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 그리고 암 판정

2006년 12월경부터 치질이 항문에서 조금 삐져나와서 움직일 때마다 항문이 시깃시깃하다던 아내가 치질 수술을 하자고 했다.

2007년 3월 치질 수술을 위해 인근에 있는 병원에 들렀다. 진찰을 하던 의 사는 단박에 ‘치질이 아닌 것 같다’면서 큰 병원으로 가서 진단과 조직 검사를 받아보라고 하였다. 놀랍지만 그래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큰 병원에서 검사를 받은 결과 직장암 말기였고, 이미 간과 폐까지 전이되어 있으며, 항암치료는 큰 의미가 없다고 하였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애써 마음을 진정해 보았다.

‘그래, 70살에 생길 것이 30년 빨리 왔을 뿐이다. 맘 굳게 먹자.’

그러나 직장 노동조합 사무총장을 맡고 있었던 나는 귀가가 늦어졌으며, 아내를 제대로 보살펴주지 못했다. 더구나, 2006년 1월 사무총장에 당선된 뒤부터 그만두라는 아내와 다투고 난 후 1개월 침묵, 어떤 경우에는 2~3개월간 아내와의 침묵이 계속되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안팎으로 힘들었고, ‘이 짓을 계속해야 하나’ 고민도 많이 했다.

마음이 힘들 때마다 절에 가서 108배 하고, 금강경 읽고, 아내를 향해 마음이 누그러지길 발원하였다. 그래도 나의 번민은 계속 쌓여만 갔다.

 

제25기 불교호스피스 교육 받으며

2006년 여름에 읽었던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책을 떠올리면서 인터넷에서 ‘정토마을’을 검색하게 되었고, 제25차 불교호스피스교육이 2007년 8월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 어쩌면 지금 내 마음을 잡아줄지도 모르겠구나.’

기대를 걸고 신청을 하여 교육을 받게 되었다.

교육받는 동안 내내 아내의 ‘직장암’에 대한 생각과 이러한 아내의 암 투병을 어떤 자세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 그리고 앞으로 이 사태를 애들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가 화두였고,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내 아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나는 내 아내에게 내 맘을 이해시켜 보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나는 어쩌면 그렇게 내 아내에게 나그네였고, 아내에게 가까이 가지 못한 방관자였을까.’

그런 자각과 함께 아내와의 다툼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리고 현재의 병 원인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나에 대한 스트레스가 주범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아내에 대한 연민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능행스님은 교육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분노하고, 타인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등 자신을 파괴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을 서럽게 했으며, 자신을 외롭게 했습니다. 자신을 못났다고 했으며, 자신을 쓸모없다고 했습니다. 밖으로 밖으로만 매달렸던 것입니다. 오장이 살아남기 위해, 육체가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가! 자신의 존재를 꼬옥 온몸으로 안아주시기 바랍니다.’

이 법문을 듣고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내 자신에 대한 미안함에 눈물을 쏟으며 참회하였다. 내가 바깥으로만 끌려 다니며 사는 동안 아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 자신의 아집을 본 것에 감사하며

나는 5남 1녀 중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누님은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시집을 갔다. 우리 집에 여자라고는 단지 엄마 혼자였다. 밤늦게 일을 하고 집에 들어와도 누구 하나 밥을 해놓지 않아서 엄마가 그 지친 몸으로 밥도 하고 방청소도 하였다.

나는 자라면서 여자에 대한 배려와 여자들의 생각, 여자들이 말하는 법 등을 배우지 못했다. 그냥 내가 잘해주면 될 것이다. 이렇게만 생각하였다.

큰애 임신 중에 시원한 것 먹고 싶다는 아내 말에 나는 고작 아이스크림을 사주었고, 추석이나 설날 시골에 가는 날이면, 아내가 내게 “나는 시금치의 ‘시’자도 싫어한다.”고 말하면, 버럭 화를 내면서 “왜 시골만 가려고 하면 그렇게 말을 하느냐? 차라리 시골 가지 말자.” 이렇게 말을 해버렸고, 그 말로 인해 명절 내내 서로가 기분이 좋지 않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자를 싫어한다는 말은 아내가 남편에게 위로받고 싶어서 그냥 하는 말이었는데 그땐 정말 몰랐다. “그래, 나한테 시집 와서 힘들지, 그리고 시골에 가면 당신이 일을 많이 해야 될 거야. 힘들어도 참어.” 이렇게 말하고 위로 했어야 했는데, 그때 나는 아내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을 내려버려서 잦은 다툼이 일어났던 것이다.

 

입원, 수술, 그리고 부처님 가피

2007년 12월 19일 새벽, 결국 항문으로 변이 나오지 못하던 것이 위태로워지면서 조선대학교 응급실로 직행하였고, 오전에 능행스님과 전화 통화 후 곧바로 일산에 있는 동국대학교 불교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직장암으로 항문이 막혀 대장 속에 변이 쌓여 있는 것이 극에 달한 것이었다. 장은 본능적으로 운동을 하여 항문 쪽으로 보내는데, 항문이 막혀 있어서, 육안으로도 보면 딴딴하게 굳어서 볼록한 것이 보였다.

2007년 12월 21일 새벽, 내내 부풀어 올라온 배를 부여잡고 진통제 투여와 고통을 호소하는 마누라 손을 잡은 채 가슴을 조이다가 아침을 맞았다. 참으로 우리는 많은 말들을 나누었고, 아내의 착한 마음도 보았으며 내 자신의 아 집도 보았다. 오후에 수술 준비를 위해 간호사님들이 병실로 들어왔을 때, 그저 수술(대장에서 변을 빼내기 위한 장루 수술임)이 잘 되길 바랄 뿐이었다. 3시간 수술이 끝났다는 연락을 받고 회복실에 달려가서 아내 얼굴을 보니 너무 좋았다.

빙긋 웃는 아내가 그냥 고마웠다. 나는 ‘이게 반가움일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비죽이 흘러나오는 웃음으로 아내를 보았다. 너무 잘된 수술이었다. 모두가 부처님 가피와 여러 도반들의 기도 덕택인 것 같았다. 아내의 수술 사실이 호스피스 동문방에 알려진 후 아침 7시와 저녁 10시에 ‘찰나기도’를 간절히 해주신 스님들과 동문님들께 어떻게 감사함을 표해야 할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는 아직도 완벽하게 아내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종종 아내는 내게 독설을 퍼붓는다. 그래도 감사하다. 수술 전까지의 2박 3일의 시간은 나와 아내의 현생의 업이 녹았던 시간이었으며, 연애시절 그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그때만은 이 세상 모두가 청정해 보였었다. 아내는 내게 아버지 같은 남편의 모습을 기대한 것 같았으나, 나는 언제나 내 몸 편하고 싶은 마음에 빠져 아내에게 보채기만 하는 어린 남편이었다. 하염없이 참회의 눈물이 흘렀다.

 

질병, 수행의 도구로 삼아

2007년 12월 19일 수요일 새벽부터 12월 21일 금요일 집사람이 입원하여 장루(腸瘻) 수술이 끝날 때까지, 이렇게 많은 도반님들의 쾌유 기도를 느껴보니 부처님의 가피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깊고 깊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스스로 내 삶의 명심문을 만들었다.

“부처님 뜻대로 베풀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아내의 아픔을 계기로 부처님 말씀에 의지하며 더욱더 부지런히 정진 수행하겠습니다. 함께 공유하고, 함께 나누고, 아내와 즐겁게 웃어보겠습니다. 모든 인연에게 회향하며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나의 도반과 일체 중생들이 아픔에서 벗어나 부처님 전 복짓기 발원 합니다.”

 

장용열│25기 호스피스

 

죽음에는 노소가 따로 있지 않다.
날짜가 한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차별도 없다.

현재 지구상에는 약 65억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이 함께 있음을 자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죽음의 주인공이 나임을 인식하며, 삶 속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오늘날 죽음의 원인 중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암이다. 암 투병 중에는 많은 돈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평상시에 보험을 포함하여 많은 돈을 저축하는 이유 중에는 병이 나면 쓰기 위한 것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정작 죽음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를 할까?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요소

 

심해지는 빈부의 격차
우리의 생활수준은 몇 년 전만 해도 몇 개의 계층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 격차가 더욱 심해져서 극부와 극빈의 상태로 나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빈부의 격차는 과도한 경쟁 심리를 유발시키고, 우리의 마음에서 풍요로움을 빼앗아가고 있다. 이에 따라 정신은 더욱 황폐해지고 감정은 점점 메말라가고 있다. 더구나 불안한 현실은 사람들에게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마음 상태를 갖게 하고 있으며, 점점 더 돈에 의존하게 한다. 심지어는 자식도 믿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극도의 경쟁 심리와 그에 따른 압박감, 불신과 불안은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바쁠수록 수명이 단축된다
현대인들은 정말 바쁘게 살아간다.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러나 정작 왜 바쁜지는 모르는 채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정말 바쁜 것이 아니고, 마음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외부의 경계에 끄들리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왜 바쁜지도 모른 채, 정신없이 살다보면 어느새 죽음이 눈앞에 와 있다. 마음이 바쁘고 불안해서 자신을 혹사시키고 괴롭히면서 몰아치다 보면, 자살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빨리 죽을 수도 있다.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은 육체적인 질병뿐만이 아니라, 바쁜 마음 때문에 몸과 마음의 균형이 깨지는 것도 큰 몫을 차지한다. 

죽음에 도달하는 지름길은 욕망과 집착
욕망이란 끝없이 얻으려 하고 움켜쥐려고 하는 마음이다. 이러한 욕망이 적당할 때에는 우리의 삶을 발전시키는 방편이 되기도 하지만, 지나칠 때에는 우리의 삶을 망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욕망을 잘 조절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활기차고 풍요로울 수 있을 것이다.
집착이란 한번 움켜잡으면 놓지 않으려 하는 마음이다. 좋은 것은 좋기 때문에 놓치지 않으려고 움켜잡을 것이고, 싫은것은 그것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을 움켜 잡을 것이다. 이러한 욕망과 집착을 갈구하는 마음의 강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의 몸은 화장할 필요도 없이 스스로 타죽고 만다.
IMF의 경제위기를 넘기고 난 몇 년 뒤에 우리나라에는 암환자가 급증을 했었다. 이런 현상은 경제적인 위기상황에서 겪은 마음의 고통과 스트레스가 육체의 질병을 유발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통해 우리는 올해의 경제 위기가 2, 3년 뒤 암환자의 급증을 가져올 거란 예측을 할 수 있다. 즉 마음의 고통이 몸의 질병을 가져오는 것이다. 지금의 사회현상은 가까운 미래에 나타날 현상을 보여주는 셈이다. 이럴 때 우리는 마음을 어떻게 내야 할 것인가?

 

내가 원하는 대로 죽기 위해 필요한 요소

 

돈을 운용하는 지혜
우리나라는 아직은 혈연을 중요시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사랑 아니면 돈 때문에 병이 드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죽음은 비참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이 맑을 때 돈을 제대로 운용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우린 평생 돈을 벌어서 저축을 하기도 하고, 많은 보험을 들기도 한다. 그 이유는 늙어서 병이라도 들면 자식들에게 신세 지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돈에 모든 것을 의지하며 움켜쥐고 놓을 줄을 모른다. 그러나 병이 들면 내 맘대로 움직일 수가 없어 제대로 치료도 할 수 없게 되며, 중단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된다. 거기에 보험금 마저도 보호자인 자식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돈은 언제 어떻게 없어지는지도 모르게 없어지고 남는 것은 질병과 외로움, 서러움과 원망, 죽음뿐이다. 그리고 죽은 뒤에는 자식들간의 의리마저도 끊어놓게 된다. 이렇게 봤을 때 돈은 가족과 나를 망치는 주범인 셈이다. 돈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인간성과 윤리마저도 상실하게 한다. 돈은 휘발유와 같다. 휘발유는 불이 나게도 하지만 자동차를 움직이게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 돈에 대한 정치를 잘 해야 하며, 적절하게 운용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당신의 삶, 죽음이 말한다
“죽을 때 보자.” 
이 말은 죽음이란 사건은 우리의 삶을 그대로 재판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즉 죽은 뒤에 염라대왕 앞에 가서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가 염라대왕인 것이며, 죽어가는 과정에서 현상으로 드러난다는 말이다. 
남을 미워하고 원망하면 그 미워하는 과보로 인해 죽을 때 깨끗한 눈으로 죽을 수가 없다. 그리고 남을 비난하고 욕하면, 죽음이 오기 전에 혓바닥이 마른 논바닥 갈라지듯 쭉쭉 갈라지고 부풀어 올라 움직일 수 없는 고통을 받는다. 여기에 물을 부어주면 아프지만, 혀가 입안에 꽉 차서 의사를 표현할 수가 없어 그 고통을 그대로 겪으며 죽게 된다.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은 지은 죄의 모습이 현상으로 눈앞에 떠올라 몸부림치기 때문에 온몸을 묶어놓아야 한다. 심한 잘못을 한 사람 은 죽을 때 자신이 저지른 현상을 그대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선하고 어질게 산 사람은 선하고 어진 과보를 받고, 악하고 모질고 나만 아는 이기적인 삶을 산 사람은 죽음의 여정에서 자신이 뿌린 그대로 겪게 된다.
병이 드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부처님도 생로병사를 여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듯이, 우리의 몸은 물질이기 때문에 병들고 아프면서 죽는 것은 모두가 겪는 여정인 것이다. 그러나 병들고 죽어가는 여정,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통 의 현상은 각각 살아온 모습으로 결정된다. 다시 말해 죽어가는 사람이 겪는 고통 과 외로움, 괴로움, 아픔, 서러움은 그 사람이 살아온 모습을 말해주는 것이다. 돈, 가족, 명예, 지위, 권위는 죽음의 여정 앞에서 내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 고,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 그것은 내 죽음의 질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죽음은 그러한 현상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내 죽음의 모습이 어떻게 되길 원하는지 그 모습이 확정된다면 삶에 대한 대답 은 저절로 나오게 된다. 그 모습대로 삶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삶이 풍요로워지고 행복해지고, 삶의 모습이 당당하게 되며 자유로워지고 아름다워진 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모습이 그려지지 않으면 삶이란 드라마도 혼란스런 모습 을 보이게 되고 제대로 된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다. 따라서 죽음의 드라마가, 극 본이 구체적으로 설정되면 삶의 드라마도 변하게 된다. 삶의 목표와 역할에 따라 극본과 시나리오 등이 제대로 정해지고 변하게 되며, 그 변화는 개인의 삶뿐만 18 보디사트바_겨울 아니라 사회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마음의 치유는 죽음의 질을 높인다
평상시에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을 보면 죽음도 잘 맞이할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에 보이는 모습은 치유되지 않은 마음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몸을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속의 질병을 치유 해야 죽음의 질을 높일 수 있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갖가지의 돌덩어리를 올려놓고 살고 있다. 감정표현, 심정표현을 제대로 못하고 살고 있으며, 그것은 고스란히 가슴속에 담겨져 있다. 그리고 그대로 질병이 되고 악취가 되어 밖으로 표출된다. 따라서 가슴에 올려놓은 돌덩어리를 제거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그것을 제거해야만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랑, 보살핌, 관심이 없는 삶, 아내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삶, 자식과의 불통의 삶이 노년을 외롭고 쓸쓸하고 힘들게 한다. 그리고 그 마음의 병이 육신의 병이 되게 한다. 내가 타인에게 그러한 행위를 했다면 그 과보는 고스란히 내가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내가 행복하고 풍요로운 노년과 죽음을 맞고 싶다면 그러한 공덕을 쌓아야 함을 의미한다. 

타인의 죽음을 돌보는 행위
죽어가는 사람에게 다가가 잘 봉양하고 보살피며 도와주는 인연을 짓지 않으면, 내가 죽을 때 그러한 인연이 없기 때문에 나의 죽음자리도 지켜주는 이가 없고, 어떤 일이 있어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어떤 좋은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내가 죽을 때 사랑받고 극진한 돌봄을 받으려면 그러한 종자를 심어놓아야만 한다. 아무리 자식이 많고 친척이 많아도 죽는 그 순간엔 모두 자리를 비우게 되는데, 그러한 종자를 심지 않은 인과의 법칙에 의한 것이다.
내 주변에 임상의 대상은 많다. 부모, 친척, 형제 등 그러한 사람들을 향해 죽는 그 순간만이 아니라 끝까지 도움을 줘야 한다. 내가 간호 받고 싶은대로 타인을 간호해야만 한다. 내가 죽은 뒤에 장지까지 오길 바란다면 타인에게 그렇게 베 어야 한다. 타인의 죽음을 돌보는 것은 바로 나의 죽음을 돌보는 행위인 것이다.

준비없는 죽음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같다
죽음의 모습은 마음으로, 생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준비하지 않으면, 어느 날 죽음이 왔을 때, 비참하게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와 같은 신세가 된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모습은 눈을 부릅뜨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뒷걸음질을 친다. 안 끌려가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그러나 결국엔 끌려가고 만다. 돌아설 수 없는 그 길을 돌아서려 하고 몸부림친다면 몸부림치는만큼 괴롭고 비참하며 고통만이 있게 된다. 이런 모습은 누구에게나 예외가 없다.
현대인의 조급증을 반영이라도 한 듯, 요즘은 갑자기 발병하고 진행속도도 빠른 암이 많아지고 있다. 췌장암, 담도암, 폐암 등은 진행 속도도 빠르고, 발견한다 해도 치료할 시간도 없다. 그렇다면 언제 삶을 정리할 것인가. 돈이 많은 경우 그 돈을 정리하지 못했으면 자식들이 죽지도 못하게 한다. 치료라는 명분을 내세 워 현대 의학에 의존해서 목숨을 연장시키며 돈을 정리하도록 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건강할 때 해당되는 사람들 모두에게 돈이 있고 없음을 분명히 말해서 죽음을 준비해야만 때가 되었을 때 편안히 죽을 수 있다.
또한 마음의 돌덩이를 모두 내려놓고, 정말 가볍게 갈 수 있어야 한다. 미움도 원망도 내려놓고, 모든 것을 용서한다면 아주 가벼운 몸으로 가게 된다. 시신이 바짝 말랐어도 태산같이 무거운 경우가 있고, 뚱뚱해도 깃털처럼 가벼운 경우가 있다. 이것은 우리 삶의 모습인 것이다. 죽음만큼 살아온 모습을 정직하게 대변해 주는 것은 없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모습을 직면한다면 함부로 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지금 같아선 죽음의 길을 누구나 잘 갈수 있고,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죽음이 앞에 와 있으면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다. 병이 들었을 때 원망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그 나이에 맞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자식 낳고 농사짓고 하는 것은 내 삶이 아니다. 이러한 삶을 90살을 살았더라도 그것은 산 것이 아니다. “얼마나 살았다고…….” 이 말은 아무리 긴 시간을 살았 더라도 내 삶을 산 것은 얼마 안 되었다는 말이다. 자식을 위한 삶은 내 삶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80이 되어서도 ‘얼마나 살았다구.’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 앞에 와서 가자고 하기 전에 내 삶과 내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

죽음을 상실한 삶 자체는 죽음이다
오늘날 우리는 죽음을 상실해 가고 있다. 우리의 문화가 죽음을 외면하게 하고 있다. 그래서 집에서 죽은 사람도 병원으로 실려 가게 하며, 시신에 대한 부가가 치까지 생겨나서 시신 쟁탈이 일어나기도 한다. 병원에서 죽게 되면 숨 떨어지자마자 실려 나가 냉동고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는 평생 쌓아온 공덕을 순식간에 무너뜨리는 행위이다. 정신을 안 차리고 죽으면 누구나 그러한 처지가 될 것이다.
죽음이란 지(地)․수(水)․화(火)․풍(風) 순서대로 무너지는 과정이다. 사대가 차례로 무너질 때는 의식을 온전히 집중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문소리나 발자국소리 하나도 없이 절대적인 적정의 상태에서 염불소리와 화두에 집중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혼식이 고요하고 적정한 상태에서 염불소리를 들으며 화두만 잡고 육체를 빠져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혼식이 모두 빠져 나간 뒤에도 5~6시간 정도는 조용하게 시신을 건드리지 않아야 한다. 그 순간은 다음 생을 결정짓는 절대 절명의 순간이며, 이 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따라 사후의 질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소원은 건강하게 살다가 남의 신세 지지 않고 자듯 죽는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임상의 현장에서 직면한 진실은 수행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에 제대로 죽지도 못한다는 사실이다. 수행을 했어도 현상적인 수행은 했을지언정 실제적 으로 영적인 성장을 이룬 수행이 되지 못했기에 잘 죽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삶 속에 죽음이 함께 있음을 자각하면서 순간순간을 살아가야 할 이유이 기도하다.

능행스님 │재단법인정토사관자재회 이사장
(채록자|변은숙, 24기 호스피스)
출처 : 재단법인 정토사관자재회 계간지 ‘정토마을’ 2018.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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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마을 능행스님 : 네이버 포스트

행복한 삶이란? 온전한 죽음이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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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은 무엇이며, 죽는 것은 무엇인가?
일찍이 붓다께서는 사는 것도 고통[生苦]이고 죽는 것도 고통[死苦]이라고 하셨다.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열반이 있고, 열반으로 가기 위한 수행이 있는 것이다. 삶은 연기법에 의해 인연의 조건과 환경에 영향을 받으면서 그 무엇을 학습하는 여정이다. 그 학습 결과에 따라서 맞이하는 죽음의 질이 다르고, 시작하는 죽음의 질이 다르다.
사람들은 흔히 죽음이란 나이가 들거나 심각한 병이 들었을 때 찾아오는 손님 쯤으로 여긴다. 그러나 2008년 이 시점에서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죽음이나 질병은 연령과 성별을 구별하지 않고 다가온다. 그래서 아주 두렵고 공포스러운 느낌이 강하다. 손님이긴 하지만 반갑지 않은 손님임에는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애써 회피하고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재수 없거나, 마음 상하게 하는’ 부정적인 주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죽음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미리 준비하고 극복해가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그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전혀 하고 있지 않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렇다면 삶의 여정 중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죽음이 찾아왔을 때, 두 손 들어 환영은 못할지라도 당황하지 않고 허둥대지도 않으면서 담담히 맞이할 수는 없는 것일까?

죽음에 대한 인식의 부족
요즘 젊은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인식이나 지식,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이다. 매일의 생활 가운데 죽음을 염두에 둔다거나 죽음 뒤의 세계에 대한 생각을 하는 일은 결코 없다고 할 정도이다. 더구나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은 부분을 부모에게 의지하기 때문에 갑자기 병이 들거나 죽음에 임박해서도 부모가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 생각한다.
때로 젊은이들에게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어떻게 될 것이라 생각하는지요?’ 라고 질문을 하면 그런 점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다.’라는 대답을 들을 때 막막함을 느낀다. 이런 인식과 무지와는 달리 현실적으로 죽음은 우리와 훨씬 가까이에서 삶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반영하듯,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청소년, 소아를 위한 암병동은 서울대병원 등 대형 병원 몇 개에만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각 대학병원마다 소아암병동이 생겨났다.
더 이상 젊은이들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죽음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해 직면해야 하며, 의식을 바꾸어야 한다.

변화된 죽음의 환경
예전에는 집에서 태어나 집에서 죽는 것이 다반사였다. 심지어는 안방에서 죽지 않으면 객사(客死)라고 하여 그 시신을 집안에 들이지 않을 정도로 죽음을 존중하였다. 장례를 치르는 과정을 보더라도, 잘못 행해졌을 때 다시 고칠 수 없는 일이 장례에 대한 일이기 때문에 정성을 다하여 실수하지 않고자 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태어나는 것도 병원이고 죽는 곳도 병원이다. 대개 병이 들거나 죽음에 임박해서는 집에 있다가도 죽을 때는 다시 병원으로 가서 죽는다. 이는 죽는 사람에 대한 배려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 위주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아파트라는 주거환경은 사람의 주검조차도 물건으로 치부해 버리곤 한다. 주변의 죽음을 보면서 나의 죽음을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극도의 이기주의에서 죽음이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즉 죽음이 상실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이나 친지, 친구 등 주변의 사람들이 죽어도 그 여정을 함께하지 못하고 죽음 뒤에도 충분히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죽음을 상실한다는 것은, 죽음이 결핍된다는 것은, 죽음을 외면하는 것은 온전한 삶이라 할 수 없다. 우리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죽음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지 않는다. 될 수 있으면 죽음을 외면하게 한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회피는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면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삶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며, 부모는 자녀들에게 이러한 환경을 제공하는 주인공이다.
어른들은, 부모들은 젊은이들이 죽음에 대해 직면하고,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 젊은이가 건강한 생각을 가지고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삶의 요소보다 훨씬 많은 죽음의 요소
우리 주변에는 삶을 영위하게 하는 요인보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요소가 훨씬 많다. 정신 차리고 보면 가슴을 쓸어내려야 할 만큼 위험 요소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죽을 일이 많다.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는 매일 매일의 사건 사고만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어제까지도 웃던 사람이 오늘 생사가 나뉘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한 번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또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우리는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에는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고 온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그 많은 죽음의 요소를 견뎌내고 살아온 사람들이 맞이하는 죽음의 여정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죽음, 그 이후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무지에 대해서도 별 의식이 없다. 평소에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기며 그 이후의 경과에 대해서는 경시하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모든 것이 넘쳐나는 현실에서 우리의 마음은 목마르고 영혼은 메말라 있다. 죽음을 보는 시각이나 사후 처리 과정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죽음이 경시되는 결핍된 사회에서의 삶은 정신적인 황폐함이 난무한다. 정신의 황폐함은 물질적인 욕구만을 채우기 위한 살게 한다. 그것만이 성공된 삶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삶에 있어서 양적인 극대는 있을지 몰라도 질적인 풍요는 존재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이 동반하지 않는 삶은 온전한 삶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정토에 오는 사람 누구에게나 묻는다. ‘지금 이 순간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지금 이 순간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기고 싶은 말은,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거의 모든 사람의 첫 번째 대답은 ‘해도 될까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정말 해도 될까요?’이다. 
그리곤 이어 말한다. “죽음이 이렇게 오는 것이라면, 삶이란 것이 이렇게 끝나는 것이라면 내게 죽음에 대해 왜 이야기해주지 않았나요? 왜 가르쳐주지 않았나요? 죽음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왜 미리 가르쳐주지 않았나요? 너무나 중요한 죽음에 대해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 당혹스럽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한다. 자신의 삶과 죽음에 세상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 있는 것이다.

호스피스교육이란 무엇인가
삶 가운데 죽어가는 과정을 공부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공부이다. 그런 의미에서 호스피스 교육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도와주는 봉사가 아니라, 죽음을 보면서 나의 죽음을 바라보고 준비하는 수행의 여정이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죽음인 임상체험을 통해 평생 살아오면서 잘 살아왔는지를 돌아볼 수 있다. 죽음의 진실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공부할 수 있다.
호스피스는 수행이다.
우리는 생과 멸의 사이에 서서 직면하고 싶지 않은 사실들에 직면하게 된다. 탐진치에서 비롯되는 형상 없는 생각과 감정들이 고통, 두려움, 이별, 아픔, 상실 의 질을 바탕으로 윤회를 창조하게 하는 사실에 깨어있도록 우리의 의식을 흔든 다. 팔정도를 통해서 실상을 알 수 있는 사실적인 통찰이 온다. 떠나는 자와 떠나 려는 자들이 서로의 모습을 통해 진실에 면하게 되면서 서로에게 높은 의식의 성장과 빛이 된다. 이 수행은 죽음과 삶을 통해 얻는 바른 경험이 있을 뿐이다.
죽음에 끌려가지 않는 죽음, 죽음을 통해 더 높은 의식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현상적인 풍요보다 영적인 풍요가 더욱 중요하다. 시선을 내면으로 거두고 달리 기를 멈추라. 그리고 지금 여기에 깨어 있으라.

능행스님 │재단법인정토사관자재회 이사장
2008년 마하보디교육원 호스피스교육 중 능행스님의 법문을 채록하여 싣습니다.
(채록자|변은숙, 24기 호스피스) 

https://youtu.be/wFgX-RfCOTs

 

https://youtu.be/AaGuDqJrCMI

 

1997년 여름 능행 스님에게 급한 연락이 왔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온 전화였다. 임종 직전의 환자 한 분을 돌봐줬으면 한다는 전갈이었다. 많은 종교인이 찾아와도 도통 반응이 없는 묘한 분이라는 얘기와 함께….

■ 능행 스님, 법당 겸 병동 세워 봉사

세상에나. 머리가 헝클어지고 뼈만 남은 환자를 씻겨놓고 보니 스님이었다. 출가 뒤 24년 선방에서 정진하느라 토굴 하나 장만 못했다는 얘기와 함께 그는 비구니 능행 스님의 손목을 부여잡고 간곡한 부탁을 했다.

"비구니 스님. 나는 이렇게 죽어가지만 나중에 병원 하나 세워주소. 내가 죽어서라도 도와줄게…."

이틀 뒤 스님 시신을 벽제 화장터에서 태우고 돌아오는 길에 능행 스님은 서원 하나를 세웠다. "그래. 진정 수행다운 수행, 부처님 가르침에 합당한 보살행에 전념하리라. 죽어가는 이들과 함께 수행을 하는 호스피스(임종을 앞둔 환자의 평화로운 죽음을 돕는 봉사) 수행을 할 수 있도록 병동을 세우리라."

충북 청원군 미원면 구녀산 기슭의 정토마을. 밤이 되면 쏟아지는 별빛이 유난이 고운 이곳이 바로 그런 내력을 안고 2000년에 세워진 법당 겸 병동이다. 물론 3년 모금활동이 큰 보탬이 됐다.

89년 이후 충북 음성군 꽃동네 등을 돌며 봉사했던 능인 스님의 호스피스운동이 자기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린 곳이기도하다. 또한 불교계 최초의, 또한 유일한 독립 호스피스 센터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동안 정토마을은 '아미타호스피스 운동'의 센터로 자리 잡았다.

아미타 호스피스란 기존 호스피스운동에 불교 아미타 신앙(중생을 건지려는 아미타부처와 정토를 믿는 타력신앙)을 결부한 현대적 봉사수행을 말한다.

실제로 이곳에선 한 해 두 차례 스님.불자 대상으로 호스피스 교육이 이뤄진다. 200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에 '불교호스피스연합'을 결성한 데도 정토마을의 역할이 컸다.

그러면 삶과 죽음이 무시로 오가는 공간 정토마을의 실제는 어떨까. 의외로 소박하다. 크지않은 아미타 법당 한 채와 그 옆의 팬션처럼 보이는 병동이 전부다. 의사 두 명, 간호사 네 명, 병상은 15개 규모다.

"우리네 삶은 빗방울처럼 한차례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산다고 하는 것은 죽음 이전의 한시적인 존재일 뿐입니다. 요즘 품위 있는 죽음을 의미하는 웰다잉(Well-Dying), 웰엔딩(Well-Ending)이 자주 거론되지만, 호스피스 운동이야말로 그런 취지를 현실에 옮기는 가장 훌륭한 봉사이자 수행입니다. 질병과 죽음을 경험하면서 인간의 두려움과 외로움을 보살피고 돕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호스피스야말로 '수행의 꽃'이라고 봅니다."

스님은 거듭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한다'(上求菩堤, 下化衆生)는 불교의 대승 정신에 호스피스운동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스님의 활동은 아직은 사회봉사에 소극적인 불교계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크게 시사적이다. 불교계도 80년대 이후 질병.빈곤 등 사회복지에 눈을 많이 돌리고 있으나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말하긴 아직 이른 편이다.

스님은 자신의 이런 신앙관과 정토마을 활동은 담은 단행본 '섭섭하지 않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도솔)를 다음주 초 펴낸다. 몸이 크게 아파 병석에 누웠던 2년 전 문득 '누군가 이런 수행을 이어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과 함께 하나 둘 메모해둔 원고가 바탕이 됐다. 그간의 활동을 일기체 형식으로 적어 얘기가 생생하고, 그런 만큼 설득력도 크다.

조우석 문화전문기자

[출처: 중앙일보] 호스피스로 피어난 '수행의 꽃'

 

책소개

우리나라 불교 호스피스계 선구자 능행 스님이 전하는 삶의 교훈
죽어가는 말기암 환자들의 마지막을 지키며 불교계에서 최초로 호스피스를 장려하며 보살행을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비구니 능행 스님이 두 번째로 펴낸 호스피스 이야기다. 모든 사람들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유지한 채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수 있도록 15년 호스피스 활동을 통한 구도의 길에서 1천여 명이 넘는 죽음을 배웅하면서 만났던 사람들과, 그들과 나눈 마지막 순간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았다. 

이 책은 따뜻한 시선과 생사를 꿰뚫는 통찰력으로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이고, 또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지 고찰한다. 작가는 우리의 생이 얼마나 남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언젠가 우리 모두가 삶을 떠나는 날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하루를 살더라도 치열하게 사랑하고 나누고, 베풀며 살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순간'이 내 생에서 가장 소중한 순간인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이있는 가르침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진정한 삶의 길을 찾는 이들에게 귀중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목차

여는 글_ 지금 이 순간의 삶을 보라 

1. 마지막 노래
혈연 
잘 지내고 있지?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다 
안겨오는 죽음 앞에서 
소리 없이 기적이 내리다 
딱 맞네 
할아버지의 용서
만 원에 담긴 모정 
오지 못하는 당신을 위해 
애도(哀悼) 
찰나 生 찰나 死 
윤회의 강을 건너 

2. 죽음은 삶을 닮았네
기도 
고달팠던 삶 사뿐히 내려놓고 가소서 
생자필멸(生者必滅) 
임 가시던 그날 
기러기 아빠 
지지 않는 연꽃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넓고 넓은 바닷가에 
연극 같은 인생 
그리움 

3. 만약 돈 때문에 가난하다면
오원짜리 아이스케키 
돈도 선함을 안다 
영혼이 가난한 형제들 
가난한 사람에게 서울 큰 병원은 꿈이다 
화택(火宅) 
꿈속에서 꿈을 꾸며 꿈을 말하네 
복권을 사볼까 

4.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는 길
생사에 한 발씩
죽음이 건네준 선물
아름다운 뒷모습
다 괜찮아

5.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는 간이역
우산이 되어주리
인연과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준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꽃상여
무상
나팔꽃을 닮은 당신
한 잎 낙엽
떠날 때를 생각하며
빛과 그림자
당신을 초대합니다

6 모두가 함께 부르는 노래
부처님 전상서 
초파일 연등을 만난 스물여덟 봄날 
구도자의 길
약속 
태조산 금강이도 힘을 보태고 
언양 땅에 닻을 내리고 
하나로 동행 

7. 가슴 벅차게 사랑할 인연이 있어 행복하다
달이 밝습니다 
인연 
내 도반은 사진작가래요 
알뜰한 당신 
연등
고추 모종을 지켜라 
토끼와 오대의 2라운드 
다시 봄이다 

닫는 글_ 언젠가 세상에 없을 당신에게

 

http://ch.yes24.com/Article/View/16099

 

[아름다운 책 이야기] 능행 스님 "최상의 죽음 얻을 수 있는 방법은..." - 『이순간』 능행 스님 | YES24 문화웹진 채널예스

지난 5월 26일 서울 조계사 극락전 법당, YES24와 한겨레출판이 마련한 작가와의 만남 가 열렸습니다. 이날의 는 능행 스님.『이 순간』(능행 지음|한겨레출판 펴냄)의 저자이시며, 지난 15년 구도의 길에서 만난 1천여 명이 넘는 죽음을 배웅한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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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선고받은 사람들이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10년 넘게 해온 비구니 능행스님. 천여 명이 넘는 죽음을 배웅하면서 그는 사람들에게 잘 먹고 잘사는 법이 아니라 잘 죽는 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다. 

"이 세상을 살다가 우리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갈 수 있는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선물은 무엇일까요?" 그는 언제나 만나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미소로 답하고 갈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멋진 죽음일까요. 삶을 누렸듯이 죽음도 누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는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아름답게 이별할 수 있도록 불교계 최초의 독립형 호스피스 정토마을을 세워 오늘도 봉사자들과 함께 생활을 하고 있다.

 

목차

1장 삶의 마지막은 언제나 살아온 모습과 닮았습니다 

백금 귀고리를 하고 떠난 소녀 
대문 옆에 피어난 참꽃 
다이아몬드 반지가 담긴 보따리 
고통없는 죽음을 준비하자 
다시 태어나면 아기 낳고 살아볼래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웃음 
아름다운 뒷모습 
백구두 네 켤레 
응급실도 웃는 날 
너무도 그립고 그리운 그리움이여! 

2장 하늘로 간 이들이 별빛으로 내려오는 정토마을

시님! 나 여거서 죽어도 되지라? 
새털처럼 가벼운 인생 
부처님! 행복하게 조금 더 살고 싶답니다 
마니주 
오직 나의 팬 
할매의 담배 연기 
구녀산 도라지 
진리의 태양은 하나입니다 
호스피스 교육 

3장 저녁노을 닮은 당신의 아름다운 동행이고 싶습니다 

밤하늘에 별이 된 스님 
입 있는 사람 다 말해보시오 
어느 수행자의 텅 빈 아름다움 
행복한 여행을 시작하신 울 할배 
극락의 즐거움은 어떠십니까, 스님! 
천지의 주인이 되신 스님 
극락에는 치과가 없소? 
죽음 앞에서 죽음을 돌봐주시는 내 도반 

4장 거세게 일어나는 저 파도처럼 거듭나소서

도반과 함께 걷는 길 
잠 못 드는 밤 
동해 바다에서 
아버지 묘지에서 
정토마을 물러가라! 환자가 웬 말이냐! 
연꽃 피우는 사람들 
우리는 왜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가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작가와의 만남

http://ch.yes24.com/Article/View/16099

 

[아름다운 책 이야기] 능행 스님 "최상의 죽음 얻을 수 있는 방법은..." - 『이순간』 능행 스님 | YES24 문화웹진 채널예스

지난 5월 26일 서울 조계사 극락전 법당, YES24와 한겨레출판이 마련한 작가와의 만남 가 열렸습니다. 이날의 는 능행 스님.『이 순간』(능행 지음|한겨레출판 펴냄)의 저자이시며, 지난 15년 구도의 길에서 만난 1천여 명이 넘는 죽음을 배웅한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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