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목적은 매 순간 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각자 자신의 삶이 그렇게 된 데 대한

모든 책임이 본인에게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매 순간 자신의 삶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위치에 있다면

자신의 생각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는 점을 명심하세요.

문제는 사람들이나 장소나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생각에 있습니다.

 

- 이하레 아카라 휴렌 -

 

 

나는 누구일까?

내가 있기는 한가?

여기 있는 이것은 그럼 누구야?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

내가 좀 더 나은 집에서 태어났다면 달랐을까?

내가 좀 더 배웠으면 더 나았을까?

나는 왜 저들만큼 못하는 걸까?

내가 뭘 하면 잘할 수 있을까?

나의 전부를 이해해주는 단 한 사람, 엄마도 이젠 세상에 없어.

땅 위로 솟은 느낌이야. 붕 떴어.

나는 누구지?

내가 왜 여기에 있을까?

내가 여기에 있기는 한 건가?

그럼 여기 있는 이것은 누구야?

누가 제발 좀 속 시원히 가르쳐 줬으면 좋겠어…….

스님 좀 가르쳐 줘요…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요.

 

이것이 CPE를 만나기 전 그리고 만나고부터 내 안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경험의 과정들이다. 가끔은 새로 태어난 것 같기도 하고 가끔은 가슴 안에 있었던 미쳐 몰랐던 나를 흔들어 깨운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나를 성장시킨 것 같기도 하다. 과거의 어느 시점에 머물러 만들어진 요지 부동이었던 나의 관점과 신념들을 대면하고 다시 관점을 바꾸고 새로운 신념으로 대체하면서 오감으로 모든 것들에 대해 짜릿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고 지난날의 나에 대해 자책보다는 연민의 눈으로 바라 보게 될 줄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나 자신을 끊임없이 용기를 갖고 바라 볼 수 있게 지지와 박수를 주신 슈퍼바이져 능행스님…

스님께선 때로는 매서운 독수리처럼, 때로는 엄격하거나 냉정한 선생님처럼, 때로는 장난끼 넘치는 친구처럼, 때로는 내면의 아이를 자랄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지지해주는 엄마처럼, 안전한 자리를 제공해줌으로써 내면의 아이가 “나는 불안했었구나.”라는 사실을 인지하게끔 이끌어 주셨다.

슈퍼바이져와 함께한 시간을 이미지로 표현하자면 호박을 넝쿨째 날려주신 날도 있었고, 함께 대화를 하다 보면 마치 보물창고에 들어 갔다 나온 듯한 날도 있었다. 그리고 어떨땐 쪄 죽을 듯이 숨이 턱턱 막히고 오도 가도 못하게 막아대는 이미지도 연상이 된다. 그룹원들 하나하나의 거울이 되어 삶에 걸림이 되는 것을 스스로 풀어 나갈 수 있게 열정을 가지고 늦은 저녁까지 기다려 주심에 합장 삼배를 드린다. 그리고 화끈하게 지지해주고 또 다른 나를 즉석에서 경험하게 하고 공부하게 도와준 그룹원들에게 마음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고마움을 전해 본다.

(재단법인 정토사관자재회 2010년 겨울호)

 

이명현 | CPE 2010년 여름학기 수료생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CPE센터문의 : 010-7109-7600

┃프로그램 소개

①기본과정 (16주, 320시간 이상)

②전문가 과정 (1년, 800시간 이상)

③지도자 과정 (1년, 800시간 이상)

*봄학기 : 3~6월

*가을학기 : 9~12월

 

개인성장을 위한 나의 목표는 일어나는 분노를 즉시 알아차리고 그것을 생활 속에서 완화시키는 것으로, 매일 10회 이상 거울을 보고 호탕하게 웃으며, 항상 눈을 크게 뜨고 미소를 지으며,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즉각 알아차리며, 우리 각자의 몸과 마음이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었다.

CPE 성찰 과정을 통해 성장과 변화를 얻기 위해 교육기간 동안 주로 운전을 하면서 의식적으로 크게 웃는 연습을 했는데, 처음에는 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으며 내가 듣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어색했다. “웃으면 좋아진다.”는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지만 개인 성장을 위한 첫 번째 목표로 웃는 것을 정했으므로 웃어서 좋아질 것으로 믿기로 했다. 처음에는 일부러 웃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웃음을 만들기 위해 주로 출퇴근 하면서 또는 마하보디교육원을 왔다 갔다 하면서 운전 중에 다양한 종류의 소리를 내면서 또 고함을 지르면서 크게 웃으려고 노력했다. 왼손으로 핸들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허벅지나 운전대 선반을 치면서 흥을 돋우었다. 또 아침저녁으로 샤워를 하면서 소리를 좀 낮추어 웃는 연습을 했으며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거울을 보면서 소리를 내지 않고 입을 활짝 벌리어 웃거나 미소를 짓는 연습을 했다. CPE교육이 끝나가는 지금, 많은 사람들이 나의 얼굴이 매우 밝아졌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고 나 자신 얼굴을 직접 보지 않고도 어느 강도의 표정으로 웃고 있는가를 느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아침에 공원을 산책 중에도 자연스럽게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걸어가는 자신을 보면서 흐뭇해하기도 하며, 집에서 염불을 하거나 참선을 하거나 절을 할 때마다 벽지의 무늬를 보면서 자주 미소를 띤다. 벽지 속의 그림이 연꽃과 흡사하기도 하고 손발이 아주 많은 벌레와 같기도 한데 전체 모습은 눈과 입을 크게 벌리고 활짝 웃는 것 같은 형상으로 그것을 볼 때 마다 나의 입은 벌어지고 기분이 매우 좋다. 먼저 웃어야 뒤에 웃을 일이 생기고 또한 마음이 편해진다는 항간의 이야기를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인간관계에서 변한 것은 아내와의 사이에서 나도 모르게 화를 내거나 내 주장을 세우는 일이 없어진 것 같다. 오히려 아내가 인상을 써도 아무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음을 보고 있다. 또 내가 미소 띤 얼굴을 자주하니 아내도 마음이 편해졌는지 나에게 가까이 오는 횟수가 늘고 있다. 나의 의견을 낼 때도 명령하는 식이 아닌 상대방의 의견을 물어보는 방식으로 조금 바뀌었다. 예를 들면, 전에는 ‘본가에 먼저 가라. 내가 나중에 갈게.’ 였는데 요즘은 ‘어쩔래? 갈래?’ 하고 물었을 때 ‘오늘은 집에 있고 싶다.’고 하면 ‘그렇게 하라.’는 식이다.

한편, 오랜 기간(약 10년) 매우 불편하게 지내던 같은과 동료 교수에게 일주일 동안 모두 여섯 번을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하다가 결국에는 전화를 걸어 “저는 지난 일을 다 흘러 보내고 서로 편안하게 지내고 싶은데 교수님의 의사는 어떠하십니까?” 하고 물어 지금은 서로 편하게 잘 지내고 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이전보다는 훨씬 많이(?) 형성되었다. 예를 들면, 2학기 교육대학원 수업이 있는 첫날, 학생들이 모두 책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1학기의 연속이고 또 나의 평상시의 강의 방침을 알고 있는 학생들의 이러한 행동은 일종의 계획된 집단 반항의 표시이다. 학생들의 이런 행동에 대해 CPE 교육을 받기 전과는 달리 나의 표정은 웃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왜 책을 준비하지 않았느냐?” 하는 나의 질문에 학생들은 긴장된 얼굴을 하면서도 가벼운 미소를 띠고 말이 없다. “좋다. 그렇다면 수업을 하는 대신에 1학기에 나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이야기를 들어보자.” 하고 제안을 하였다. 내가 제안을 하자마자 6명의 학생이 마음의 상처를 받은 사실을 적나라하게 이야기를 했다.

 

여학생 1 : 제가 문제를 풀고 있는데 교수님께서 바로 제 뒤에서 “이기 바보가?” 하고 말씀 하셨어요. 마음이 좀 그랬어요.

나의 즉답 : 아이고 그랬나? 내가 지금 사과할게. 미안하다.

남학생 1 : 저는 4학년 총대할 때 한 번, 그리고 교수님 연구실에 문제 푼 것을 질문하러 갔을 때 한 번, 칠판에 문제를 잘못 풀었을 때 한 번, 모두 세 번에 걸쳐 교수님께서 고함을 치시고 꾸중을 심하게 하셔서 가슴이 많이 아팠어요.

나의 답 : 어짜노? 내가 진짜 잘못했다. 미안하다. 그런데 너 지금은 장족의 발전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제?

남학생 1 : (웃으면서) 예. 그것은 그렇습니다. 사실 꾸중을 들은 후에야 열심히 했습니다.

여학생 2 : 저희들 1학기에 수업하는 날 거의 밥을 먹지 못했어요. 긴장이 되어서……. 하도 고함을 치시고 숙제도 많이 내시고 꾸중도 많이 하셔서…….

 

나로 인해 상처를 받은 모든 학생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빌었다. 마지막에는 서로 함께 웃으면서 마음의 상처를 다 씻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사실, 고의로 고함을 지르고 꾸중 일변도의 수업을 하는 이유는 있다. 임용고사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그룹을 지어서 수학문제를 풀고 발표를 하여 점검을 받아야만 학습의 효율을 올릴 수 있기 때문에 학습을 느슨하게 하는 것은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 어렵다. 물론 부드럽게 하면서 학습 효과를 올릴 수 있는 교수법이 제일 좋겠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서 그것은 거의 불가능했었다. 하지만 이번 CPE교육을 통해서 지혜로운 방법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다고 생각한다. 부드럽게 웃으면서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고도 학생들을 격려하면서 최대한의 학 습효과를 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스스로 기대가 된다.

CPE그룹 안에서나 임상의 현장에서 또는 공동체 안에서 서운한 감정이나 분노가 일어나지 않았고, 미소 뛴 얼굴이 자연스럽게 유지되었지만,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그들의 비언어적 행동을 관찰하고 역동성을 읽는 것에는 소홀히 하였다. 특히 자식들에 대한 나의 욕심이 제거되지 않아 나의 삼업(三業)을 미리 보고 방지하는 능력은 만족할 만큼 발달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아직 딸아이에게는 욕심과 절망이 교차해서 그런지 맑은 미소가 나오지 않는다. 그 애에게 자연스럽게 편안한 웃음이 나오는 그날이 나의 목표가 완성되는 날일 것 같다. 또한 아직까지도 그룹원들의 비언어적 행동을 관찰하여 그들의 역동성을 읽고 표현하는 것에 매우 서툴다. 어떤 물건이나 혹은 상황[色]에 대해 서운한 감정이나 분노[受]가 일 어나면 그것을 즉시 알아차리고[싸띠, sati] 생각[想]이 아닌 감정[受, 느 낌]을 솔직하게 부드럽게 그리고 이성적으로 표현하는 습관을 몸에 익히려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지금부터 그 점을 실천하는 데 최선을 다하여 관찰력과 표현력을 상승시킬 것이다.(2009. CPE 여름학기 참여후기)

 

이병수|경성대학교 수학과 교수

도감스님

올해는 텃밭과 함께 씨름하고 땀을 흘리며 산 획기적인 한해였다. 농사짓는 것에 익숙지 못한 만큼 에피소드도 많았다. 특히 나를 만나 너무 고생스러웠을 무시(무)의 삶을 생각하니 비죽이 웃음이 난다. 하기야 그도 내 생각이다. 내가 고생스러웠고 간이 조마조마했고 부끄러워서 쥐구멍에 숨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김장을 하려보니 무시가 얼마나 잘되었는지 부끄러웠던 일은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만 북태산만큼 커진 때문이다.

 

지난여름에 겨울 김장 준비로 무씨를 젊은 스님들과 함께 뿌렸다. 삼십 센티 간격으로 무씨를 두서너 개씩 넣고 새싹이 나길 아무리 기다려도 새싹이 올라오질 않았다. 나는 씨를 너무 깊이 넣었거나 아니면, 너무 얕게 넣어서 새가 다 물어간 것 같다면서 스님들과 함께 앉아서 걱정을 하였다. 그래서 다시 씨를 뿌리기로 마음먹고 있는데, 마침 어떤 분이 오시더니 “비닐을 씌우고 씨를 뿌려야 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젊은 스님들을 데리고 나가서 비닐을 씌우고 구멍을 뚫어 씨를 넣었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누군가 오더니 “무밭에 비닐 씌운 것은 생전 처음 봤다.”고 하면서 “북(흙을 북돋움)은 어떻게 주려고 하느냐?”고 물으며 허허 웃는 것이 아닌가. 저녁에 다시 젊은 스님들을 데리고 나가서 비닐을 벗기느라 그날은 기운이 다 빠져버렸다. 부끄러워서 “무” 소리만 들어도 경기(驚氣)를 할 지경이었다. 손님이 와도 밭에 갈까봐 걱정이 태산이었다. 밭에서 일을 하다가도 손님이 오는 소리만 나면 밭에 올까 무서워 큰소리로 “안녕하세요? 거기 계세요. 내 나갈 테니…….” 하고는 정신없이 밭에서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할 짓이 아니다 싶어서 곰곰이 생각을 하였다. 무를 어떻게든 크게 만들어서 밭이 시퍼렇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 나의 화두였다.

결국 고민 끝에 무를 모종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또 젊은 스님들을 데리고 나가서 삼십 센티 간격으로 퍼져 있는 사이사이에 무를 모종해서 심었다. 심고 나니 푸릇푸릇한 것이 풍성해 보여서 왠지 안심이 되었다. 그랬는데, 이번엔 누군가가, “스님, 무는 모종하는 게 아니래요. 모종하면 죽는 다네요.”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절망했고 이젠 정말로 무 농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밭에 가지 않기만을 부처님 전에 기도했다. 이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원장스님께서 가끔 무밭에 물을 주시며 나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소가 뒷걸음질 치다 뭐를 밟는다더니……. 공을 들인 것이 없는데 무가 저 혼자서 그냥 쑥 커버린 것이었다. 원장스님이 밭에 갔다 오시더니 깜짝 놀라며 나를 찾으셨다. 단지 삼십 센티 간격을 준 것밖에 없는데 무가 사람 넓적다리보다 더 크게 자라 있었다. 그렇게 감사하고 행복할 수가 없었다.

“무시야! 잘 자라줘서 고맙다."

 

그렇게 잘 자라준 무를 뽑아서 크기별로 분류해 놓았다. 넓적다리만한 것은 저장도 해놓고 오그락지(무말랭이)도 만들 것이다. 그리고 중간치는 동치미를 담으려고 한다. 크기가 얼마나 적당한지 동치미에 맞춤형 무시가 되었다. 그리고 제일 작은 것은 다싯물 내는 용으로 쓰려고 금강지 보살님과 의논 중이다.

“스님, 시장에 가보니 우리 무시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디더.”

금강지 보살의 말에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 같았다.

“무시야! 잘 자라줘서 정말 고맙다."

(2008. 겨울 정토마을 계간지)

 

도운 │정토마을 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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