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가 새벽부터 어둠이 내릴 때 까지 운다.

 

매미의 일생은 며칠이지만 그 며칠의 여정에 존재로서 해야 하는 일을 마치고 7년 동안 숙면을 위하는 것 같다.

 

작은 곤충도 그러한데 하물며 인간, 특히 출가한 사문의 길을 가는 내 입장은 가장 어두운 곳, 그 곳에 작은 등불이라도 되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20세기가 저무는 그때 "정토"맑고 깨끗한 땅, 정토마을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정토마을은 붓다의 자비실천을 원력으로 삼아 질병과 죽음 그 사이에서 발생되는 고통들을 돌보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죽음에 그 가치를 두면서 인류가 공존과 공생을 통하여 더불어 사는 평화로운 정토를 구현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정토마을은 위와 같은 목적을 실천하기 위해 '의료'와, '임상교육'이라는 두 가지의 방법을 선택하였고, 인간이 겪어 내야하는 영적고통완화에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해 나가기로 했다.

 

2000년 1월부터 호스피스완화의료시설을 청주에 준비하여 매년 100여 명이 넘는 호스피스환자의 죽음을 13년간 돌보았고, 그 시작은 현재 울산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병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다양한 측면의 임상교육이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과 마하보디교육원에서 이루어지고, 그 자원들은 또 다시 환자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에 기여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정토마을 공동체의 가치이며 영성이다.

 

1997년부터 이루어진 기부와 모금이 정토마을 공동체가 수행하는 모든 분야의 밀알이 되어 주었다.

조건없는 헌신이 담겨진 기부와 자원봉사는 현재 국경없는 민들레가 되어 해외의료봉사로 이어지고 있고, 그렇게 정토마을은 의료적 측면과 교육적 측면으로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조금씩 확장되어가고 있다.

 

붓다께서 2700년 전 인도 기원정사라는 사찰 안에 열반당이라는 호스피스시설을 지어 죽어가는 환자를 직접 보살펴드렸고, 21세기에는 정토마을공동체 사람들이 붓다의 유지를 받들어 죽어가는 이들을 보살펴주고 있다.

 

지금 정토마을은 좀 더 많은 이들, 가난한 나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질병과 죽음에 관여하여 그들의 마지막 삶의 질과 죽음의 질 향상에 기여하고자 다양한 방법으로 길을 모색하고 있다.

 

정토마을 공동체에서 함께 일하는 모두는 같은 꿈을 꾸고, 같은 가치를 가지며, 그 의미를 좋아한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 것을 가지진 않았지만, 풍요를 잃지 않는 지혜로 살아감에 만족할 줄 아는 삶을 배우고 있다.

 

이곳에서 함께 살아가는 정토마을 공동체 가족 모두에게 감사의 마음 전하며 특히 호스피스에 마음 기우려 주시는 모든 분들께 더욱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함께 우산을 쓰고 가는 이 길에 폭우가 내려도 나는 당신이 곁에 있어 더욱 힘이 납니다.

 

-능행 합장

세상을 떠난 랜디 포쉬(Randy Pausch) 교수는 건강문제로 대학을 떠나면서 동료 교수들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행한 <마지막 강의>에서 아주 감동적인 강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행한 강의 내용 전부가 감동적이었지만, 저는 그 중에서도 특히 '벽 이론(The Brick Walls Theory)'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가 언급한 '벽 이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But remember, the brick walls are there for a reason. The brick wallsare not there to keep us out. The brick walls are there to give us achance to show how badly we want something. Because the brick wallsare there to stop the people who don't want it badly enough. They'rethere to stop the other people.”
“벽돌담은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그 벽돌담은 우리를 안으로 못들어가게 하기 위해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벽돌담은 우리가 그 어떤 것을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를 보여줄 기회를 주기 위해 그곳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벽돌담은 그것을 아주 간절히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그곳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벽돌담은 다른 사람들을 저지하기 위해 그곳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Remember brick walls let us show our dedication. They are there to seperate us from the people who don't really want to achieve their childhood dreams. Don't bail. The best of the gold's at the bottom of barrels of crap.”
“벽돌담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전심전력을 보여주도록 시킨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그것은 우리들을 어린 시절의 꿈을 달성하기를 진심으로 원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과 분리시키기 위해 그곳에 존재합니다. 결코 중단하지 마십시오. 가장 좋은 황금은 쓰레기더미의 가장 밑바닥에 존재합니다.”

결국 오래 전에 꾸었던 까마득한 높이의 성벽(城 壁)은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언젠가는 넘어야할 장애물인 것이며, 이러한 장애물이 존재하는 것은 꿈을 달성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자를 테스트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모두들 망연자실(茫然自失) 주저앉아 좌절하고 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연(憤然)히 앞장서 떨치고 일어나 벽을 타고 오르며 희망(希望)을 노래 하는 자그만 담쟁이 잎 하나...

그런 담쟁이 잎들이 존재했기에 인류의 역사는 그나마 발전하는 방향으로 면면(綿綿)히 이어져 내려 왔을 것입니다.

 

담쟁이 

도종환詩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2014년 자재병원을 건립하고 푹 삶긴 풀처럼 땅을 베고 누워있을 때 저는 이 시를 만났습니다.

저는 어느 날 병원을 완공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짓놀려버린 나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병원 앞 길목에 살고 있는 담쟁이를 만나 그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아~하

담쟁이 넝쿨은 벽을 결코 뛰어 넘으려 하지 않고 천천히- 기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저 담쟁이는 벽에 살면서도 저렇게 푸른 잎을 피우는구나 생각 하니 담쟁이의 인욕과 정진의 힘에 한없이 고마운 마음이 흘러갔습니다. 어린 담쟁이의 삶의 터전은 흙 한 톨도 없고 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메마른 벽, 그 벽을 의지하여 푸른 잎을 피우며 서로 힘을 내고 있었습니다. 서로 함께 힘을 모아 의지하며 배려하고 힘이 되어주면서 벽을 넘는 모습에서 저도 또한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정토마을을 위해 기도하는 후원 가족들이 곁에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담쟁이는 뿌리로 벽을 뚫고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벽을 붙들고 포기하지 않았던 거죠.

혼자만 살 길 찾겠다고 달려가지 않고, 천개의 이파리가 손에 손을 잡고 한 발짝씩 나아가느라 저렇게 느리게 가면서도 어느 견딜 수 없이 뜨거운 날에도 말없이 벽을 오르는 담쟁이처럼 저 또한 모든 일에서 서두르지 않고 조급해 하지 않으면서 삶의 벽을 오르고 있는 듯 합니다.

메마르고 거친 회색 벽의 환경을 푸른 잎으로 덮어 주는 담쟁이처럼 정토마을을 일구는 사람들과 함께 저도 질병으로 갈라진 마른 벽을 푸른 사랑으로 덮어 가 보려합니다. 담쟁이처럼 걸어 보려합니다.

 

정토마을을 사랑하는 그대와 함께 손잡고 벽을 넘어 저 푸른 초원으로 나가보려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서 때때로 벽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권력과 물질 그리고 권위로서 벽을 파괴 할 수도 있지만, 누구나 다 행복하고 평화로운 길, 타인에게 힘이 되고 도움이 되는 길, 길 없는 길에선 사람들에게 희망의 길이 되어주길 그 길을 담을 넘는 담쟁이처럼 그렇게 걸어가 보려합니다.

정토마을 국경없는 민들레 홀씨되어 그대와 나는 지금 담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계간지 정토마을. 2019 봄호)

 

기해년 오월 능행 합장 

 

 

자재병원을 소망하신 스님의 이야기

밤하늘에 별이 된 스님

무더운 어느 여름날, 호스피스 관계로 잘 알고 지내는 수녀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짐을 보면 스님 같은데 가족이 없고 임 종이 임박한 상태라면서 한번 다녀가길 원했다. 바로 다음 날 아침에 나는 서울로 향했다.

 

수녀님의 안내로 잠시 작은 방에서 여러 가지 기본적인 임상 자료를 브리핑 받고 호스피스 병실로 들어갔다. 날이 너무 더워 병실 공기가 탁하고 습했다. 창 옆 침상에는 뼈만 남은 남자분이 누워 있었는데, 수녀님이 저 분이라고 눈짓으로 말해주었다. 살포시 다가가 깡마른 손을 살며시 잡아드려도 환자는 눈도 뜨지 않았다. 느낌이 스님 같았다. 그래서 귓전에 대고 “스님!” 하고 불렀더니 그제야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셨다. 웬 비구니가 비구 손을 잡고서 있으니 ‘누구?’ 하며 놀라면서도 반가운 눈빛이었다.

 

스님이라는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 억장이 무너져 할 말을 잃어버렸다. 머리카락과 수염은 제멋대로 길어 엉망이고, 목욕은 언제 했는지 옷 속에 비늘이 뚝뚝 떨어지고, 손톱과 발톱은 길어 살을 파고들어갈 정도였다 차마 바라볼 수 없는 그 모습, 대명천지 밝은 하늘 아래 어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무엇부터 먼저 해야 하나 막막한 심정이었다. 밖에 나가 속옷, 바리깡, 면도기, 수건 등을 사왔다. 휠체어로 모시고 간신히 병실 목욕탕에서 삭발 면도하고 깨끗한 새 속옷으로 갈아입혔더니 병원 자원봉사자들이 모두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타 종교 봉사자가 나를 찾아와 정말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저희는 스님인 줄도 모르고, 기독교인 천주교인 할 것 없이 찾아와 찬송가 부르고 성경 읽어드리고 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왜 그렇게 해야 했으며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이렇게 무더운 여름날에…….’

 

나는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다. 다 씻기고 옷을 갈아입혀 자리에 눕혀 놓고 바라보니 얼마나 거룩하고 맑으신지……. 옛말에 한 다리가 천리라고 그래도 부처님의 한 제자로, 비구니에게 당신 몸을 맡기시는게 덜 서글프고 덜 비참했으리라.

 

"스님! 제가 이제 곁에 있을 거예요. 아무 염려 마세요."

 

우리는 서로 마주 눕고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법랍法臘 24년 출가 이후 지금까지 선방에서만 정진하느라 토굴 하나 장만하지 못 한 구도자였다. 지난 겨울 결제結制때 자주 잔 기침이 나서 해제하면 병원에 한 번 가봐야지 하다가 해제 후 주위에서 병원은 서울로 가야 한다고 해서 도반들이랑 함께 이곳을 왔는데 진찰 결과 폐암 말기로 진단이 나왔다고 했다.

 

"처음에는 도반 스님들이 해제비를 털어 입원했고, 도반들이 오가곤 했는데, 몸이 그저 그래서 모두 결제 들어가라고 했지. 그런데 이렇게 빨리 병이 깊어질 줄이야……."

 

올해 세속 나이가 47세. 속가에는 여동생 하나 달랑 살아 있어 가끔 왔다 가곤 했는데, 어렵게 살다 보니 요즘에는 통 못 온다고 말씀하셨다. 커다란 키에 뼈만 남은 육체의 고통……. 숨이 가빠 온몸의 땀구멍 마다 식은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전신은 산소 부족으로 청색증이 와서 피부는 파랗게 죽어가고 물 한 모금 제대로 떠 넣어주는 이가 없어 혀는 마른 논바닥처럼 갈라져 있었다. 거즈에 물을 묻혀 입속에 넣어드리고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 나를 찾았다. 병원비 문제로 직원이 올라온 것이다.

 

"450만원인데 스님 병원비는 어디로  구하면 되나요?"

 

대답이 퍼뜩 떠오르지 않았지만  "걱정 마세요. 해결할 테니……." 한 칸 토굴 형편에 이렇게 대답을 했다.

 

450만원. 시간은 없고 그 많은 돈을 어디서 구할까? 생각나는 대로 전화를 돌렸다. 차마 스님 병원비가 없어 그런다는 사정 이야기는 체면상 빼놓고 일곱 군데 전화를 해서 돈을 마련했다. 그리고 착한 어느 보살님께 스님 떠날 때 입혀줄 수의 한 벌 값까지……. 이 모든게 스님의 청정한 수행공덕이었으리라.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님. 왜 저 사람들이 와서 무례하게 굴면 나무라시지 가만히 계셨어요?"

 

스님은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서 말씀하셨다.

 

"우리나라에서 땅을 제일 많이 가진 종교가 불교인데, 중이 지 죽을 자리 하나 없어 남의 병원에 와서, 그것도 이렇게 큰 십자가 아래 누워 죽는 주제에 무슨 할 말이 있겠노? 허! 허! 내가 이래 큰 십자가 아래서 죽어나갈 줄 우예 알았노? 내가 중이믄 뭐 하겠노? 부끄러바서 눈도 뜰 수가 없었제."

 

스님의 부끄러운 마음이나 지금 내가 부끄러운 이 마음이나 같을까?

 

"스님! 제가 저 바랑 열어봐도 되지요?"

 

눈으로 그러라고 허락하셨다. 바랑을 열어 보니 가사, 장삼, 지갑, 승려증, 8만원, 통장 (120만원 들어 있었음)이 스님의 생활을 반영하듯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스님! 그동안 살아오신 짐들은요?"

 

내 물음에 고개를 흔든다. 20년 세월을 수행자로 살아온 마지막 모습이 이토록 비참할 수가……. 숨이 차서 좌불안석인 스님이 푹 꺼진 눈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시더니, 붉은 눈 속에서 눈물을 토해내셨다. 닦아도 닦아도 흘러내리던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스님을 모시고 내 토굴로 내려오고 싶었지만 형편이 그러질 못해서 더욱 죄송스럽고 안쓰러웠다. 하필이면 그 병원 십자가가 유독 컸다. 게다가 스님 머리 바로 위에 걸려 있어 마음이 더욱 불편했으리라. 침대 위로 올라가 한시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스님을 끌어안아 무릎에 누이고 작은 소리로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가는 혼자 남아……." 노래를 들려주었더니 힘없는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아주시며, 

 

"시님! 내 부탁 하나 들어주소, 꼭!"

 

"네~ 말씀하세요."

 

"나는 이렇게 십자가 아래 누워 죽지만, 우리 시님들 늙거나 병들면 편히 죽을 수 있는 병원 하나 지어주소. 시님은 할 수 있어."

 

처음 들어보는 소리에 나는 너무 놀랐다.

 

"스님, 난 못해요. 내가 의사도 간호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슨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안돼요! 스님! 병원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닐 거예요."

 

그러자, 스님은 내 손을 더욱 힘주어 잡으시며,

 

"원願을 세워요, 부처님이 계시니까. 내가 죽어서라도 도와줄게. 원만 세워! 원만 세우면 다 돼."

스님의 눈물이 내 승복 바지에 젖어들었다. 스님은 공부 중에 있는 도반들에게 자신이 죽더라도 알리지 말기를 당부하며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 후 뿌려주길 당부하셨다.

추적추적 장맛비가 내리던 오후 4시에 스님은 내 체온에 의지한 채 병든 육신을 여의고 그렇게 떠나셨다.

스님! 저 하늘에 뜬 저 별이 스님 아니신가요?

스님! 스님의 영전에 맑은 향 사루어 공양 올리오니 영원한 생명의 빛으로 사바를 밝혀주소서! 나무아미타불.

 

[능행스님 저서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중에서]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물질문명 시대에 정작 우리 인간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학교수, 총장, 국회의원, 큰 기업 사장, 큰스님, 작은스님, 아이, 어른 등 수천수만 가지 사연을 안고 사는 수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그런 현상적인 요소들과 상관없이 각각 달랐습니다. 제가 본 많은 죽음들은 제게 삶을 통찰하는 지혜를 주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꿈에서 꿈을 꾸면서 꿈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의 꿈은 죽음이 목전에 와서야 비로소 깨어지게 됩니다. 그 이전에는 꿈을 깰 수가 없어요. 내가 죽을 것이라는 것은 생각하면서 살아요. 그렇지만 실제로 내가 죽을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너무나 부족합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내가 오늘밤에 죽을 수 있어.’라고 인식하고 사는 분들은 과연 몇 분이나 있을까요?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인식해서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만약 우리가 ‘오늘 밤에라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집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생활하는 관점이 달라지고, 나에게 주어지는 한순간을 대면하는 나의 의도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꿈속에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시간을 한정 없이 주면서 언제까지 살 것이라고 최면을 겁니다. 그러나 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같이 죽을 수 있습니다. 오늘밤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죽어지면 대우주는 사라집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무도 인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욕망에 끄달려서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원망하고, 애정으로 애욕으로 뒤범벅이 된 삶을 살다가 결국 죽을병에 걸리고, 병에 걸렸다 해도 죽을 거라는 걸 인식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죽음이 목전에 와서 숨을 헐떡이면서 사대가 무너질 때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꿈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그때는 우리 인생이 너무 늦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꿈을 꾸게 되다가 종착역에 가서야 만나게 되는데 그때는 너무나 조급하고 초라하고 비참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 앞에는 대기업의 회장도 소용없어요. 저는 돈이 많으면 죽을 때도 잘 죽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그걸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죽음은 너무나 냉혹하고 정직하고 진실합니다. 죽음은 여러분이 죽어가는 3개월, 6개월, 1년 안에 여러분들이 살아온 일생의 결과를 오롯이 다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것은 내가 심어놓은 농작물과 같습니다. 돈이 많고, 권력이 있고, 명예가 있을수록 그 죽음은 더 외롭고 처절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자식이 열 명이 있어도 죽음 앞에서는 소용없습니다.

하나, 사랑하면서 살아가기
우리나라에서 일 년에 암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8만 명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암으로 판명되는 사람은 12만 명입니다. 남성 환자의 3명에 한 사람, 여성 환자의 5명에 한 사람이 암환자입니다. 내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 삶의 가치와 의미를 어디에 두고 살아가는지에 따라서 내가 고통스러울 때, 위기에 있을 때, 죽어갈 때에 삶을 마무리하는 결과가 달라지게 됩니다.
너무 잘살려고 애쓰지 마세요. 대충사세요. 좀 둥글둥글하고 소통이 가능하고 여유 있는 사람이 되세요. 여러분 모두가 여러분의 자식도 품어주지만 남의 자식도 품어줄 수 있는 가슴을 가지고 살아가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1년에 100여 명의 죽어가는 사람을 지켜보면서 제가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인간 존재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죽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말 한 마디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정직할 것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내 자신을 사랑할 때 남도 사랑할 수 있습니 다.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가 없어요. 죽음의 순간에 많은 이들이 가장 후회스러워했던 것은 돈도 권력도 명예도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야 할 수 있는 안타까운 그 말 한마디, “내가 사람을 사랑하지 못했다.” 였습니다. 온 가슴으로 나와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세상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한 것에 대해 가장 후회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세요? 머리로 사랑하지 말고 가슴으로 사랑하세요. 머리로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그것은 그저 생각하는 거예요. 사랑은 가슴으로 하는 것이며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정적으로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에요. 온 가슴으로 사랑을 하게 되면 용서하지 못할 것이 없고, 화해하지 못할 것이 없고, 꼴을 봐주지 못할 것이 없고,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고, 사랑하지 못하는 존재가 결코 없답니다. 가슴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세요. 그래서 죽을 때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후회하는 사람이 되지 마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둘, 나누면서 살아가기
여러분들이 소유하고 공유하고 사용하고 있는 것을, 그 중에서 1%만 세상으로 되돌려주세요. 왜냐하면 우리가 사용하는 산소, 땅, 이 모든 현상이 공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티끌 하나도 공짜가 아니에요. 여러분은 여러분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천지만물이 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고, 내가 존재하면서 천지만물이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편안히 살고, 나 혼자만 생각하고, 내 가족만 생각하고, 내 인생만 생각하는 삶은 참 재미없고 빡빡한 삶이면서 동시에 여러분이 언젠가는 갚아야 할 많은 빚들이 그 속에 녹아 있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대가없는 사랑을 받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다 못 갚으면 다음 생, 그 다음 생까지도 갚아야 되겠지요. 그렇다면 차라리 살면서 건강할 때 이 세상과 함께 공유하고, 여러분도 대가 없이 조건 없이 나눠줄 줄 아는 큰 가슴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자기 자신에게 인색한 사람은 다른 이에게도 인색합니다. 돈이 아무리 많더라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건강할 때 이 세상과 소통하고 공유하면서 살다가 죽음을 맞을 때 고통 없이 죽어가는 죽음은 겸허하기까지 합니다.

셋, 돌보면서 살아가기
지금 이 시대는 죽음의 문화가 상실되어 가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삶의 가치도 생명의 존엄성도 상실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죽음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부모가 밖에서 돌아가시고 하면 업고 집으로 뛰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집에서 죽고 싶어도 병원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어떻게 죽어야 하고, 죽은 사람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하는가에 대해서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해봅시다.
적어도 죽음은 안전해야 합니다. 죽음이 안전하게 보호받는 사회가 삶을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사회입니다. 내 죽음이 안전하지 못한 것은 우리가 죽음을 안전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죽어가는 사람을 돌볼 때 죽어가는 사람이 온전히 깨어서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잘 돌봐주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에 산파가 돕는 것보다 100배 이상 더 깊이, 더 섬세하게 죽어가는 사람을 돌봐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을 전혀 돌보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변의 부모나 누구라도 죽음이 안전하도록 깨어서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음을 맞이하도록 가르치는 선생님도 어른들도 없습니다. 죽음이 안전하도록 죽음을 바로 알고 나와 내 주변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죽음의 가치가 바로서야 삶의 가치가 바로 설 수 있다고 봅니다.
살 가능성보다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많은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사랑하지 못해서 후회하면서 죽지 않도록 지금부터 가슴으로 사랑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이 세상에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아주 조금이라도 나누면서 살아가면 참 아름다운 삶이 될 것입니다. 나와 내 가족, 모든 이들의 안전한 죽음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후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재단법인 정토사관자재회 계간지 정토마을 2009.겨울호)

2014년 2월 24일부터 BBS불교방송에서 방영된 능행스님의 법문 입니다.

 

1-죽음의 중심에 서다-

http://www.bbsi.co.kr/HOME/BBS_PLAYER/?PG_TYPE=VOD&ProgramCode=174&IDX=125557

 

2-가슴 설레는 또 다른 삶을 위하여-

http://www.bbsi.co.kr/HOME/BBS_PLAYER/?PG_TYPE=VOD&ProgramCode=174&IDX=125943

 

3-죽음의 여정에서 이 순간의 의미-

http://www.bbsi.co.kr/HOME/BBS_PLAYER/?PG_TYPE=VOD&ProgramCode=174&IDX=126145

 

4-괴로움의 원인은 갈애-

http://www.bbsi.co.kr/HOME/BBS_PLAYER/?PG_TYPE=VOD&ProgramCode=174&IDX=126470

 

5- 영적 돌봄의 필요성 -

http://www.bbsi.co.kr/HOME/BBS_PLAYER/?PG_TYPE=VOD&ProgramCode=174&IDX=126722

 

6-삶에서의 또 다른 삶을 위하여-

http://www.bbsi.co.kr/HOME/BBS_PLAYER/?PG_TYPE=VOD&ProgramCode=174&IDX=127007

 

7난치병 어린이들-

http://www.bbsi.co.kr/HOME/BBS_PLAYER/?PG_TYPE=VOD&ProgramCode=174&IDX=127338

 

8-흔들리는 신심 그리고 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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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전통죽음문화의 상실 그리고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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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삶이주는 기회와 희망(종착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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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임종간호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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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죽음에 대한 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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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임종의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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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대화 환자를 힘들게 하는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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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임종의식에 대한 재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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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정토수행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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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삶의 종착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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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바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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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정토세계에 대한 믿음이 담긴 수행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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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죽어감에 대한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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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죽음을 이용한 영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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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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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는 노소가 따로 있지 않다.
날짜가 한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차별도 없다.

현재 지구상에는 약 65억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이 함께 있음을 자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죽음의 주인공이 나임을 인식하며, 삶 속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오늘날 죽음의 원인 중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암이다. 암 투병 중에는 많은 돈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평상시에 보험을 포함하여 많은 돈을 저축하는 이유 중에는 병이 나면 쓰기 위한 것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정작 죽음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를 할까?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요소

 

심해지는 빈부의 격차
우리의 생활수준은 몇 년 전만 해도 몇 개의 계층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 격차가 더욱 심해져서 극부와 극빈의 상태로 나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빈부의 격차는 과도한 경쟁 심리를 유발시키고, 우리의 마음에서 풍요로움을 빼앗아가고 있다. 이에 따라 정신은 더욱 황폐해지고 감정은 점점 메말라가고 있다. 더구나 불안한 현실은 사람들에게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마음 상태를 갖게 하고 있으며, 점점 더 돈에 의존하게 한다. 심지어는 자식도 믿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극도의 경쟁 심리와 그에 따른 압박감, 불신과 불안은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바쁠수록 수명이 단축된다
현대인들은 정말 바쁘게 살아간다.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러나 정작 왜 바쁜지는 모르는 채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정말 바쁜 것이 아니고, 마음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외부의 경계에 끄들리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왜 바쁜지도 모른 채, 정신없이 살다보면 어느새 죽음이 눈앞에 와 있다. 마음이 바쁘고 불안해서 자신을 혹사시키고 괴롭히면서 몰아치다 보면, 자살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빨리 죽을 수도 있다.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은 육체적인 질병뿐만이 아니라, 바쁜 마음 때문에 몸과 마음의 균형이 깨지는 것도 큰 몫을 차지한다. 

죽음에 도달하는 지름길은 욕망과 집착
욕망이란 끝없이 얻으려 하고 움켜쥐려고 하는 마음이다. 이러한 욕망이 적당할 때에는 우리의 삶을 발전시키는 방편이 되기도 하지만, 지나칠 때에는 우리의 삶을 망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욕망을 잘 조절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활기차고 풍요로울 수 있을 것이다.
집착이란 한번 움켜잡으면 놓지 않으려 하는 마음이다. 좋은 것은 좋기 때문에 놓치지 않으려고 움켜잡을 것이고, 싫은것은 그것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을 움켜 잡을 것이다. 이러한 욕망과 집착을 갈구하는 마음의 강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의 몸은 화장할 필요도 없이 스스로 타죽고 만다.
IMF의 경제위기를 넘기고 난 몇 년 뒤에 우리나라에는 암환자가 급증을 했었다. 이런 현상은 경제적인 위기상황에서 겪은 마음의 고통과 스트레스가 육체의 질병을 유발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통해 우리는 올해의 경제 위기가 2, 3년 뒤 암환자의 급증을 가져올 거란 예측을 할 수 있다. 즉 마음의 고통이 몸의 질병을 가져오는 것이다. 지금의 사회현상은 가까운 미래에 나타날 현상을 보여주는 셈이다. 이럴 때 우리는 마음을 어떻게 내야 할 것인가?

 

내가 원하는 대로 죽기 위해 필요한 요소

 

돈을 운용하는 지혜
우리나라는 아직은 혈연을 중요시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사랑 아니면 돈 때문에 병이 드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죽음은 비참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이 맑을 때 돈을 제대로 운용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우린 평생 돈을 벌어서 저축을 하기도 하고, 많은 보험을 들기도 한다. 그 이유는 늙어서 병이라도 들면 자식들에게 신세 지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돈에 모든 것을 의지하며 움켜쥐고 놓을 줄을 모른다. 그러나 병이 들면 내 맘대로 움직일 수가 없어 제대로 치료도 할 수 없게 되며, 중단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된다. 거기에 보험금 마저도 보호자인 자식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돈은 언제 어떻게 없어지는지도 모르게 없어지고 남는 것은 질병과 외로움, 서러움과 원망, 죽음뿐이다. 그리고 죽은 뒤에는 자식들간의 의리마저도 끊어놓게 된다. 이렇게 봤을 때 돈은 가족과 나를 망치는 주범인 셈이다. 돈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인간성과 윤리마저도 상실하게 한다. 돈은 휘발유와 같다. 휘발유는 불이 나게도 하지만 자동차를 움직이게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 돈에 대한 정치를 잘 해야 하며, 적절하게 운용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당신의 삶, 죽음이 말한다
“죽을 때 보자.” 
이 말은 죽음이란 사건은 우리의 삶을 그대로 재판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즉 죽은 뒤에 염라대왕 앞에 가서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가 염라대왕인 것이며, 죽어가는 과정에서 현상으로 드러난다는 말이다. 
남을 미워하고 원망하면 그 미워하는 과보로 인해 죽을 때 깨끗한 눈으로 죽을 수가 없다. 그리고 남을 비난하고 욕하면, 죽음이 오기 전에 혓바닥이 마른 논바닥 갈라지듯 쭉쭉 갈라지고 부풀어 올라 움직일 수 없는 고통을 받는다. 여기에 물을 부어주면 아프지만, 혀가 입안에 꽉 차서 의사를 표현할 수가 없어 그 고통을 그대로 겪으며 죽게 된다.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은 지은 죄의 모습이 현상으로 눈앞에 떠올라 몸부림치기 때문에 온몸을 묶어놓아야 한다. 심한 잘못을 한 사람 은 죽을 때 자신이 저지른 현상을 그대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선하고 어질게 산 사람은 선하고 어진 과보를 받고, 악하고 모질고 나만 아는 이기적인 삶을 산 사람은 죽음의 여정에서 자신이 뿌린 그대로 겪게 된다.
병이 드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부처님도 생로병사를 여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듯이, 우리의 몸은 물질이기 때문에 병들고 아프면서 죽는 것은 모두가 겪는 여정인 것이다. 그러나 병들고 죽어가는 여정,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통 의 현상은 각각 살아온 모습으로 결정된다. 다시 말해 죽어가는 사람이 겪는 고통 과 외로움, 괴로움, 아픔, 서러움은 그 사람이 살아온 모습을 말해주는 것이다. 돈, 가족, 명예, 지위, 권위는 죽음의 여정 앞에서 내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 고,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 그것은 내 죽음의 질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죽음은 그러한 현상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내 죽음의 모습이 어떻게 되길 원하는지 그 모습이 확정된다면 삶에 대한 대답 은 저절로 나오게 된다. 그 모습대로 삶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삶이 풍요로워지고 행복해지고, 삶의 모습이 당당하게 되며 자유로워지고 아름다워진 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모습이 그려지지 않으면 삶이란 드라마도 혼란스런 모습 을 보이게 되고 제대로 된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다. 따라서 죽음의 드라마가, 극 본이 구체적으로 설정되면 삶의 드라마도 변하게 된다. 삶의 목표와 역할에 따라 극본과 시나리오 등이 제대로 정해지고 변하게 되며, 그 변화는 개인의 삶뿐만 18 보디사트바_겨울 아니라 사회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마음의 치유는 죽음의 질을 높인다
평상시에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을 보면 죽음도 잘 맞이할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에 보이는 모습은 치유되지 않은 마음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몸을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속의 질병을 치유 해야 죽음의 질을 높일 수 있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갖가지의 돌덩어리를 올려놓고 살고 있다. 감정표현, 심정표현을 제대로 못하고 살고 있으며, 그것은 고스란히 가슴속에 담겨져 있다. 그리고 그대로 질병이 되고 악취가 되어 밖으로 표출된다. 따라서 가슴에 올려놓은 돌덩어리를 제거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그것을 제거해야만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랑, 보살핌, 관심이 없는 삶, 아내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삶, 자식과의 불통의 삶이 노년을 외롭고 쓸쓸하고 힘들게 한다. 그리고 그 마음의 병이 육신의 병이 되게 한다. 내가 타인에게 그러한 행위를 했다면 그 과보는 고스란히 내가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내가 행복하고 풍요로운 노년과 죽음을 맞고 싶다면 그러한 공덕을 쌓아야 함을 의미한다. 

타인의 죽음을 돌보는 행위
죽어가는 사람에게 다가가 잘 봉양하고 보살피며 도와주는 인연을 짓지 않으면, 내가 죽을 때 그러한 인연이 없기 때문에 나의 죽음자리도 지켜주는 이가 없고, 어떤 일이 있어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어떤 좋은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내가 죽을 때 사랑받고 극진한 돌봄을 받으려면 그러한 종자를 심어놓아야만 한다. 아무리 자식이 많고 친척이 많아도 죽는 그 순간엔 모두 자리를 비우게 되는데, 그러한 종자를 심지 않은 인과의 법칙에 의한 것이다.
내 주변에 임상의 대상은 많다. 부모, 친척, 형제 등 그러한 사람들을 향해 죽는 그 순간만이 아니라 끝까지 도움을 줘야 한다. 내가 간호 받고 싶은대로 타인을 간호해야만 한다. 내가 죽은 뒤에 장지까지 오길 바란다면 타인에게 그렇게 베 어야 한다. 타인의 죽음을 돌보는 것은 바로 나의 죽음을 돌보는 행위인 것이다.

준비없는 죽음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같다
죽음의 모습은 마음으로, 생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준비하지 않으면, 어느 날 죽음이 왔을 때, 비참하게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와 같은 신세가 된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모습은 눈을 부릅뜨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뒷걸음질을 친다. 안 끌려가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그러나 결국엔 끌려가고 만다. 돌아설 수 없는 그 길을 돌아서려 하고 몸부림친다면 몸부림치는만큼 괴롭고 비참하며 고통만이 있게 된다. 이런 모습은 누구에게나 예외가 없다.
현대인의 조급증을 반영이라도 한 듯, 요즘은 갑자기 발병하고 진행속도도 빠른 암이 많아지고 있다. 췌장암, 담도암, 폐암 등은 진행 속도도 빠르고, 발견한다 해도 치료할 시간도 없다. 그렇다면 언제 삶을 정리할 것인가. 돈이 많은 경우 그 돈을 정리하지 못했으면 자식들이 죽지도 못하게 한다. 치료라는 명분을 내세 워 현대 의학에 의존해서 목숨을 연장시키며 돈을 정리하도록 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건강할 때 해당되는 사람들 모두에게 돈이 있고 없음을 분명히 말해서 죽음을 준비해야만 때가 되었을 때 편안히 죽을 수 있다.
또한 마음의 돌덩이를 모두 내려놓고, 정말 가볍게 갈 수 있어야 한다. 미움도 원망도 내려놓고, 모든 것을 용서한다면 아주 가벼운 몸으로 가게 된다. 시신이 바짝 말랐어도 태산같이 무거운 경우가 있고, 뚱뚱해도 깃털처럼 가벼운 경우가 있다. 이것은 우리 삶의 모습인 것이다. 죽음만큼 살아온 모습을 정직하게 대변해 주는 것은 없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모습을 직면한다면 함부로 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지금 같아선 죽음의 길을 누구나 잘 갈수 있고,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죽음이 앞에 와 있으면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다. 병이 들었을 때 원망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그 나이에 맞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자식 낳고 농사짓고 하는 것은 내 삶이 아니다. 이러한 삶을 90살을 살았더라도 그것은 산 것이 아니다. “얼마나 살았다고…….” 이 말은 아무리 긴 시간을 살았 더라도 내 삶을 산 것은 얼마 안 되었다는 말이다. 자식을 위한 삶은 내 삶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80이 되어서도 ‘얼마나 살았다구.’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 앞에 와서 가자고 하기 전에 내 삶과 내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

죽음을 상실한 삶 자체는 죽음이다
오늘날 우리는 죽음을 상실해 가고 있다. 우리의 문화가 죽음을 외면하게 하고 있다. 그래서 집에서 죽은 사람도 병원으로 실려 가게 하며, 시신에 대한 부가가 치까지 생겨나서 시신 쟁탈이 일어나기도 한다. 병원에서 죽게 되면 숨 떨어지자마자 실려 나가 냉동고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는 평생 쌓아온 공덕을 순식간에 무너뜨리는 행위이다. 정신을 안 차리고 죽으면 누구나 그러한 처지가 될 것이다.
죽음이란 지(地)․수(水)․화(火)․풍(風) 순서대로 무너지는 과정이다. 사대가 차례로 무너질 때는 의식을 온전히 집중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문소리나 발자국소리 하나도 없이 절대적인 적정의 상태에서 염불소리와 화두에 집중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혼식이 고요하고 적정한 상태에서 염불소리를 들으며 화두만 잡고 육체를 빠져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혼식이 모두 빠져 나간 뒤에도 5~6시간 정도는 조용하게 시신을 건드리지 않아야 한다. 그 순간은 다음 생을 결정짓는 절대 절명의 순간이며, 이 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따라 사후의 질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소원은 건강하게 살다가 남의 신세 지지 않고 자듯 죽는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임상의 현장에서 직면한 진실은 수행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에 제대로 죽지도 못한다는 사실이다. 수행을 했어도 현상적인 수행은 했을지언정 실제적 으로 영적인 성장을 이룬 수행이 되지 못했기에 잘 죽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삶 속에 죽음이 함께 있음을 자각하면서 순간순간을 살아가야 할 이유이 기도하다.

능행스님 │재단법인정토사관자재회 이사장
(채록자|변은숙, 24기 호스피스)
출처 : 재단법인 정토사관자재회 계간지 ‘정토마을’ 2018.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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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마을 능행스님 : 네이버 포스트

행복한 삶이란? 온전한 죽음이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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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은 무엇이며, 죽는 것은 무엇인가?
일찍이 붓다께서는 사는 것도 고통[生苦]이고 죽는 것도 고통[死苦]이라고 하셨다.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열반이 있고, 열반으로 가기 위한 수행이 있는 것이다. 삶은 연기법에 의해 인연의 조건과 환경에 영향을 받으면서 그 무엇을 학습하는 여정이다. 그 학습 결과에 따라서 맞이하는 죽음의 질이 다르고, 시작하는 죽음의 질이 다르다.
사람들은 흔히 죽음이란 나이가 들거나 심각한 병이 들었을 때 찾아오는 손님 쯤으로 여긴다. 그러나 2008년 이 시점에서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죽음이나 질병은 연령과 성별을 구별하지 않고 다가온다. 그래서 아주 두렵고 공포스러운 느낌이 강하다. 손님이긴 하지만 반갑지 않은 손님임에는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애써 회피하고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재수 없거나, 마음 상하게 하는’ 부정적인 주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죽음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미리 준비하고 극복해가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그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전혀 하고 있지 않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렇다면 삶의 여정 중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죽음이 찾아왔을 때, 두 손 들어 환영은 못할지라도 당황하지 않고 허둥대지도 않으면서 담담히 맞이할 수는 없는 것일까?

죽음에 대한 인식의 부족
요즘 젊은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인식이나 지식,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이다. 매일의 생활 가운데 죽음을 염두에 둔다거나 죽음 뒤의 세계에 대한 생각을 하는 일은 결코 없다고 할 정도이다. 더구나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은 부분을 부모에게 의지하기 때문에 갑자기 병이 들거나 죽음에 임박해서도 부모가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 생각한다.
때로 젊은이들에게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어떻게 될 것이라 생각하는지요?’ 라고 질문을 하면 그런 점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다.’라는 대답을 들을 때 막막함을 느낀다. 이런 인식과 무지와는 달리 현실적으로 죽음은 우리와 훨씬 가까이에서 삶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반영하듯,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청소년, 소아를 위한 암병동은 서울대병원 등 대형 병원 몇 개에만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각 대학병원마다 소아암병동이 생겨났다.
더 이상 젊은이들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죽음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해 직면해야 하며, 의식을 바꾸어야 한다.

변화된 죽음의 환경
예전에는 집에서 태어나 집에서 죽는 것이 다반사였다. 심지어는 안방에서 죽지 않으면 객사(客死)라고 하여 그 시신을 집안에 들이지 않을 정도로 죽음을 존중하였다. 장례를 치르는 과정을 보더라도, 잘못 행해졌을 때 다시 고칠 수 없는 일이 장례에 대한 일이기 때문에 정성을 다하여 실수하지 않고자 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태어나는 것도 병원이고 죽는 곳도 병원이다. 대개 병이 들거나 죽음에 임박해서는 집에 있다가도 죽을 때는 다시 병원으로 가서 죽는다. 이는 죽는 사람에 대한 배려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 위주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아파트라는 주거환경은 사람의 주검조차도 물건으로 치부해 버리곤 한다. 주변의 죽음을 보면서 나의 죽음을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극도의 이기주의에서 죽음이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즉 죽음이 상실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이나 친지, 친구 등 주변의 사람들이 죽어도 그 여정을 함께하지 못하고 죽음 뒤에도 충분히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죽음을 상실한다는 것은, 죽음이 결핍된다는 것은, 죽음을 외면하는 것은 온전한 삶이라 할 수 없다. 우리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죽음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지 않는다. 될 수 있으면 죽음을 외면하게 한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회피는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면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삶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며, 부모는 자녀들에게 이러한 환경을 제공하는 주인공이다.
어른들은, 부모들은 젊은이들이 죽음에 대해 직면하고,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 젊은이가 건강한 생각을 가지고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삶의 요소보다 훨씬 많은 죽음의 요소
우리 주변에는 삶을 영위하게 하는 요인보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요소가 훨씬 많다. 정신 차리고 보면 가슴을 쓸어내려야 할 만큼 위험 요소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죽을 일이 많다.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는 매일 매일의 사건 사고만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어제까지도 웃던 사람이 오늘 생사가 나뉘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한 번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또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우리는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에는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고 온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그 많은 죽음의 요소를 견뎌내고 살아온 사람들이 맞이하는 죽음의 여정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죽음, 그 이후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무지에 대해서도 별 의식이 없다. 평소에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기며 그 이후의 경과에 대해서는 경시하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모든 것이 넘쳐나는 현실에서 우리의 마음은 목마르고 영혼은 메말라 있다. 죽음을 보는 시각이나 사후 처리 과정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죽음이 경시되는 결핍된 사회에서의 삶은 정신적인 황폐함이 난무한다. 정신의 황폐함은 물질적인 욕구만을 채우기 위한 살게 한다. 그것만이 성공된 삶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삶에 있어서 양적인 극대는 있을지 몰라도 질적인 풍요는 존재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이 동반하지 않는 삶은 온전한 삶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정토에 오는 사람 누구에게나 묻는다. ‘지금 이 순간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지금 이 순간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기고 싶은 말은,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거의 모든 사람의 첫 번째 대답은 ‘해도 될까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정말 해도 될까요?’이다. 
그리곤 이어 말한다. “죽음이 이렇게 오는 것이라면, 삶이란 것이 이렇게 끝나는 것이라면 내게 죽음에 대해 왜 이야기해주지 않았나요? 왜 가르쳐주지 않았나요? 죽음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왜 미리 가르쳐주지 않았나요? 너무나 중요한 죽음에 대해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 당혹스럽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한다. 자신의 삶과 죽음에 세상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 있는 것이다.

호스피스교육이란 무엇인가
삶 가운데 죽어가는 과정을 공부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공부이다. 그런 의미에서 호스피스 교육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도와주는 봉사가 아니라, 죽음을 보면서 나의 죽음을 바라보고 준비하는 수행의 여정이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죽음인 임상체험을 통해 평생 살아오면서 잘 살아왔는지를 돌아볼 수 있다. 죽음의 진실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공부할 수 있다.
호스피스는 수행이다.
우리는 생과 멸의 사이에 서서 직면하고 싶지 않은 사실들에 직면하게 된다. 탐진치에서 비롯되는 형상 없는 생각과 감정들이 고통, 두려움, 이별, 아픔, 상실 의 질을 바탕으로 윤회를 창조하게 하는 사실에 깨어있도록 우리의 의식을 흔든 다. 팔정도를 통해서 실상을 알 수 있는 사실적인 통찰이 온다. 떠나는 자와 떠나 려는 자들이 서로의 모습을 통해 진실에 면하게 되면서 서로에게 높은 의식의 성장과 빛이 된다. 이 수행은 죽음과 삶을 통해 얻는 바른 경험이 있을 뿐이다.
죽음에 끌려가지 않는 죽음, 죽음을 통해 더 높은 의식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현상적인 풍요보다 영적인 풍요가 더욱 중요하다. 시선을 내면으로 거두고 달리 기를 멈추라. 그리고 지금 여기에 깨어 있으라.

능행스님 │재단법인정토사관자재회 이사장
2008년 마하보디교육원 호스피스교육 중 능행스님의 법문을 채록하여 싣습니다.
(채록자|변은숙, 24기 호스피스) 

https://youtu.be/wFgX-RfCO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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