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마을 교육원에 들어서면 환한 미소로 반갑게 맞이하는 똑순이 이영실(법명. 별리) 부장이 있다. 자신의 속명 보다는‘별리’라는 법명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소탈한 성품의 그녀는 기관의 부장이라는 직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권위를 찾아 볼 수 없이 온몸으로 일을 한다.
그런 그녀가 능행스님과의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07년 9월 정토마을 마하보디에 입사하면서 부터다. 그녀는 입사 이전까지 이주노동자 인권을 위한 활동을 도왔다. 그렇게 열정을 다했던 5년의 활동을 접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딸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던 어느 날, 우연히 공중파를 통해 능행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다큐 ‘삶의 끝에서 길을 묻다.’를 접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 놓여있는 환자들과 그들을 돌보는 능행스님을 발견하게 된 것 이다.
당시 이영실 부장의 눈에는 스님의 열정도 돋보였지만 무엇보다 그 뒤에 드리워진 고독의 긴 그림자가 보였기에 잔잔한 여운은 오래도록 그녀의 뇌리에서 떠나질 않더란다. 그 진한 감동을 안고 지내던 2년 뒤, 우연히 신문에서 정토마을 직원 공개 채용 광고를 보고 반가움과 벅찬 기대로 응시를 하게 되었다고. 물론, 감사하게도 합격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정토마을과 이영실 부장의 본격적인 인연이 주어진 것이었다.
마하보디 교육원은 그녀가 입사하던 2007년 9월 개원을 했고 지금의 자재요양병원 자리에는 문을 닫은 허름한 공장 건물만 있었으니 불모지나 다름 없는 모습이었다. “그 막막한 시절에 하나 둘 봉사를 오신 분들이 자발적으로 자원봉사단을 꾸렸어요. 교육원 개원까지 불철주야 헌신해 주신 분들은 1호 봉사단 ‘정념회’였어요. 말 그대로 밤을 새우며 행사를 준비해 주셨기에 초창기 교육원은 기반을 다질 수 있었던 겁니다. 이름을 한분 한분 거명할 수는 없지만 정념회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며 초기의 상황을 차분히 들려주고 있었다.
연일 병원의 개원 업무와 법인의 업무 등 과중한 일상에서도 눈살 한번 찡그리는 법이 없는 그녀에게 “가장 큰 보람으로 다가서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라고 물었다.
주저 않고 들려주는 말, “교육을 이수한 수료생들, 스탭들이 하나 되어 서로 교감을 느끼는 순간 입니다. 그 순간은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의중을 읽을 수 있으며 ‘참 이 길을 잘 선택했구나.’라는 환희심으로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끼지요.”라며 환하게 웃는다.
그리고는 기억에 남는 순간을 낱낱이 들려주었다. “교육원 개원식 때의 일입니다. 개원 며칠을 앞두고 한통의 전화를 받았지요. 어느 비구스님이셨습니다. 스님은 ‘몸이 불편하지만 개원식에 꼭 참석하고 싶다. 강원도에서 가는데 위치를 알려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개원 당일 건강이 허락지 않아 못 가게 되었다는 통보였지요. 허나 정토마을에 꼭 가고 싶다는 말씀과 함께 산골의 토굴에서 생활하는 당신에게 소식지 보디사트바를 보내달라는 부탁을 하셨습니다.
그때로부터 7년이 흐른 지금도 스님은 가끔 전화를 주시곤 하는데 그때마다 스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비단, 그 스님 뿐만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그런 유사한 전화를 해 주시거나 격려를 보내주시기에 임직원들은 지칠 줄 모르고 원장 능행스님과 운명을 함께 할 수 있지 싶습니다.”며 잔잔하게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이제 마하보디교육원은 불교호스피스교육으로 그 명성이 자자하다. 이유인즉, 올해로 불교전문 호스피스교육이 20년을 넘었고 그 수료생들 또한 2천여 명에 이르러 그들은 생과 사를 넘나드는 현장에서 최고의 손길을 펼치고 있다. 선배가 되고 후배가 다시 태어나는 오랜 전통이 이곳 교육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바로 그 불교호스피스교육의 역사와 노하우를 이영실 부장의 입을 통해 듣게 되는데 그녀의 애정과 자랑을 옮기자면 이러하다. “20년 전통의 독보적인 비법은 전통과 변화의 경계를 아우르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시대에 아날로그를 사용하면 뒤떨어진다는 생각으로는 창의적이지도 않으며 전통을 지킬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두 가지가 고루 섞이어 시너지 효과를 내게 될 때라야 어느 분야든 빛을 발하게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저희 공동체는 자원봉사자와 후원자가 이루어내고 지속 가능하도록 큰 버팀목이 돼 주고 있는 특별한 공동체입니다.”라며 교육원의 현재와 미래를 꼼꼼히 짚어주는 그녀이다.
그런 이영실 부장에게 바람을 물어봤다. “공동체의 가치와 사명을 우리가 맡은 소임에 담아 가꾸고 키워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이 숭고한 정신이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일입니다. 제가 그 일원으로서 자비를 실천하고 생명을 존중하며 의식을 성장시켜나가는 진정한 정토인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녀의 모습에서 굳은 결의가 느껴지며 참 아름답고도 귀한 존재라는 생각에 마음은 한량 없이 높아지고 있었다. 마치 청량한 바람을 몰고 온 가을 하늘처럼.[2013. 가을]
불교 호스피스교육 2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오르면, 정토마을 공동체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 한다. 정토마을 공동체는 돌봄과 수행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의료와 교육으로 사회에 공헌하려는 비영리 단체다. 정토마을 공동체는 1988년 불교 봉사단체 ‘자비회’라는 15명의 봉사자로 시작하여 1989년 5월 말기환자를 대상으로 호스피스활동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임종까지 동행 하는 호스피스 영적 돌봄은 전문적인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였고, 그리하여 4년 후 1993년 5월 아미타호스피스회를 창립하여 불교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불교전문 호스피스교육을 실시 하면서 현재까지 2,000명의 수료생을 배출하였다.
교육에 있어 정통이 있다는 것은 적어도 인기에 편승하지 않고 교육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때문에 불교 호스피스교육에 함께 했던 강사진, 진행요원, 수료생 모두 20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한 사람으로서 서로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교육생을 지지하러 방문한 선배는 “어느 한 순간도 소중하지 않은 때가 없었노라”고 회상에 잠긴 말을 간혹 남기고 간다. 그 순간의 감동을 다시 느끼고 싶은 듯하다.
Are you happy ?
불교호스피스를 처음 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스피스=네가티브(부정적)로 인식한다. 죽음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깊은 고찰이 필요한 지점이다.
불교 호스피스교육 20년 역사를 이끌어 오신 능행스님(정토마을 재단이사장)께서는 언제부터인가 대중들에게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하신다.
수없이 많은 환자들을 통해 죽음을 지켜보신 스님께서 행복하냐고 물으시면, 사람들은 멈칫 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람들은 “행복은 무지개 너머에 있다.”라는 보편적인 결론을 잘 알고 있지만 멈칫하게 되고 끝내는 다양한 답을 한다. 하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불교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도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답하지 못한다.
2010년 11월, H 대학교에서 능행스님께서 ‘행복’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게 되었다. 그날 스님은 청년들에게 불교적 관점에서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강연 내용을 일부 요약하여 실어 보았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일시적이고 감상적인 관심만 보일 뿐 죽음을 대화의 주제로 삼는 것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며, 또 그런 주제를 입에 담는 것조차 민망한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무관심이 이미 죽음에 대해 확고하고 초연한 자세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다고 보기도 어렵다. 사람들이 죽음의 문제를 외면하는 이유는 죽음에 대해 초연하기 때문이 아니라 4층을 F층이라 부르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죽음은 부정이요, 금기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죽음을 꺼리고 혐오하거나 죽음에 대한 언급조차 금기시 할 것이 아니라, 인간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을 대비하는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하여 죽음에 대한 지식과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과 그 가족들을 돕는 방법 등을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교육은 노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 모두에게 해당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죽음이란 바탕 위에 삶이란 집을 짓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과 동행하는 삶 위에 눈부신 빛이 있다. 이것은 자신의 삶에 스스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긍정적 사고의 관점이다.”(능행스님 강연 내용中)
강의가 끝나고 스님은 다시 청년들에게 물었다.
“행복하십니까?”
질문에 죽음이 배제되지 않기를 바라며 함께 강연장을 나왔다. 불교호스피스교육 20년 호스피스를 하고 있는 혹은 경험했던 우리에게 다시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조용히 누워 있는 어미에게 어린 딸이 꽃을 꺾어 손에 쥐여 준다.어린 딸을 홀로 이 땅에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어미. 그 어미의 식어가는 가슴에 어린 딸은 슬며시 함께 드러눕는다. 뼈만 앙상한 어미의 가슴을 만지며 식어가는 어미에게 자신의 따뜻한 체온을 나누어주고 있나보다. 강물 처럼 출렁이며 아이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보고 있으니 나 역시 눈물 이 흐른다.
한 시간이 지나도 아이는 어미 곁에서 떨어지지 못하고 죽어 누워있는 어미의 가슴팍에 온몸을 묻고 나란히 누워 있다. 아버지는 뜰에서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나뭇가지를 붙잡은 채 쪼그려 앉아 있다. 이 세상에 남은 가족은 이제남편과 딸 둘 뿐이다.
엄마 이제 그만 보내드리자고,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어린 저 딸에게 어떻게 이야기할까 망설이는데, 새들은 눈치도 없이 맑은 목소리로 지저귀고 산사의 풍경소리는 왜 이리도 청명한 것인지…….
"엄마, 엄마~."
아이는 조그마한 손으로 어미의 가슴을 만지며 흐느꼈다.
"울지 마라. 제발 울지 마라, 아가야! 너는 나의 그림 자요, 너는 내 삶의 의미요, 너는 나의 기쁨이요, 너는 나의 사랑이란다."
아내를 살리려고 애쓰던 남편이 아이에게 말했다.
서로의 그림자처럼 함께 살던 비둘기 부부가 정토에 온 것은 지난 늦은 가을이었다. 남편은 오직 아내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 하나였고, 아내 역시 그런 남편을 홀로 두고 갈 수 없어 꼭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며 정토에서 추운 겨울을 보냈다. 어쩌면 그렇게도 두사람이 서로에게 지극 정성 일 수 있을까.
구녀산 자락에 참꽃이 붉게 타오르고 매화 향기 가득한 봄날, 보살님께서는 창문 너머 저만치 피어있는 대문지기 참꽃 두 그루를 보고 기뻐하셨다. 몸은 야윌대로 야위어 뼈와 가죽만 덮인 앙상한 모습이었지만 소녀처럼 아름다웠다. 기력이 떨어져 점점 처지는 두 손을 힘들게 모으고, "스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저는 행복합니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얼마 후, 볼 일이 있어 남편이 잠시 아내 곁을 비울 일이 생겼다. 남편은 영 불안했는지 가는 도중에도 몇 번이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 결국 핏기 하나 없는 아내가 남편에게, 나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라며 젖먹은 힘까지 다 해 힘겹게 말했다. 모처럼 남편이 자리를 비운 잠깐 동안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스님, 저 안 울어요. 저 절대로 안 울어요."
마음속으로는 피보다 더 깊은 오열을 쏟아내면서도, “스님, 저 절대로 울지 않아요. 울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 그래 울지 마요!"
"스님, 결혼생활 20여 년 동안 내 자신의 삶은 없었습니다. 아직 어리지만 그냥 딸아이를 믿고, 그리고 아빠도 잘 살것이라 믿고 이젠 가렵니다. 이렇게 가도 되겠지요……? 전 요즘 꿈만 꾸면 웃고있는 제 모습이 보입니다. 그래서 잠이 들면 정말 행복 하답니다."
꿈 속에서 세 사람의 고운 소녀가 당신을 시봉하고, 당신이 걸어 다니는 곳마다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고,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너무나 친절히 맞아주어 너무 행복하다고 말하는 보살님. 아마도 목숨이 다하면 그런 곳으로 갈 것 같다며 무척 행복해했다. 나는 부디 정신을 맑게 하시고, 떠나시면서 일념으로 아미타불을 염송하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날 늦은 저녁 에 남편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
수화기를 들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남편이 아내를 불러놓고 하염없이 우나 보다. 혹 당신 없는 사이에 아내가 저 세상으로 떠날까봐 무척 두려운가 보다. 밤이 새고 나면 부리나케 달려올 남편. 전화를 끊고나서 아내가 내게 말했다.
"남편과 딸아이가 너무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일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습니다. 어서 저를 죽게 해주세요. 제발……."
부처님, 이럴 땐 정말 어찌해야 좋습니까? 부처님! 굽어 살펴주소서. 남편과 딸아이가 자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빨리 죽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저 보살님을 제발 도와주소서.
며칠 후 나는 남편을 불러 차분하게 말했다. 부인께서 어느 날 혼수상태에 빠지면, 그땐 정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니 부인 마음 편히 가시도록 이야기 하시라고. ‘여보! 잘 가거라. 나도 때가 되면 당신 곁으로 가마. 나 잘 살거다. 건강하게 아이랑 잘 살다가 당신 간 곳으로 나도 갈게. 그러니 아무 걱정 마라’하며 서로 행복을 빌어주는 작별인사를 해 주시길 부탁드렸다. 남편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네, 스님 올라가서 이야기 좀 해볼께요."
그분이 앉아 있던 바닥에는 눈물자국이 흥건했다.
사랑하는 어린 딸과 남편을 두고 세상을 떠날 것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짐에 피눈물을 흘리던 보살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합니다. 행복합니다. 울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몸이 앙상하게 야위어가는 죽음 앞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보살님. 엄마품에 매달려 그렁그렁 맺히던 아이의 눈물과, 헤어짐에 고통스러워 하던 남편의 눈물……. 이생에서의 이별과 슬픔은 얼마나 깊고 질기고 아픈 것일까.
저 대문 곁에 핀 참꽃이 제 아무리 예뻐도 열흘을 못 간다 하니, 우리 인생이라고 별수 있으리. '만나지 말아야지, 만나지 말아야지, 애달픈 인연일랑 만나지 말아야지.' 생각하는데 나도 모르게 그 곱고도 아린 가족들의 눈물이 자꾸만 내 눈 속에 후두둑 참꽃으로 피었다가 진다.
결혼을 몇 달 앞둔 26세의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아가씨가 정토마을에 찾아왔다. 애인의 손을 잡고 아버지와 함께 이곳에 온 그녀. 며칠 전 친구랑 회를 먹고 급체한 것 같아 병원에 갔다가 급성 위암 말기라는 진단에 그것도 생존기간이 불과 2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선고를 받았다.
"돈이면 다 되는 이 세상에 왜 돈을 준다고해도 저 아이를 못 살리는 거예요. 말도안 돼요. 이럴 순 없어요. 살려야 해요. 스님,제발 살려주세요."
며칠 후 검은 색 가방에 현금을 가득 넣고 찾아 온 어머니가 돈을 내 앞에 패대기치면서 두다리를 뻗고 통곡했다.
하루 이틀 환자의 몸은 점점 말라가고 물 한 모금 삼킬 수 없는 고통을 밤낮으로 겪으면서도, 죽음이 무엇이며 어떻게 죽는 것인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고 생각해 본적도 없는 듯했다. 부모는 아이를 살려보려고 완전히 미친 사람이 되었고,더욱이 아버지는 곡기마저 끊어버렸다. 자식의 병이 자기 잘못이라는 죄책감과 아버지로서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미안함 때문에 그녀의 아버지는 더 괴로워했다. 그리고 전국을 뒤지며 약과 의사를 찾아 헤매다가 어디서 구했는지 불로초란 것을 가지고 와서는 한 모금의 물도 넘기지 못하는 자식에게 조금만 삼켜보라며 빌고 또 빌었다.
"스님! 나는 병원 앞을 하루 두 번씩 매일같이 출퇴근하며 지나치면서 저 병원에 누가 있고 어떤사람이 입원해 있는지 한번도 관심을 가져 본 일이 없었습니다. 시장 바닥에서 돈 버는 일에만 미치다 보니 병원 병실의 불이 왜 밤새 켜져 있는지 몰랐습니다. 뭐하느라 저렇게 불을 켜놓았나? 하는 생각만 했을 뿐, 세상에 암 환자가 병원에서 이토록 많이 죽어가고 있는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더욱이 내 새끼가 이렇게 죽을거라고는……."
정원에 서 있는 작은 나무를 붙들고 주저 앉아 아버지는 아이가 들을까 소리 죽여 몸부림치며 통곡했다.
"실려야 해요. 꼭 살릴 겁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곁에 앉아 휴지를 잘라주다가도 몇 번씩이나 쓰러졌다.
"엄마! 아프지 마. 나는 어떻게 해? 선생님, 우리 엄마 주사 좀 놔주세요."
아무 것도 먹지 못하면서도 딸아이는 늘 밝게 웃었다.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이에게 죽음을 준비시키는 일보다 곤혹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
어느 조용한 오후,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머리와 얼굴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사랑하는 저 사람은 어쩔래?"
그녀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떳다가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스님! 나 못 살아?"
"최선은 다해보겠지만... 너는 요즘 너의 증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네, 저도 조금 알 것 같아요. 어렵다는 것...."
"그렇게 생각했어?"
"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빠 그리고 엄마, 동생, 또 네가 사랑하는 저 사람들 말이야.
"모르겠어요. 그런데 스님! 죽으면 모든 것이 다 끝이예요?"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엄마는 절에 다니시지만 저는 종교에 대해 잘 몰라요. 하지만 난 요즘 내가 정말 살 수 없다면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안 되나요?"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은데?"
"네, 다시 여자로 태어나고 싶어요. 그리고 여섯 살이 되면 스님에게 와서 스님 제자 될래요."
그렇게 말하며 활짝 웃는 그녀의 미소가 너무 아름다웠다.
"저 정토마을에 와도 되죠?"
"그럼"
"스님, 제가 어떻게 해야 다시 태어날 수 있죠?"
"자, 봐라. 극락이라는 세계. 들어봤지? 그 세계의 부처님이시지. 우리 같은 중생들을 죽음이 없는 극락세계로 이끌어 주시는 분이셔. 그곳에는 아미타불 부처님이 계시고 관세음보살님도 계시지. 아름다운 연꽃 속에서 태어난단다. 지금부터 네가 부처님께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고 극락에 태어난다는 지극한 믿음으로 나무아미타불을 계속부른다면 고통 없이 부처님의 자비로운 품에 안겨 극락에 태어났다가 네가 원하면 다시 이 땅에 태어날 수 있단다. 우리 한번 부처님 불러 볼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삼귀오계三歸五戒를 주고 염주도 하나 선물로 손에 쥐어주었다.
얼마 있지 않아 아버지는 딸아이에게 새로운 치료를 받게 해야 한다면서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며칠 후 그녀가 날 찾는다는 전화가 왔다. 부랴부랴 서둘러 갔더니 어느 중국 한의사가 그녀의 병을 낫게 해준다고 아버지에게 약속했다며 그녀의 온몸에 뜸을 뜨고 한 뼘이나 되는 침을 놓는 바람에 몸은 만신창이가 됐고, 방의 온도는 35도를 넘어가고 있었다. 어떻게든 딸아이를 살려보고 싶은 아비의 마지막 몸부림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그녀가 날 보자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나 극락으로 가야 하는데,스님이 곁에 없어서 너무 걱정했어요 스님이 아미타불 노래를 불러줘야 제가 따라 부르죠."
나는 그녀를 무릎에 누이고 아미타불 노래를 들려주었다. 온 식구가 초주검 상태였고, 어머니는 애를 죽인다며 펄펄 뛰었다, 오! 지옥이 어찌 죽어서만 있으랴... 아버지가 없는 틈을 타 구급차를 부른 후 그녀를 병원에 입원시켰다.
입원한지 나흘째 되던 날,그녀는 비로소 나와 함께 삶의 보따리를 싸기 시작했다. 예쁜 발찌도 빼고 옷이랑 그림, 그리고 종이학 천 마리 등등... 하지만 예쁜 백금 귀고리는 여전히 걸고 있었다.
"귀고리는?"
"스님, 귀고리는 빼지 마세요."
"왜?"
"다음에 제가 정토에 찾아오면 스님이 날 어떻게 알아봐요. 귀고리를 하고 와야 저인 줄 알지요."
"그래, 그게 좋겠구나!"
"우리 그때 다시 만나요."
"그래, 이놈아! 아미타부처님 만나서 극락에 가거든 잘 갔다고 꼭 전해줘야 해. 알았지?"
그녀는 오후부터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무릎에 누이고 함께 아미타불 노래를 불렀다. 의식은 초롱초롱 맑았지만 어느새 혀는 점점 말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미타불을 부르는 모습이 안타까워 나지막이 그녀의 귀에대고 말했다.
"마음 속으로 해도 된단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극락세계에 가고싶니?"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를 위해 기도했다.
"부처님! 어서 이 곳으로 강림하소서! 당신의 나라에 태어나기를 이토록 서원하는 이 아이를 당신의 감미로운 능라로 감싸 안아 주시옵고, 당신의 품에 편히 안기어 정토에 태어날 수 있도록 대자비를 베푸소서. 이 맑은 영혼을 당신의 손에맡기나이다. 거룩한 님이시여! 사십팔원四十八願 원력願力 바다로 돌아가 당신의 자비를 구하오며 이 몸 던져 비옵니다. 나무아미타불"
그녀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부처님 오셨니?"
그녀는 아주 아름다운 모습으로 웃었다. 잠시 병실을 비웠던 어머니가 들어오자, 두 손을 벌려 제 어머니의 목을 끌어안았다.
"엄마!"
"여기 있어."
나무아미타불 염불과 함께 조금 후 숨소리가 멈추었다.
"잘 가거라"
어미는 한참동안 죽은 딸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 울다 지쳐 쓰러진 어머니의 꿈에 그녀가 나타났다.
"엄마! 나 부처님이 안고 갔다. 병원에 올 때는 걸어서 왔는데 부처님이 날 안고 극락으로 가셨다. (뜸 뜬자리를 보여주며) 엄마, 이것 봐. 부처님이 다 없어지게 해주셨어. 나 이제 하나도 안 아프고 흉터도 없어. 아빠 용서해 주고 잘 살아.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나는 너무너무 좋아! 스님께도 꼭 말해줘. 나 극락세계 갔다고. 그리고 부처님이 날 안고 있다고. 엄마 가게 장부 저기 있는데, 불쌍한 사람들 것은 받지 마. 응? 내 차로 운전 배우고. 엄마! 나 이제 간다"
고향이 거제예요. 저의 부모님이, 아버지가 어부였어요, 배를 타고. 그래서 배를 타러 가면 3년 만에 한 번씩 오는 어부인데, 제가 태어난 그곳은 산과 들과 바다가 있는 아주 아름다운 곳이에요. 앞에 가면 바다 있고, 우리 살고 있는 넓은 들이 있고, 뒤에는 아주 아름다운 산이 있고. 마을 구성이, 동네가 가구수가 되게 많았는데, 가족공동체로 할아버지, 할머니, 다른 집도 할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뭐 이렇게 대가족 속에서 태어나서 그 동네도 하나의 가족공동체 구성으로 이렇게 살았던 거 같아요. 그래서 이 집 애도 이 집 애고, 이 집 애도 이 집 애라. 서로서로 봐주고 이렇게 다함께 공유 하고 분담하고. 이런 구조 속에서 제가 태어났어요.
우리 할아버지는 침을 놓는데, 소에게도 침을 놓고 사람에게도 침을 놓아서 고치는 할아버지였는데. 제 기억속의 할아버지는 갓을쓰고 하얀도포를입고, 어디를 갔다 오시기도 하고. 침을 놓으러 갔다 오셨던 거 같애, 침통을 들고. 그 다음에 아침 저녁에는 밭에서나 논에서 일을 하셨어. 일을 엄청 많이 하는 우리 할아버지였어. 우리 할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는 다 만주로 가셨답니다, 독립운동하러.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부터 홀로 컸대요, 동생들이랑. 그래서 늘 우리 할아버지는 집안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어요. 아버지 어머니가 만주로, 당신 아버지 따라 어머니가 만주로 갔지만, 독립운동을 하러 갔다고 생각해서 굉장히 긍지심을 가진….
저는 부모가 결혼하고 좀 늦게 태어났어요. 저가 맏이인데, 6년인가 있다가 태어 났대요, 굉장히 많이 바랬는데. 그렇게 태어났는데, 저희 할아버지가 제 태몽 꿈을 꾸신 거예요. 당신 생각에는 아들이라 보셨던 거 같애. 그 꿈이 매우 상서롭고 훌륭한 인재가 태어나는 꿈이었다고 당신이 인제 생각하신 거 같애.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가 태교를 너무 잘 하신 거예요, 며느리에게. 얘기를 들어보면 시골에서 농사도 짓고 막 이래야 되잖아요, 밭도 매고. 그런데 할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입태를 했다는, 들은, 알고 난 순간부터는 그다음 부터 안 시켰대. 김도 매러 나오지 마라, 개울도 여기서 여기로 펄떡 뛰어 건너지 마라. 태교를 잘했대요. 모든 손자손녀에게 다 그런 건 아니고, 당신이 태몽을 꿨기 때문에 이 아이는 필시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당신이 투자한 거죠, 그죠. 우리 집안을 이 아이가 살릴 거다. 항상 집안을 중요시 했는데, 거기서 우리 할아버지 생각에 ‘하, 뭣이 하나 태어나서 집안을 다시 세울라나’ 이렇게 생각을 하시고 투자를 하신 거 같애.
태교를 아주 잘 했대요. 어머니도 굉장히 정적이시고 해서. 제가 안전한 환경, 좋은 환경, 어머니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그런 안락한 환경에서 제가 잘 자랐고. 그 다음에 인제 거기가 바닷가니까, 그때 당시에 이런 시골이나 산골마을에는 먹을 게 없었다 그래요. 보리 뭐 이런 거 밖에는. 거기는 생선도 많고, 쌀, 보리, 산도 있으니까. 모든 게 다 풍요로워서, 그런 섭생이 매우 좋았던 거 같애요. 제가 정말 건강한 몸을 가지고 태어났거든요. 지금은 일을 하도 많이 해서 인제 이렇게 늙고 야위고 이랬지만, 굉장히 제가 팔도 엄청 굵고 건강한 몸으로 태어났는데. 태교를 정말 잘, 할아버지가,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제공해주셨고. 그 다음에 제가 태어나서 (아들이 아니라서) 많이 실망하셨지만, 그 이후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한테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고. 그러고 한 열 살 때까지는 정말 좋은 환경에서 제가 아주 잘 자랐어요.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올바르게 잘 컸어요. 스님이 아주 부지런하고 똘똘했대요. 심부름을 잘했대요. 담배 사와라 이런 것도 참 잘 사다주고. 그런 거 잘했대요. 그래서 동네사람들에게도 많이 귀여움을 받았던 거 같애.
할아버지의 한마디
스님이 성이 여가예요. 속가의 성이 여가인데, 우리 할아버지가 한 내가 여덟살 때나 되었을 때 우리 혈통에 대해서 말해줬어요. 여가는 중국 성이래요. 시조가 진시황인거야. 여불위1 아들이 진시황이잖아요. 우리 할아버지가 어린 나를 데리고 앉아서, “너는 황족의 피를 받았어, 니가 혈통을 잘 알고 살아야 해. 그러니까 공부도 잘해야 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돼, 착한 사람이 되어야 돼, 남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 해.” 그런 이야기를 한 거예요. 이 이야기가 끄트머리는 나중에 생각한 거고, 다른 건 다 없어지고, 사라지고, 딱 하나 남은 게. “너 혈통이 황족이다.” 이렇게 말한 게, 엄청난 자존감과 자긍심이 만들어 졌어요. 나 어른 되어서는 진짜 맞는지 족보를 막 이렇게 역사적으로 찾은 적이 있어요. 중국의 영화를 비디오로 다 갖다 빌려보면서 진짜 맞나, 여불위가 어떤 사람이고, 진시황이 어떤 사람인가 막 이렇게 찾아보려 애썼던 적이 있어요. 우리 할아버지 했던 말이 정말 맞나. 지금 가만 살펴보면, 아, 근거가 없는 얘기는 아니었고, 우리 할아버지가 왜 나에게 손자가 엄청 많은데 그런 얘길 했을까. 당신의 꿈이 이뤄지지 못한 상실감에 대해서 나한테 그렇게라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그때는 뭔 말인지 몰랐고, 어리니까. 아무 경위 없이 내 할아버지가 심각하게 했던, 그 진지하게 말했던 그 말씀을 제가 기억하고 그 단어자체만 가지고 스스로, 아, 나는 남과 다른 사람이구나. 딱 고 한 마디만 남아서, 이 거친 세상을 안 넘어지고 잘 살 수 있었던 거 같아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자빠져도 다시 일어나고. 그때 만들어진 자존감과 자긍심이 지금까지 내가 세상을 사는데, 그게 바탕이 돼요. 많은 사람들 사랑하게 되고, 돕게 되고. 그들의 고통을 통해서, 그들이 고통에서 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저들이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는 원초적인 바탕이 할아버지의 한마디가 아니었을까.
열 살 가장
「그 시절엔 왜 그리 먹을 게 부족했을까. 산천에 쑥이 자랄 때쯤엔 동무들과 산과 들을 분주하게 오갔다. 학교에 갔다 와서 주린 배를 안고 땔감을 하러 산에 가면 이 산 저 산에 창꽃이 피어 있었다. 낫도 팽개치고 창꽃을 한입 가득 따먹었다. 그러다 목이 마르면 옹달샘 물을 두 손 가득 채워 벌컥벌컥 들이켰다」
제가 열 살 때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했습니다. 학창시절에 가끔 선생님들이 너는 소설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해준 선생님이 한분 계시긴 해요. 그 선생님이 그리 말했다고 내가 소설가 되는가. 소설가가 뭔지도 모르는데 뭐. 꿈이 있었던 거 같진 않고, 그냥 아버지가 아팠기 때문에 나는 간호장교가 되고 싶었던 꿈은 있었어요. 간호 장교가 되고 싶다. 질병과 무관하진 않아요, 아버지가 아픔으로 해서. 그러나 인제 그런 간호장교의 꿈은 이루지 못했고.
열 살이 지나면서 아버지가 배를 타셨는데 사고가 나서 다쳤어요. 3년인가 4년 동안 아버지 투병을 하시게 되었는데, 그때 제가 가장 노릇을 했던 거 같애. 우리 할아버지 사는 집이 여기 있으면, 우리 아버지 둘째네 이쯤에 살아요. 여기서 한 십분 거리쯤에 살고, 또 작은집 있고. 큰집엔 할머니 할아버지 식구가 많고, 우리 집에는 분가를 해가지고 집을 짓고 아버지, 어머니, 나, 동생들 둘 이렇게 살았는데. 어머니가 아버지 간병을 하러 가야 되잖아요. 그때 제가 동생들 두 명 하고 저하고 셋이 이렇게 남게 되었는데. 할아버지가 가르쳐주는 대로 할머니가 가르쳐주는 대로 동생들도 키우고, 집도 관리하고, 동생 학교도 보내고, 저도 학교 가고. 저희가 밭이나 이런 게 많았어요. 어머니가 막 농사 짓다가 갔으니까. 그런 것 거두어들이고. 어머니가 키우던 소, 돼지도 키우고. 이런 거를 척척척 하면서 컸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학교 갔다 오는데, 그때는 공동우물에서 물을 먹었어요, 우물을 지나 가는데 동네 어른들이, “금이는”, 제 이름이 금이에요, 동네 금이에요,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거예요, “금이는 못하는 일이 없어, 쟤는, 뭐든지 잘해” 이렇게 말했어요. 제가 들으면서 지나가면서 기분이 엄청 좋았어요. 그때부터 나는 못하는 게 없고, 뭐든지 잘하려고 엄청 노력하는 사람이 됐어요, 그 말 한마디에. 어릴 때 말 한마디가 너무 중요한데.
어린 시절의 그런 부분들, 앞에가 탁 트인 바다와, 뒤에는 푸른 산과 넓은 들. 그런 환경적 구조도 제 영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어요. 제가 한 3~4년 동안 동생들하고 살면서 이렇게 동네 어른들이 다 도와주셨어요. 동네 어른들하고 살아가는 방법도 제가 배웠고, 소통하는 방법도 배웠고, 생존,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지도 배우고.
제가 중요하다 여기고 역할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어린아이들을, 젊은 사람들이 잘 낳지 않지 않습니까. 아기들 많이 낳으라고 권해드리고 싶고. 태교를 저는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요. 태교를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미래지향적으로 잘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가장 중요했던 입태와 열 살 때까지의 그 환경이 아무리 척박하고 어려운 환경에 놓여도 무너지지 않고 오뚝이처럼 끝없이 일어나서 이거를 풀어야지, 했던 배경이 됐어요. 어떤 아동심리학자가 열 살까지 그때 그렇게만 키워주면 그 다음부턴 지가 알아서, 자기 가져온 까르마에 따라서 자기 생을 개척해나간다, 이렇게 얘기했는데, 거기에 100% 공감을 하면서. 또 입태 시기에, 태어났을 때에 고통 받았던 아이들, 그래서 어른이 된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 불행하거든요. 엄청 미약하고, 유약하고, 하여튼 장애가 많은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정말 태교가 너무 중요해. 어린 시절의 환경, 대상, 너무 중요해. 이런 것을 깨닫게 되죠. 그래서 지금은 그게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 많이 말해줄려고 해요.
살아볼수록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제가 만나지 않습니까. 그럴 때 그 고통의 원인은 어디서 왔을까. 원인을 분석을 해봅니다. 이 고통의, 고통의 시작은 어디서부터 되었나. 그 다음 단계, 이 고통이 어떻게 무엇으로 인해서 확장 되었는가에 대해서 관찰 하고 분석하고 사유해보죠. 그랬을 때, 어릴 때 엄마 뱃속에 입태되는 순간부터 태어날 때 그 환경이 너무 중요했고, 그다음에 두 번째로 중요한 환경이 태어나서부터 열 살 때까지의 환경이 매우 중요했다. 이게 1차 단계, 1단계라 한다면. 2단계가 열 살에서 스무 살 때까지. 단계가 있는 거예요, 입태가 0살에서 태어날 때까지 그때가 우리가 불가에서 생유라 합니다, 생유. 입태에서부터 생유, 태어나서부터 열 살 때까지 딱 10년 보는 거예요, 만 10년 이잖아요. 이때가 한 인간에게는 너무나 이 인간이 행복해지는지 불행해지는지 그 삶의 방향, 질, 결, 모양, 형태가 거진 다 결정이 된다고 보면 될 거 같아. 그것은 뭘 근거로 얘기 해줄 수 있느냐면, 수많은 사람들을 상담하고 그들의 고통을 보면서 ‘아! 정말 중요하구나’ 알게 됐어요.
예배당 가는 길 만난 불교음악
「그 봄도 어제 같고, 그 여름도 어제 같다. 서른이 다 되어갈 무렵 그 봄날, 거리에는 연등이 달려 있었고, 나는 교회를 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초파일 연등이었다. 문득 레코드 가게에서 들리는 소리가 내 폐부에 박혔다. 처음 듣는 소리에 온몸이 전율했다. 교회에 갔지만 목사님 설교도 귀에 들리지 않고 오직 그 소리만 귓전을 울렸다」
집안 종교는 기독교였어요. 지금도 제 바로 밑에 동생은 목사고, 부인도 목사예요. 전생의 인연이라고 봐야죠.. 전생에 내가 아마, 전생에도 출가자였던 거 같아요. 근데 환경이 불교를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어서 접하지 못하다가, 처음으로 불교라고 하는 환경을 찰라 시간에 접한 거죠. 과거 생의 습기, 습관이 탁 재생된 거죠. 아무도 말 못했어요. 그땐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안 계셨지만, 제 출가에 대해서 아무도 저를 막을 수가 없었어요. 제가 너무 단호했기 때문에, 아무도. 저는 스스럼없이 거침없이 이 길을 갔어요. 지금까지 한 번도 뒤를 돌아보거나 옆을 돌아본 적이 없어요. 다음 생에도 이 길을 갈 거예요.
그 힘이, 그 토대가, 할아버지인 거예요. 할아버지 그 한 마디. 그 자긍심과 자부심. 한 마디가 어떻게 승화됐나 보니까. 내가 출가하면서 더 승화가 된 거예요. 일체중생들이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내가 힘이 되어주어야 하고, 내가 무언가 해주어야 된다는 이 사명감이 엄청 커진 거예요. 어떠한 역경이 있어도 이 길을 가야 되는 거예요. 안 갈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어린 아이들에게 부모가 주변에서 한마디가 그렇게 중요 하다는 것, 제가 새삼 느낍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만약 우리 할아버지가 그런 말을 안 했으면 나는 어떻게 이 고통을 극복했을까, 안 죽고 살 수 있었을까.
2.
길
위에서
소록도와 꽃동네
내가 출가하자마자, 내가 세상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실제로, 고통 속에 죽는 사람을 만나보게 되었어요. 내가 그때 되기 전에 할아버지 할머니 돌아가셨는데, 그분들은 그냥 연세가 다해서 자연스럽게 돌아가신 거고. 고통 받다 죽는 사람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고, 고통이 무엇인지, 그 다음에, 어떻게 하면 죽는 건지, 이런 거에 대해서 뭐랄까 객기가 발동했다 해야 되나, 이거를. 아니면 호기심이 발동했다 캐야 되나. 뭐 어떻게 말해야 될까. 그걸 너무 알고 싶었어요. 죽음이 뭔가, 어떻게 하면 죽을까, 얼마나 사람이 아프면 죽는지. 그래서 소록도를 갔는데. 정확하게 말하면은 그들이 나를 돌봤지, 그 환자들이. 사랑스런 눈빛으로, 화사한 미소로, 일그러지고 찢어져도 그 속에서 스님이라 고 얼마나 잘 보살피고 보호를 하는지. 거기서 알았어요. 인간은, 인간이 행복을 만들어 내는 데에서는 환경과 조건이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구나. 마음가짐이 중요하구나, 마음가짐이…. 그들이 뭐가 행복하겠어요. 그래도 한없이 그 삶을, 그 삶 안에서 행복을 만들어내고, 미소를 만들어내고, 사랑을 만들어내더란 말이지. 죽음은 그곳에서 잘 몰랐어요. 그곳에서는 행복에 대해서 알게 되었어요, 마음에 대해서 알게 되었어요. 아, 진짜 일체가 유심조4 구나. 원효스님이 말씀했던 것처럼. 그래, 마음이 이 세상을 창조하네, 사랑을 창조하고. 그것을 어렴풋이 알게 됐고.
꽃동네에 가서, 천주교 재단의 꽃동네에 가서 환자들을 만나게 됐고, 거기서 죽음을 알게 됐어요. 거기서는, 매우 경건하고 엄숙한 죽음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천주교 수사님 이나 신부님, 수녀님이 너무나 그쪽으로 잘 돌보는 모습들, 굉장히 엄숙하고 경건한 죽음, 존엄한 죽음을 만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인제 거기서 나와서, 암환자들을 만나게 되면서 저는 그때부터 지옥을 만나게 되지요. 암환자들을 돌보게 되면서, 호스피스를 시작하게 되면서, 이 세상에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있구나. 역부족인, 인간의 힘으로는 버틸 수 없는, 역부족인 고통이, 괴로움이 있구나. 그때는 스님이 한 서른 여섯, 일곱 살쯤이 됐는데, 그때부터 인생의 진한 맛을 보게 된 거죠. 말 그대로 똑 부러진 배를 타고 바다 한 가운데서 폭풍을 만난 거죠. 어떻게 안 빠져죽고 살아남았는지. 그때부터, 그때는, 마약도 많이 발달 안 하고, 암환자 치료법도 그렇게 개발이 별로 안 됐을 때라서 환자들이 고스란히 통증을 다 안고 죽었어야 하는 때예요. 그때가 1996년, 97년, 98년 이때거든요. 그때부터 시작이지, 그때부터.
생과 사의 기로를 지나
「어린아이가 엄마 품에 안기듯 환자가 내 품에서 가만히 숨을 고른다. 스님 없는 동안에 혼자서 죽으면 어쩌나 너무 두려웠다는 말과 함께……. (중략) 아들의 죽음을 기다리는 어머니와, 홀로 자녀들을 챙기며 살아가야 할 아내……. 한 사람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의 삶이 내 마음을 이리저리 솓아놓았다」 5 「그들의 고통 앞에 어떻게 초연해질 수 있겠는가. 세월이 가면 갈수록 그들의 고통과 아픔의 늪 속에서 나는 함께 허우적거리며 울고 아프고 위로하고, 간호하고 동반자가 되어주며 허허 웃을 뿐이다」
2000년도에 청주에 정토마을 만들었는데, 정토마을 호스피스 센터를 만들었는데, 1년이면 백 명 이상 환자가 돌아가셨어요. 백 명이면 그 역사가 백 개예요. 그 [환자] 가족이 다섯이면, 그 역사가 다섯 개이면, 백 명이면 오백 개의 역사를 내가 만나는 거예요. 그 역사 속에서, 그 역사 책을 들여다보고 느끼는, 정말 정말 다차원적인 고뇌와 고통과 갈등과 번민들. 그때는 이렇게 분석하고 분류할 줄도 몰라, 온통 다 뒤집어쓰고, 같이 함께 아파하고 뒹굴면서,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섭섭하게[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라는 책이에요. 그것도 천분의 일이나 될까, 그 속에 담긴 것들이. 그냥 그 속에서 사는 거지, 그럭하고. 그때는 이들에게, 이들이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도와야 한다, 그 사명감으로 그걸 할 수 있었죠. 내가 곁에 있는 게 도움이 된다니까, 힘이 된다니까, 덜 무섭다니까.
「어떤 가르침을 얻게 하려고 이런 경험을 하게 하셨을까? 내 자신이 죽음의 문턱 까지 다녀온 다음에서야 비로소 환자와 가족들의 심정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의사의 한마디가 환자의 투병생활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2003년도에, 그때는 스님이 암환자만 돌봤던 게 아니고 에이즈 환자도 돌봤어요. 에이즈가 마지막에 굉장한 고통을 호소해요, 면역체계가 다 무너지면서 결핵부터 시작 해서 온갖 병이 다 생겨요. 그런 상태에서 고통이 너무 심하니까, 주사를 놓으려고 간호사랑 둘이서 어리버리하다가 같이 동시에 바늘에 찔렸어요. 그럼 50일 동안 약을 먹어야 돼요. 그 약을 먹으면서 나는 간이 많이 상했어요, 약이 너무 독해서. 간 때문에 생사가 좀 오고 갔죠. 50일 있다가 검사하니까, 에이즈에 걸리지 않은 걸로 판명이 나서, 그 이후에 계속 그 약 때문에 간이 많이 힘들어졌고. 한 2년 정도 걸렸어요, 회복하는 데. 지금도 많이 피곤하고 힘들면 간 수치가 좀 올라가고. 보호자들의 심정, 환자들의 심정, 그런 것들을 실질적으로 내가 경험, 내 문제로 경험하면서 깊이 체득해서 사람을 이해하고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 좀 더 깊어졌죠.
「이곳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어 더욱 감사한 순간들이다. 오십이 넘은 지금에서야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이 선물로 다가온다. 그 고통이 무엇이든 내 작은 가슴으로 품어 안을 때마다 내 속에 있는 아픔까지 치유받는 느낌이다」
어떤 때는 내 삶 자체를 압도시킬 때가 있어요, 죽음이. 이런 죽음들. 내 삶을 그냥 잡아먹을 거 같은 압도적인 죽음. 내 삶을 압도시킬 만큼 강렬한 어떤 감정적인 부분들, 상황적인 부분들, 이런 부분들이, 발생할 때. 아마 다른 사람보다는 많이, 다른 사람이 열 번이면 나는 아마 삼십 번 될 거 같은데. 그렇게 어느 한시도 고요하고 조용할 날이 없을 만큼 이 복잡다단한 이 삶 속에서 그러한 일이 발생할 때, 그걸 저는 제 안으로 갖고 와서,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이 안에서 승화해내는 거 같아요, 그거를. 우리가 밥을 먹어서 몸에 자양분을 보내듯이 그걸 내 안으로 갖고 와서, 내 안에서 그것을 썩혀서 발효시켜서 긍정적인 부분으로 승화시켜내는 거 같아요. 이겨낸다, 견뎌낸다라고 하기 보다는, 승화시켜낸다. 감정에 빠질 때는 푸욱 빠지고, 빠진 줄 알고 퍼뜩 벗어나야죠. 슬퍼할 때는 온전히 슬퍼하고, 아파할 때는 온전하게 아파하되, 온전하게 경험하고 짧게. 그 다음에 인제 정리해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게 참 쉽지 않죠. 참 어려워요, 그죠. 우리가 상황에 압도되어 버리니까.
종교적인 측면도 없지는 않겠지만, ‘인간의 고통, 인간이 겪은 괴로움들을 보고 관찰하고 그것을 분석하고 이러면서 이 부분들을 누가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그것을 승화시켜내는 수밖에 없다. 억압해서 참아도 문제가 되고, 이것을 밖으로 드러내도 문제가 되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 안에서 이 폭탄을 터뜨 리지 않고, 잘 분해해가지고, 본래대로 회복시키는 게 가장 적합한 방법이다’ 라고 나 스스로 결정한 거 같애요. 수많은 고통을 보고 느끼며 경험하면서. 수많은 다차원적인 고통들을 실제로 경험하면서 얻은 답이 그것. 그 길만이 오직 살길이다. 이 고통을 벗어 나는 길이다. 표현을 한다 해도 파편이 튀고, 억누르고 억압한다고 해도 내가 심리적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 받을 것이기 때문에. 버리지도 못하고 가질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하나의 어떤 사건이 발생했다. 뭐 때문에 이게 발생했는지 원인을 분석하고, 이것이 실질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분석해보고, 그 다음에 여기에서 버릴 것과 취할 것을 분류합니다. 분류해서, 버릴 것 버리고, 취할 것의 기준을 너도 좋고 나도 좋은 것을, 선택하는 거죠.
마하보디 교육원과 자재(自在)병원
「스님의 임종을 준비하던 중 뜻밖의 유언을 받아 쥐게 되었다. 나에게 병원을 지어 달라셨다. 숨을 몰아쉬며 피 같은 땀을 떨구면서도 스님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 (중략) “원력만 세워요, 내가 죽어서라도 도울게. 혼자 하게 두지 않고 내가 도울게. 시님아, 중이 이래 죽어서 되겄소. 노무 뱅원에서 (고개를 뒤로 젖혀 십자가를 보면서) 이래 죽어서 되겄소. 나는 이래 가지만 다른 시님들은 이러면 되겄소. 다른 시님은 몰라도 시님이라면 할 수 있다.”」
「앞으로 이 병원을 통해 ‘죽음의 문화 바로세우기’ 운동을 전개할 생각이다. 죽음에 대한 사회의 영적 돌봄이 어떤 것인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우리 인간을 얼마나 가치 있게 하는지, 그것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리고 싶다」
내가 병원까지 짓는 것은, 센터를 짓는 것은 엄두도 못냈는데. 그 스님의 간절한 부탁과, 또 우리 불교계에 너무 필요한 시설이고 그래서, 어쩌다보니 총대를 내가 메게 된 거지. 마하보디교육원은 섭섭하게 책 팔아가지고 [만들었어요]. 하하. 책이 정말 많이 팔렸는데, 사람들은 다 병원을 짓자고 했는데, 저는 병원을 짓지 않고 이 교육원을 지었어요. 2007년에 이걸 지었어요. 정말 의견이 많았습니다, 비난과 비판이 막. 그래도 이걸 지었어요. 왜냐면 저들을 돌볼려고 하면 여기[마하보디교육원]서 그에 알맞은 교육을 시켜서 알맞은 영성을 갖추어줘야 저기[자재요양병원] 누워있는 사람들의 삶의 질이 높아지는 거지, 대책도 없이, 사람도 없는데 병원만 지으면 누가 사람을 돌봐요. 환자를 돌보는 건 사람인데. 그래서 사람다운 사람을 만들어서, 전인적인 아름다운 사람을 만들 어서 저기에 투입하겠다. 매우 전략적이죠. [여기 의사분들, 간호사분들] 다 교육받고 해요. 지금 만약 입사한다면, 여기서 교육 받으면서 일을 해요. 또 스님들도 계시고, 다양한 사람들이 와서 다양한 차원의 교육들을 받아요. 영적 돌봄가이신 스님들 다 여기서 교육 받아 나가서, 다 그런 존재들이 되어서 전국 각지 병원으로 가고.
명상심리대학원 석사과정이 있고, 사람의 영성과 고통을 돌보는 전문가를 배출 하는 CPEE라는 교육 프로그램도 있고, 그 다음에 인제, 호스피스 교육도 있고.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 기도교육도 있고. 죽음, 임종의식 교육. 굉장히 많아요. 생사의 장이라고 5박 6일짜리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게 고통을 다루는 법이거든요. 고통을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해소하고, 집에 가서도 고통이 생길 때 덜어낼 줄 아는 방법을 배우는 프로그램인데, 올해 23년째 하고 있어요. 그 프로그램을 하고나면 많은 사람들의 삶의 변화가 오고, 관점의 변화가 오고, 건강도 좋아지고.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도 알게 되고, 죽음은 무엇인지,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도 알게 하는 교육이 생사의 장입니다. 5박 6일, 그 안에서 그거를 돌출해낸다는 건 대단한 거죠. 저번에 학생들도 중국에서, 미국에 서도 오고 이랬던데, 생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지 궁금해서 다 온 거예요. 누구에게나 다 필요해요. 아이들은 더 좋아요. 아이들은 절대 자살하지 않아요, 이런 교육 받으면. 떠나가는 사람은 잘 떠나가도록 도와야 하고, 떠나보내는 사람은 잘 떠나보내도록 준비 해야 하고. 떠나간 뒤의 그 빈자리, 그 아픈 자리에서 새 살이 차오를 때까지 우리가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는 거죠. 그러지 않으면 보내놓고 그 빈 자리에 빠져 죽어요. 얼마나 중요해요. 삶.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이 무엇인가. 스스로 발견해요. 죽음.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죽음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 답을 찾아요. 그 다음 에 길을 가는 거예요. 그때부터는 너무 잘 사는 거예요. 이거를 몇 마디 언어로서 스님이 여러분에게 설명해줄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그게 궁금하고 알고 싶은 사람은 생사의 장에서 공부를 하란 거예요. 울산시에 이런 아름다운 곳에 멋진 교육장소가 있잖아요. 최고로 공부 안 하는 사람이 울산 시민입니다. 최고로 자기 발전, 자기 번영, 자기 행복을 위해 투자 안 하는 동네가 울산광역시라고. 정말… 어디다 가치를 두고 사는지 몰라.
「완화의료를 전문으로 하는 자제병원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교과서가 되어주는 공간이 될 것이다. 죽음의 끝까지 배움의 여정으로 함께 가고, 또 더 높은 차원의 영적인 존재로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는 곳, 모두가 희망을 얻어가는 곳. 언양에 뿌리내릴 자제병원은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공간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 언제가는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겠지만, 간접적인 경험도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자비로서 누군가를 건네준다’라고 처음에 이름을 그렇게[자제(慈濟)병원이라고] 지었는데, 그게 너무 오만한 이름인 거 같애. 난 내 자비로 단 한 사람도 건네줄 수 있는 게 없어. 스스로 건너도록, 스스로. 스스로 자유롭고, 스스로 죽음과 삶에서 자유로워지도록 내가 도울 뿐이지 내가 건네주는 게 아니었다, 라는 데서 이름을 스스로 자(自)자에다가 있을 재(在)자를 써서 스스로 건넌다, 단지 나는 징검다리에 불과하다, 내가 건네주는 게 아니고, 이 징검다리를 놓아주면 건너가기만 하면 되는 거지. 정토마을은 그저 힘이 되어 줄 뿐이다. 스스로 가야 한다. 그 말은 니가 스스로 수행해야 하고, 스스로 착한 마음 먹어야 하고, 착한 일 해야 되고, 마음씨도 잘 써야 돼, 이건 거예요. 책임을 개인에게 다 돌렸어요. 하하.
상북면 땅을 보고 여기다 싶었어요. 왜냐면 이 아름다운 산들과 이런 구조가 환자 들에게 많은 위안과 위로가 될 거 같고, 보호자들에게도. 실제 그래요. 우리 보호자들은 여기서 가슴이 턱턱 막히다가도 밖에 나오면 호흡을 하고 숨을 쉬어요. “하… 숨이 쉬어 진다” 이렇게. 호스피스라는 것은 환자뿐 아니라 보호자까지, 또 의사, 간호사 모두가 다 포함이 돼요. 한 사람을 돌보는 데, 모두가 다 그 스트레스에 놓이게 돼요. 한 사람 빠지는 사람 없어요, 다. 그들에게 이 공간이, 치유의 공간, 휴식의 공간, 숨을 쉬는 공간이고.
건립할 때 최고 어려웠던 점은,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여기가 기부를 받고 모금하는 단체잖아요. 모금하는 것도 힘들지만, 모금되어진 돈을 적절하고 적합하게 잘 쓴다는 게 저에게는 너무 어렵고 힘들었어요. 돈 하나가, 내 돈이 아니잖아요. 남의 돈을 써준다는 게, 그게 정말 엄청난 부담이고, 어려움이고 힘들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이 병원은 전 국민과 전 세계에 있는 교포들이 낸 돈으로 이게 지어진 거예요. 수를 헤아릴 수가 없어요. 이거 짓는 데 150억이 들었는데, 그 150억이 어떤 사람은 백 원 에서부터, 천 원에서부터 시작해서 수없는 돈들이 모여서 이게 만들어진 거예요. 돈이 많은 사람이 자기 돈 갖고 지은 게 아니라,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돈을 모아서 이걸 만든 거예요. 정말 가치 있는 거예요.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모금해서 이 병원이 울산 광역시에 섰다는 게 얼마나 기뻐요, 얼마나 좋아요. 울산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특히 환자들이게, 이게 기여했으면 좋겠어요. 저희 병원이 정말, 우리나라가 인정할만한 아름다운 병원이에요. 저 안에 있는 사람들도 아름다고. 저기 입원하는 환자들은 정말 복이 있는 거다.
서사와 대안이 필요한 울산
여러 교육을 하면서 제가 울산 사람들을 접하고 하면서 ‘아, 이분들은 어떻구나. 아,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구나. 울산 사람들은 그냥, 돈을 벌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에 주의가 너무 집중되어 있다. 지금은 1960년대 아니고, 80년대 아니기 때문에 벗어나서 조금 더 자유롭고 행복하고 또 단란한 삶을 추구할 수 있는데 너무나 사는 데 급급한 것이, 그것에만 욕망이 계속 활성화 되고 있다. 욕망이 중재가 안 되고 있다.’ 욕망이 절제되는 이슈가 이제는 필요할 거 같아요. 우리나라 경제는 10년 전에도 불경기, 20년 전에도 불경기였어요. 한번도 호황이었던 때가 없었어요. 우리가 어디에 기준을 두고 사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예요. 울산이 살기가 얼마나 좋아요. 바다, 산, 대숲, 태화강, 장미 공원….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데. 우리가 정말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데 이 관점만 바꾸면 얼마든지 행복하고 질 높은 삶을 살 수 있는 울산 시민입니다.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얼마든지 즐기고, 가족이 단란하게, 행복하게, 너무 돈 추구하지 않아도 좀 아끼고 살면 되는데, 욕망이 절제되지 않다보니 이 갈애심이 끝없이 활성화 되다보니 끝이 없어요. 그래서 자폭하게 되는 거예요. 영적으로 폐허가 되는 거죠. 이혼하고, 별거하고, 이런 식으로 가정이 무너지죠. 울산시는 돈은 많은 도시인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인간이 행복한 도시일까. 특히 여성이 행복한 도시가 맞나. 여성이 행복한 도시 아닌 거 같아요. 돈도 벌고, 삶의 질도 올라가면 좋은데 이게 뭔가 어딘가 펑크가 났어. 돈은 많은데 이게, 삶의 질은 바닥을 쳐요. 여기서 다양한 결핍이 있는데 아동, 청소년, 노인,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정의 엄마가 행복해야 됩니다.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엄마가 과연, 울산광역시에 살고 있는 엄마들은 행복한가. 우리가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지도 서로가 머리를 맞대보고, 그게 해결이 되어야 아동 [문제]도 해결이 되고 노인[문제]도 해결될 수 있어요. 다문화 가정도 참 손 쓸 데가 많은데, 한국 가정의 모델을 보고 그들이 그대로 따라하기 때문에. 한국 가정이 바로 서야 다문화 가정도 바로 섭니다. 그런 철학을 가지고 우리도 행복한가? 행복하려면 뭘 해야 하지? 서사도 해보고 대안을 세워야 합니다.
상생(아스콘 공장 대표에게)
교레미콘은 안 들어오게 됐고, 아스콘 공장은 들어오게 됐다가, 건립 불허가 났는데. 어찌 보면, 개인적으로 보면 너무 미안해요. 그들에게는 가족이 있고 직원들이 있고 이런 측면에서 보면 정말 미안해요, 마음이 아프고. 얼마나 상심하고 힘들까, 이렇게. 또 다른 차원에서 보면,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이곳이 적합하지 않다라는 거예요. 산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 높은 산에, 그 미세먼지가 넘어가겠습니까, 못 넘어가죠. 그러면 내 수십 명이 돈을 벌어먹고 살기 위해서 수천 명이 자자손손 대대로 고통을 받을 거 아닙니까. 여기 사는 주민들의 고통을 예방하고, 완화하기 위해서 여기다 그거를 지으면 안된다라는 거예요. 한편으론 미안하고, 참 걱정이 되는 마음이 있어요. 얼마나 그들의 삶이 힘들까. 레미콘은 안 그런데, 아스콘에 대해서는 좀, 영세업자라서 마음이 가고, 아프고 미안하고. 얼마나 고민하고 고뇌할까. 정말 잘 되기를. 적합하고 적당한 땅이 나와서 그 사업이 정말 잘 되기를 바래요. 그렇지만, 나는 그 사업주가 크게 마음을 먹고 여기에 칠천 오백명이 살고 요 밑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그 사람들을 생각해서 좀만 더 양보하고 적당한 부지를 찾았으면 좋겠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또 사람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에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또 그게 되도록 울주군도 많이 도와주고 해서, 사업이 망하게 하는 게 아니라, 사업을 하되 안정적으로 할 수 있고, 인간도 서로 안정적 으로 살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그런 차원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만날 수 있으면 꼭 한번 만나보고 싶고, 이런 얘기 해주고 싶어요. 힘내어서 정말 적당한 부지가 생겼으면 좋겠고, 그런 부지에서 계속 사업을 잘 이루어갈 수 잇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꼭 해 주고 싶어요. 정말 지지해주고 싶고, 격려해주고 싶고, 기도해주고 싶어요, 잘 되길. 그럼 왜 이곳엔 안 되냐고 반문한다면, 너무 많은 사람이 살지 않냐, 그리고 젊은 아이들 이나 노약자들이 이 미세먼지 때문에 병에 걸리면 그에 대한 고통과 괴로움이 너무나 크다. 그 업을, 그 죄를, 그 사람이 다 받을 건데, 너무 가혹하다. 그래서 적당한 .. 적당하고 적합한 땅을, 내가 군수님한테 이야기 했어요, 적합하고 적당한 땅을 군에서도 찾아줘서 정말 성공적으로 사업을 잘 풀어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도 가족이 있고, 그 직원들은 또 다른 가족들이 있는데, 스님 어찌 그 생각을 안 하겠어요,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 [그러나] 요 언저리 사는 7,500명 주민들, 그리고 상북면 밑으로 언양 까지 그 많은 주민들의 생명의 고귀함을 생각한다면, 사장님께서 너그럽게 배려하고 내 생명이나 그 생명이나 차이가 없으니까, 소중함에는, 정말 좋은 마음을 가지면 좋은 땅이 좋은 곳에 나타나지 않을까. 그러기를 기도해요.
3.
기도
그 자체로도 기도 잖니
「깊고 깊은 산속을 그리며 청아한 자연과 샘물같이 맑은 영혼으로 걸림 없이 살아 가는 사문(沙門)의 꿈을 안고 출가를 하였다. 출가를 하고나서 몇 년이 지난 후 나를 돌아보니 깊은 산도 아니요, 너른 들도 아닌 사람들이 죽어가는 고통의 늪 중심에 서 있었다. 은사스님께서는 나에게 사문으로서 공부에 전념하기를 바라 셨지만 그 뜻을 따르지 못하고 나는 늘 환자들 곁에 있었다」
마흔한두 살 때까지는 늘 공부를 해야 된다고, 갈애심이, 늘 갈증이 있었어요. 어느 순간부터 ‘이 자체가 공부고, 이게 수행이고, 이게 전부다’ 라고 딱 알아진 순간, 깨닫게 된 순간에 그런 허기가, 갈증이 싹 없어졌어요. 이게 그 어떤 수행보다도 가치 있고, 그 어떤 수행보다도 더…. 원효스님이 해골의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를 깨달았듯이, 이 임상에서 끝없이 죽고, 죽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들의 역사를 통해서 내가 보고 듣고 배우고 깨달은 이것. 그래서 더 많은 연민과 더 깊은 사랑을 만들어내는 나.
이것이 더 훨씬 팔팔하게 살아있는, 살아있는 수행이에요, 돌아보니까. 모두가 다 이런 수행을 하고 싶어서 저런 수행을 하고 있는 거더라고요. 그 사람들 그렇게 수행하고 있는 것은, 이런 수행을 하고 싶어서, 이런 보살행을 하고 싶어서 그런 수행을 하고 있는 거더라고요. “스님 저는 기도할 시간도 없고 맨날 일만 하고 어떡해요” 이랬더니 어떤 스님이 “그 자체가 기도잖니, 그 자체가 수행이잖니, 거기서 뭘 더 바라냐. 너 삶 전체가 다 그냥 기도고 수행인데” [말씀하셨어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정말 새로운 세상을 발견 했어요. 내가 그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걸 몰랐구나.
다음 생
「죽음을 맞이하는 이가 다음 생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발원할 수 있도록 돕는 일도 불교 호스피스의 중요한 소임 가운데 하나다.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다음 생을 맞이하고 싶은지, 그러기 위해선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옆에서 조언해주고 지켜봐준다. (중략) 윤회는 선택이다. 다음 생에 어떤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욕망을 일으키는 순간, 자신이 살아온 업성에 따라 그대로 이 세상에 재현되는 것이다. 어떤 삶의 주체로 태어나고 싶은가는 이생의 업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윤회의 삶도 그 연장 선상에 놓일 수밖에 없다」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는 부분에 대해서 한 5년 동안 고민 중에 있는데, 요 근간에는 이제 좀, 사실 태어나는 걸로 확정이 거진 90% 되어가고 있는 중이에요. 다시 태어나는 걸로. 이 고통 많은 세상에 그때는 다른 비전을 갖고 와서 인류에 기여하고 싶어요. 인류의 평화와 공존을 위해서. [다시 태어날지 아닐지는] 당연히 제가 정해야죠. 내 인생인데. [중생들도] 당연히 결정해야 되겠지. 결정 안 해서 그렇지. 스님 글에 보면, 대책 없이 살다가, 대책 없이 죽으면, 대책 없이 태어난다. 그래서 또 대책 없이 살다가 또 대책 없이 죽는다[는 내용이 있어요]. 응, 이게 업의 사슬이에요. 까르마의 사슬이에요.
죽을 때 말하는 건 이미 늦은 거예요. 늦어서 말빨이 안 서, 말의 힘이 없어. 지금 부터 건강할 때, 이 순간부터 다음 생 어떡할 건가 계획을 짜고 전략을 잘 세워서 성공적 으로 이끌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거예요. 안 그러면 대책 없이 또 흘러가잖아요. 그러니까 이 생도 삶이고 다음 생도 삶이기 때문에. 삶이란 이 자체는 현대어로 말하면 경영이라, 경영. 공장을 세워 돈을 벌려면 공장 세우기 전에 기획을 잘 하고 전략을 잘 짜야 되잖아요. 그리고 내 분수에 맞는 적합한 전략을 짜야 되겠죠. 분수는 항상 변화해. 어떻게 변하냐. 내 마음이, 마음 씀이 변하면 모든 게 다 변해요. 마음 씀이 변하면 마음 씨가 변하고, 마음 씨가 변하면 삶이 변하는 거예요.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는 거 같애, 그 어떤 것도 정해진 게 없더라. 찰나 찰나에 일어나고 경험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경험하고 사라지고 하는 것뿐이지. 정해진 것이 없어서 매우 희망적이지 않아요? 좀 불안하기도 하지만. 마음을 잘 써서, 마음 씨를 잘 만들면, 그게 아주 긍정적으로 변하겠죠. 희망적이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면 어떡하겠어요. 변합니다. 흘러가고, 다시 만들어 지고, 다시 경험하고, 흘러가고.
잘 살아야 잘 죽는다
「임종이 다가오면 지수화풍地水火風이 차례대로 무너진다.임종은 사람마다 다르다. 각자 지어온 업력에 따라, 그리고 마지막 종착역에서 어떤 마음으로 죽음을 대하는 가에 따라 죽음의 질은 천차만별이다. 잘 살아야 잘 죽는다. 그렇다면 어떤 삶이 잘 사는 삶일까?」
「천차만별의 다양한 죽음의 과정을 보며 ‘아! 잘 살아야 잘 죽는구나!’ 삶의 흔적들이 보여주는 진실은 죽음의 과정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많은 죽음을 보며 이제는 ‘어떻게 하면 잘 죽을까?’가 아닌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하루의 삶을 늘 챙기게 된다. ‘오늘 하루 아쉬움이나 후회는 없는가?’ 살피며 살게 된다. 진정으로 오늘 하루 잘 사는 것이야말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죽음의 근원이 됨을 알았기 때문이다」
잘 산다는 것의 기준이 없잖아요. 기준을 꼭 잡아야 한다면, 스님은,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이로운 삶이 잘 사는 삶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죽어야 잘 죽는 거냐 하면, 일단은 죽음의 과정에서 최소한, 고통이 최소화되어야 한다, 고통이. 심리적, 정신적, 영적, 사회적, 육체적 이 다섯 가지 고통이 최소화되어야 된다. 그런 환경과 그런 상황이 만들어 지는 게, 그게 정말 잘 죽어갈 수 있는 사항이에요. 그리고 마지막까지, 정말 죽을 때까지도 걱정과 근심과 고통과 괴로움에 시달리지 않고 편안하게 숨 쉬다가, 숨이 마감되는 그 순간까지 숨을 쉬면서 여유롭게 머물다 갔으면 좋겠다. 이게 내 생각에는 정말 잘 죽는 죽음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다양한 측면에서 죽음의 원인 주어지기 때문에, 그럴 때, 좀 더 나의 마지막이 안전하고, 존중되고, 존엄한 공간, 존엄한 환경에서 내가 여유 있게, 또 숨을 쉬면서 죽을 수 있었으면 죽겠어, 숨을 쉬면서. 숨을 쉴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는 죽음. 살다가, 숨이, 목숨이 다하면 어쩔 수가 없는 거죠. 숨이 끊어질 때 끊어지더라도, 그 전까지는 숨을 좀 잘 쉬고 살았으면 좋겠어, 숨 쉬다가 죽었으면 좋겠어요, 끝까지.
「저 멀리에서는 무정하게도 죽음의 열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급히 보따리를 싸야 한다면 정성을 다해 싸는 일을 도와주는 것이 호스피스의 사명이다. 장례식 장소는 사람들이 많이 올 수 있는 곳으로, 장례식은 최소한 간소하게, 기간은 상황에 맞추어, 그리고 최대한 빨리 상복 벗기. 이와 같은 새로운 죽음의 문화와 정서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 다음에 인제, 그렇게 숨이 심장이 멎었다고 죽은 것이 아니다. 그 이후에도 우리는 몸과 의식이 분리되는 시간을 그 사람에게 공급, 제공해주어야 되고, 기다려줘야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그를 도와서 몸과 신체와 의식이. 인제. 처음에는 우리가 이렇게 의식과 몸이 붙어 있잖아요. 같이 활동하잖아요. 죽게 되면 몸이 못쓰게 되잖아요. 그러면 못쓰게 된 몸과 의식이 분리, 나누어져야 된다. 그래서 몸과 의식이 나누어질 수 있는 시간을, 이걸 사회적인, 대한민국의 그 어떤 죽음의 문화와도 연결되어 있는데. 우리가 불과 15년 20년 전에도 그렇게 가능했거든요.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아파트 문화가 생기면서 이 문화가 없어지기 시작했는데, 이건 너무나 중요한 거예요. 몸이 다 식고, 좀 기다려줘서, 적어도 24시간 기다려줘서 깨어나지 않을 때 그리고 몸과 의식이 분리되어버렸을 때, 그때 우리는 죽었다 라고 정의하고 그 다음 단계에 나아 가야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지금 숨이 딱 끊어지면 무조건 영안실, 냉장고에 딱 집어 넣는다. 그러고 길면 60시간 이내 우리 존재는 영원히 사라진다. 그래서 그 죽음 이후의 존재에 대한 존엄성이나 가치, 의미, 이것이 너무 없는 거예요. 급하강, 급하강하고 있어요. 그거는, 그 의식은 다음 생과도 무척 관련이 있어요. 그 전에는 우리는, 우리나라는, 유교 불교 뭐 다차원적으로 종교가 있지만 그것 상관없이 무조건 사람이 죽으면 당신이 죽은 방에다 병풍을 치고 홑이불을 덮어서 24시간을 기다렸어요. 그러고 안 깨어나면 지붕 위에 올라가서 옷을 흔드는, 초혼, 영혼을 부르는 의식을 했어요. 그래도 안 깨어나면 그때 입관을 해서 보통 기본 5일장을 치렀어요. 천천히 천천히. 지금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 문화가, 한국의 그 아름답고 고귀하고 가치있던 죽음의 문화가 우리 스스로 다 상실시켜 버렸어, 상실. 우리가 다 제거했어요. 우리 다음 생의 질이 엄청나게 떨어지고 있어요. 미국도 그리 하지 않고, 중국도 그리 하지 않고, 전 세계가 그리 하지 않아요, 우리나라 만큼 그리 하지 않아요. 일본이 좀 그런 경향이 조금 있긴 한데,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이렇지는 않죠.
소박한 즐거움
울산 시내에 열 번도 안 나가봤는데 [울산 온 지] 벌써 13년이 되었어요. 한 네 다섯 번 나갔던 거 같은데. 태화강 축제에 한 세 번 정도 나가본 것 같고, 그 다음에는 시장을 보러 두 번 나가고. 다섯 번 갔네.
「나의 가장 큰 취미와 즐거움은 환자돌보기요, 그 다음은 장보기다. 한 달에 두어 번씩 강연료를 모아들고 시장에 가서 환자들과 가족들을 위해 장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좋은 것을 요즘은 한 달에 한 번도 못 한다. 시간이 없어서다」
역시 그게 즐거운데, 환자 보는 건 마 그냥 가면 되는데, 시장 보는 즐거움이 없어 졌어요. 갈 새가 없어. 한 번씩 제가 마트에 가면 정말 즐기거든요, 시장 보는 걸. 환자들 에게 주고 싶은 것, 해주고 싶은 것, 이런 거 저런 거 막 이렇게 사서 뭔가 해주는 게 정말 즐거웠어요. 지금도 가면, 우리 이쪽 사무실에 뭐 사다주고 저쪽 사무실에 뭐 사다주고 챙기는 게 너무 즐거운데, 시간이 없어. 대신에, 일 년에 두 번은 하네. 추석 전날 내가 시장을 가요. 가서 이 공동체에 있는 사람들에게 추석날 아침에 아침 식사를 스님이 해줘, 다. 설날에 시장 가요. 가서 사다가, 설날 아침에 여기 사는 모든 직원들이랑 밥 먹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양해줘요. 그거는 계속 하고 있어요. 스님 요리… 나는 잘한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도 긍정해요, “맞아요” 이렇게 해줘요. 야채 볶는 거. 저 정말 잘하는데, 할 시간이 없어요. 장 봐다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직원들이랑, 함께하는 사람들, 애쓰는 사람들에게.
완전히 뻗어버릴 때가 있죠. 그냥, 완전히 지쳐서 파김치가 되어 뻗어요. 그럴 때는 뻗어지는 대로, 뻗어서 하루 정도는 가만히 쉬어요, 멈춰요. 그리 하든지, 아니면 스님 그림을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데 그냥 물감을 풀어놓고 무언가를 그리든지, 마음대로. 「이 순간」 책갈피에 있는 그림, 제가 그린 그림이에요. 제가 쓴 책 중에 이 책 참 좋아 해요. 이거 바다예요, 바다. 응. 하늘이고 바다예요. 근데 이게 별인데, 별이 바다에 떠 있는 거. 요새는 그림을 안 그려가지고. 이때는 한창 너무 고통스러웠나봐. 이런 그림. 색 돌아가는 대로 그냥 그대로 그리거든요. 큰 붓으로 노랗게 묻혀서 막 돌리는 거야 이렇게. 어떨 때 내가 그림을 그리는가 보니까 고통스러울 때, 심신이 지칠 때, 이럴 때 이렇게 막 그림을 그리는데. 사람을 그리거나 그러진 않아.
이루어지이다
일과가, 보통 네 시 정도 일어나면 12시 정도까지 뭔가를 해야 해요. 목표가 여섯 시간 자는 건데 잘 안 되네. [제가 하는 일들은] 그게 전부 다 연결을 해보면, 생명과 생명 끼리의 공생과 공존, 존엄이 거기에 다 연결되어 있어요. 다 한 맥이에요. 한 나무에서 난 가지라, 그냥.
저희 재단이 두 가지 사업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하나는 교육이고 하나는 의료 사업이에요. 우리 불교계에서 이런 병원이 없어 좀 그랬지만, 사실 우리 한국은 굉장히 좋은 병원이 많지 않습니까. 저희가 복지의료사업부가 있거든요. 복지의료사업부는 이 병원 짓자마자 실행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우선 동남아시아쪽 중심으로 해서 가난한 나라에 작은 진료소를 지어준다거나, 또 의료봉사를 가서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거나 이런 사업들을 하고 있죠. 만약 예를 들면 우리가 네팔에 병원을 하나 지어주겠다고 하면 프로젝트를 실행해요. 스님들도 다 도네이션을 하는 거라 거기다가. 이거 하는 데 3억 든다 하면 3억을 도네이션 받아, 들어가서 거기다 지어주고, 이렇게. 프로젝트 당 한 개씩 해가지고 하고나면 또 다른 거 해주고. [의료봉사] 도네이션 하면 그걸 갖고 약을 삽니다. [재단 홈페이지] 들어가면 도네이션하게 되어 있거든요. 여러분이 보내주신 돈으로 거기 필요한 약을 사서 의사들이랑 함께 가요. 병원에는 내과 의사, 가정의학과 의사, 한방의사 해서 의사가 네 명. 행동대원들 사십 명. 환자 옮겨주고, 처리해주고, 식사도 우리가 다 해줘야 되거든요. 식사도 해주고, 그리고 약을 가져가기 위해서 우리가 사람이 많이 필요해요. 약이 어마어마해요. 한국 약이 좋아요, 아주 좋아요.
계획은, 계속 외국에 조만한 진료소를 만들어주는 일을 추진해갈 거고, 그 다음에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곳에 그런 병원을 비롯하여 그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고민하게 될 거고, 그 고민이 실행되어질 거예요. 아마, 그중에 가장 유력한 게 병원을 지어주거나 진료소를 지어주고 지원해주는 거. 그렇게 해서 케어할 거고.
그 다음에 인제 소원이 하나 있는데, 그 소원은 부산, 대구, 서울 지역에 누가 자기 건물을 도네이션 해주면 스님 거기다가 너무 아름다운 호스피스 병원을, 조그마한 병원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서울 지역, 대구 중간 지역, 부산 지역에 사람들의 죽음의 질을 높이 는 데 기여해주고 싶어요. 죽고나면, 자식에게 남겨줘도 3년 안 가거든요. 자식에게 물려 준 재산이 3년 안 가니까 굳이 물려주려 애쓰지 말고, 죽기 전에 내가 좀 많이 가졌다면 그런 것들을 도네이션 해주면, 서울 지역, 대구 지역, 부산 지역에 임종을 전문으로 돌봐 주는 병원을 만들고 싶다, 자재병원보다 더 아름다운 병원으로. 얼마나 그 사람의 공백이 무량하겠어요. 얼마나 돈 멋지게 쓰는 거잖아요. 나는 힘들겠지만 그 사람은 멋지게 쓰는 거지. (합장하며) 이루어지이다.
/ 각주
1. 여불위는 원래 양책(陽翟:河南)의 대상인(大商人)이었다. 그는 국경을 넘나들며 장사를 했으며 이를 통해 거금을 모은 전국시대 대부호였다. 특히 여불위는 수완이 뛰어나고 이재에 밝았다. 여불위가 조(趙)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으로 갔을 때 진나라의 서공자(庶公子)로 볼모로 잡혀 있는 자초(子楚)를 만났다. 자초는 진나라의 소왕(昭王)의 둘째 아들인 안국군(安國君)의 가운데 아들이었다. 여불위에게 는 여자가 있었는데 임신한 사실을 숨기고 그 여자를 자초에게 주었다. 여불위는 자초가 진나라로 귀국 할 수 있게 도움을 제공하였고 후일 자초는 왕위에 올라 장양왕(莊襄王)이 되었다. 그 공로에 의해 여불 위는 진나라 승상(丞相)이 되어 문신후(文信侯)에 봉하여졌다. 장양왕이 즉위한지 3년만에 죽자 《사기 (史記)》에 여불위의 친자식이라고 기록된 태자 정(政:始皇帝)이 왕위에 올랐으며 그가 진시황제이다. (두산백과)
2. 「이 순간」 p.132
3. 「이 순간」 p.229
4.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임을 뜻하는 불교용어이다. 《화엄경 (華嚴經)》의 중심 사상으로, 일체의 제법(諸法)은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의 나타남이고, 존재의 본체는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것일 뿐이라는 뜻이다. 곧 일체의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에 있다는 것을 일컫는다. (두산백과)
5. 「이 순간」 p.26-28
6.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p.130
7. 「이 순간」 p.163
8. 「이 순간」 p.175
9. 「이 순간」 p.234
10. 「이 순간」 p.256
11. 마하보디교육원은 울산시 울주군에 위치한 불교 의료복지 전문인력 양성기관으로 불교호스피스 교육, 영적치유 에너지 강화 훈련, 승려연수 불교호스피스 영적돌봄, 직무연수교육 등을 실시하고 있으며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을 운영 중이다.
12. 「이 순간」 p.256
13. 2018년 6월 11일 능행스님을 상임대표로 한 울산불교환경연대와 상북면 주민들은 울산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울주군 상북면 길천산업단지 내 유해업체 아스콘 공장 설립 반대를 주장했다. 7월 16일 울주군 민원조정위원회는 온양읍 외광리 레미콘 공장 사업계획 승인 신청에 대해 불가 권고를 결정했다. 앞서 울주군은 상북면 길천2차 2단계 일반산단 내 아스콘 공장 건축 신청을 불허한 바 있다. 아스콘 회사 측이 허가 불허를 취소해달라고 행정심판을 제기했으나 울산시 행정심판위원회는 이를 기각했다.
14. 「이 순간」 p230
15. 「이 순간」 p.194
16.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p.95
17.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p.238
18.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p.56
19. 「이 순간」 p.153
20. 「이 순간」 p.274
구술자
능행스님과의
만남
구술자 능행스님은 1960년 거제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그를 잉태했을 때 상서로운 태몽을 꾼 할아버지께서 태교를 매우 중히 여겼다. 구술자는 자존감과, 긍정,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의 근원에는 안전하고 아름다운 태교에서부터 열 살 때까지의 환경, 자긍심을 심어준 할아버지의 교육이 있었다고 말한다. ‘예배당 가는 길 들은 불경 소리’에 이끌려 삼십대에 출가를 결심하였다. 소록도, 꽃동네, 암환자 병동 등에서 호스피스 돌봄을 하다가 2000년에 충북 청주에서 정토마을 호스피스 센터를 건립하였다. 2003년 생사를 오가는 경험 끝에 죽음을 사유하고 환자와 보호자의 입장에 더욱 다가갈 수 있었다. 불교 호스피스병원 건립을 발원하여 십시일반의 모금으로 2005년 울산 울주군에 자재요양 병원 부지를 매입해 2년 후 불교 의료복지 전문인력 양성기관인 ‘마하보디교육원’을 개원하였고, 2009년에는 불교호스피스협회를 창립하였으며, 2014년에 자재요양병원을 개원하였다. 2018년에는 울산불교환경연대를 창립하여 자연과 인간이 상생하는 울산을 만들고자 힘쓰고 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의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게 전부 다 연결을 해보면, 생명과 생명끼리의 공생과 공존, 존엄이 거기에 다 연결되어 있어요. 다 한 맥이 에요. 한 나무에서 난 가지라, 그냥.”
2018년 8월 두 번째 방문에서 자재요양병원의 직원들과 구술자는 사랑하는 동료의 사고사 소식으로 큰 충격과 비탄에 빠져있었다. 만남을 취소하고 돌아가려는 기록자를 다시 자리에 앉힌 것은 그의 슬픔이 묻어나는 깊은 목소리였다. 두 번째 만남 녹취록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어떤 때는 내 삶 자체를 압도시킬 때가 있어요, 죽음이. 이런 죽음들. 내 삶을 그냥 잡아먹을 거 같은 압도적인 죽음.” 그는 8월 어느 날의 일기에 쓴다. ‘이 삶이 참 힘겹다.’ 그리고 또 쓴다. ‘삶은 매일 피는 꽃을 닮았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하루의 시작. 삶이 너와 나를 깜짝 놀라게 하도록 허락해야 하는 이 아침을 선물로 받았다. 밤이 주는 잠에 어제가 깨끗이 지나고 다시 맞는 아침. 모든 일은 정확히 일어나야 하는 대로 일어날 그날. 이 닦고, 세수하고, 선선한 바람을 만나면서 신선한 바람 속으로 걸어 나가는 것보다 더 고귀하거나 영적이거나 숭고한 일은 없음을 알게 하는 아침이다. 이해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이지만 그래도 깊은 수용으로 허락해보면서 매일, 매 시간, 매 순간을 그때가 언제나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 마지막 순간임을 성찰하는 아침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날이 또한 최초의 날이며 마지막 순간이 최초의 순간임을 일깨우는 아침이다. 모든 작은 것들 하나 하나 안에서 현존을 보이는 우주를 만나는 아침. 이 아침을 나는 찬미한다.’
2006년 12월경부터 치질이 항문에서 조금 삐져나와서 움직일 때마다 항문이 시깃시깃하다던 아내가 치질 수술을 하자고 했다.
2007년 3월 치질 수술을 위해 인근에 있는 병원에 들렀다. 진찰을 하던 의 사는 단박에 ‘치질이 아닌 것 같다’면서 큰 병원으로 가서 진단과 조직 검사를 받아보라고 하였다. 놀랍지만 그래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큰 병원에서 검사를 받은 결과 직장암 말기였고, 이미 간과 폐까지 전이되어 있으며, 항암치료는 큰 의미가 없다고 하였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애써 마음을 진정해 보았다.
‘그래, 70살에 생길 것이 30년 빨리 왔을 뿐이다. 맘 굳게 먹자.’
그러나 직장 노동조합 사무총장을 맡고 있었던 나는 귀가가 늦어졌으며, 아내를 제대로 보살펴주지 못했다. 더구나, 2006년 1월 사무총장에 당선된 뒤부터 그만두라는 아내와 다투고 난 후 1개월 침묵, 어떤 경우에는 2~3개월간 아내와의 침묵이 계속되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안팎으로 힘들었고, ‘이 짓을 계속해야 하나’ 고민도 많이 했다.
마음이 힘들 때마다 절에 가서 108배 하고, 금강경 읽고, 아내를 향해 마음이 누그러지길 발원하였다. 그래도 나의 번민은 계속 쌓여만 갔다.
제25기 불교호스피스 교육 받으며
2006년 여름에 읽었던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책을 떠올리면서 인터넷에서 ‘정토마을’을 검색하게 되었고, 제25차 불교호스피스교육이 2007년 8월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 어쩌면 지금 내 마음을 잡아줄지도 모르겠구나.’
기대를 걸고 신청을 하여 교육을 받게 되었다.
교육받는 동안 내내 아내의 ‘직장암’에 대한 생각과 이러한 아내의 암 투병을 어떤 자세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 그리고 앞으로 이 사태를 애들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가 화두였고,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내 아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나는 내 아내에게 내 맘을 이해시켜 보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나는 어쩌면 그렇게 내 아내에게 나그네였고, 아내에게 가까이 가지 못한 방관자였을까.’
그런 자각과 함께 아내와의 다툼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리고 현재의 병 원인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나에 대한 스트레스가 주범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아내에 대한 연민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능행스님은 교육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분노하고, 타인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등 자신을 파괴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을 서럽게 했으며, 자신을 외롭게 했습니다. 자신을 못났다고 했으며, 자신을 쓸모없다고 했습니다. 밖으로 밖으로만 매달렸던 것입니다. 오장이 살아남기 위해, 육체가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가! 자신의 존재를 꼬옥 온몸으로 안아주시기 바랍니다.’
이 법문을 듣고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내 자신에 대한 미안함에 눈물을 쏟으며 참회하였다. 내가 바깥으로만 끌려 다니며 사는 동안 아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 자신의 아집을 본 것에 감사하며
나는 5남 1녀 중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누님은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시집을 갔다. 우리 집에 여자라고는 단지 엄마 혼자였다. 밤늦게 일을 하고 집에 들어와도 누구 하나 밥을 해놓지 않아서 엄마가 그 지친 몸으로 밥도 하고 방청소도 하였다.
나는 자라면서 여자에 대한 배려와 여자들의 생각, 여자들이 말하는 법 등을 배우지 못했다. 그냥 내가 잘해주면 될 것이다. 이렇게만 생각하였다.
큰애 임신 중에 시원한 것 먹고 싶다는 아내 말에 나는 고작 아이스크림을 사주었고, 추석이나 설날 시골에 가는 날이면, 아내가 내게 “나는 시금치의 ‘시’자도 싫어한다.”고 말하면, 버럭 화를 내면서 “왜 시골만 가려고 하면 그렇게 말을 하느냐? 차라리 시골 가지 말자.” 이렇게 말을 해버렸고, 그 말로 인해 명절 내내 서로가 기분이 좋지 않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자를 싫어한다는 말은 아내가 남편에게 위로받고 싶어서 그냥 하는 말이었는데 그땐 정말 몰랐다. “그래, 나한테 시집 와서 힘들지, 그리고 시골에 가면 당신이 일을 많이 해야 될 거야. 힘들어도 참어.” 이렇게 말하고 위로 했어야 했는데, 그때 나는 아내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을 내려버려서 잦은 다툼이 일어났던 것이다.
입원, 수술, 그리고 부처님 가피
2007년 12월 19일 새벽, 결국 항문으로 변이 나오지 못하던 것이 위태로워지면서 조선대학교 응급실로 직행하였고, 오전에 능행스님과 전화 통화 후 곧바로 일산에 있는 동국대학교 불교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직장암으로 항문이 막혀 대장 속에 변이 쌓여 있는 것이 극에 달한 것이었다. 장은 본능적으로 운동을 하여 항문 쪽으로 보내는데, 항문이 막혀 있어서, 육안으로도 보면 딴딴하게 굳어서 볼록한 것이 보였다.
2007년 12월 21일 새벽, 내내 부풀어 올라온 배를 부여잡고 진통제 투여와 고통을 호소하는 마누라 손을 잡은 채 가슴을 조이다가 아침을 맞았다. 참으로 우리는 많은 말들을 나누었고, 아내의 착한 마음도 보았으며 내 자신의 아 집도 보았다. 오후에 수술 준비를 위해 간호사님들이 병실로 들어왔을 때, 그저 수술(대장에서 변을 빼내기 위한 장루 수술임)이 잘 되길 바랄 뿐이었다. 3시간 수술이 끝났다는 연락을 받고 회복실에 달려가서 아내 얼굴을 보니 너무 좋았다.
빙긋 웃는 아내가 그냥 고마웠다. 나는 ‘이게 반가움일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비죽이 흘러나오는 웃음으로 아내를 보았다. 너무 잘된 수술이었다. 모두가 부처님 가피와 여러 도반들의 기도 덕택인 것 같았다. 아내의 수술 사실이 호스피스 동문방에 알려진 후 아침 7시와 저녁 10시에 ‘찰나기도’를 간절히 해주신 스님들과 동문님들께 어떻게 감사함을 표해야 할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는 아직도 완벽하게 아내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종종 아내는 내게 독설을 퍼붓는다. 그래도 감사하다. 수술 전까지의 2박 3일의 시간은 나와 아내의 현생의 업이 녹았던 시간이었으며, 연애시절 그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그때만은 이 세상 모두가 청정해 보였었다. 아내는 내게 아버지 같은 남편의 모습을 기대한 것 같았으나, 나는 언제나 내 몸 편하고 싶은 마음에 빠져 아내에게 보채기만 하는 어린 남편이었다. 하염없이 참회의 눈물이 흘렀다.
질병, 수행의 도구로 삼아
2007년 12월 19일 수요일 새벽부터 12월 21일 금요일 집사람이 입원하여 장루(腸瘻) 수술이 끝날 때까지, 이렇게 많은 도반님들의 쾌유 기도를 느껴보니 부처님의 가피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깊고 깊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스스로 내 삶의 명심문을 만들었다.
“부처님 뜻대로 베풀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아내의 아픔을 계기로 부처님 말씀에 의지하며 더욱더 부지런히 정진 수행하겠습니다. 함께 공유하고, 함께 나누고, 아내와 즐겁게 웃어보겠습니다. 모든 인연에게 회향하며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나의 도반과 일체 중생들이 아픔에서 벗어나 부처님 전 복짓기 발원 합니다.”
오늘 아침 맞은 햇살의 느낌은 어떠셨는지요? 오늘 아침 맞은 공기와 바람의 온도는 어떠셨는지요? 오늘 아침 만난 분들은 어떤 모습들이었는지요?
테라피를 하고 오면 문득문득 뵈었던 분들이 오늘은 어떠실까 떠올려지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그저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낮게 속으로 몇 번씩 불러봅니다.
그냥 오늘 아침 보살님 안부가 조금 더 궁금해졌고 꼭 전하고 싶은 제 마음이 있어서 적어 보내봅니다. 늘 그곳을 다녀오면, 우리는 어떤 인연으로 길게는 1년, 짧게는 단 한번 여기서 만나게 되었을까 되돌아봅니다. 불법을 공부하면서 제가 가장 크게 깨친 것이 있다면 내 밥상에 오르는 밥 한 톨, 콩나물 한 가닥, 늘 입는 옷이 내 몸에 걸쳐지기까지 만인의 노고와 땀이 녹아들어 있다는, 그래서 천지 만물의 은혜로 내가 숨 쉬고 살아가는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보살님 옆에 계신 어르신은 의성에서 마늘 농사를 지으셨다지요?
어쩌면 제가 그 분이 지으신 마늘 한쪽을 먹었을지 모르는 일이고, 맞은편에 계셨던 스님은 늘 중생들을 위한 기도를 해주셨기에 그 기도가 인연되어 그 받은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으라고 뵙게 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곤 합니다. 보살님과의 인연은 어떤 의미일까요? 지난번 제게 불교의 핵심 교리를 말해주시고는 종범스님 설법을 권해주셨지요.
아마도 불법 제대로 배워서 법에 따라서 똑바로 살라는 그 가르침을 주시려고 뵙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주말에 종범스님 설법을 찾아 들어보면서 군더더기 없이 명료하고 본질을 보도록 해주시는 성성한 법문이 참으로 선명하게 다가왔습니다. 또 한번 보살님 모습이 떠오르고 비록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뵙게 되었지만 인연됨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어 혼자서 눈물을 닦았습니다. 법을 전해주시는 또 한분의 선배 도반으로서, 스승으로서의 인연이 보살님과 저의 참으로 귀한 인연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보살님은 제게 돌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받는 분의 심리적, 육체적 컨디션을 주의 깊고 세심하게 살피기보다 내 추측에 이렇게 해드리면 좋지 않을까하고 했던 행동들이 얼마나 일방적이고 불편함을 드렸을까를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보살님,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공부 제대로 해서 잘 쓰이겠습니다.
때때로 넘어지더라도 고통 속 연꽃의 법향을 전해주신 보살님 생각하며 방일하지 않도록 노력하며 꾸준히 정진하겠습니다.
많이 힘드시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두손 모으는 일 뿐입니다. 멀리서 보살님 위해 두 손 모아 부처님께 기도 올립니다. 아미타부처님 자비의 빛이 함께 하셔서 이 순간 그저 평안하소서 _()_
※손재선 님은 호스피스병동에 아로마테라피를 통해 환자 돌봄을 해주시고 계시는 요법강사님이자 호스피스전문 자원봉사자입니다. 강사님께서 환자와 나눈 아름다운 소통을 많은 이와 나누고 싶어 두 분께 허락을 구하고 편지를 실어봅니다. 이 편지를 읽으며 사람과 사람이 만나 아름다운 순간을 만드는 이 공간에 함께하고 있는 것에 대한 기쁨과 인연에 대한 감사함과 소중함을 느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느낌들이 올라오시나요? 지금 여러분의 공간에도 아름다운 순간들이 항상 하고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