이 두터워졌다고 기뻐하였다.

“지갑 좀 열어보소.”

성지순례의 마지막 날, 마지막 일정.

부처님 진신사리 이운식과 스리랑카 불교병원 기공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원장스 께서 봉지를 들고 앞차, 뒤차를 다니시며 쓰고 남은 돈 다 여기에 넣어 달라신다. 원장스님의 마음을 왜 이해하지 못하랴. 병원건립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고자 하는 스님의 마음이 우리 순례단에게 보살행을 실천할 수 있는 가르침이 되어왔다. 서슴지 않고 내어 모인 보시금을 보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부처님, 부처님, 부처님

부처님 치아사리를 이운해 친견하는 일에 함께함은 다겁생래 쌓이고 쌓여 석화가 된 업장이 녹아지고 무명이 타파된다고 하셨지요. 이번 진신사리 이운식에 동참하신 이차인연 공덕으로 모든 분들이 나 하나의 행복보다는 더 많은 이들에게 안락을 줄 수 있는 큰 회향으로 남게 하소서. 그리고 모든 업장이 소멸되고 지혜는 증장되어 구경에 꼭 해탈로 이어지는 원인되게 하소서.

이번 순례와 부처님 진신사리 이운식을 여법하게 마칠 수 있도록 모든 진행을 맡아 애써주신 스리랑카 정부와 통역과 안내를 맡아 도와주신 완샤스님과 여러분의 스님들께 감사합니다. 정말 한 생을 살며 받아보기 힘든 최고의 예우를 받았으나 지면을 빌어 인사 올리는 무례함을 용서하소서. 살면서 평생 잊지 않고 갚겠습니다.

끝으로 여법한 회향까지 대중을 외호해주시며 수고해주신 정토마을 회주이신 수환큰스님, 자재요양병원 원장 능행스님께 진심을 다해 감사드리며 그 외 도감스님을 비롯하여 함께 애쓰신 대중스님들과 법인가족들 너무나 고맙습니다.

감사드려야 할 분들이 너무 많은데 지면이 적어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이 거룩하고 환희로운 불사에 동참자가 되어주신 님들 이시어.

부처님의 고귀한 인연법에 합장여밉니다. (2016.여름)


https://forms.gle/DMVFkyK2L78TCu2Z9

 

간월보궁 및 삼천불 공경전 건립불사 동참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정토마을에 나투신 것은 희유하고도 희유한 일이며 환희 용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계평화와 몸이 아픈 환우들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해달라는 당부와 함께 부처님 진신사리를 스리랑카대통령께서 정토마을에 기증해 주셨을 때 정말 꿈인지 생시인지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후 이번 21일 정초 장좌기도 중에 달라이 라마 존자님께서 사리를 보내시어 이운을 하였습니다. 이 어찌 기적이 아니라고 말하겠습니까. 천 년을 이어갈 가람불사가 기공식을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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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아이들은 무척이나 외롭고 쓸쓸합니다. 외롭고 쓸쓸한 만큼 마음의 상처가 깊고 상처가 깊은 만큼 분노도 큽니다. 그런 상처받은 마음을 표현할 길 없어 때로는 주먹이 먼저 나가고 감정의 기복이 심해서 쉽게 좌절하거나 도리어 화를 내어 자신들의 아픔을 돌아봐 달라고 외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침에도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쓰다듬어 주지 않을 때 아동들은 깊은 절망을 경험하곤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그랬습니다. 모든 아동들이 그런 건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의 아동들이 가정에서 올바른 돌봄을 받지 못합니다. 특히 감정적인 아픔으로 인하여 자존감이 낮고 돌발적이고 거친 행동들이 동반되기도 합니다.

 

명상을 시작하기 전 아동들의 감정과 행동들이 서로 상반되게 나타났습니다. 마음으로는 관심을 호소하고 있지만 정작 행동은 전형적인 문제아의 행동이 동반되는 아이러니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느 날 문득 선물같이 명상수업이 아이들에게 다가왔을 때 당황하는 아동들도 있었습니다. 친절하신 무진스님의 자애로운 미소 속에 진행된 명상수업.. 그 정숙한 분위기가 처음에는 무척 낯설고 어색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이들은 마음을 비워가고 명상을 통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면서 낮았던 자존감이 변화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평소 거칠고 남을 괴롭히는 것에 만족을 느끼던 아이들이 나 아닌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고 거친 행동들이 차츰차츰 부드럽고 유한 모습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명상을 통한 마음 다스리기가 아동들의 삶 속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쳐서 작은 변화지만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게 되고 또 그동안 남에게 했던 행동 중 잘못되고 힘들게 했던 것을 반성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명상을 하면서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자기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느꼈다.’는 아동들도 있어 교사로서 무척 기뻤습니다. 아직 어린아이고 명상을 통해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표현을 잘 못하는 아동들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아이들에게 조금씩 변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센터에서 가장 폭력적이고 남을 많이 괴롭히고 모든 것을 남 탓으로 돌렸던 대표적인 문제아동이 명상 수업 후 동생들을 부드럽게 대하고 말할 때 목소리가 많이 낮아지고 부드러워진 것을 보았습니다. 평소의 거친 행동과 남을 교묘하게 괴롭히고 상대방의 힘듦을 나 몰라라 하는 모습의 그 아동은 여러 번의 외부적 심리치료에도 별다른 변화의 모습이 없었는데 명상 수업을 통해 작게나마 변화가 일어난 것은 무척이나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으로 계속 진행될 명상 수업을 통해 이 아동이 얼마나 많은 변화의 시간을 가질지 무척 기대가 됩니다. 이기적인 아동이 아우르는 아동으로 변화되어가고, 표정이 어둡던 아동이 밝게 변해가고, 늘 불만 섞인 부정적인 말들을 하던 아동들도 명상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모습이 간혹 눈에 띄어 명상 수업을 하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아동들 입장에서나 교사의 입장에서나 무척 기쁩니다. 특히 명상시간에 아동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웃고 엉뚱한 행동을 할 때도 화 한번 내지 않으시고 늘 인자하신 미소로 아동들을 지도해주신 스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명상수업 인연을 지어주신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다음 명상수업 하는 날을 아이들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김경석│파랑지역아동센터 사회복지사


위 글은 2015년, 명상수업 시범운행 후, 파랑지역아동센터 선생님께서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으로 보내주신 편지글 입니다.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에서는 2015년 부터 파랑지역아동센터 정서지원 명상지도 프로그램 지원 MOU협약 체결을 통한 명상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도법사 스님들은 모두 본 대학원의 재학, 졸업생으로,
2015년 무진스님을 시작으로, 2016년부터 2019년 현재는 도우스님께서 진행해주고 계십니다.

파랑지역아동센터 명상수업은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과 NGO생명교육네트워크_공존이 함께 합니다.

기억을 떠올리며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 정념회에 관한 원고를 쓰려니 문득 생각나는 일이 있다.

2005년도이었을 것이다. 큰 태풍과 폭우로 뒷산이 무너져 토사가 건물 안까지 밀려들어온 적이 있다. 지금은 병원 새 건물인데 당시에는 공장건물의 사무동이 있어서 일층은 호스피스 교육장과 숙소로 사용하고 2층은 법당과 집무실 그리고 공양간이 있었다. 그때 거사들이 모여 들어 토사를 며칠에 걸쳐 치웠던 기억이 난다.

 

대만의자제공덕회를 모델로 한 정념회

정념회는 2005930일 발족되었다.

원장스님이 당시 늘 다니던 봉사자들을 차 한 잔 하자고하여 많은 분이 저녁에 모여 들었다. 차를 마시다가 모임의 필요성을 말씀하시며 모임을 만들고 회칙을 정하게 되었다. 원장스님은 대만의자제공덕회를 잘 알고 있었고, ‘자제공덕회를 롤모델로 삼아 그런 봉사단체가 필요하다면서 단체를 만들게 된 것이다.

 

지금의 정념회가 있기까지

그때 모였던 사람들은 충북 청원의 정토마을까지 달려가서도 봉사를 하던 사람들이었다.

부산, 마산, 대구, 울산, 포항 등 각기 사는 곳이 달랐지만 정토마을 홈페이지에서 서로 만나 일이 생기면 달려가고는 하였다.

원장스님이 지금의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이 들어선 울산 언양의 병원부지를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매입을 하였다 보니 늘 힘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 멤버들은 청국장이나 메주 등을 만들어 팔아서 이익금을 보태기도 하고, 원장스님은 전국의 큰 행사가 있으면 다른 스님들과 함께 병원 건축에 대한 홍보를 위해 다녔다. 그럴때는 우리 회원들이 동참하여 스님이 쓰신 책도 판매하고 병원홍보 전단지도 돌리는 방법 등으로 후원자 발굴을 하기도 하였다. 그 회원들이 모여 지금의 정념회가 만들어졌고, 지금까지도 정토마을 병원의 각종 행사 등에 참여하고 있다.

지금은 정토마을의 모든 건물들이 난방이 되지만 그때는 드럼통에 나무를 넣어 난방을 하였다.

그래서 봄에는 공양간 앞의 텃밭을 일구고, 여름이면 비 피해가 있지 않도록 배수로를 정비하였고, 가을이면 뒷산에 올라가 땔감을 구해다가 장작을 만들어 쌓아 놓고, 겨울이면 김장을 하고, 장을 담그고……

한 해에 두 번 정도는 행사가 있었다. 산사음악회며 기공식 등등. 그때마다 밤을 새워가며 음식을 준비하고 다음날 배식과 정리정돈까지 하였다. 매월 둘째 일요일에는 법회를 보고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원장스님이 직접 법문을 하였다. 모임 초기에는 회원이 60~70여명 정도 되어서 지금의 교육관이 꽉 찼었는데, 병원 건물의 건축이 시작되면서 공사기금을 마련하고자 원장스님은 차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전국을 다니시다 보니 법회를 챙기지 못하게 되었고, 그때의 회원들도 이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되다 보니 지금의 활동인원은 크게 많지가 않다.

십년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까닭

십년을 함께 할 수 있었던 힘은 남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우리병원을 짓는다는 생각을 하였기에 꾸준히 이어져온 것이란 생각이 든다. 병원 준공과 개원이란 감격도 잠시 잠깐, 환자가 채워지지 않아 빈 병실이 많다는 소리에 안타까웠는데, 이제는 병실이 부족하다는 말에 안도하면서도 병실을 필요로 하는 모든 분들이 시설을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정토마을은 앞으로 병원도 증축해야 하고 법당불사도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 다시 팔을 걷어붙여야 되겠다. 하지만 스님은 더 넓은 시야를 가지신 것 같다. “이제는 병원도 좋지만 아프리카나 물 없는 나라에 우물을 한 개라도 파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니 부응을 하도록 해야겠다.(2015.여름)

 

송봉관(현묵) 초대 정념회 간사, 현 부회장

입보리행론 제1장 보리심 공덕 찬탄품

보리심을 일으키면 성불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삶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원력만이 아닌 진실된 마음으로 보리심을 일으키면 그때부터 마음이 편안해짐은 물론 인생 자체가 의미 있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의 고통이라는 이름마저도 소멸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보리심은 궁극적으로 성불의 일체종지를 증득할 수 있는 인과의 종자가 되는 것입니다. 무량한 세월 동안 깊은 사유를 행하신 모든 부처님들께서 이 보리심의 유익함을 보시고, 이것으로 한량없는 중생들에게 아주 쉽게 궁극의 안락을 얻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중생들은 고통을 여의기를 바라지만 오히려 고통 자체로 내달리고, 안락을 원하지만 무지로 인해 스스로 자기 안락을 원수처럼 부수어 버립니다.

축생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중생들은 고통을 싫어하고, 행복을 바라며 불행은 누구도 원치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번뇌의 힘에 의해 이끌려 다니기 때문에 한 가지 번뇌를 간신히 조복 받고 나면 그 다음에 또 다른 번뇌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노력을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고통 속으로 내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탐욕을 내고 화를 내게 되면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화를 냄으로써 새로운 마음이 일어나 더욱 더 용기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를 내는 원인 때문에 또 다른 업을 짓게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탐욕과 욕심을 내다보면 이것쯤이야 내가 취해도 되지 않는가, 욕심을 좀 내도 되지 않겠는가 하고 자기 자신에게 자비로워지고 자신을 합리화 시킵니다. 탐욕으로 인해 또 다른 업을 짓게 되는 그런 원인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정도는 내가 자만을 가져도 된다는 자만심과 이 정도라면 괜찮지 않나 하는 자신을 북돋아 주는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질투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질투심을 내게 되면 누가 뒤에서 등을 떠미는 것처럼 더욱 더 질투의 힘이 커지고, 더욱더 그 마음을 크게 일으켜주는 번뇌의 도우미가 반드시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경쟁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경쟁하는 라이벌 의식을 가지게 되면 더 정진력이 생깁니다. 그러나 사실상 그것들은 번뇌가 번뇌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고통을 원하지 않지만 악업에 의해 고통으로 내달리게 되는데 그런 악업의 힘에 의해 번뇌가 번뇌를 낳아 오히려 우리를 더 고통 자체로 내달리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단 보리심을 일으키고 난 후 자신이 악업과 번뇌로 인해서 고통 받은 경험들을 잘 관찰하고 분석함으로써, 그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런 아집이 오히려 고통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업의 뿌리는 바로 아집과 악연이라고 했습니다.

 

입보리행론 제1장 보리심 공덕 찬탄품12

보리심이란 무량한 허공과 같이 무한한 중생들을 그 중생들 모두 나의 부모처럼 보고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해줘야 되겠다는 마음을 내기 때문에 그 생각 자체는 한계가 없고, 선업은 끝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간에 한계가 있는 선업의 마음을 가지고 선행을 쌓게 되면 그 과보가 한 번으로 끝이 나지만, 보리심의 나무는 항상 푸르러 끊임없이 열매를 맺고 시들지 않으며 잘 커나갑니다.

 

보리심 기도문

 

지극한 마음으로

··승 삼보에 귀의하오며,

무지무명으로 지었던 지난 과거의 모든 잘못들을 진정으로 참회하오며,

앞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반야의 지혜와 자비의 방편으로,

보리심을 일구며, 세세생생 보살도의 삶을 살겠습니다.

참회진언 : 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 (3)

발보리심 진언 : 옴 보디지땀 우뜨 빠다야미 (3)

원하옵나니,

이러한 공덕이 일체에 두루 하여

나와 모든 중생들이 극락세계에 왕생하고,

무량수 무량광 아미타 부처님을 뵈어,

다 함께 성불하여 지이다.

 

정토마을 후원 가족들과 저희들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에 귀의하여 배우고 선업을 닦아서

나의 생각 가는대로 착각하는 삶을 살지 않을 것이며, 나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을 것이며, 나의 양심을 속이고 다른 사람이 상처받는 나쁜 말을 하지 않을 것이며, 내가 비록 가진 것이 많지 않다 하더라도 마음을 가난하고 인색하게 내지 않을 것이며, 내가 바르게 노력한 만큼 필요한 것을 적절히 취할 것입니다.

이러한 서원의 기도를 부처님 전에 올립니다.

 

-능행 합장

 

아름답게 늙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어떤 모습이 아름다운노년의 모습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만난 것이호스피스라는 것이다.

살아내면서 가장 두렵고도 알기 어려운 것이 죽음이다. 죽음이란 상황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황하고 놀랍고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댈 것이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런 당황스런 죽음의 상황에서 조금이나마 놀라고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고 죽음의 옆에서도 여유로울 수 있는 마음그릇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일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호스피스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다.

 

지난여름 호스피스교육을 받았다. 그러면서 자재요양병원에서 3일간의 실습 을 하게 되었다. 우린 먼저 중환자실로 향했고, 도울 거리를 찾게 되었다. 중환자실 환자들의 목욕날,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냥 환자를 씻기는 데 손을 보탰다. 그렇게 3일간 환자목욕 시키는 일을 도울 수 있었다. 구석구석 문질러 드렸더니 어르신들이 시원하고 때가 싹 씻긴 것 같아 좋다고 해주셨다. 그런 칭찬에 더 힘을 내어 정성껏 어르신들의 몸을 닦아 드렸다. 아직 서툴렀지만 몸을 맡겨주시는 분들께 듣는 칭찬에 뿌듯함을 느끼며 힘든 줄 모르고 하게 되었다.

목욕봉사를 하면서 늙어 가면서 내 몸 하나 내 힘으로 건사하지 못하고 남의 손에 맡겨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어떨까?’하고 생각해보게 되었다. 궁극적으로 봉사라는 것은 남보다도 나 자신을 위한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나를 위한 것이 남을 위한 것이며, 남을 위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것임을 이번 자재병원에서의 실습을 통해 다시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우리네 인생은 서로 도와가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 같다. 지금 내가 이렇게 조금이나마 보태게 된 힘이, 결국 내 인생의 막바지에 누군가의 도움으로 내게 다가오게 될 거란 생각을 멈출 수 없다.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도록 서로의 공간을 조금씩 내어줄수 있는 마음씨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름답게 늙어가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그렇게 아름답게 늙어가고 싶다. 힘을 보탤 수 있을 때 충분히 정성껏 돌보아 드리도록 해야겠다. 그것이 내 노년을 위한 저축이며, 아름다운 노년을 위한 준비가 될 것이다.

 

이상필│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호스피스 봉사자

 


http://www.jajae-hospital.com/

 

정토마을자재요양병원

세계에서 행복지수 1위인 .. 세계에서 행복지수 1위인 부탄으로 성지순.. 2017.05.25

www.jajae-hospital.com

 

얼마 전 정토마을에 상담을 받으러 온 환자분이 있었다. 그 환자분의 허탈한 웃음 소리가 아직까지 내 귓가에 맴돌며 지워지지 않고 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상담 좀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너무 젊고 생생했다. 게다가 잘 생기고 총명해 보였다.

 

"가족 중에 누가 아프신가요?"

물음에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아픕니다."

"아니, 어디가요?"

"아……. 저, 그게……. 지난 금요일 날에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적잖게 놀랐지만 본인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 레절레 흔들었다.

"어디가 많이 아프세요?"

"아~ 얼마 전부터 만사가 피곤하고 소화도 잘 안 되는 것 같아서 병원에 갔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며 큰 병원으로 가라고 의뢰서를 써주었어요."

"저기, 올해 몇 살이세요?"

"경자생이에요, 마흔다섯 됐어요."

‘어이구,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노.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난 속으로 큰 한숨을 쉬었다.

 

"큰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보니, 글쎄 췌장암 말기라네요. 그는 ‘허허’하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혹시 암이 다른 데로 전이됐나요?"

"간도 이상이 있다고 하네요. 지금은 수술, 방사선, 항암제도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합니다."

 

"가족은요?"

"아내와 아들 둘에 딸 하나가 있고, 부모님을 모시고 삽니다. 제가 외동아들이거 든요."

외동아들이란 말에 나의 가슴은 더욱 아팠다.

 

"가족 중에는 누가 알지요?"

"아직 아무도 몰라요. 특히 아내는 저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거든요. 이제 겨우 서른일곱밖에 안 됐어요."

 

"제가 무엇을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사실은, 제가 무작정 찾아왔습니다.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어서요. 휴가를 냈습니다. 여기서 좀 있으면서 계획을 잡아보려고요."

 

"생존 기간은 얼마나 되시는지요?"

"의사가 오래가면 6개월이고 아니면 3개월 정도라고 하네요. 저는 아직 그 누구도 죽는 것을 실제로 본 적이 없습니다." "무엇을 계획하시려고요?"

"글쎄요, 아직 아무것도. 제가 무엇을 계획해야 하나요?"

 

입술이 하얗게 말라서 타들어가던 환자는 뜨거운 차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나서 중얼거렸다.

 

"이럴 경우엔 어떻게 하면 되나요?"

"가족들에게 말씀드려야지요."

"스님, 아직은 안 됩니다. 정말 이런 병 걸리면 죽기는 죽는 겁니까? 정말 고칠 수 없나요? 3일 동안 인터넷을 다 찾아봤는데 모르겠어요.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전 어떻게 하면 되나요, 네? 죽는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돼요. 안 그래요 스님? 꿈을 꾸는 것 같아요."


"아이들이 몇 살인가요?"

"제가 공부하느라 좀 늦었습니다. 하나는 초등학생, 또 하나는 유치원생입니다. 여기서 좀 머물면 안 될까요?"

 

정말 사형 선고를 받고 곧바로 달려온 환자 같지 않은 환자. 우리는 두 시간 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당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가족들에게도 보내드릴 수 있는 준비가 필요했기에 조금이라도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도록 서울에 있는 대체의학 전문 시설로 보내드렸다. 침착하게 투병하기로 약속하고 그는 서둘러 서울로 떠났다. 그 잘 생긴 눈에 눈물을 흘리며 웃는 웃음소리.

 

"허~허~허~허~허~"

"거사님, 우리 만나지 맙시다. 꼭 성공하세요. 그리고 제가 필요할 때엔 언제든 전화 주세요. 거사님은 이제 혼자가 아니랍니다. 아시죠?"

 

나는 그의 친구가 되어주기로 했다. 어디까지 함께 가주어야 할까. 그를 보내고 났는데도 자꾸만 그의 씁쓸하고도 허허로운 웃음이 머릿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지금 그 친구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

 

 

 

진정한 구도자, 이 분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20여년 이라는 시간을 오직 치유할 수 없는 병에 걸린 이들을 위해 바치신 분, 바로 능행스님이시다. 스님을 처음 만나 뵌 건 방송회의 차 자재요양병원을 찾아가서였다.

 

죽음에 대해 평소 생각해본 적 없던 나는 처음 ‘지금 이 순간’ 이라는 프로그램의 작가를 맡게 됐을 때 사실 걱정이 먼저 앞 섰다. 누구나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무섭고 두려운 느낌이 들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죽음은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능행스님을 만나기 전인 불과 몇 달 전까지, 20대의 난 그렇게 생각했다.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곳이었다. 병원을 이야기하면서 아름답다는 표현이 조금 아이러니할 수도 있지만 내가 그 곳에서 느낀 것은 그 표현이 딱 알맞은 것 같다. 하나같이 밝은 미소를 띄고 계시던 호스피스 봉사자 분들, 심지어 심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고 계실 오가는 환자분들의 표정에서 더는 아픔이 아닌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회의를 마치고 능행스님은 PD님과 나를 임종을 앞두신 한 보살님이 계신 곳으로 인도하셨다. 병실 안, 침상 위에 누워 계신 보살님은 암 환자이신 듯 했다.

방송을 통해서나 본 모습처럼 무척이나 야위셨고, 마치 돌아가신 것처럼 잠들어 계셨다. 하지만 스님은 그 분이 아직 떠나신 게 아니라고 했다. 임종하시는 분의 모습을 처음 본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고, 마음속으로나마 그 분의 극락왕생을 발원했다. 그런데 그 분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의 표정이 저렇게 편안해보이시는 걸까?’

죽음에 대한 어떤 두려움, 공포, 슬픔 등의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마치 행복한 여행을 떠나시는 것처럼 그 분은 그런 표정으로 편안히 누워계셨다.

 

병실을 나와 점심공양을 하기 위해 가려다가 한 젊은 보살님을 만났다. 많이 운 듯한 눈에 잠을 주무시지 못한 것 같은 얼굴을 보아 환자의 보호자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보살님을 따라 들어간 한 병실, 그 곳엔 얼핏 보아도 20대로 밖에 보이지 않는 남자 환자분이 침상에 누워 계셨다.

‘내 또래인 것 같은데 저렇게 젊은 사람이 왜 이 곳에……’나는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능행스님은 누워 있는 환자의 손을 잡으시고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셨고, 환자분은 스님께 마치 “괜찮아요.”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환자분의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식을 먼저 보내야하는 부모님의 마음이 느껴져서였을까? 안타까움에 가슴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그 날, 자재요양병원을 가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능행스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난 어쩌면 아직도 죽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난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능행스님을 만나고,‘지금 이 순간’작가인 지금의 나는 너무나 행복하다.

그 언젠가 죽음이 내 앞에 다가왔을 때 나는 웃으며 말할 것이다. 기다리고 있었노라고, 잘 살다 떠난다고……

한치 앞을 모르는 것이 우리들 인생이고, 누구나 죽음은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현재 건강한 것에 감사하고 지금 이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면서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고 싶어졌다. 누군가가 말했듯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그렇게.[2014.봄]


김윤지BBS불교방송 작가

2005년 늦은 가을 선배로부터 책을한권 선물 받았다. 능행스님이 쓰신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불심이 깊은 선배라 “또 스님이 지은 책이네~”하고 별 호기심 없이 책장을 넘기다가 가슴을 벅차게 만든 무언가에 한바탕 울며, 간호사로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간호대학을 졸업 후 종합병원에서 보냈던 3년 동안 조직사회의 치열하고 삭막함에 실망하였고 사람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게 되면서, ‘다시는 간호사 일을 하지 않으리라’다짐했다. 그리고 언어 치료사로서의 새로운 삶을 찾게 되었다.

자폐, 구순구개파열, 뇌성마비, 정서장애, 지능지체 아동에게 언어를 가르치면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서울, 대구 등 배움의 기회도 찾아다니면서, 조그마한 성과에 기뻐하고 감사하며 보냈었다. 물질적으로 풍족하지 못했으나, 내 인생에서 정신적으로 가장 충만하고 행복한 5년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경제적 독립이 필요했고, 사회가 요구하는 사회인이 되기 위해서는 봉사가 아닌 직업이 필요했다. 다시 시작된 간호사 일은 뚜렷한 방향의식 없이 단지 직업인으로서의 생활이었다.

 

매너리즘이란 마약에 중독되어 살아온 16년은 안락함만 추구하며 살았었다. 맛있는 것을 찾고,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곳만 돌아다니며, 지금 이 순간 행복하게 지내는게 최선이라 여기며 미래에 대한 생각을 접고 현재의 시간을 즐겼다.

문득 고개 드는 허허로움……

과감히 종지부를 찍는다. 내가 무얼 하고 싶었는지 기억이 났다. 가족과 헤어져 살아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내 맘을 충족시킬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이윤이 목적이 아닌 병원.

후원자의 손길로 15년 동안의 염원이 이루어진 곳.

18년 동안 능행스님의 원력으로 세워진 곳.

 

이곳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일하는 직원이 행복해야 한다며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부족한 기자재나 임금을 마련하기 위해 탁발을 떠나시는 원장스님의 뒷모습에서 경이로움이 느껴지고 후원자의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곳이라며 휴지 한 조각, 물 한 방울, 전기 하나 라도 아끼려는 직원들에게서 감사하는 마음이 느껴지고, 먼 곳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깨끗이 청소를 하고, 환자의 식사, 목욕수발, 산책을 도와주는 봉사자들에게서 행복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난 하염없이 마음이 수그러든다.

 

이제 나는 호스피스를 담당하는 간호사 생활을 준비 중이다. 이 병원을 선택한 목적이고 이유이기도 하다. 아직은 너무 부족하고 배울게 많은 준비생이지만, 내가 살아가는 나머지 생의 보람이기를 바라며 이 길을 시작했다.

 

나는 간호사로서 그 분들의 남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멀리 가시는 그날까지 그 때를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안위를 도모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가지게 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분들에게 동반자가 되어 무섭지도 외롭지도 않게 하고 싶다.

 

호스피스는 진정 구도의 길이며 수행의 길이어서 멋진 수행자가 되는 것이라는 능행스님의 말씀처럼 이 길을 통하여 내가 그 분들을 돕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그 분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멀리 가는 그날을 편안하게 안식과 함께 맞을 수 있기를 바란다.

주위 모든 사람들이 함께 웃으며 이 길을 걸었으면 한다.

 

오늘도 환자들은 암이라는 무거운 병을 지니고 어쩌면 마지막 입원이 될 수 있는 인생의 마지막 묵어가는 여관에 속속 도착한다. 자재요양병원으로……[2013.가을]

 

이경화 님은 현재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병동 팀장 소임을 맡고 있습니다. 위에 글은 병원이 개원한 2013년 호스피스병동을 준비하며 정토마을 계간지에 실어주신 글을 8년이 지난 지금 다시 옮겨 실었습니다.

 


「간호사로서 환자들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주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며 큰 사명이기도 합니다. 2013년 병원 개원당시부터 현재 요양병원 호스피스시범사업기관으로 선정되어 10병상을 운영하기 까지 떠나는 이와 떠나보내야 할 사람들의 가슴 아픈 사연들로 함께 상실감을 경험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임종 후 8시간, 엄숙하며 애틋한 그 시간까지 그동안의 삶의 의미를 담아 아름답게 마무리 할 수 있도록 함께 동행하겠습니다.」

 

 

이경화(수간호사)│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병동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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