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에 나오는‘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말은 우리 삶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삶이 먼저인가 죽음이 먼저인가’를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이 먼저이고 죽음은 살고 난 뒤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삶, 즉 인간다운 삶을 살고 난 뒤에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인간다운 삶이란 어떤 것이며 의미 있는 죽음이란 어떤 죽음을 말하는 것인가? 이 둘은 각각 별개의 문제인가?


태어남도 고(苦), 죽어감도 고(苦) 생명은 어머니 뱃속에 잉태되는 순간에 깃들고 죽음도 함께 깃들어 여정을 시작하게 되며 그 여정을 삶이라고 한다. 즉 삶과 죽음은 처음부터 같이 진행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둘을 따로 생각하여 정작 죽음이 왔을 때 당황스러워하며 혼란을 겪고 고통스러워 한다. 그렇게 되면 웰빙(well-being)도 아니고 웰다잉(well-dying)도 아니다. 즉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인간다운 삶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어떻게 하면 멋지게 살고 성공적인 삶이 되며 멋지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와 인간다 운 삶이란 어떤 것일까?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좋은 집에 좋은 차를 사고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일생을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감을 느끼는 순간은 열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평생을 행복해 지기 위해 노력했는데 진정 행복했던 순간이 일생 동안 열 번도 안 된다는 것은 만족했던 순간이 열 번도 안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욕망 속으로 질주를 한다. 앞도 뒤도 돌아볼 새 없이 정신없이 달려가는 사이 삶의 궁극적인 목표였던 행복은 욕망에 내몰려서 고생에서 고생으로 끝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끝없는 욕망과 욕구가 일어나면 괴롭고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기 때 문에 사회의 풍요로운 물질문명 속에서 삶의 종착역에 이르렀을 때는 허기짐과 목마름으로 괴로움을 일으키게 된다. 
우리 사회가 정말 살기 좋은 환경이 되려면 죽음을 생각하며 준비하는 삶을 살 때 비로소 가능하다. 

삶의 여정


탐진치(貪瞋痴)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은 불교에서 깨달음에 장애가 되는 근본적인 세 가지의 번뇌를 말한다. 
탐(貪)은 탐욕과 탐애(貪愛)로, 자기가 즐기는 대상을 탐내서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진(瞋)은 진에(瞋에)로,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대상에 대하여 반발하고 미워하고 분노 하고 화가 나는 것이다. 
치(痴)는 우치 (愚癡)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별하지 못하여 잘못을 저지르거 나 옳고 그름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잘못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삶의 여정은 이 세 가지 번뇌와 어리석음에서 한순간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 결과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생활하게 되고 이는 불면증을 가져와 정신을 황폐하게 한다. 현재 병원의 진료 과목중에 정신과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아지고 성업을 이루고 있다는 통계는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 결과이다. 끝없는 물질에 대한 욕망은 죽는 그 순간까지 재산을 지키기 위한 걱정과 행복의 근원은 돈이라는 망상에 빠져 부모형제와 의절하고 자식을 내버리기 도 한다. 인간성 결핍이라는 극단적인 결과는 죽음에 임박해서야 자신의 어리 석음을 깨닫고 뜨거운 눈물로 후회와 한탄 속에서 임종을 맞게 된다. 
따라서 죽는 사람의 약 90% 이상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끌려간다.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있다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죽음에 억지로 끌려가는 형상은 마치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모습과 비슷하다. 


죽음에 대한 사회의 인식
각 개인이 자신의 죽음에 직면하지 못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바로 물질과 관련된 욕망 때문에 죽는 그 순간까지도 돈과 관련된 일을 생각하며 재산 정리를 하느라 남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재산이 많을수록 정리할 일도 많으며 바쁘다보니 가족과 같이 할 시간도 없고 평화로운 시간을 가질 수도 없다. 끝내는 혼자서 쓸쓸히 죽어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오십 평생을 살았어도 눈이 오는 것을 오롯이 볼 수 있고 눈이 하얗다는 것을 온전히 느낀 순간이, 다시는 일어설 수도 없고 걸을 수도 없는 순간이 되었을 때였다고 한다. 죽음에 임박하여 그 존재를 느끼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개인의 물질적 욕망과 함께 죽음을 거부하도록 길들여진 사회의 모습도 우리가 자신의 죽음에 직면하지 못하게 하는 큰 걸림돌이다.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 시설을 혐오시설로 인식하는 것과 죽음을 바라볼 때 매우 부정적인 생각은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를 모두 혐오스런 존재로 인식하게 한다. 
예전에는 집안에서도 정침, 즉 안방에서 죽지 않으면 객사로 여겨서 부득이 한 경우가 아니면 밖에서 죽지 않도록 죽음을 존중하였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현대인들의 인식은 환자가 집에서 앓다가도 죽을 것 같으면 병원으로 옮겨서 임종과 거의 동시에 냉동실로 옮겨지게 하고 있다. 가족의 죽음조차도 못 볼 것을 본 것같이 여기거나, 혹은 죽음 자체를 혐오스럽게 여겨 회피하는 모습은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볼 기회를 주지 않는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음과 접촉할 기회를 빼앗아 내게 그런 순간이 왔을 때 준비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없게 한다. 우리의 존재가 숨이 끊어지는 동시에 사라지는 것이라면 우린 사는 동안 왜 그리 정신없이 죽기 살기로 살아야 하는 것일까? 내가 가고자 하는 목표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그 목표 점은 어디이며, 우린 그 목표점을 향해 올바로 달리고 있는 것일까?
목표점을 모르고 달리는 것은 마라톤 선수가 눈을 가리고 달리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한 자각이 웰빙(well-being)이고 웰다잉(well-dying)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어떻게 하면‘잘 살고 잘 죽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잘 사는 것인지, 즉 웰빙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어떻게 죽을 것인지, 내 마지막 모습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고 인생의 종착역에 잘 도착하려고 노력한다면 웰빙, 즉 잘사는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늘 깨어있는 의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생각한다면 웰빙과 웰다잉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연의 질서 사람의 일생
자연의 질서인 계절의 변화는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모습과 같다. 다른 점이라면 죽어 가는 여정 중에 경험하게 되는 갖가지 고통들의 내용이 각기 다를 뿐이다. 계절의 바뀜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어김없이 그 순간에 오고 간다. 사람의 일생도 그와 같이 오고 계절이 바뀌어 나무가 옷을 바꾸어 입듯 죽음은 우리의 옷을 바꿔 입게 한다. 한사람의 생명이 우주보다 더 소중하고 한사람의 움직임이 태양보다 더 빛나는 가치를 가진다.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구체적으로 준비하며 사는 사람은 삶과 죽음에 당당하고 자유롭다.

성공적인 인생의 마침표


죽음을 님으로 맞이할 것인가? 죽음이란 놈에게 끌려갈 것인가? 이 과제는 오직 자신만이 선택할 수 있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은 스스로 꽃을 피운다. 일생 중 용서와 화해, 그리고 이해와 배려가 있는 삶을 배울 수 있다면 삶은 따사롭고 풍요로울 것이다.

죽음은 진실한 삶의 결과
죽음은 사람이 모여드는 인생의 종착점에서 볼 수 있는 드라마로,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걸작품이다. 그러나 약 90%의 사람들은 고통과 두려움에 묶여 준비 없이 죽음에 끌려가는 비참하고 안타까운 내용의 드라마 주인공들이다. 명예와 권력, 학벌과 재산, 젊음 그 어떤 의상도 진실을 감출 수는 없다. 사람은 어떤 위기에 직면하면 고통과 갖가지 상실을 통하여 영적으로 성장하고 사랑을 배우게 된다. 삶 안에서 죽음을 느끼고, 죽음이 삶과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인지한다면 세상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노력할 수 있으며 잠시 머물다가 영원으로 사라지는 우리 존재의 본질을 안다면 서로를 한없이 사랑하고 한순간을 영원처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즉 세상의 가르침은 하나의 경험에서 시작되며, 일생에 한순간도 의미 없는 순간은 없다. 삶에서 경험하는 그 무엇도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 끝없는 시행착오 속에서 인생을 배우기 때문이다. 삶의 여정의 다양한 경험이 신념을 만들고 그 신념은 자신의 죽음의 질을 결정짓게 된다. 

죽음에 대한 자각과 성찰
죽음에 대한 올바른 자각과 성찰은 삶을 온전하게 한다. 바꾸어 말하면 죽음이 외면 당하면 삶도 온전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죽음과 삶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죽을 것을 생각하면 삶의 의미는 달라진다. 용서하지 못하고 죽는 삶, 화해하지 못하고 죽는 삶, 배려받지 못하고 죽는 삶, 사랑받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죽는 삶, 준비하지 못하고 죽는 삶이 아니라 한 순간 한 순간을 온전히 깨어서 살 수 있게 된다. 사람의 일생은 한순간에 결정된다. 들어간 숨이 나오지 않을 때, 나간 숨이 들어오지 못할 때, 즉시 사람이라는 이름표를 떼고 영혼(靈魂)이라는 이름표를 붙인다. 생과 멸은 찰나에 결정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사랑하라! 내일이 없는 삶 속에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 삼법인의 가르침을 통한 자각과 성찰이 죽음을 사실적으로 준비하게 하는 연습이 되어 줄 것이다. 죽음 앞에서 아무런 후회 없이 설 수 있 도록 사는 것이 웰빙(well-being)이다. 
사랑 하는 사람과 함께 내 마지막을 서로 축복하고 갈 수 있는 것이 웰다잉(well-dying)이고 이렇게 사는 것이 성공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이형기 시「낙화」

능행스님 │재단법인정토사관자재회 이사장
2007년 마하보디교육원 호스피스교육 중 능행스님의 법문을 채록하여 싣습니다.
(채록자|변은숙, 24기 호스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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