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는 노소가 따로 있지 않다.
날짜가 한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차별도 없다.

현재 지구상에는 약 65억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이 함께 있음을 자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죽음의 주인공이 나임을 인식하며, 삶 속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오늘날 죽음의 원인 중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암이다. 암 투병 중에는 많은 돈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평상시에 보험을 포함하여 많은 돈을 저축하는 이유 중에는 병이 나면 쓰기 위한 것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정작 죽음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를 할까?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요소

 

심해지는 빈부의 격차
우리의 생활수준은 몇 년 전만 해도 몇 개의 계층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 격차가 더욱 심해져서 극부와 극빈의 상태로 나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빈부의 격차는 과도한 경쟁 심리를 유발시키고, 우리의 마음에서 풍요로움을 빼앗아가고 있다. 이에 따라 정신은 더욱 황폐해지고 감정은 점점 메말라가고 있다. 더구나 불안한 현실은 사람들에게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마음 상태를 갖게 하고 있으며, 점점 더 돈에 의존하게 한다. 심지어는 자식도 믿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극도의 경쟁 심리와 그에 따른 압박감, 불신과 불안은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바쁠수록 수명이 단축된다
현대인들은 정말 바쁘게 살아간다.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러나 정작 왜 바쁜지는 모르는 채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정말 바쁜 것이 아니고, 마음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외부의 경계에 끄들리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왜 바쁜지도 모른 채, 정신없이 살다보면 어느새 죽음이 눈앞에 와 있다. 마음이 바쁘고 불안해서 자신을 혹사시키고 괴롭히면서 몰아치다 보면, 자살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빨리 죽을 수도 있다.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은 육체적인 질병뿐만이 아니라, 바쁜 마음 때문에 몸과 마음의 균형이 깨지는 것도 큰 몫을 차지한다. 

죽음에 도달하는 지름길은 욕망과 집착
욕망이란 끝없이 얻으려 하고 움켜쥐려고 하는 마음이다. 이러한 욕망이 적당할 때에는 우리의 삶을 발전시키는 방편이 되기도 하지만, 지나칠 때에는 우리의 삶을 망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욕망을 잘 조절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활기차고 풍요로울 수 있을 것이다.
집착이란 한번 움켜잡으면 놓지 않으려 하는 마음이다. 좋은 것은 좋기 때문에 놓치지 않으려고 움켜잡을 것이고, 싫은것은 그것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을 움켜 잡을 것이다. 이러한 욕망과 집착을 갈구하는 마음의 강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의 몸은 화장할 필요도 없이 스스로 타죽고 만다.
IMF의 경제위기를 넘기고 난 몇 년 뒤에 우리나라에는 암환자가 급증을 했었다. 이런 현상은 경제적인 위기상황에서 겪은 마음의 고통과 스트레스가 육체의 질병을 유발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통해 우리는 올해의 경제 위기가 2, 3년 뒤 암환자의 급증을 가져올 거란 예측을 할 수 있다. 즉 마음의 고통이 몸의 질병을 가져오는 것이다. 지금의 사회현상은 가까운 미래에 나타날 현상을 보여주는 셈이다. 이럴 때 우리는 마음을 어떻게 내야 할 것인가?

 

내가 원하는 대로 죽기 위해 필요한 요소

 

돈을 운용하는 지혜
우리나라는 아직은 혈연을 중요시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사랑 아니면 돈 때문에 병이 드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죽음은 비참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이 맑을 때 돈을 제대로 운용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우린 평생 돈을 벌어서 저축을 하기도 하고, 많은 보험을 들기도 한다. 그 이유는 늙어서 병이라도 들면 자식들에게 신세 지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돈에 모든 것을 의지하며 움켜쥐고 놓을 줄을 모른다. 그러나 병이 들면 내 맘대로 움직일 수가 없어 제대로 치료도 할 수 없게 되며, 중단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된다. 거기에 보험금 마저도 보호자인 자식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돈은 언제 어떻게 없어지는지도 모르게 없어지고 남는 것은 질병과 외로움, 서러움과 원망, 죽음뿐이다. 그리고 죽은 뒤에는 자식들간의 의리마저도 끊어놓게 된다. 이렇게 봤을 때 돈은 가족과 나를 망치는 주범인 셈이다. 돈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인간성과 윤리마저도 상실하게 한다. 돈은 휘발유와 같다. 휘발유는 불이 나게도 하지만 자동차를 움직이게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 돈에 대한 정치를 잘 해야 하며, 적절하게 운용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당신의 삶, 죽음이 말한다
“죽을 때 보자.” 
이 말은 죽음이란 사건은 우리의 삶을 그대로 재판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즉 죽은 뒤에 염라대왕 앞에 가서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가 염라대왕인 것이며, 죽어가는 과정에서 현상으로 드러난다는 말이다. 
남을 미워하고 원망하면 그 미워하는 과보로 인해 죽을 때 깨끗한 눈으로 죽을 수가 없다. 그리고 남을 비난하고 욕하면, 죽음이 오기 전에 혓바닥이 마른 논바닥 갈라지듯 쭉쭉 갈라지고 부풀어 올라 움직일 수 없는 고통을 받는다. 여기에 물을 부어주면 아프지만, 혀가 입안에 꽉 차서 의사를 표현할 수가 없어 그 고통을 그대로 겪으며 죽게 된다.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은 지은 죄의 모습이 현상으로 눈앞에 떠올라 몸부림치기 때문에 온몸을 묶어놓아야 한다. 심한 잘못을 한 사람 은 죽을 때 자신이 저지른 현상을 그대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선하고 어질게 산 사람은 선하고 어진 과보를 받고, 악하고 모질고 나만 아는 이기적인 삶을 산 사람은 죽음의 여정에서 자신이 뿌린 그대로 겪게 된다.
병이 드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부처님도 생로병사를 여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듯이, 우리의 몸은 물질이기 때문에 병들고 아프면서 죽는 것은 모두가 겪는 여정인 것이다. 그러나 병들고 죽어가는 여정,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통 의 현상은 각각 살아온 모습으로 결정된다. 다시 말해 죽어가는 사람이 겪는 고통 과 외로움, 괴로움, 아픔, 서러움은 그 사람이 살아온 모습을 말해주는 것이다. 돈, 가족, 명예, 지위, 권위는 죽음의 여정 앞에서 내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 고,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 그것은 내 죽음의 질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죽음은 그러한 현상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내 죽음의 모습이 어떻게 되길 원하는지 그 모습이 확정된다면 삶에 대한 대답 은 저절로 나오게 된다. 그 모습대로 삶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삶이 풍요로워지고 행복해지고, 삶의 모습이 당당하게 되며 자유로워지고 아름다워진 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모습이 그려지지 않으면 삶이란 드라마도 혼란스런 모습 을 보이게 되고 제대로 된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다. 따라서 죽음의 드라마가, 극 본이 구체적으로 설정되면 삶의 드라마도 변하게 된다. 삶의 목표와 역할에 따라 극본과 시나리오 등이 제대로 정해지고 변하게 되며, 그 변화는 개인의 삶뿐만 18 보디사트바_겨울 아니라 사회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마음의 치유는 죽음의 질을 높인다
평상시에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을 보면 죽음도 잘 맞이할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에 보이는 모습은 치유되지 않은 마음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몸을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속의 질병을 치유 해야 죽음의 질을 높일 수 있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갖가지의 돌덩어리를 올려놓고 살고 있다. 감정표현, 심정표현을 제대로 못하고 살고 있으며, 그것은 고스란히 가슴속에 담겨져 있다. 그리고 그대로 질병이 되고 악취가 되어 밖으로 표출된다. 따라서 가슴에 올려놓은 돌덩어리를 제거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그것을 제거해야만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랑, 보살핌, 관심이 없는 삶, 아내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삶, 자식과의 불통의 삶이 노년을 외롭고 쓸쓸하고 힘들게 한다. 그리고 그 마음의 병이 육신의 병이 되게 한다. 내가 타인에게 그러한 행위를 했다면 그 과보는 고스란히 내가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내가 행복하고 풍요로운 노년과 죽음을 맞고 싶다면 그러한 공덕을 쌓아야 함을 의미한다. 

타인의 죽음을 돌보는 행위
죽어가는 사람에게 다가가 잘 봉양하고 보살피며 도와주는 인연을 짓지 않으면, 내가 죽을 때 그러한 인연이 없기 때문에 나의 죽음자리도 지켜주는 이가 없고, 어떤 일이 있어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어떤 좋은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내가 죽을 때 사랑받고 극진한 돌봄을 받으려면 그러한 종자를 심어놓아야만 한다. 아무리 자식이 많고 친척이 많아도 죽는 그 순간엔 모두 자리를 비우게 되는데, 그러한 종자를 심지 않은 인과의 법칙에 의한 것이다.
내 주변에 임상의 대상은 많다. 부모, 친척, 형제 등 그러한 사람들을 향해 죽는 그 순간만이 아니라 끝까지 도움을 줘야 한다. 내가 간호 받고 싶은대로 타인을 간호해야만 한다. 내가 죽은 뒤에 장지까지 오길 바란다면 타인에게 그렇게 베 어야 한다. 타인의 죽음을 돌보는 것은 바로 나의 죽음을 돌보는 행위인 것이다.

준비없는 죽음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같다
죽음의 모습은 마음으로, 생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준비하지 않으면, 어느 날 죽음이 왔을 때, 비참하게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와 같은 신세가 된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모습은 눈을 부릅뜨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뒷걸음질을 친다. 안 끌려가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그러나 결국엔 끌려가고 만다. 돌아설 수 없는 그 길을 돌아서려 하고 몸부림친다면 몸부림치는만큼 괴롭고 비참하며 고통만이 있게 된다. 이런 모습은 누구에게나 예외가 없다.
현대인의 조급증을 반영이라도 한 듯, 요즘은 갑자기 발병하고 진행속도도 빠른 암이 많아지고 있다. 췌장암, 담도암, 폐암 등은 진행 속도도 빠르고, 발견한다 해도 치료할 시간도 없다. 그렇다면 언제 삶을 정리할 것인가. 돈이 많은 경우 그 돈을 정리하지 못했으면 자식들이 죽지도 못하게 한다. 치료라는 명분을 내세 워 현대 의학에 의존해서 목숨을 연장시키며 돈을 정리하도록 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건강할 때 해당되는 사람들 모두에게 돈이 있고 없음을 분명히 말해서 죽음을 준비해야만 때가 되었을 때 편안히 죽을 수 있다.
또한 마음의 돌덩이를 모두 내려놓고, 정말 가볍게 갈 수 있어야 한다. 미움도 원망도 내려놓고, 모든 것을 용서한다면 아주 가벼운 몸으로 가게 된다. 시신이 바짝 말랐어도 태산같이 무거운 경우가 있고, 뚱뚱해도 깃털처럼 가벼운 경우가 있다. 이것은 우리 삶의 모습인 것이다. 죽음만큼 살아온 모습을 정직하게 대변해 주는 것은 없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모습을 직면한다면 함부로 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지금 같아선 죽음의 길을 누구나 잘 갈수 있고,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죽음이 앞에 와 있으면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다. 병이 들었을 때 원망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그 나이에 맞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자식 낳고 농사짓고 하는 것은 내 삶이 아니다. 이러한 삶을 90살을 살았더라도 그것은 산 것이 아니다. “얼마나 살았다고…….” 이 말은 아무리 긴 시간을 살았 더라도 내 삶을 산 것은 얼마 안 되었다는 말이다. 자식을 위한 삶은 내 삶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80이 되어서도 ‘얼마나 살았다구.’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 앞에 와서 가자고 하기 전에 내 삶과 내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

죽음을 상실한 삶 자체는 죽음이다
오늘날 우리는 죽음을 상실해 가고 있다. 우리의 문화가 죽음을 외면하게 하고 있다. 그래서 집에서 죽은 사람도 병원으로 실려 가게 하며, 시신에 대한 부가가 치까지 생겨나서 시신 쟁탈이 일어나기도 한다. 병원에서 죽게 되면 숨 떨어지자마자 실려 나가 냉동고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는 평생 쌓아온 공덕을 순식간에 무너뜨리는 행위이다. 정신을 안 차리고 죽으면 누구나 그러한 처지가 될 것이다.
죽음이란 지(地)․수(水)․화(火)․풍(風) 순서대로 무너지는 과정이다. 사대가 차례로 무너질 때는 의식을 온전히 집중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문소리나 발자국소리 하나도 없이 절대적인 적정의 상태에서 염불소리와 화두에 집중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혼식이 고요하고 적정한 상태에서 염불소리를 들으며 화두만 잡고 육체를 빠져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혼식이 모두 빠져 나간 뒤에도 5~6시간 정도는 조용하게 시신을 건드리지 않아야 한다. 그 순간은 다음 생을 결정짓는 절대 절명의 순간이며, 이 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따라 사후의 질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소원은 건강하게 살다가 남의 신세 지지 않고 자듯 죽는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임상의 현장에서 직면한 진실은 수행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에 제대로 죽지도 못한다는 사실이다. 수행을 했어도 현상적인 수행은 했을지언정 실제적 으로 영적인 성장을 이룬 수행이 되지 못했기에 잘 죽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삶 속에 죽음이 함께 있음을 자각하면서 순간순간을 살아가야 할 이유이 기도하다.

능행스님 │재단법인정토사관자재회 이사장
(채록자|변은숙, 24기 호스피스)
출처 : 재단법인 정토사관자재회 계간지 ‘정토마을’ 2018.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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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삶이란? 온전한 죽음이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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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은 무엇이며, 죽는 것은 무엇인가?
일찍이 붓다께서는 사는 것도 고통[生苦]이고 죽는 것도 고통[死苦]이라고 하셨다.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열반이 있고, 열반으로 가기 위한 수행이 있는 것이다. 삶은 연기법에 의해 인연의 조건과 환경에 영향을 받으면서 그 무엇을 학습하는 여정이다. 그 학습 결과에 따라서 맞이하는 죽음의 질이 다르고, 시작하는 죽음의 질이 다르다.
사람들은 흔히 죽음이란 나이가 들거나 심각한 병이 들었을 때 찾아오는 손님 쯤으로 여긴다. 그러나 2008년 이 시점에서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죽음이나 질병은 연령과 성별을 구별하지 않고 다가온다. 그래서 아주 두렵고 공포스러운 느낌이 강하다. 손님이긴 하지만 반갑지 않은 손님임에는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애써 회피하고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재수 없거나, 마음 상하게 하는’ 부정적인 주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죽음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미리 준비하고 극복해가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그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전혀 하고 있지 않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렇다면 삶의 여정 중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죽음이 찾아왔을 때, 두 손 들어 환영은 못할지라도 당황하지 않고 허둥대지도 않으면서 담담히 맞이할 수는 없는 것일까?

죽음에 대한 인식의 부족
요즘 젊은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인식이나 지식,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이다. 매일의 생활 가운데 죽음을 염두에 둔다거나 죽음 뒤의 세계에 대한 생각을 하는 일은 결코 없다고 할 정도이다. 더구나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은 부분을 부모에게 의지하기 때문에 갑자기 병이 들거나 죽음에 임박해서도 부모가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 생각한다.
때로 젊은이들에게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어떻게 될 것이라 생각하는지요?’ 라고 질문을 하면 그런 점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다.’라는 대답을 들을 때 막막함을 느낀다. 이런 인식과 무지와는 달리 현실적으로 죽음은 우리와 훨씬 가까이에서 삶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반영하듯,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청소년, 소아를 위한 암병동은 서울대병원 등 대형 병원 몇 개에만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각 대학병원마다 소아암병동이 생겨났다.
더 이상 젊은이들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죽음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해 직면해야 하며, 의식을 바꾸어야 한다.

변화된 죽음의 환경
예전에는 집에서 태어나 집에서 죽는 것이 다반사였다. 심지어는 안방에서 죽지 않으면 객사(客死)라고 하여 그 시신을 집안에 들이지 않을 정도로 죽음을 존중하였다. 장례를 치르는 과정을 보더라도, 잘못 행해졌을 때 다시 고칠 수 없는 일이 장례에 대한 일이기 때문에 정성을 다하여 실수하지 않고자 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태어나는 것도 병원이고 죽는 곳도 병원이다. 대개 병이 들거나 죽음에 임박해서는 집에 있다가도 죽을 때는 다시 병원으로 가서 죽는다. 이는 죽는 사람에 대한 배려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 위주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아파트라는 주거환경은 사람의 주검조차도 물건으로 치부해 버리곤 한다. 주변의 죽음을 보면서 나의 죽음을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극도의 이기주의에서 죽음이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즉 죽음이 상실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이나 친지, 친구 등 주변의 사람들이 죽어도 그 여정을 함께하지 못하고 죽음 뒤에도 충분히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죽음을 상실한다는 것은, 죽음이 결핍된다는 것은, 죽음을 외면하는 것은 온전한 삶이라 할 수 없다. 우리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죽음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지 않는다. 될 수 있으면 죽음을 외면하게 한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회피는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면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삶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며, 부모는 자녀들에게 이러한 환경을 제공하는 주인공이다.
어른들은, 부모들은 젊은이들이 죽음에 대해 직면하고,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 젊은이가 건강한 생각을 가지고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삶의 요소보다 훨씬 많은 죽음의 요소
우리 주변에는 삶을 영위하게 하는 요인보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요소가 훨씬 많다. 정신 차리고 보면 가슴을 쓸어내려야 할 만큼 위험 요소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죽을 일이 많다.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는 매일 매일의 사건 사고만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어제까지도 웃던 사람이 오늘 생사가 나뉘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한 번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또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우리는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에는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고 온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그 많은 죽음의 요소를 견뎌내고 살아온 사람들이 맞이하는 죽음의 여정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죽음, 그 이후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무지에 대해서도 별 의식이 없다. 평소에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기며 그 이후의 경과에 대해서는 경시하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모든 것이 넘쳐나는 현실에서 우리의 마음은 목마르고 영혼은 메말라 있다. 죽음을 보는 시각이나 사후 처리 과정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죽음이 경시되는 결핍된 사회에서의 삶은 정신적인 황폐함이 난무한다. 정신의 황폐함은 물질적인 욕구만을 채우기 위한 살게 한다. 그것만이 성공된 삶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삶에 있어서 양적인 극대는 있을지 몰라도 질적인 풍요는 존재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이 동반하지 않는 삶은 온전한 삶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정토에 오는 사람 누구에게나 묻는다. ‘지금 이 순간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지금 이 순간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기고 싶은 말은,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거의 모든 사람의 첫 번째 대답은 ‘해도 될까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정말 해도 될까요?’이다. 
그리곤 이어 말한다. “죽음이 이렇게 오는 것이라면, 삶이란 것이 이렇게 끝나는 것이라면 내게 죽음에 대해 왜 이야기해주지 않았나요? 왜 가르쳐주지 않았나요? 죽음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왜 미리 가르쳐주지 않았나요? 너무나 중요한 죽음에 대해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 당혹스럽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한다. 자신의 삶과 죽음에 세상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 있는 것이다.

호스피스교육이란 무엇인가
삶 가운데 죽어가는 과정을 공부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공부이다. 그런 의미에서 호스피스 교육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도와주는 봉사가 아니라, 죽음을 보면서 나의 죽음을 바라보고 준비하는 수행의 여정이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죽음인 임상체험을 통해 평생 살아오면서 잘 살아왔는지를 돌아볼 수 있다. 죽음의 진실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공부할 수 있다.
호스피스는 수행이다.
우리는 생과 멸의 사이에 서서 직면하고 싶지 않은 사실들에 직면하게 된다. 탐진치에서 비롯되는 형상 없는 생각과 감정들이 고통, 두려움, 이별, 아픔, 상실 의 질을 바탕으로 윤회를 창조하게 하는 사실에 깨어있도록 우리의 의식을 흔든 다. 팔정도를 통해서 실상을 알 수 있는 사실적인 통찰이 온다. 떠나는 자와 떠나 려는 자들이 서로의 모습을 통해 진실에 면하게 되면서 서로에게 높은 의식의 성장과 빛이 된다. 이 수행은 죽음과 삶을 통해 얻는 바른 경험이 있을 뿐이다.
죽음에 끌려가지 않는 죽음, 죽음을 통해 더 높은 의식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현상적인 풍요보다 영적인 풍요가 더욱 중요하다. 시선을 내면으로 거두고 달리 기를 멈추라. 그리고 지금 여기에 깨어 있으라.

능행스님 │재단법인정토사관자재회 이사장
2008년 마하보디교육원 호스피스교육 중 능행스님의 법문을 채록하여 싣습니다.
(채록자|변은숙, 24기 호스피스) 

세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에 나오는‘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말은 우리 삶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삶이 먼저인가 죽음이 먼저인가’를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이 먼저이고 죽음은 살고 난 뒤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삶, 즉 인간다운 삶을 살고 난 뒤에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인간다운 삶이란 어떤 것이며 의미 있는 죽음이란 어떤 죽음을 말하는 것인가? 이 둘은 각각 별개의 문제인가?


태어남도 고(苦), 죽어감도 고(苦) 생명은 어머니 뱃속에 잉태되는 순간에 깃들고 죽음도 함께 깃들어 여정을 시작하게 되며 그 여정을 삶이라고 한다. 즉 삶과 죽음은 처음부터 같이 진행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둘을 따로 생각하여 정작 죽음이 왔을 때 당황스러워하며 혼란을 겪고 고통스러워 한다. 그렇게 되면 웰빙(well-being)도 아니고 웰다잉(well-dying)도 아니다. 즉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인간다운 삶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어떻게 하면 멋지게 살고 성공적인 삶이 되며 멋지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와 인간다 운 삶이란 어떤 것일까?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좋은 집에 좋은 차를 사고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일생을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감을 느끼는 순간은 열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평생을 행복해 지기 위해 노력했는데 진정 행복했던 순간이 일생 동안 열 번도 안 된다는 것은 만족했던 순간이 열 번도 안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욕망 속으로 질주를 한다. 앞도 뒤도 돌아볼 새 없이 정신없이 달려가는 사이 삶의 궁극적인 목표였던 행복은 욕망에 내몰려서 고생에서 고생으로 끝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끝없는 욕망과 욕구가 일어나면 괴롭고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기 때 문에 사회의 풍요로운 물질문명 속에서 삶의 종착역에 이르렀을 때는 허기짐과 목마름으로 괴로움을 일으키게 된다. 
우리 사회가 정말 살기 좋은 환경이 되려면 죽음을 생각하며 준비하는 삶을 살 때 비로소 가능하다. 

삶의 여정


탐진치(貪瞋痴)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은 불교에서 깨달음에 장애가 되는 근본적인 세 가지의 번뇌를 말한다. 
탐(貪)은 탐욕과 탐애(貪愛)로, 자기가 즐기는 대상을 탐내서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진(瞋)은 진에(瞋에)로,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대상에 대하여 반발하고 미워하고 분노 하고 화가 나는 것이다. 
치(痴)는 우치 (愚癡)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별하지 못하여 잘못을 저지르거 나 옳고 그름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잘못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삶의 여정은 이 세 가지 번뇌와 어리석음에서 한순간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 결과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생활하게 되고 이는 불면증을 가져와 정신을 황폐하게 한다. 현재 병원의 진료 과목중에 정신과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아지고 성업을 이루고 있다는 통계는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 결과이다. 끝없는 물질에 대한 욕망은 죽는 그 순간까지 재산을 지키기 위한 걱정과 행복의 근원은 돈이라는 망상에 빠져 부모형제와 의절하고 자식을 내버리기 도 한다. 인간성 결핍이라는 극단적인 결과는 죽음에 임박해서야 자신의 어리 석음을 깨닫고 뜨거운 눈물로 후회와 한탄 속에서 임종을 맞게 된다. 
따라서 죽는 사람의 약 90% 이상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끌려간다.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있다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죽음에 억지로 끌려가는 형상은 마치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모습과 비슷하다. 


죽음에 대한 사회의 인식
각 개인이 자신의 죽음에 직면하지 못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바로 물질과 관련된 욕망 때문에 죽는 그 순간까지도 돈과 관련된 일을 생각하며 재산 정리를 하느라 남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재산이 많을수록 정리할 일도 많으며 바쁘다보니 가족과 같이 할 시간도 없고 평화로운 시간을 가질 수도 없다. 끝내는 혼자서 쓸쓸히 죽어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오십 평생을 살았어도 눈이 오는 것을 오롯이 볼 수 있고 눈이 하얗다는 것을 온전히 느낀 순간이, 다시는 일어설 수도 없고 걸을 수도 없는 순간이 되었을 때였다고 한다. 죽음에 임박하여 그 존재를 느끼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개인의 물질적 욕망과 함께 죽음을 거부하도록 길들여진 사회의 모습도 우리가 자신의 죽음에 직면하지 못하게 하는 큰 걸림돌이다.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 시설을 혐오시설로 인식하는 것과 죽음을 바라볼 때 매우 부정적인 생각은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를 모두 혐오스런 존재로 인식하게 한다. 
예전에는 집안에서도 정침, 즉 안방에서 죽지 않으면 객사로 여겨서 부득이 한 경우가 아니면 밖에서 죽지 않도록 죽음을 존중하였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현대인들의 인식은 환자가 집에서 앓다가도 죽을 것 같으면 병원으로 옮겨서 임종과 거의 동시에 냉동실로 옮겨지게 하고 있다. 가족의 죽음조차도 못 볼 것을 본 것같이 여기거나, 혹은 죽음 자체를 혐오스럽게 여겨 회피하는 모습은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볼 기회를 주지 않는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음과 접촉할 기회를 빼앗아 내게 그런 순간이 왔을 때 준비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없게 한다. 우리의 존재가 숨이 끊어지는 동시에 사라지는 것이라면 우린 사는 동안 왜 그리 정신없이 죽기 살기로 살아야 하는 것일까? 내가 가고자 하는 목표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그 목표 점은 어디이며, 우린 그 목표점을 향해 올바로 달리고 있는 것일까?
목표점을 모르고 달리는 것은 마라톤 선수가 눈을 가리고 달리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한 자각이 웰빙(well-being)이고 웰다잉(well-dying)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어떻게 하면‘잘 살고 잘 죽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잘 사는 것인지, 즉 웰빙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어떻게 죽을 것인지, 내 마지막 모습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고 인생의 종착역에 잘 도착하려고 노력한다면 웰빙, 즉 잘사는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늘 깨어있는 의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생각한다면 웰빙과 웰다잉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연의 질서 사람의 일생
자연의 질서인 계절의 변화는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모습과 같다. 다른 점이라면 죽어 가는 여정 중에 경험하게 되는 갖가지 고통들의 내용이 각기 다를 뿐이다. 계절의 바뀜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어김없이 그 순간에 오고 간다. 사람의 일생도 그와 같이 오고 계절이 바뀌어 나무가 옷을 바꾸어 입듯 죽음은 우리의 옷을 바꿔 입게 한다. 한사람의 생명이 우주보다 더 소중하고 한사람의 움직임이 태양보다 더 빛나는 가치를 가진다.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구체적으로 준비하며 사는 사람은 삶과 죽음에 당당하고 자유롭다.

성공적인 인생의 마침표


죽음을 님으로 맞이할 것인가? 죽음이란 놈에게 끌려갈 것인가? 이 과제는 오직 자신만이 선택할 수 있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은 스스로 꽃을 피운다. 일생 중 용서와 화해, 그리고 이해와 배려가 있는 삶을 배울 수 있다면 삶은 따사롭고 풍요로울 것이다.

죽음은 진실한 삶의 결과
죽음은 사람이 모여드는 인생의 종착점에서 볼 수 있는 드라마로,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걸작품이다. 그러나 약 90%의 사람들은 고통과 두려움에 묶여 준비 없이 죽음에 끌려가는 비참하고 안타까운 내용의 드라마 주인공들이다. 명예와 권력, 학벌과 재산, 젊음 그 어떤 의상도 진실을 감출 수는 없다. 사람은 어떤 위기에 직면하면 고통과 갖가지 상실을 통하여 영적으로 성장하고 사랑을 배우게 된다. 삶 안에서 죽음을 느끼고, 죽음이 삶과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인지한다면 세상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노력할 수 있으며 잠시 머물다가 영원으로 사라지는 우리 존재의 본질을 안다면 서로를 한없이 사랑하고 한순간을 영원처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즉 세상의 가르침은 하나의 경험에서 시작되며, 일생에 한순간도 의미 없는 순간은 없다. 삶에서 경험하는 그 무엇도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 끝없는 시행착오 속에서 인생을 배우기 때문이다. 삶의 여정의 다양한 경험이 신념을 만들고 그 신념은 자신의 죽음의 질을 결정짓게 된다. 

죽음에 대한 자각과 성찰
죽음에 대한 올바른 자각과 성찰은 삶을 온전하게 한다. 바꾸어 말하면 죽음이 외면 당하면 삶도 온전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죽음과 삶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죽을 것을 생각하면 삶의 의미는 달라진다. 용서하지 못하고 죽는 삶, 화해하지 못하고 죽는 삶, 배려받지 못하고 죽는 삶, 사랑받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죽는 삶, 준비하지 못하고 죽는 삶이 아니라 한 순간 한 순간을 온전히 깨어서 살 수 있게 된다. 사람의 일생은 한순간에 결정된다. 들어간 숨이 나오지 않을 때, 나간 숨이 들어오지 못할 때, 즉시 사람이라는 이름표를 떼고 영혼(靈魂)이라는 이름표를 붙인다. 생과 멸은 찰나에 결정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사랑하라! 내일이 없는 삶 속에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 삼법인의 가르침을 통한 자각과 성찰이 죽음을 사실적으로 준비하게 하는 연습이 되어 줄 것이다. 죽음 앞에서 아무런 후회 없이 설 수 있 도록 사는 것이 웰빙(well-being)이다. 
사랑 하는 사람과 함께 내 마지막을 서로 축복하고 갈 수 있는 것이 웰다잉(well-dying)이고 이렇게 사는 것이 성공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이형기 시「낙화」

능행스님 │재단법인정토사관자재회 이사장
2007년 마하보디교육원 호스피스교육 중 능행스님의 법문을 채록하여 싣습니다.
(채록자|변은숙, 24기 호스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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