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데니야야 의료봉사는 불보살의 향기가 나는 마하위하라사찰에서 이루어졌다. 11월 11일부터 20일까지 내과, 한방, 소아과, 치과, 안과 진료를 한국과 스리랑카 의료진의 협진으로 3,905명의 환자 진료를 보았다. 더운 날씨에 새벽 4시부터 진료를 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했다.
개인적으로 4번째 참여하는 봉사인데 이번 주방 설거지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잘 정제되지 않은 가스의 그을음이 심하여 두 번, 세 번 닦아야 했기에 주방 식구들은 휴식 한번 제대로 취하지 못했다. 보살행을 한다는 것이 이렇듯 고달픈 여정임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주어진 메뉴를 척척 해내는 것을 보며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맛있게 먹어주니 우리의 업무가 더 빛이 났을 것이다.
의료봉사 여정을 마치고는 양국의 전통의상을 입고 스리랑카 전통악기 연주 및 강강술래를 부르며 어울림한마당이 열렸다. 그렇게 의료봉사 여정을 마치고 스리랑카 성지순례를 나섰다. 가는 곳마다 붓다의 가르침이 살아 있는 곳, 많고 많은 불상을 보면서 온전한 붓다의 나라임이 실감났다. 국민의 70%가 신심 견고한 불자의 나라 스리랑카에서 수많은 붓다를 만나고 온 느낌이다.
의료봉사를 잘 다녀오라면서 약 보시를 하고 현지에 가서 꼭 필요한 곳에 쓰고 오라고 현금까지 지원해준 나의 회사 동료들께 감사드린다. 또한 편안한 마음으로 다녀오라고 지지해준 가족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크다.
이번 성지순례 때 가이드께서 법구경을 말씀하셨는데 마음에 와닿아 적어봅니다. “벗어남의 맛을 알고 내려놓음의 맛을 알면 근심과 탐욕에서 벗어나 진리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네.”
다음의 의료봉사지인 몽골 울란바토르에서도 밤하늘의 별을 보며 다시 환희심을 느껴보고 싶다.
라닥을 간다고 하니 지인들은 말합니다. 고산지역이고 건강을 생각할 나이에 어렵지 않겠냐고요. 저는 자신한다고, 마라톤 뛰는 사람은 고산을 덜 느낀다고 마음을 다잡고 가벼운 마음으로 자원봉사길에 올랐습니다.
긴 시간 비행을 하고 라다크에 내리니 가슴이 흥분되기 시작했습니다. 멀리 보이는 설산과 시골에서 볼 수 있는 미루나무 그늘과 소박한 집들의 풍경은 새로운 감동으로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심장재단 이동 후 고산 적응도 안된 상태에서 모두가 의약품 정리에 분주한 움직임을 보며 우리 식당팀도 움직여 봅니다. 이번엔 밥솥과 냄비도 준비해주시고 찹쌀, 무청 시래기, 김치, 된장, 고추장, 기본양념 등등 보기만 해도 배부른 든든함에 우리도 분주히 움직여 봅니다. 주방장 형수님, 고산 적응 실패로 괴로워하시지만, 의지의 엄마 포스를 보이시며 준비를 시작합니다.
도착 후 첫 진료 시작부터 어디서 본 듯한 이웃사촌 같은 주민들의 친근감에 모두가 환희심을 느끼며 의료봉사 기간 내내 웃음과 사랑으로 열심히 하시는 아름다운 모습을 가슴에 담았습니다.
심성 착한 라닥 주민들을 보며 60여 명의 식사 준비와 정리를 하면서 종교적인 신앙심까지 생기며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라다크 심장재단병원 초겔스님의 진정함과 장엄한 자연과 멀리 보이는 설산을 보며 라닥인의 감정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감히 봉사자들의 심성에 대해 생각하는 봉사 기간이었습니다.
“대붕에서 능행스님과 약속했던 삼세번의 의료봉사, 앞으로 열번의 의료봉사로 함께 하겠습니다.”
-2019년 8월 동암 이진희의 약속
이진희 │정토마을 국경없는 민들레 라다크 의료봉사 단원
※이진희 님은 2017년 정토마을 국경없는 민들레의 첫 해외 의료봉사 인도보드가야 의료봉사를 시작으로, 남인도 대붕로셀사원의 봉사와 이번 인도 라다크 의료봉사 단원으로서, 식사준비팀에서 자원봉사를 이어가고 계십니다.
"몸이 아픈 이들을 돌보는 것은 붓다인 나를 돌보는 것이며 몸이 아픈 이들에게 약을 공양을 올리는 것은 나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이다."
-부처님 말씀 중에서
[정토마을 능행스님과 함께하는 국경없는 민들레 스리랑카 의료봉사] 스리랑카 의료봉사는 2003년과 2017년 두차례의 쓰나미로인한 산사태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한 마타라 데니야야 지역으로 갑니다. 함께해주세요. 많은 분들의 동참은 어려운 그들에게 희망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또한 선착순 60여명의 자원봉사자를 모집합니다. 가정의학과 및 일반외과, 그리고 내과를 봐주실 수 있는 의사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으며,
한국 아유르베다(한방) 의사선생님도 2분 이상 모시고자합니다. 간호인력도 매번 부족합니다.
북인도 라닥의 도시 레에 위치한 심장재단으로 향하는 길,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가득 싣고 히말라야산맥이 병풍처럼 휘감은 고산지대이며 동시에 인접국가의 국경지대인 레로 떠난다.
델리 국제공항에서 레로 향하는 비행기가 연착 되었다. 두어 시간을 더 기다린 후에야 작은 비행기에 탑승하여 레로 향한다. 창밖의 푸른 하늘을 무심히 보고 있는데 맑고 시린 히말라야 산봉우리들이 하얀 구름과 눈을 이고 모습을 나타냈다. 너무 깨끗한 시야에 너도, 나도 수미산 봉우리를 눈과 가슴에 담고 레 공항에 도착했다. 도착해보니 공항 너머로는 모래 언덕과 모래 산들이 즐비했다.
간밤의 폭우로 인해 모든 비행기가 연착되었다고 한다. 모래흙 덕분인지 간밤의 폭우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맑게 갠 하늘만 나투시어 좀 더 깨끗한 히말라야산맥을 마음에 담을 수 있게 해주셨으니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심장재단으로 이동해 의약품 등의 짐을 정리한 후, 이틀가량의 공식적인 고산 적응 기간을 가졌다. 적응 기간 동안 안내, 접수, 한, 양방 의약품분배 등 다양하게 팀을 나누고 팀별 소임 내용을 숙지한 뒤 의료봉사가 시작되었다. 막상 의료봉사가 시작되니 고산 적응이 덜 되었거나 몸이 힘든 봉사자들이 이따금 발생했지만, 유기적으로 봉사팀을 이동해가며 빈자리에서 발생하는 공백을 서로 나누고 보태며 서로의 배려 속에 하루하루 일정을 소화해 나갔다.
멀리 창밖으로 그림 같은 히말라야산맥 봉우리들을 풍경 삼아 먹는 녹두죽은 어찌나 맛이 있었는지 모른다.
별처럼 반짝이는 아이들의 눈망울들에서는 시꺼먼 내 속이 들여다보이듯 했다. 해맑고 즐거운 아이들은 진료를 받기 위해 줄을 맞추어 병원 복도에 앉아 있다가도 금세 본연의 아이로 돌아가 까르르 거리며 장난을 친다.
전통복장을 하고 하얗게 센 머리를 길게 땋아 내리고 목에 손에 염주를 건 노 보살님은 두꺼운 여러 겹의 옷을 하나하나 벗어 내리고 진료를 받기 위해 침대에 누웠다. 아침은 먹었는지, 심장병, 고혈압, 당뇨가 있는지 약은 먹는지 문진하고 어디가 제일 많이 불편하고 아픈지 물어본다. 고산지대인 데다 영양 섭취가 고르지 않아 심장이 안 좋거나 호흡이 곤란한 이가 많다. 노화로 인한 무릎, 발목 관절이 아픈 이도 많다.
물길 따라 이동하는 유목민들이 몇 시간을 걷고 느린 버스를 타고 반나절 혹은 하루 혹은 이틀거리에서 찾아왔다고 한다. 파스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왜 아니 들까. 한방 선생님께서 침을 놓으시고 관절 크림이며 파스며 처방을 하시고 통역을 맡으신 티벳 스님들께서는 열심히 환자분들에게 설명해주신다.
그렇게 의료봉사 기간 동안 내가 있었던 한방 진료실에는 같은 그림이 지나갔다. 누구 혼자 도드라져 끌고 나가는 것이 아닌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씩 작은 태엽이 되어 하나하나 맞물려 큰 복전의 시계의 초침이, 분침이, 시침이 움직였다.
무한한 인드라망 속 작은 구슬이 반짝하고 흔들리면 같이 연결되어 있는 구슬들이 서로 다른 반짝임으로 춤을 춘다. 나만을 위함이 아닌 당신을 위한, 이 공간을 위한, 이 세계를 위한 내 행동 하나가 무한한 긍정의 파장으로 작게는 내가 속한 세상과 크게는 온 법계에 유익한 출렁거림을 전하게 될 것이다. 의료봉사는 그렇게 유익한 우리를 위한 긍정의 한 걸음이며 또한 미쳐 닫지 않는 곳에 전해야 할 에너지이다. 이런 기회가 주어지고 참여할 수 있었음에 매우 감사하고 내가 아니라 우리로 돌아가야 하는 길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몸이 아픈 이들을 돌보는 것은 붓다인 나를 돌보는 것이며 몸이 아픈 이들에게 약을 공양을 올리는 것은 나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이다."
-부처님 말씀 중에서
[정토마을 능행스님과 함께하는 국경없는 민들레 스리랑카 의료봉사] 스리랑카 의료봉사는 2003년과 2017년 두차례의 쓰나미로인한 산사태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한 마타라 데니야야 지역으로 갑니다. 함께해주세요. 많은 분들의 동참은 어려운 그들에게 희망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또한 선착순 60여명의 자원봉사자를 모집합니다. 가정의학과 및 일반외과, 그리고 내과를 봐주실 수 있는 의사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으며,
한국 아유르베다(한방) 의사선생님도 2분 이상 모시고자합니다. 간호인력도 매번 부족합니다.
1980년대 들어서야 비로소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곳이다. 그것도 ‘오래된 미래’라는 책을 통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 이전에는 그들만의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을 이어 왔다. 티벳불교가 그들의 정신적 기둥이 되고, 강력한 공동체 정신이 그들의 삶을 이끌어 왔다. 어디를 가나 마니차가 설치되어 있고 사람들은 수시로 마니차를 돌리면서 모든 생명체가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기원하는 불보살의 땅이다. 일 년 중, 4개월 정도만 농사가 가능하고 나머지 8개월은 영하 이삼십 도의 추위가 이어지고 강우량도 거의 없는 척박한 땅이다. 열악한 환경이지만 서로 협동하며 검소하게 살아온 사람들이다. 지금은 산업화의 물결이 거세게 밀려오고 있지만, 아직도 그들의 표정은 밝고 맑고 아름다웠으며 항상 웃으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능행스님의 원력으로 보살도를 실천하는 정토마을 공동체에서는 지난 7월 8일, 10일간 일정으로 불보살의 땅, 라다크로 의료봉사 활동을 떠났다. 전국에서 자원해서 모인 39명의 봉사단원은 각자의 소임에 따라 철저한 준비와 각오를 다졌다. 의료진은 인도 의사들과 한국 의사로 구성되었고 간호사들도 분야별로 배치하였다. 의약품은 법규 내에서 영양제, 구충제, 칼슘제, 오메 가, 비타민, 파스, 한방소화제, 마스크 등 최대한 많이 한국의 의약품을 준비하였고 환자들에게 나누어 줄 다양한 생필품도 마련하였다. 그곳은 햇볕이 워낙 강한 곳이어서 선글라스를 500여 개나 준비하였다. 분야별로 관련자들이 모여서 여러 차례 사전점검도 모두 마치고, 엄청난 화물들은 각자 15kg에서 25kg까지를 나누어 담았다. 따라서 개인 소지품은 최소화했다. 라다크 사정이 열악한 곳임을 고려하여 각자 침낭과 물을 끓이는 포트까지도 준비했다. 7월 8일 인천공항에서 마주한 얼굴들은 모두가 환하고 밝았다. 자비행은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우쭐대거나 교만해서는 자비행이 될 수가 없다. 한없이 자신을 내려놓고 텅텅 비울 때 비로소 무량심이 일어나고 자비행이 꽃을 피우게 되는 것이다.
델리 공항에서 라다크행 국내선으로 갈아탄 비행기는 무려 4시간이나 늦게 출발하였지만, 인도인의 문화는 그리 대수로운 것은 아니었다. 세상의 흐름에 따라가는 오랜 그들의 삶의 태도는 무엇이나 수용하는 자세였다. 비행기는 단숨에 히말라야산맥을 넘는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온통 돌산이거나 설산이었다. 계곡 깊은 아래로 실오라기처럼 이어지는 푸른빛의 수목들은 만년설이 녹아 흐르는 물길을 따라 이어진다. 산맥을 넘은 비행기는 급격한 경사를 피해 오른쪽으로 멀리 우회해서 활주로로 접근한다. 해발 3,500m, 사람이 사는 곳으로는 대단히 높은 고도이다. 산소량은 평지보다 40% 정도가 부족한 곳이니 조금만 급히 움직여도 산소가 부족하여 맥박은 분당 100회 정도로 오르내린다. 눈길을 걷듯이 모두 서두르지 않고 조심조심 움직인다. 5분 정도 차를 타고 드디어 우리의 목적 라다크 심장재단에 도착하였다. 고산 적응을 위해 그다음 날도 휴식을 취하며 만반의 준비를 했다.
7월 11일 드디어 우리의 목적인 의료봉사활동이 시작되었다. 수백 명의 사람이 8시 이전에 이미 병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대중교통이 없는 곳이 많아서 진료를 받기 위해 2박 3일 동안 달려온 분들도 있었고 100km 거리를 새벽에 출발해서 도착한 사람들도 있었다. 진료는 질서 있게 잘 이루어졌다. 의료진 5명은 많은 환자를 진료하느라 잠시 쉴 틈도 없었고, 약제팀, 안내팀을 비롯한 6개로 구성된 팀원들도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며 진료 활동을 도왔다. 라다크 사람들은 만트라 수행이 생활의 기본이다. 오랜 수행 탓인지 모두가 환한 얼굴이 었다. 선물도 욕심내지 않고 한 가족이 한 개만 받아 갔다. 진료를 마친 사람들은 병원 마당에서 소풍 온 아이들처럼 가지고 온 음식들을 나누어 먹는다. 봉사자가 다가가면 자리도 권하고 보리빵도 권하며 친절하게 맞아준다. 그들의 천성처럼 보였다.
아무 탈 없이 모든 진료 일정을 종료하였다. 1200여 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필요한 의약품들을 처방하였다. 산부인과 진료에서는 124명이 자궁암 환자로 의심된다는 진료 결과가 나왔다. 그들에게는 인도병원에서 정밀검진을 받고 치료받도록 안내하였다. 암 환자는 조기 발견과 치료가 매우 중요하다. 가족들과 함께 건강하게 살아가길 기원하였다. 특히 이종진 원장(한의사)이 진료를 맡은 한방과는 환자가 가장 많아서 보람도 있었지만, 수고도 많았다.
범망경(梵網經)에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만약에 불자가 일체의 앓는 사람을 볼 때에는 언제나 정성껏 공양할(보살필) 것이며 부처님을 대하듯 해야 한다. 여덟 가지 복전(福田) 중에 환자를 보살피는 복전이 제1의 복전이다. 사찰이나 성읍, 광야, 산속, 도로 등에서 병자를 보고 구제하지 않으면 경구죄를 짓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픈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만큼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정토마을의 의료봉사활동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라다크는 지금은 해발 3,500m가 넘는 히말라야 산속에 위치하지만 오랜 옛날에는 바다 밑이었다고 한다. 지각판의 이동으로 인해 융기 해서 만들어진 땅이다. 몇 군데 사원을 참배하면서 지금은 세계에서 최고 높은 산맥이지만 과거에는 바닷속이었다는 사실을 눈으로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동글동글한 주먹 돌과 모래들이 쌓여서 산을 이루고 있다. 삼법인은 불교의 근본진리이다. 첫 번째가 제행무상의 진리인데 이번 봉사활동에서는 바다가 산으로 변한 것을 보면서 그 진리를 생생하게 눈으로 확인하고 가슴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봉사활동과 더불어 소중한 공부였다.
'이 약을 먹은 아기 부처님들께서는 건강회복과 기력회복으로 문수의 지혜가 충만해져서 구경에 꼭 성불하여지이다.’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에서 미소약국을 운영하시는 김연옥 님께서 어린이 영양제를 후원해 주시면서 함께 올린 발원문입니다.
“제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어떤 자격을 갖추어야 하지요?”
“해 본 경험이 없는데도 참여 할 수 있나요?”
나의 답변은 대략 이렇습니다.
“보살님 건강하신가요?”
“나눠주는 일은 잘하실 수 있으시죠?” 그러하시다면 당연히 함께하셔야지요. 건강한 육체엔 건강한 정신이 깃들어있고, 빵도 나누고 사탕도 나누고 선물도 나누고 사랑도 나누고 희망도 나누고 웃음도 나누고 그렇게 나눌 수 있다면 만사 오케이지요.
그리고 나는 한 가지를 더 여쭈어봅니다.
“제일 잘하는 건 무엇인가요?"
“보살님 나는 잘하는 게 웃는 거예요. 이런 사람도 쓸데가 있나요?”
“그럼요! 가장 필요한 분이시네요. 당첨입니다.”
힘든 여건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늘 웃을 수 있는 분, 우리 봉사 팀 안에서는 그런 에너지가 꼭 필요합니다. 그렇게 다양한 사연을 가진 39명의 의료봉사단이 꾸려졌습니다.
7월 1일, 의료봉사에 쓰일 의약품과 열악한 조건에 사시는 현지인들에게 선물로 전해질 겨울용품을 포장하는 날이다. 50여 명의 봉사자들의 손놀림은 분주하기만 하다.
대법당에서는 스님들과 봉사자들이 약 포장을, 야외천막에서는 산더미처럼 쌓인 겨울옷, 장갑, 넥워머 등이 진공 포장되어 몸무게 줄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39명의 가방에 넣어갈 15kg의 약과 선물들이 개별 포장되었다.
7월 8일, 아침 11시 인천 제1 터미널 K 카운터 앞에 정토마을 의료봉사단이 집합하였다.
들고 온 개인 가방을 펼쳐놓고 준비된 약과 선물을 채워 총 23kg를 맞추는 과정은 진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개인 짐을 최소화하고 불편함을 무릅쓰고라도 약을 더 가지고 가려는 마음은 타인을 배려하는 대자비심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 일행은 세상에서 가장 오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히말라야 3,500고지로 10시간을 날아가 민들레를 꽃 피우게 될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떠 창밖을 보면 벌써 문밖에 줄을 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2~3일씩 걸어서 치료를 받으러 온 사람들도 있다 하니 한 분, 한 분이 소중하기만 하다.
진료 과정은 이러했다. 가장 먼저는 순서대로 문진표를 작성하고 체온, 혈압, 혈당을 체크하는 검사팀을 대면해야 한다. 그렇게 검사를 받고 나면 해당 치료를 받을 과 앞에서 기다리게 된다. 진료를 받은 후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가서 약을 받게 되면 돌아가는 길에 간식과 선물이 기다리고 있다.
매일 350개의 간식 봉투를 만들어 일일이 나눠주었고, 후원에서는 식사와 간식을 준비했다. 매끼, 현지인을 포함해 약 50인 분의 식사를 담당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고산증에 좋다는 마늘을 볶아 반찬으로 내려고 후원에서 장을 봐왔는데 정말 갑갑했다. 한국에서는 6쪽 마늘도 까기가 싫어서 깐마늘을 사다 먹는 실정인데 6쪽이기는커녕 60쪽은 되는 것 같아 보였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후원에서 가지고 나와 펼쳐놓고 하나, 둘 까다 보니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 잔잔한 마늘을 다 깔 수 있었다.
봉사 마지막 날에는 김경일 단장님으로부터 국제 의료봉사증서를 전달받고 3일 동안 진행되었던 의료봉사를 마무리하였다.
39명의 정토마을 국경없는 민들레들과 함께했던 9박 10일의 여정을 곰곰이 떠올려 봅니다. 몸은 고산병으로 지치고 힘들었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에 함께한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는 일행들을 보며 참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그저 감사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한 생을 살면서 큰 추억이 될 여정이었습니다. 국경없는 민들레, 꼭 한 번은 가봐야 할 일입니다. 정말 어느 수행보다도 큰 수행이고 많은 공부 거리가 있는 공덕이 무량한 여정입니다. 우리들의 사치스러운 환경에 미안함을 느끼게 되었고 또 복된 삶을 감사하게 여기게도 되었습니 다. 늘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이길 발원하며 고산병을 감당할 정도의 건강을 지켜주신 부처님께 감사드리고 우리들의 원만 회향을 위해 출발부터 기도해주신 어른 스님들의 기도의 힘에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동행은 하지 못했지만, 물심양면으로 동참해주시고 후원해주신 분들의 덕분임을 지면을 빌어 감사함을 전합니다.
김현아 │정토마을 법인사무국 자원개발부 팀장
"몸이 아픈 이들을 돌보는 것은 붓다인 나를 돌보는 것이며 몸이 아픈 이들에게 약을 공양을 올리는 것은 나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이다." -부처님 말씀 중에서
정토마을 능행스님과 함께하는 국경없는 민들레에서 올해 11월에는 스리랑카로 다시 의료봉사를 떠납니다.
스리랑카 의료봉사는 2003년과 2017년 두차례의 쓰나미로인한 산사태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한 마타라 데니야야 지역으로 갑니다.
함께해주세요.
많은 분들의 동참은 어려운 그들에게 희망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또한 선착순 60여명의 자원봉사자를 모집합니다. 가정의학과 및 일반외과, 그리고 내과를 봐주실 수 있는 의사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으며, 한국 아유르베다(한방) 의사선생님도 2분 이상 모시고자합니다. 간호인력도 매번 부족합니다. 정토마을과 인연있는 간호사 선생님들께서도 함께해주시면 참 고맙겠습니다.
인도에 오면 마음이 숙연해 진다. 인도의 오지마을 라다크, 산과 산맥에 둘러싸여 뜨겁고 추운 마을이다. 많은 것을 소유하지 않아도 만족하며 자기가 맡은 일을 묵묵히 하며 살아가고 있다. 크게 동요하거나 남과 비교하지 않는 그들의 삶을 바라보면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며, 편안해 진다. 그들이 원한 것은 소박한 것들이다. 가족이 아프지 않고, 가족과 함께 하루 세끼를 해결하면 감사할 뿐이다. 더 편하고 더 나은 생활을 기대하지 않기에 마음이 편한 것 같다.
의료봉사를 한다고 이곳을 찾았지만, 과연 우리가 얼마만큼의 도움을 줄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신세를 질뿐이라는 미안함과 그들의 소박한 삶이 아름다울 뿐이다.
│라다크 심장재단 병원에서의 의료봉사
이른 아침 일출을 받으며 떠오르는 히말라야산맥은 인간의 오만을 나무라는 듯, 우리를 겸허하게 한다. 마치, 전체에 조명을 받는 듯한 황금빛 설산과 돌산의 조화! 누가 감히 그 앞에 토를 달겠는가?
어차피 흙이 되어 돌아갈 몸들...
영원한 어머니의 커다란 자궁과 같은 산들의 둥지 라다크. 교만할 것도, 아등바등할 것도 없는 땅.
이틀간의 여정 끝에 ‘라다크 심장재단’에 도착했다. 방 배정이 될 때까지 로비 바닥에 주저 앉아 준비해 온 선글라스 수백 개를 케이스에 넣었다. 해발 3,500여 미터의 산악지대라 자외선으로부터 눈을 보호해야 하는 주민들을 위한 선물이다.
고산증 약을 복용한 후 침대에 누워 고산증 적응을 위한 휴식을 한다. 말도 많이 하면 안되고 걷기도 천천히 우아하게 하라는 능행스님의 말씀이다.
라다크는 파키스탄과의 정전이후 항상 군인들이 상주하고 있기 때문에 병원 밖 외출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양쪽 코가 콱 막힐 정도로 날씨가 건조하고, 머리가 띵하며 심한 사람은 양 손발이 저리도록 고산 증세가 심하다. 신기한 것은 3일정도 고산증 약을 복용하고 나니 몸이 적응을 하는지 견딜 만 했다.
나는 한방 팀에 배정되었고, 다음날의 진료를 위해 몇 시간에 걸쳐 미팅을 하였다. 한방의사인 한의학박사, 의사를 보좌하는 현직 간호사분이 함께 배정되었고 간호사의 보조가 내 소임이었다. 시간을 맞춰 침을 뽑고, 부황 도구를 떼고 피를 닦아 냈으며, 파스를 붙이고 쓰담쓰담 하기까지 마음을 모아 집중해야 한다. 작은 침과 일반 침은 쉽게 뽑을 수 있었으나 한 뼘 길이의 장침은 쉽게 빠지질 않는다. 특히, 허리에 꽂힌 장침의 경우 환자가 긴장하여 힘을 주면 절대 뺄 수가 없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며 부처님의 명호가 튀어 나온다.
오전에 40명, 오후에 40명, 하루80명의 환자들에게 침술을 행하고, 아픈 부위를 치료한다. 약제 처방만 해도 10여 가지로 구미강활탕, 오적산, 도인승기탕, 인삼패독산, 보증익기탕, 청심연자탕, 평위산 등이다.
나와 한 팀이 된 룸메이트보살은 약제담당을 맡았다. 나이가 나보다 많은 보살은 안경을 쓰고 처방전대로 약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다. 베드가 5개 놓인 좁은 방안은 환자들의 열기와 냄새로 가득하다. 창문을 열고 싶어도 침 맞는 환자들이 찬 기운을 느끼면 안 된다는 의사선생님의 지시대로 열지 못한다. 그밖에도 치료부위 이외의 신체부위는 덮어 줄 것, 베개는 반드시 낮은 것을 사용할 것, 무릎을 치료할 환자는 무릎 밑을 받쳐 줄 것, 침 놓을 부위를 알코올 솜으로 닦을 것, 침을 뺄 때는 직각으로 빼고 피가 날 경우 반드시 마른 솜으로 눌러줄 것 등 상당히 엄격한 규정을 지키며 진료는 진행되었다. 복도를 가득 메운 환자가 차례대로 진료실에 들어오면 티벳 스님 2~3분이 현지 언어로 문진을 하신다. ‘식사는 했는지, 알러지는 없는지, 통증 부위가 어딘지 ...’ 그것을 한국에서 함께 간 비구니스님이 영어로 전해 듣고 진료팀에게 전달한다.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환자들의 옷을 벗기는 일이다. 추운지방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복을 두세 겹 껴입고 있다. 특히 유목민 보살들은 그 위에 두껍고 넓게 퍼지는 코트(?)까지 껴입고 긴 스카프 같은 천으로 허리를 꽁꽁 동여매고 있다. 그러한 복장을 해제시키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원활한 진료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일!
언어가 안 통하니 벗는 제스처를 하면서 연신 ‘Open, open!’을 외칠 수밖에 없다. 치료를 마친 이에게는 어깨를 어루만지면서 “줄레, 줄레~”하면, 고맙다는 표현을 하며 약제부 쪽으로 이동한다. 챠트에 기재된 처방 외에 스님들과 연로하신 분들에게는 오메가 쓰리 3개월분과 비타민제가 추가 되었다. 무릎과 발목이 아픈 사람들에게는 파스 대신 바르는 맨소래담 한 병이 주어졌다. 나와 약제부 보살이 짜고 하는 배려였지만 의사선생님께서는 모르는 척 눈 감아 주셨다. 첫날 약재준비부터 시작하여 3일 동안 204명의 환자를 치료하였고, 점심식사도 하는둥 마는둥 밀린 환자들을 치료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루일과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니 급하게 돌아치느라 침대 모서리에 부딪친 곳이 멍으로 얼룩얼룩하다. 서로의 허리에 파스를 붙여주며 알 수 없는 행복감에 미소 짓는다.
│‘레’ 게스트하우스에서의 휴식 – 성지(리종. 헤미스. 틱세곰파)순례
‘환상의 팀웍’이라는 꼬리표 덕분에 스님들이 계시는 2층에 방을 배정 받았다. 온 몸이 무거운 상태에서 한 층을 덜 올라간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병원에서도 하얀 시트로 싼 목화 솜 이불을 배정 받았었는데, 숙소로 옮긴 후에도 룸메이트와 함께 푹신한 목화솜 이불이 덮인 더블 침대에서 꿈같은 잠을 잤다. 다른 방은 싱글 침대에 담요가 덮여있었고, 거사들은 가지고 간 침낭을 이용하여 취침에 들곤 했다.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며 너무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6시 산책길에 숙소를 못찾고 헤맬 때 출근하던 군인아저씨가 숙소 명함을 보고 게스트하우스 입구까지 데려다 주었고, 버스에 늦게 승차한 나를 위해 비구니스님이 자리를 양보해 주기도 하셨다. 9박 10일의 여정동안 보이지 않는 힘이 항상 보호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가짐으로 임할 수 있었다.
우리는 제일 먼저 리종 린포체를 친견하였다. 리종 린포체는 1928년 라다크 마토왕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셀 수 없이 많은 밀교의 기도의식과 안거, 무문관 등을 성만하셨다.
스님은 겔룩파의 수장이시며 달라이 라마존자의 스승이시기도 하다. 린포체께서는 특별히 제주불자들을 위해 친필사인을 해주셨다.
‘수행의 낙원’이라고 불리는 리종 곰파는 레에서 70Km서쪽 리종 마을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는 엄격한 규율과 규범을 지키는데, 아플 때 외에는 사원의 외출이 금지되어 있고, 침대와 침구의 사용이 불가하다. 일출에서 일몰 때까지 물을 떠 올 때를 제외하고는 자신들의 방을 떠나지 않는다. 소유할 수 있는 것은 바늘뿐이며 방안에서 불을 켜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여자형제나 여자손님이 손댄 물건과도 접촉이 금지되며, 여자는 절대 사원에서 머물지 못한다. 이곳에서는 여성 수행자를 비구니 스님이 아닌 ‘촘마’라고 부른다. 이 여성 수행자들은 사원에서 수행생활을 하지 못하고, 근처 ‘출리찬수도원’에서 수행하고 있다. 티벳 <사자의 서>를 쓴 파드마 삼바바(구루 린포체)-Padma sam bhava(Guru Rinpoche)도 리종 곰파에서 수행하였으며, 라다크의 왕과 왕비도 이곳을 방문하여 후원하였다고 한다.
리종 린포체의 법문을 듣기로 예정되어 있었기에 잔뜩 기대를 했지만 워낙 연로 하셔서 법문은 힘들다고 하였다. 짜이를 한 잔씩 대접 받으며 차담을 나눈 후, 스님께서 하사하시는 생기환(봉숭아 씨앗처럼 생긴 환약)을 받고 돌아 나와야 했다.
다음으로 간곳이 헤미스 곰파이다. 이곳은 주변에 식사할 곳이 없기 때문에 게스트하우스에서 주먹밥을 한 개씩 받아 가지고 갔다. ‘곰파 중의 곰파’라 불리는 헤미스 곰파는 라다크 곰파 중에서 최대의 규모라고 했다. 레에서 50Km의 가까운 거리이기 때문에 그만큼 찾는 이들도 많다. ‘고독한 은둔자’라는 뜻의 곰파는 보통 산중턱이나 산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찾아오는 사람도 많지 않고, 찾아오기도 쉽지 않은 곳일수록 성취도 높아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미스 곰파는 산 아래 자리 잡고 있어 곰파 입구에 다다를 때까지도 그 모습을 볼 수가 없다. 헤미스 곰파에는 높이 12m의 파드마 삼바바 상이 봉안되어 있고, 지하에는 왕실에서 조성하고 보시한 순금 장신구 등 각종 공예품과 탕카들이 소장되어 있다. 헤미스 곰파가 유명한 또 하나의 이유는 파드마 삼바바의 탄생일을 기념해 열리는 축제 때문이라고 한다. 이 축제는 라다크지역 여러 곰파의 축제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이때에는 스님들이 가면을 쓰고 ‘참Cham’이라는 춤을 추는데, 그 내용은 선신(善神)이 악신(惡神)을 무찌르는 내용으로 불교가 사람들의 마음속의 악을 무찔러 선이 승리했음을 상징한다. 특히, 이때에는 평소 볼 수 없던 대형 탕카가 공개된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하는 이 탕카는 헤미스 곰파의 건물을 전부 뒤덮을 만큼 거대하며 탕카 곳곳에 진주와 보석 등이 장식되어 있다고 한다. 때문에 이것을 보기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6~7월이 되면 이곳으로 몰려 들고 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틱세 곰파에 들렸는데, 레에서 19Km떨어진 겔룩파의 곰파이다. 틱세 곰파는 라다크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곰파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데,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버티고 있는 곰파의 모습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붉은색과 황금색 건물의 곰파를 중심으로 아래를 향해 줄지어선 하얀 집들이 마치 곰파를 호위하듯 떠 바치고 있는 느낌이다.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Potala궁과 비슷하여 ‘작은 포탈라’라고도 불리는 틱세 곰파는 15세기에 건축되어진 것으로 한때는 군사요새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 이후 수백 년에 걸쳐 법당과 요사체들이 증축 되면서 지금의 규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이곳 2층에는 화려한 보관으로 장식된 미륵부처님의 상호가 법당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가부좌로 앉아계신 부처님의 하체는 1층에 있고, 건물을 관통하여 상체만 2층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1층은 출입을 금하여 들어갈 수가 없었다. 높이가 14m이고, 미간 사이의 백호가 소라 껍데기로 되어 있으며, 커다란 장신구와 세밀한 그림을 그려 넣은 보관을 쓰신 모습이 서글서글하고 시원한 존안이다.
│성지(라마유르, 알치 곰파)순례, 그리고 휴식
아침6시, 일정이 시작되기 전에 산책을 나선다. 9시에 숙소에서 출발인데, 시장구경을 하다보니 시간이 임박했다. 숙소까지는 차로 20분 거리이다. 로터리에 가면 택시가 대기되어 있다고 하나 워낙 오던 길을 되돌아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진행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손을 들어 세운 차량은 야채를 배달하는 차다. 게스트하우스 명함을 보여주니 알았다고 하여 타려고하니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한다. 마음이 바쁘던 차에 아파트에서 나오는 차가 있어 택시인줄 알고 세우니 출근하는 군인장교의 차였다. 명함을 보여주고 급하다고 하니 ‘OK!’ 타라고 한다. 모르는 길을 헤매며 숙소 앞에 도착하여 100루피 짜리 새 돈을 내미니 ‘NO!’라며 사양한다. 고마운 마음에 몸에 지니고 있던 악세사리와 펜을 건네고 감사하다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일행들이 식사를 마치고 출발하기 직전이어서 급히 식당에서 토스트와 삶은 계란을 챙겨 버스에 올랐다.
오늘 일정은 어제와는 다른 반대방향에 있는 라마유르 곰파와 알치 곰파다. 레에서 3시간을 걸쳐 가야하기 때문에 버스의 앞자리에 앉았다. 버스는 인더스 강의 굽이치는 물결을 따라 계곡을 향해 달린다. 인더스 강의 강줄기가 한쪽은 파키스탄으로 흐르고, 다른 한쪽은 중국으로 흘러 들어간다. 중간 중간 넓은 바위 위에는 대포가 설치 되어있고, 군인들이 상주하는 모습이 보인다. 옆에 앉은 티벳 스님이 사진을 보여 주시며 겨울에는 이 강이 정말 맑고 깨끗했다고 설명해 주신다.
라마유르 곰파는 레에서 125Km 떨어진 해발 3510M의 고산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라마유르로 향하는 ‘잘레비Jalebi’라는 고갯길은 우리나라의 한계령처럼 구불구불하다. 마침내 도착한 ‘달의 계곡’이라는 곳에 라마유르 곰파가 자리하고 있다. 티벳 불교전승에 의하면 붇다 생존 시에는 맑은 호수였는데, ‘먼 미래에는 호수가 사라지고 절이 들어 설 것이다’고 한 아라한이 예언하였다고 한다.
라마유르 곰파는 10세기경 라다크 왕의 명령으로 린첸 잔포Rinchen Zanpo스님이 창건했다. 그 후 16세기에 이르러 나병에 걸린 라다크 왕이 스님들의 도움으로 병을 치료하고 고마움의 뜻으로 곰파를 스님들에게 보시했다고 한다. 왕은 사원을 보시하면서 세금을 면제 해 주고 곰파 주변을 성역화 하여 범죄자라 할지라도 곰파 안에서는 절대 잡아 갈 수 없도록 했다고 한다. 때문에 라다크 사람들은 지금도 이곳을 ‘자유의 장소’라고 부른다. 곰파를 둘러싼 구석구석에는 마니차가 설치되어 있어서 계속하여 ‘옴 마니 반메훔’을 염송하며 거닐게 된다.
전성기 때 이곳 라마유르 곰파에는 400여명의 스님들이 생활 했지만 지금은 20~30여명의 스님들만이 기거하고 있다. 그러나 3월과 7월경에는 100여명이 넘는 스님들이 모여 함께 기도하며 가면 춤을 추는 축제가 열린다. 3월은 지루한 겨울의 끝자락이고, 7월은 짧은 여름의 한복판이다. 혹독한 자연환경을 이겨내며 묵묵히 겨울을 보내고 있는 라다키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리고 짧은 여름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며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레에서 스리나가르 쪽으로 70Km떨어진 오지마을이다. 인더스 강변과 맞닿아 있는 이곳에 10세기 말 린첸 잔포 스님이 건립한 알치 곰파가 숨어 있다. 이곳은 법당 6개중 대웅전 격인 두캉과 숨첵, 만주리라캉, 로트사바라캉 만을 개방하고 있다. 좁은 실내에는 5.18m의 관세음보살 입상이 한 면을 높이 차지하고 있었고, 맞은편에 문수보살 입상, 그 곁에 미륵불 입상이 모셔져 있다. 우리들의 개념과는 달리 법당이라고 하지만 불상들이 모셔진 방이었다. 그 옆의 법당에 가서야 우리는 간단한 법회를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처음 보게 된 건물은 숨첵이라는 목조기둥의 3층 건물로 그리스 신전의 기둥처럼 섬세한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다. 특히, 건물 입구 위에 삼각 틀에 조각 된 문양들은 법당의 불상보다 훨씬 더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린첸 잔포 스님은 인도와 카슈미르의 17년간 유학파로 티벳에 돌아와 왕의 후원을 받아 많은 경전을 번역하고, 카슈미르 예술가 32명을 초청해 이 사원을 지었다고 한다. 건물뿐만 아니라 내부 벽면에도 천문도와 불보살상 등 각종 신장상 등이 그림으로 표현되어있고, 입상의 법의에 그려진 그림들 역시 그 섬세함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린첸 잔포 스님은 알치 곰파 외에도 라다크와 서티벳에 108개의 사원을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치 곰파의 벽화들은 카슈미르와 간다라 미술의 절묘한 만남으로 아잔타 석굴 벽화와도 종종 비교되고 있다. 대웅전격인 두캉은 알치 곰파의 보석 격으로 알치 곰파 중 그 규모가 가장 크다. 목조불상인 비로자나불(Vairocana)을 모시고 있는데, 이것은 1000년동안 살아남은 현란한 세부묘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벽화 6개중 만다라(Mandara)와 ‘왕과 왕비’라는 제목의 벽화도 있다. 라다크의 다른 곰파들과는 달리 알치 곰파는 잔스카르 지역 오지의 평지에 위치하여 이슬람교도들의 침입 때도 눈에 띄지 않고 무사히 지켜졌다고 한다.
안타까운 것은 흙벽으로 이루어진 건물의 벽들이 추운 겨울에는 꽁꽁 얼었다가 여름 한철 해동되니 자연스레 금이 가고 약해진다는 것이다. 한 쪽 벽의 벽화가 유실되어 보수를 하여 비슷하게 그림을 덧 씌워 놓은 것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만약 라다크를 방문하게 된다면 최우선으로 가 보아야 할 천년고찰이라 생각 된다. 4개의 법당을 모두 둘러보고 사진을 찍지 못한 아쉬움에 그림엽서를 사들고 나선다. 마당의 낮은 담장 너머로 멀리 작은 수력 발전소가 보인다. 히말라야 산맥에서 눈이 녹아내리는 물을 이용하여 전기를 생산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인도의 수도인 델리보다 물 사정이 넉넉했다는 생각이 든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