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나에게 울타리인 엄마가 쓰러지신 악몽 같은 달이었다. 엄마는 6차례의 수술과 시술을 받으셨지만, 결과는 임종을 준비하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뿐이었다.

지금 엄마는 이곳 자재요양병원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계신다. 처음 이곳에 오실 때에는 겨우 몇 마디 말씀하실 수 있는 정도였고, 삼키는 기능도 떨어져 주사약에 의지해야 했었다.

그렇게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영적돌봄가 스님께서 엄마를 위한 이벤트를 마련해 주셨다. 행복했던 과거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을 보여 드렸고, 아버지에게 고운 꽃다발도 받으셨다. 그렇게 많이 웃고 눈물 흘린 시간을 보낸 뒤 엄마는 조금씩 음식을 삼키기 시작하셨고, 웃음도 보여주셨다.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이토록 큰 변화, 기적이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곳은 불교재단 병원이지만, 엄마의 머리맡에는 성모님이 온화하게 자리하고 계신다. 천주교 신자인 엄마를 위해 영적돌봄가 스님께서 가져다주신 성모상이다. 종교를 불문한 따뜻하고 섬세한 돌봄이 우리 가족에게는 늘 큰 감동이 된다.

언제나 나를 반갑게 맞아주시는 엄마. 엄마와 나는 휠체어를 타고 병원 앞 치유동산 약사여래 불상 앞에 가서 묵주 알을 돌리며 기도문을 주거니 받거니 한다.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 향기로운 가을 길을 걸어갑니다.” 예쁜 가을을 바라보며 함께 노래도 부른다.

엄마가 쓰러졌을 때 우리 자매들이 마음 모아 기도했던 지향들이 있다. 엄마와 눈 마주치기, 함께 노래 부르기, 함께 걸었던 길을 다시 걷기... 비록 휠체어에 앉아 움직이시지만, 이 모든 기도가 이루어졌다.

이곳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의 따뜻한 돌봄과 스님들의 기도, 그리고 우리 가족들의 사랑이 모여 엄마가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준 것 같다.

주말이 되면 아이들은 외갓집에 가자고 한다. 병원 앞마당에서 아이들은 자전거와 씽씽카를 타고, 우리는 카페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평온한 주말을 보낸다. 엄마가 평생 바라시던 넓은 정원에 손자 손녀들이 뛰어노는 외갓집. 바로 이곳이 엄마의 집이고, 아이들의 외갓집이며, 나의 친정이다.

(정토마을 2020.1월호 계간지에 실어주신 내용을 옮겨 싣습니다.)

김다운 │ 요양병동 보호자

http://www.jajae-hospital.com/

 

정토마을자재요양병원

세계에서 행복지수 1위인 .. 세계에서 행복지수 1위인 부탄으로 성지순.. 2017.05.25

www.jajae-hospital.com

 

 

30여 년 동안은 교직 생활로 인해 종교나 봉사에 대해서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던 2014년 5월, 저는 정토사 불교대학에 입학하게 되었고, 봉사활동을 통해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과도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은 첫 만남부터 낯설지 않았고, 항상 푸근함으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벌써 6년째 매월 정기적으로 봉사활동으로 인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정토 도량에서 열심히 복 지으라는 운명인가 봅니다. 

요양병동에 계시는 어르신들의 식사를 도와드리거나, 말벗이 될 때는 멀리 경기도 용인에 계시는 친정엄마 생각에 가슴이 찡해지기도 합니다.
조리실(공양간) 봉사할 때는 식자재 다듬기, 환경정비를 하며 건강식으로 준비한 점심을 먹고, 봉사를 마치고 돌아갈 때는 항상 뿌듯한 마음으로 마무리하고 도반들과 헤어지면서 또 만나길 기원합니다.

“과거 생의 내가 궁금하면 지금의 내 삶을 보고, 미래 생의 내가 궁금하면 지금의 내 행을 보라. 지금의 삶이 편안한 사람은 복을 까먹고 있는 중이니, 그럴수록 많은 선업을 쌓아야 미래 생도 편안하다.”
날마다 행(行)하는 삶이기를 되새기게 하는 글귀입니다.

주변에 봉사를 망설이고 있는 분들이 계시면 주저하지 말고 이곳 정토마을자재요양병원으로 오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전혜경 │ 울산 정토회 회장


의미있는 시간을 만들어드리는 일,

함께하고 싶으시다면?

#자원봉사자 #재능기부자 가 되어 그들의 일상에 힘이 되어드릴 수도 있고

#후원자 로써 힘이 되는 활동들을 지지해주시는 방법도 있어요~!

함께 해주신다면 정말 행복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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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이었다. 네팔지진으로 히말라야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작은 진료소가 무너져서 주변 지역 6개면 주민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연락이 왔었다. 소식을 들은 그 길로 정토마을 사무국장님과 종무 팀장을 데리고 네팔로 날아갔고, 그때 정토마을에서 무너진 진료소 복구비를 지원한 인연이 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차츰 잊어가던 중, 올봄에 진료소 운영비 마련을 위해 빵 만드는 시설을 마련하신다 하여 시설비를 지원해드렸었다. 그리고 4월쯤인가 페이스북을 통해 진료소를 운영하는 티벳 스님이 교통사고로 많이 다쳐서 입원 중이라는 소식을 접했지만, 딱히 깊이 사정을 알아볼 처지가 못 되어서 차츰 좋아지고 있다는 소식으로만 대신했었다.

 

그리고 지난 10월 어느 날, 때아닌 비가 언양 간월산에 억수같이 쏟아졌다. 며칠 내내 내린 비로 인해 기온이 많이 떨어진 어느 날, 네팔에서 티벳 비구스님 한 분이 오셨다. 네팔 히말라야 산 중턱에서 진료소를 운영하는 그 비구스님이셨다.

건강이 많이 걱정되었는데 만나 뵈니 반가운 마음이 먼저 일어났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는지 당황스럽고 놀라웠다.

 

영어를 하는 정토마을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왕복 8시간 거리의 도시로 약을 사러 갔다가 벼랑에 굴러떨어져서 복부에 구멍이 나고, 오른팔과 손을 심하게 다쳐 사용하지 못하고, 두통이 심하다 하셨다.

사실상 진료소 운영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정토마을에 오신 날부터 나는 우리 자재요양병원에서 침 치료, 물리치료, 약물치료 등을 제공하면서 스님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기도했다. 음식도 잘 드시게 하고, 따스한 옷도 마련해드리면서 스님을 돌보기 시작했다. 여권 비자 기간도 1개월 연장하여 정토마을에 조금 더 머무실 수 있도록 하였다.

 

스님과 나는 부처님 사리각에서 함께 기도했다. 나는 한국어로, 스님은 네팔어로...

그날 밤에도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아픈 몸을 구부리고 내 곁에 앉아 경전을 독송하는 39살 비구스님 모습에서 나는 나의 39살을 보았다. 죽어가는 암 환자들과 함께 천지도 모르고 살던 그때, 너무나 외롭고 막막했으며 암담했던 그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면서 눈물이 났다.

나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스님이 진료소를 운영하지 않으면 네팔 그 산속에 살는 3만 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아플 때 어떻게 하느냐고, 힘을 내셔야 한다고...

자재요양병원 문채경 선생님의 통역을 도움받아 밤이 깊도록 법당에 앉아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어가면서 나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드렸다.

산을 넘고 보니 또다시 바다였고, 바다를 건넜다 싶어지면 어느새 또 다른 길 없는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절대 쉽지 않은 길, 누구나 갈 수 있을지언정 아무나 갈 수는 없는 길임을 말했다.

 

스님은 다친 팔과 손, 심한 두통은 차츰 좋아져 갔지만, 그동안 네팔에서는 언제 오시는지, 진료소 문은 언제 여시는지, 스님을 찾는 전화가 시간이 갈수록 많아져 갔다.

 

12월 7일, 스님은 네팔로 가는 비행기표를 샀다.

나는 스님에게로 마음이 계속 쓰였다. 병원이 다시 운영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나는 스리랑카 의료봉사를 떠났고, 내가 의료봉사를 다녀올 동안 스님은 부처님 진신사리각에서 혼자 기도를 이어가셨다.

 

12월 6일, 정토마을 종무소에서 네팔스님 가방싸기 운력을 하였다. 아기들 옷과 사탕, 연고, 회충약, 파스, 라면, 커피, 아동 영양제 등등... 그리고 정토마을 국경없는 민들레에서 모금된 1천만 원과, 정토마을 직원 두 분이 마음 내어주신 2천만 원을 가지고 스님은 용기를 내서 진료소 운영을 다시 해보겠다며 네팔 산골 진료소로 돌아가셨다.

대형가방 세 개를 빌려 가면서, 내년에 또 오시겠다며 활짝 웃는 스님의 모습에 나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가슴은 또 왜 이리 시린지 모르겠다.

발덴라마 따시델레 기도하리다.

 

산골진료소 지원협약 체결 (발덴라마 따시델레 스님과 능행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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