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면 개구리 울음소리가 요란한 정토마을에서 오늘은 개구리가 먼저 예불을 한다.

 

나 오늘 기도하기 싫어~”

스님아, 어여 하시소

못해~!”

 

봉사자랑 이야기가 길어져 예불시간을 10분 놓치신 스님께서는 늦은 것이 마음에 걸려 투정을 하시는 게다.

 

그럼 개구리보고 저녁 예불하라고 할까요?”

내 말에 우리 스님 웃으신다.

아이고 개구리가 어떻게...?”

그럼 어여 가서 예불 하세요.”

몰라~! 싫어 나 못 해 못 해~!”

 

그럼 오늘 예불은 하지 말지 뭐...”

...?”

기도하기 싫은 거 부처님께서 다 아시고 계실 테니까...”

오늘은 쉬세요.”

안돼~!”

큰소리로 말씀하시며 일어나시더니 가만 가만 법당으로 가신다. 그리고는 목탁 소리가 난다.

또르륵- 또르륵 똑 똑...

 

죽음 속에서 죽음을 돌보시는 분, 우리 성오스님, 당신은 환자가 아니란다.

 

우리 성오 스님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4년 전으로 올라가야 한다.

스님께서는 아주 특별한 불치질환 판정을 받으셨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 제방을 두루 다니시면서 공부를 하시었다. 그러다가 어느 여름안거를 들어가시었는데, 공양시간에 뇌혈관과 심장판막이 터져서 바루를 손에 든 채 대중방에서 쓰러지셨다.

 

병원 중환자실에서 얼마 동안 계셨는데, 의료진들이 `살릴 수가 없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고 어른 스님들께 전하셨다고 한다.

'카타야수 동맥염' 우리나라에 500명밖에 없는 생존기간 5년 선고형 불치병이다. 혈관이 이유 없이 뚝뚝 끓어지는 질병이다. 안거 중인 선방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 정토마을로 오시었다.

 

그때 진단서에는, 1주 정도의 생존가능성이 기재되어 있었다. 식사로는 멀건 물죽을 호스를 통해 코로 주입되었고, 소변, 대변, 의식, 기억력, 인지능력, 사지불능, 신체적 정신적 모든 기능이 상실되어 버렸다.

 

그렇게 나는 스님의 임종 맞을 준비를 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 일주일, 보름, 한달... 스님께서는 기적처럼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하시었다. 혈관이 터지는 병이라서 주사 한 대를 놓을 수가 없는 처지였다. 사그라지는 잿더미 속에 빨딱거리는 작은 불씨 하나 부채로 부치고 또 부치며 불꽃을 살려내기 시작하였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6개월 만에 코에서 줄을 빼고 입으로 식사를 드시는 연습을 하시기 시작하였다.

깨어나고 보니 막막한 것은 오른쪽 팔다리가 기능을 다 상실한 것이었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것은 기억력 상실과 인지능력 상실이었다. 모든 기억력이 담긴 뇌신경 세포가 뇌혈관 출혈로 몽땅 제 기능을 상실한 것이었다. 오른쪽 전신마비로 더욱 불편하고 수시로 발작을 하시고 부정맥 등 심장판막도 터지고 상태는 늘 벼랑 끝이었다.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이파리가 되어 하루하루 그렇게 생명을 이어갔다. 말씀도 못 하시고 글자도 다 잊어버리시고 팔다리고 못 쓰시고, 기억력도 반 이상 상실된 채 또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차츰, 차츰, 차츰.... 인지능력이 살아나면서(분별심) 우울증과 조울증에 수시로 시달리면서 정신적인 고통까지 겸하게 되었다. 자신의 모습에서 사람으로서 그리고 승려로서 모든 역할과 관계가 상실되고 존재의 의미마저 퇴색되어가고 있음을 아시고는 비참한 당신의 처지가 너무나 서글퍼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죽고 싶다. 죽어야 한다는 절망 속에서 우울증에 시달리시던 우리 성오 스님께서는 그래도 늘 나의 의지처였다. 상의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그래도 우리 둘은 참 좋은 도반이었다. 눈으로 말했고 마음으로 통했다. 생각과 튀어나오는 어설픈 말들은 늘 따로따로이지만 우리는 다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날 홀로 두시지 않으시고 좋은 스승을 곁에 두어 주시었다.

 

성오 스님~!

당신을 통하여 부처님께서는 나에게 새로운 소임이 있음을 알게 하시었습니다. 스님의 모습을 통하여 장기적으로 투병이 필요한 스님들의 고통과 그들의 삶의 질을 생각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성오 스님이 내 곁에 계시지 않았다면 요양병원의 필요성과 구체적인 기획, 시설방안, 심리적 정신적 이해, 운영에 대한 대책, 열정과 의무감, 이런 것들이 강하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장기적으로 긴 투병이 필요한 스님들의 처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구도자로서의 삶으로 끝까지 이어질 수 있는 대책과 방안으로 고심하게 되는 나를 봅니다.

"성오스님! 당신은 나에게 보살로 오시었구려." 스님의 여윈 몸을 감싸 안아봅니다.

 

여러 스님들의 장기 투병모습을 여기저기서 자주 보고 느끼면서 고심고심 끝에 '그래 천일기도를 해보자' 마음 먹었다.

그러나 천일기도 해주실 스님 오실까?’ 하고 1년을 기다려 보았지만 스님들께서는 오시면 떠나실 뿐이었다. 봉사를 오신 스님들도 사나흘만에 모두 바랑을 메고 떠나기 바빴고, 성오스님과 나는 그런 스님들의 뒷모습에 떠날 수 있음에, 부러운 눈길을 던지곤 했다.

어느 날 나는 성오스님께 매달렸다.

병원을 잘 건립해 보겠으니 스님께서 천일기도를 해달라고 말이다. 투정 반, 억지 반 그렇게 거듭 실랑이를 했다.

한글도 다 잊어버리고, 반야심경 한 구절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 우리스님, 두돌박이 아기 말 배우듯이 더듬거리는 스님, “못해~”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성오 스님께 말씀드렸다.

이제 법당은 스님께서 맡아서 천 일 기도를 올려주세요.”

 

스님께서는 천일기도에 대한 부담감과 할 수 없다는 포기심리에서 오는 갈등 때문에 한참을 괴로워하셨다. 나는 모르는 체 천일기도 입재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대중들에게 천일기도는 성오스님께서 하실거라고 발표하였다. “몰라~! 몰라~!” 아이처럼 왼쪽 손만 흔드셨다.

모두들 무리라고 했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커다란 좌목탁 하나를 샀다. 법당에 놓아드리고 어설픈 왼손에 목탁체를 쥐어드리면서 말했다.

나는 이제 법당에 천일 동안 들어오지 않을 테니 그리 아셔요.”

가슴이 저려오는 걸 참으면서 법당을 나왔다.

절도 못 하시고, 합장도 안 되고, 다리도 말 안 듣고, 말도 제대로 안 나오고, 글도 모르는데 어찌 기도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왜 나라고 무리인 줄을 몰랐을까. 그러나 억지를 부리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성오스님에게는 환자로서의 생존보다는 승려로서의 생존에 대한 의미가 더욱 크기에, 나는 그 이후로부터 특별한 날이 아니면 법당에 들어가지 않았다. 힘없는 손에 목탁을 들려놓고 처음에는 사시기도 때마다 문 뒤에 숨어 서서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부모나 형제였더라면, 그 가슴은 더욱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아픔이 되었으리라. 문 뒤에 숨어 혼자 눈물을 눌러 닦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흩어져 버린 쪼가리 기억들, 오만가지 문구들이 더듬거리는 소리에 튀어나왔다.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지만 그래도 목탁소리는 똑딱 똑딱 흘러나왔다.

 

환자복으로 법당에 가시어 그 목탁 채 몇 번이고 집어던지시며 울며불며 기억을 찾아 헤매시던 우리 스님, 정토마을 가족들은 성오 스님께서 기도하고 나오시면 아낌없는 격려와 칭찬을 해드렸다.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스님과 함께 기도 동행에 나서주시는 순주 보살님...

 

성오 스님과 순주 보살님 두 분은 신체 증상이 비슷하시다.

그래도 순주보살님은 기도하시는 스님 뒷등에 눕기도 하시고 벽을 기대고 앉기도 하시며 기도 동행이 되어주신다. 그 이후로 우리 스님은 할 수 없이 많은 공부를 시작해야 했다.

기도 끝나시면 천수경 반야심경 사경 하시고 ----부터 읽고 쓰기 공부를 시작하였다. 한 마디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어도 스님 기도에 우리는 만족스러웠다. 세월이 흘러갔다. 눈물과 고통들 속에서 어느새 800일 기도 천도의식 날짜를 함께 의논할 수 있게 된 우리는 서로 너무 행복하다.

 

이제 성오스님께서는 법당에 가시면 가사를 걸치시고 기도할 수 있으며, 천수경 반야심경 그리고 영단에 법성계까지 치신다. 제사를 지내야 할 때는 곁에서 한쪽 손으로 목탁을 쳐주시며, 하루 두 번 기도시간은 꼭 법당에 계신다.. 초도 갈고, 자원봉사자들에게 법당청소 지시도 하시는 스님이시다.

 

혜란씨- 청수물 주세요-” 이렇게 말씀도 하신다.

이제는 천수경 소리도 제법 옛 소리를 찾아가고, 아랫방에 내려오시어 옛날, 차 우려내시던 솜씨로 차도 한 잔 만들어 건네주시며 살포시 웃어주시는 그 미소에 나는 너무 큰 행복을 느낀다.

 

우리는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태산이다. 늦은 밤 귀가하게 되면 스님 방에는 불이 밝혀져 있다. 내 차 소리가 들려야 비로소 불을 끄시고 잠자리에 드시는 고마운 도반 성오스님! 기도 중에도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시면서 목탁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

 

엊그제는 늦은 밤 내 방으로 내려오시었다.

빨간 봉투 2매에 십만 원씩을 담아서, 삐뚤삐뚤 글씨로 이렇게 쓰시어 보관하라신다.

1) 성오 스님 입관할 때 수고하시는 분께 보시해 주세요.

2) 해동사문 비구니 성오, 아미타 부처님 전에 불전 올립니다.

 

이러실 때마다 나는 슬펐다.

`왜 저렇게 서두르실까?'

이렇게 쓴 글씨봉투가 벌써 3개째다.

`날 혼자 이렇게 버려두시고 당신 혼자 먼저 가시면 알아서 하라'고 협박도 하지만, 그때마다 웃음을 허공으로 날리신다. `관자재병원 다 지을 때까지 내 곁에 있어 달라'고 늘 애원한다.

 

이 산중에 이라곤 당신과 나 둘뿐인데...

다른 스님들께서는 오고 싶을 때 왔다가 가고 싶을 때 언제라도 떠나가시지만 우리 둘은 이 모든 것 버리고 떠날 길이 없다.

 

어젯밤에는 둘이서 차 한 잔 하면서 감사드렸다. 성오 스님께서도 자신의 기도 원력으로 모든 것이 잘 되어가노라고 좋아하신다.

이제는 내가 없어도, 병실 환자를 위해 힘없이 아래로 처지는 오른손을 잡아 쥐고 기도해 주신다.

매일 힘들어 하시는 환자 곁에 가시어 이야기도 들려주시고 기도하실 때 축원도 잘 해주신다. 사지 말짱한 어느 스님 못지않게 당신의 자리를 이렇게 채워 가신다.

 

출가 승려는 어떤 경우에 처하더라도 수행자로서의 역할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늘 생각한다. 병중에 있을 때라도 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하시면서(이것이 정진이다) 존재하는 것(생명의 존엄성을 상실하지 않는 것이다.) 요즘에는 혼자 살살 산책도 하시고 봉사자들하고 담소도 나누어 주신다.

 

성오스님.

그는 역시 구도자였다. 언제까지나...

800, 우리 성오스님 기도하시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을까?

항상 경상 옆에는 커다란 손수건 하나가 놓여 있다.

그래도 나는 늘 모르는 척 지나쳐 나온다.

아무리 힘들어 해도 기도품을 덜어주지 않는 내가 미울 때도 있겠지만 환자이기 이전에 당신은 승려이기에...

 

요번 800일 기도 축제 때는 우리 성오 스님께서 아마도 4년 만에 처음으로 장삼에 가사를 수하시고 여러분을 반겨 맞아 주실 겁니다. 너무나 장하시고 거룩하시지요.

당신께서는 `한 오년 더 살아 병원 다 짓는 것 보시고 떠나시겠다'고 하시지만 여러분 기도해 주세요. 스님이 성오 스님을 정말 편안히 모시고 오늘의 고생스러움에 보답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서둘러 준비하시는 모습에... 늘 걱정입니다.

그래도 천진한 웃음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천도재에서 성오 스님을 만나는 분들께서는 붓다를 만나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죽음을 돌보아 주시는 분...

 

 

성오 스님!

당신께 정례를 올립니다.

금생에 모두 성불하옵소서.

오늘 저녁에는 성오스님과 둘이서 따뜻한 차 한 잔 나누어야지...

 

-2004, 어느 날 능행 합장

사는 것은 무엇이며, 죽는 것은 무엇인가?
일찍이 붓다께서는 사는 것도 고통[生苦]이고 죽는 것도 고통[死苦]이라고 하셨다.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열반이 있고, 열반으로 가기 위한 수행이 있는 것이다. 삶은 연기법에 의해 인연의 조건과 환경에 영향을 받으면서 그 무엇을 학습하는 여정이다. 그 학습 결과에 따라서 맞이하는 죽음의 질이 다르고, 시작하는 죽음의 질이 다르다.
사람들은 흔히 죽음이란 나이가 들거나 심각한 병이 들었을 때 찾아오는 손님 쯤으로 여긴다. 그러나 2008년 이 시점에서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죽음이나 질병은 연령과 성별을 구별하지 않고 다가온다. 그래서 아주 두렵고 공포스러운 느낌이 강하다. 손님이긴 하지만 반갑지 않은 손님임에는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애써 회피하고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재수 없거나, 마음 상하게 하는’ 부정적인 주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죽음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미리 준비하고 극복해가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그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전혀 하고 있지 않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렇다면 삶의 여정 중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죽음이 찾아왔을 때, 두 손 들어 환영은 못할지라도 당황하지 않고 허둥대지도 않으면서 담담히 맞이할 수는 없는 것일까?

죽음에 대한 인식의 부족
요즘 젊은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인식이나 지식,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이다. 매일의 생활 가운데 죽음을 염두에 둔다거나 죽음 뒤의 세계에 대한 생각을 하는 일은 결코 없다고 할 정도이다. 더구나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은 부분을 부모에게 의지하기 때문에 갑자기 병이 들거나 죽음에 임박해서도 부모가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 생각한다.
때로 젊은이들에게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어떻게 될 것이라 생각하는지요?’ 라고 질문을 하면 그런 점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다.’라는 대답을 들을 때 막막함을 느낀다. 이런 인식과 무지와는 달리 현실적으로 죽음은 우리와 훨씬 가까이에서 삶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반영하듯,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청소년, 소아를 위한 암병동은 서울대병원 등 대형 병원 몇 개에만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각 대학병원마다 소아암병동이 생겨났다.
더 이상 젊은이들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죽음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해 직면해야 하며, 의식을 바꾸어야 한다.

변화된 죽음의 환경
예전에는 집에서 태어나 집에서 죽는 것이 다반사였다. 심지어는 안방에서 죽지 않으면 객사(客死)라고 하여 그 시신을 집안에 들이지 않을 정도로 죽음을 존중하였다. 장례를 치르는 과정을 보더라도, 잘못 행해졌을 때 다시 고칠 수 없는 일이 장례에 대한 일이기 때문에 정성을 다하여 실수하지 않고자 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태어나는 것도 병원이고 죽는 곳도 병원이다. 대개 병이 들거나 죽음에 임박해서는 집에 있다가도 죽을 때는 다시 병원으로 가서 죽는다. 이는 죽는 사람에 대한 배려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 위주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아파트라는 주거환경은 사람의 주검조차도 물건으로 치부해 버리곤 한다. 주변의 죽음을 보면서 나의 죽음을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극도의 이기주의에서 죽음이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즉 죽음이 상실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이나 친지, 친구 등 주변의 사람들이 죽어도 그 여정을 함께하지 못하고 죽음 뒤에도 충분히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죽음을 상실한다는 것은, 죽음이 결핍된다는 것은, 죽음을 외면하는 것은 온전한 삶이라 할 수 없다. 우리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죽음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지 않는다. 될 수 있으면 죽음을 외면하게 한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회피는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면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삶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며, 부모는 자녀들에게 이러한 환경을 제공하는 주인공이다.
어른들은, 부모들은 젊은이들이 죽음에 대해 직면하고,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 젊은이가 건강한 생각을 가지고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삶의 요소보다 훨씬 많은 죽음의 요소
우리 주변에는 삶을 영위하게 하는 요인보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요소가 훨씬 많다. 정신 차리고 보면 가슴을 쓸어내려야 할 만큼 위험 요소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죽을 일이 많다.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는 매일 매일의 사건 사고만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어제까지도 웃던 사람이 오늘 생사가 나뉘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한 번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또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우리는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에는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고 온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그 많은 죽음의 요소를 견뎌내고 살아온 사람들이 맞이하는 죽음의 여정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죽음, 그 이후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무지에 대해서도 별 의식이 없다. 평소에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기며 그 이후의 경과에 대해서는 경시하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모든 것이 넘쳐나는 현실에서 우리의 마음은 목마르고 영혼은 메말라 있다. 죽음을 보는 시각이나 사후 처리 과정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죽음이 경시되는 결핍된 사회에서의 삶은 정신적인 황폐함이 난무한다. 정신의 황폐함은 물질적인 욕구만을 채우기 위한 살게 한다. 그것만이 성공된 삶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삶에 있어서 양적인 극대는 있을지 몰라도 질적인 풍요는 존재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이 동반하지 않는 삶은 온전한 삶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정토에 오는 사람 누구에게나 묻는다. ‘지금 이 순간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지금 이 순간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기고 싶은 말은,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거의 모든 사람의 첫 번째 대답은 ‘해도 될까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정말 해도 될까요?’이다. 
그리곤 이어 말한다. “죽음이 이렇게 오는 것이라면, 삶이란 것이 이렇게 끝나는 것이라면 내게 죽음에 대해 왜 이야기해주지 않았나요? 왜 가르쳐주지 않았나요? 죽음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왜 미리 가르쳐주지 않았나요? 너무나 중요한 죽음에 대해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 당혹스럽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한다. 자신의 삶과 죽음에 세상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 있는 것이다.

호스피스교육이란 무엇인가
삶 가운데 죽어가는 과정을 공부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공부이다. 그런 의미에서 호스피스 교육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도와주는 봉사가 아니라, 죽음을 보면서 나의 죽음을 바라보고 준비하는 수행의 여정이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죽음인 임상체험을 통해 평생 살아오면서 잘 살아왔는지를 돌아볼 수 있다. 죽음의 진실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공부할 수 있다.
호스피스는 수행이다.
우리는 생과 멸의 사이에 서서 직면하고 싶지 않은 사실들에 직면하게 된다. 탐진치에서 비롯되는 형상 없는 생각과 감정들이 고통, 두려움, 이별, 아픔, 상실 의 질을 바탕으로 윤회를 창조하게 하는 사실에 깨어있도록 우리의 의식을 흔든 다. 팔정도를 통해서 실상을 알 수 있는 사실적인 통찰이 온다. 떠나는 자와 떠나 려는 자들이 서로의 모습을 통해 진실에 면하게 되면서 서로에게 높은 의식의 성장과 빛이 된다. 이 수행은 죽음과 삶을 통해 얻는 바른 경험이 있을 뿐이다.
죽음에 끌려가지 않는 죽음, 죽음을 통해 더 높은 의식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현상적인 풍요보다 영적인 풍요가 더욱 중요하다. 시선을 내면으로 거두고 달리 기를 멈추라. 그리고 지금 여기에 깨어 있으라.

능행스님 │재단법인정토사관자재회 이사장
2008년 마하보디교육원 호스피스교육 중 능행스님의 법문을 채록하여 싣습니다.
(채록자|변은숙, 24기 호스피스) 

 

책상 한편에 약 봉지가 수북했다. "웬 약이 이렇게 많으냐"고 묻자 능행(能行·49)스님이 말했다.

"2003년에 말기 암환자를 돌보다 감염됐어요. 환자가 뽑아놓은 주삿바늘에 찔렸거든요. 더러 있는 일이에요."

이 비구니는 작년 8월 급성 저혈압으로 쓰러져 심장이 멎을 뻔 했다. 올 5월까지 병원을 들락거렸다.

그는 "과로로 죽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하고 느꼈다.

무슨 일을 하기에 스님이 과로사까지 생각했을까?

환자들은 그를 살아있는 '약사보살'이라 부른다. 1999년 그가 지은 호스피스 '정토마을'에서 1000명이 넘는 말기 암환자들이 생을 마쳤다. 11일 창단되는 한국불교호스피스협회의 2000여 호스피스 중 1500명이 그를 거쳐갔다.

"누가 시킨 일이었다면 그이와 원수가 됐을 거야. 일이 힘드니 중이 이렇게 늙었지." 그런데도 호스피스 일을 멈출 수 없다고 했다. "나도 궁금해. 아마 전생(前生)에서부터 이 일을 해왔나 봐."

10년 전 충북 청원군 미원면에 정토마을이 생길 때 20가구 주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시설을 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입구에 개 70마리를 키우고 트랙터로 길을 막기도 했다. 나중에는 군 주민들까지 확성기를 들고 쳐들어와 스님을 고소했다. 시위는 그 뒤로도 3년간 계속됐다. 스님은 30여 차례 경찰과 검찰에 불려갔다.

"혐오시설이라고 무조건 반대할 땐 화도 났지만 나중엔 '아,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죽음을 두려워 하는구나'하고 오히려 이해하게 됐어요." 1993년 서른셋의 나이로 출가한 그 역시 죽음이 두렵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이듬해 한 신도 남편을 병문안 갔다. 췌장암에 걸린 환자는 그 후 닷새 만에 사망했다. "복수(腹水)가 차 배만 불러 있고 새까맣게 타 있던 모습이 너무 무서웠어요.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그때 처음 본 거예요."

그때 그는 '세상은 고통의 바다(苦海)'라는 부처님 말씀을 이해했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암 환자들을 보며 그는 "'저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어찌하면 좋을까' '죽음의 질을 좀 더 나아지게 할 수 없을까' 생각했다"고 했다.

부처가 세상에 들어가 깨달음을 얻었듯 그때부터 능행도 절 밖으로 나갔다. 첫 방문지는 소록도였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코가 으깨진 사람들도 웃더라고요. 이 안에서도 미소가 있고 행복이 있구나, 느낀 거예요."

알코올 중독자, 지체장애자, 불치병 환자를 찾아 오웅진 신부의 음성 꽃동네에 갔다. 그곳을 찾은 스님은 능행이 처음이었다. 더 힘들고 아픈 사람들을 찾아 부산 의료원 행려 병동까지 내려가 먹고 자며 환자들을 돌봤다.

얇디얇은 이불이라지만 말기 환자들에게는 그 무게감이 천근만근처럼 느껴진다. 스님은“세탁을 자주 하다보니 이불도 금세 헐어버린다”며 쌀쌀해지는 날씨를 걱정한다.

능행은 가난한 사람들은 편안하게 죽을 곳도 없다는 걸 알았다. 1997년 한 천주교 병원에서 폐암으로 숨져 가던 스님이 "스님들 편히 죽을 수 있는 병원 하나 세워달라"고 유언을 남기자 호스피스 시설을 만들기로 했다.

"한 편의 소설이었다"는 탁발(托鉢)이 그때 시작됐다. 동냥을 하러 혈혈단신 전국을 떠돈 것이다. "절에서 수행은 언제 하느냐"고 묻자 "동냥 다니는 게 나에게는 수행이었다"고 했다.

1년에 15만㎞씩 전국의 절과 기업인, 시장 바닥까지 가리지 않고 뛰었다. 1000원을 내놓는 상인들부터 100만원씩 도움을 주는 큰 스님들까지 우선 2200만원을 모아 지금의 땅 계약부터 했다. 2년에 한 대씩, 지금까지 5대를 폐차시켰다. 2000년 10월 조립식 건물로 정토마을을 개원할 때까지 들어간 3억원을 그렇게 모았다. 현재 15개 병상에 직원 10여명이 있는 정토마을은 환자 가족들의 후원금으로 운영된다.

1년이면 100여명의 말기 환자들이 이곳에서 마지막을 보낸다. 그 많은 죽음을 지켜보면 어떤 깨달음이 올까? 스님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모든 죽음을 보면 안타깝다는 생각뿐"이라고 했다.

"80이 돼도 난 아직 아니라고 하지 '그래, 나 이제 갈 때 됐다'고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왜 지금 죽어야 하는지 모르고 조금만 더 살고 싶다고 울부짖을 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마음 아파요."

그는 돌이켜 보기도 싫을 만큼 '힘든 죽음' 뒤에는 모두 돈이라는 욕망을 놓지 못한 공통점이 있다고도 했다. 스님은 "15년간 여유롭고 흔쾌하게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채 20명이 안 됐다"고 했다.

"평생 화장실 청소와 바느질로 자식을 키운 70대 할머니가 있었어요. 아름다운 세상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는지 손 흔들고 가시더라고요. 자제분들과 같이 손 흔들어 드렸어요. 경이로웠어요."

4년 전엔 40대 남자가 위암 3기 때 들어왔다. 치료비 부담으로 남은 가족에 누가 될까 아무 치료도 않고 마지막을 보내러 왔다고 했다. 그는 오히려 수능을 앞둔 고3 딸에게 문병도 못 오게 하며 전화로 응원했다.

"우리 딸 파이팅! 우리 딸 잘할 수 있어! 아빠는 잘 있으니까 수능 끝나고 보자." 수능 당일 그는 죽어가면서도 사력(死力)을 다해 전화기를 붙잡았다. "우리 딸 오늘 힘내야 돼? 아빠는 괜찮으니까 수능 끝나면 바로 내려와."

내색하지 않고 딸을 응원한 그는 시험이 끝나갈 무렵 "스님, 제가 할 일은 이제 다 끝났네요"란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능행은 "자식 사랑하는 마음으로 책임을 다했기 때문인지 표정도 평온했다"고 했다.

스님의 바람은 한 가지다. 고통과 아픔으로 범벅된 죽음이 아닌 맑고 여유로운 죽음이 더 많아지는 것이다. 2005년 베스트셀러가 된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라는 호스피스 사례집도 그래서 펴냈다.

청각 장애인 아버지를 뒀던 능행은 의사가 되려 했다. 아버지처럼 몸이 불편하고 치유할 수 없는 질병을 가진 사람을 고쳐주고 싶었다. 그는 "의사는 아니지만 치유할 수 없는 환자를 돌봐주고 있는 점에서는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에서 또 다른 일을 벌이고 있다. 호스피스를 양성하는 교육 기관과 함께 정토마을에서 수용할 수 없었던 더 많은 환자를 위해 병원을 지으려 한다.

신현종 기자 shin69@chosun.com,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0/09/200910090130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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