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이었다. 네팔지진으로 히말라야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작은 진료소가 무너져서 주변 지역 6개면 주민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연락이 왔었다. 소식을 들은 그 길로 정토마을 사무국장님과 종무 팀장을 데리고 네팔로 날아갔고, 그때 정토마을에서 무너진 진료소 복구비를 지원한 인연이 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차츰 잊어가던 중, 올봄에 진료소 운영비 마련을 위해 빵 만드는 시설을 마련하신다 하여 시설비를 지원해드렸었다. 그리고 4월쯤인가 페이스북을 통해 진료소를 운영하는 티벳 스님이 교통사고로 많이 다쳐서 입원 중이라는 소식을 접했지만, 딱히 깊이 사정을 알아볼 처지가 못 되어서 차츰 좋아지고 있다는 소식으로만 대신했었다.

 

그리고 지난 10월 어느 날, 때아닌 비가 언양 간월산에 억수같이 쏟아졌다. 며칠 내내 내린 비로 인해 기온이 많이 떨어진 어느 날, 네팔에서 티벳 비구스님 한 분이 오셨다. 네팔 히말라야 산 중턱에서 진료소를 운영하는 그 비구스님이셨다.

건강이 많이 걱정되었는데 만나 뵈니 반가운 마음이 먼저 일어났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는지 당황스럽고 놀라웠다.

 

영어를 하는 정토마을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왕복 8시간 거리의 도시로 약을 사러 갔다가 벼랑에 굴러떨어져서 복부에 구멍이 나고, 오른팔과 손을 심하게 다쳐 사용하지 못하고, 두통이 심하다 하셨다.

사실상 진료소 운영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정토마을에 오신 날부터 나는 우리 자재요양병원에서 침 치료, 물리치료, 약물치료 등을 제공하면서 스님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기도했다. 음식도 잘 드시게 하고, 따스한 옷도 마련해드리면서 스님을 돌보기 시작했다. 여권 비자 기간도 1개월 연장하여 정토마을에 조금 더 머무실 수 있도록 하였다.

 

스님과 나는 부처님 사리각에서 함께 기도했다. 나는 한국어로, 스님은 네팔어로...

그날 밤에도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아픈 몸을 구부리고 내 곁에 앉아 경전을 독송하는 39살 비구스님 모습에서 나는 나의 39살을 보았다. 죽어가는 암 환자들과 함께 천지도 모르고 살던 그때, 너무나 외롭고 막막했으며 암담했던 그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면서 눈물이 났다.

나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스님이 진료소를 운영하지 않으면 네팔 그 산속에 살는 3만 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아플 때 어떻게 하느냐고, 힘을 내셔야 한다고...

자재요양병원 문채경 선생님의 통역을 도움받아 밤이 깊도록 법당에 앉아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어가면서 나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드렸다.

산을 넘고 보니 또다시 바다였고, 바다를 건넜다 싶어지면 어느새 또 다른 길 없는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절대 쉽지 않은 길, 누구나 갈 수 있을지언정 아무나 갈 수는 없는 길임을 말했다.

 

스님은 다친 팔과 손, 심한 두통은 차츰 좋아져 갔지만, 그동안 네팔에서는 언제 오시는지, 진료소 문은 언제 여시는지, 스님을 찾는 전화가 시간이 갈수록 많아져 갔다.

 

12월 7일, 스님은 네팔로 가는 비행기표를 샀다.

나는 스님에게로 마음이 계속 쓰였다. 병원이 다시 운영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나는 스리랑카 의료봉사를 떠났고, 내가 의료봉사를 다녀올 동안 스님은 부처님 진신사리각에서 혼자 기도를 이어가셨다.

 

12월 6일, 정토마을 종무소에서 네팔스님 가방싸기 운력을 하였다. 아기들 옷과 사탕, 연고, 회충약, 파스, 라면, 커피, 아동 영양제 등등... 그리고 정토마을 국경없는 민들레에서 모금된 1천만 원과, 정토마을 직원 두 분이 마음 내어주신 2천만 원을 가지고 스님은 용기를 내서 진료소 운영을 다시 해보겠다며 네팔 산골 진료소로 돌아가셨다.

대형가방 세 개를 빌려 가면서, 내년에 또 오시겠다며 활짝 웃는 스님의 모습에 나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가슴은 또 왜 이리 시린지 모르겠다.

발덴라마 따시델레 기도하리다.

 

산골진료소 지원협약 체결 (발덴라마 따시델레 스님과 능행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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