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제시 다사|원네스 유니버스티

원네스란 다양한 차원에 의해서 존재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여러 차원에서 의 분리심과 경계심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분리심으로부터 언어별, 국가별 분리 등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분리심이 없어지고 통합되면 하나됨이 이루 어진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보는 관점의 하나됨이란 내면적 인 경험이고 변화라고 보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바깥세상이 아니라, 내면의 상 태에서 세상을 어떠한 관점으로 보느냐 경험하느냐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됨이란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지요. 자신의 여러 가지 면을 수용하게 되면 그것이 하나됨으로 이루어질 때 다른 것을 보는 것이 달라집니다.
저는 12년간 수천 명의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고 또한 더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아 왔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싸우지 않게 되었으며, 더 이상 갈등 안에서 애쓰고 있지 않고, 갑작스럽게 자기 주변의 사람들과 세상과의 연결성을 맺는 것에 수월함을 느끼게 되는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원네스의 목표 중 하나는 인류에게 어떠한 조건도 없는 자유로움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모두가 그 자유를 향 해서 달려갑니다. 자유를 얻기 위해 명상, 혹은 경전을 통해서, 또는 남을 도와주면서 우리는 달려왔습니다. 저 역시도……
자유라는 과정을 향해서 가게 되면 늘 시작은 고통의 시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 다. 그리고 우리는 고통에 친숙합니다.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란 무엇인가요?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은 내 자신에 대한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고 우리 삶에서 그것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를 다양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자아가 있다면, 모든 사물을 그대로 봐줄 수 있는 것이 자유이며, 자신의 욕구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것도 자유입니다. 불교는 아싸바스(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철학적인 자아로부 터 해방되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다시 말해 자유란 사람마다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습 니다. 그렇지만 공통적으로는 —자유로움을 얻게 된다면— 누구든지 모든 것들과의 연 결성이 깊어집니다. 자신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주변 사람들이나 세상과도 깊은 관계가 이루어지고, 자연과의 관계도 그리고 고차원의 의식과의 관계도 깊어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어떠한 길을 선택해서 그 행로를 갈 때 우리는 죄악의 성품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그 길을 걸어갑니다. 그리고 마음으 로부터 해방을 얻어 간섭받지 않고 작용받지 않는 단계로 가기 위해서 그 행로를 진행 합니다.
마음이 중단되는 고요함까지 어떻게 가며, 또한 그 고요함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인가 요? 자유로워지는 것은 누구나 중요하다고 느끼며 가능하다고도 여깁니다. 그런데 무 엇이 그것을 가로막나요? 가로막는 것은 바로 무지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에 주의를 기 울인다면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가능합니다. 자유로움을 성취하기 위한 핵심은 주시입 니다. 그리고 주시를 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은 특정된 감정의 집착입니다.
감정의 집착을 원네스에서는 ‘충전’이라고 말합니다. 경험에 의한 집착에 충전이 남 아있으면 그것이 고통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주시하고 자각하게 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예를 들면 증오심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화가 나는 이유는 저 사람이 저렇게 하기 때문이야.”라고요. 그런데 상대방이 어떻게 해서 내가 화가 나는 것이 사실입니까?


고통은 관점에 있다.
자유라는 것을 향해가는 과정의 첫 출발은 고통에서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고통의 챔피언들입니다. 그 의미는 자신이 겪은 고통에 대해 공부를 해왔다는 얘기입니 다. 고통은 무엇인가요? 육체적 심리적으로 아는 경험이며 불편한 경험들입니다. 그리 고 둑카라는 존재성의 고통이고 영적인 고통도 있습니다. 고통은 아주 아픕니다. 뿐만 아니라 나에게 방해를 주고 불편함을 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고통을 겪습니까? 고통을 겪는 이유는 무지에 빠져있기 때문입니 다. 가정하고 있는 무지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가정 중의 하나는 상대방이 책임요소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통이란 남 탓을 하는 과정입니다. 내면에 일어나는 ‘기분 나쁨’에 대해 남 탓을 하며 부연 설명하는 과정이 바로 고통입니다. 남에 대해서는 지배 하거나 해명하려 들고, 자신에게는 변명이라는 부연 설명들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고통을 멈추게 합니까? 그러한 과정 자체가 모두 고통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고통의 핵심은 아예 들여다보지도 못합니다. 그저 그 과정 속에 빠져 있게 됩니다.
고통이란 것은 끝내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통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는 고통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상대방과 상황이 고통의 원인이라고 믿는 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상대방과 상황에게 주의가 묶여서 주의가 밖으로 빠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황을 바꾸고 사람을 끊임없이 바꾼다 고 우리의 고통이 종료됩니까?
바가완께서는 고통이란 ‘관점’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고통은 ‘상대방이나 상황이 고통의 책임요소’라고 보는 무지 때문이며, 상대방이 책임요소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현실이 되었을 때 고통을 들여다보고 주시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상대는 고통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제가 어떤 분에게 “당신은 매우 똑똑하시고 영리하십니다. 진리에 가까우십니다.”라고 했는데 그분은 그 말에 상처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 면 그분은 그 자신이 똑똑하고 진리에 맞다고 믿은 적이 없기 때문에 제 말을 놀린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분의 고통은 저와 무관합니다. 고통이 사실 에 있다면 모든 사람에게 사실은 고통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넌 바보 같다.”라고 말해도 기분이 좋은 사람도 있거든요. 고통이란 ‘바보 같다’라 는 말과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이란 우리가 그 상황과 사람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느냐에 의해 일어납니 다. 이것을 자각하고 알아차리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습니 다. 바라보고 알아차리는 순간 모든 외부요소가 잘라지듯이 주의가 더 이상 그리로 가 지 않습니다. 더 이상 밖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고통이란 우리의 관점에 있으 니까요. 그런데 좋은 관점에 있다고 자유로운가요? 좋은 관점은 나쁜 관점이 형성될 수 있기 때문에 진실이 아닙니다. 관점 자체가 바로 고통입니다. 어떠한 관점이든 이것 은 주장이며, 주장을 하게 되는 순간 당신이 그것이 됩니다. 그것에 당신이 묶이고 당신 이 그 관점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고통이 됩니다.

고통의 회피
어떻게 관점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우리 과거의 경험에 충전이 있는 한 관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충전은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일어납니다. 이 해결되지 않은 경험은 끊임없이 마무리 지으 려고 계속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부족하고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느낌을 지닌 사람은 그 지닌 상태로 삶을 이어가며, 색안경을 끼고 그것을 투사하게 됩니다. 그러면 서 그 색으로 세상을 봅니다. 그리고 살면서 어떠한 이유를 들이대서라도 사랑을 못 느끼고 거부당했다고 호소합니다. 과거의 경험이 완전하게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입니 다. 그러나 어떠한 것이든 완전하게 완성되게 경험하면 그것은 아이처럼 깡충깡충 뛰고 싶을 정도의 기쁨과 환희로움을 줍니다. 상대방이 요소라고 생각하는 것은 고통을 지속 시킵니다. 그러나 어떠한 변화를 주려하지 않고 남의 탓도 하지 않고 부연 설명하지 않으면 그것이 고통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고통도 완전하게 경험하면 기쁨과 환희로 전환됩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마음은 절대로 이렇게 해내기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부연 설명을 계속합니다. ‘분석하면 안 돼’도 분석이며 ‘비교하면 안 돼’도 비교입니다. 그리 고 ‘생각을 없애야 해’도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마음을 끝낼 수 있을까요? 고통을 온전히 경험하기 위해서는 도망하고 있는 그 자체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 의 성품은 ‘도망치기’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은 절대적으로 아픔을 경험하 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픔을 경험하면 그것이 환희를 주는 것이 사실입니 다. 고통이 다가오는 순간 즉각적인 반응은 회피입니다. 육체적 물리적 방법으로도 회 피하고, 영화과 음악 그리고 일로도 회피하고, 뿐만 아니라 철학을 사용하기까지 합니 다. ‘그래, 어차피 삶이란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지. 모든 것을 똑같이 경험해야지. 고통이란 삶의 일부분이야. 고통이 있어야 성장하는 것이니까 더 많은 고통이 있어야 해.’라고 하면서요. 마인드가 하고 있는 것은 끊임없는 회피입니다. 주의를 몰입하는 것이 불가능하면 고통을 끝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회피함을 자각하면 고통 속에 있으면서 고통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고통이다. 고통이다.’ 하면서 고통을 경험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회피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한마디 던지면 상처를 받고 가슴에 불편함을 느낍니다. 이와 비슷한 배움을 통 해 ‘고통을 경험하면 환희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마인드는 ‘경험해야 해.’라고 하며 마인드가 그 경험을 경험하려고 노력합니다. 마인드는 생각이 흐르고 있는 과정입니다. 다른 생각이 들어오면 마인드는 ‘지금 올 때가 아니야. 나는 고통을 경험해야 해.’라고 편집부 특집_라제시 다사 39 집착하고 놓질 않습니다.
아픔을 진정 경험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픔은 육체적 아픔을 온전하게 일어나도록 허용하고 자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인드가 작용하여 ‘물 한잔을 경험해야 해.’라 고 생각하면 물이 경험이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애씀입니다. 온전히 마인드가 작용하 면 애씀이 일어나고 애씀은 아픔으로부터 자신을 멀어지게 합니다. 만약에 진실이 개념 으로 사용되고 철학으로 활용되면 그것은 아픔으로부터 멀어지는 수단인 동시에 회피 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인드는 아주 똑똑하기 때문에 회피를 잘합니다.
또한 마인드는 수용의 개념을 이용해서 회피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인도에서는 갠지스강을 향해서 여행하는 행사가 있습니다. 거기에 가서 자기의 성품을 바치는 것이 행사의 일부입니다. 
어떤 사람이 참여하고 와서 말합니다. “나는 분노를 버리고 왔어.”라고요. 그런데 사 람들이 자꾸 와서 묻습니다. “너 정말 분노를 버리고 왔니?” 그런데 그렇게 같은 질문이 계속되고 마침내 다섯 번째의 사람이 질문했을 때, 그 사람은 화를 내면서 말합니다. “내가 이미 말을 했잖아. 내가 분노를 버리고 왔다고!”

고통의 수용
수용이 개념으로 있는 한 마인드는 그것을 활용합니다. 이것이 회피가 아닌지 회피인 지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요? 진정한 수용이 일어나면 어떠한 설명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삶은 그냥 흐르는 것이야.’라고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수용이 진정 일어나면 그때는 그 말 자체도 언급이 안 됩니다. 오로지 있는 것은 아픔뿐 어떠한 생각 이 붙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일어나려면 자각의 힘이 엄청 강력해야 합니다.
고통으로부터 회피하는 과정이 고통입니다. 정당화시키고 틀에 맞추어 편안함을 받 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진정한 고통이 아니라 도망치는 과정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호랑이가 있다고 합시다.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그렇죠. 당연히 도망치는 거죠. 제가 제일 먼저 도망칠 겁니다. 호랑이가 쫒아오면 맨발로 옷도 챙겨 입지 못하고 30분, 40분, 엄청나게 뜁니다. 그때 누군가 “너 지금 어떠냐?”고 묻습니다. “나는 고통스럽 다.”고 대답하죠. 그가 또 묻습니다. “무엇이 고통스럽냐?” 나는 “저 호랑이 때문에 고 통스럽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봅시다. 호랑이가 저를 건드렸습니까? 저를 먹었습니까? 때렸습니까? 한 번도 그런 사실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입니다. 호랑이는 언젠가 저를 먹을 것입니다. 어차피 먹힘을 당할 바에는 지금 먹히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고통은 우리 안에 있는 무엇이 무너질 때입니다. 그것을 직면하지 못하니까 방어하고 보호하려고 애씁니다. 호랑이가 당신을 바로 먹으면 당신은 죽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죽으면 그것이 당신 삶의 시작입니다. 우리 안에서 죽는 것은 아나만입니다. 아나만은 자신의 왜곡된 관점, 즉 가면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자아의 일부가 죽는 것입니다. 그러 면 자유로워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일부가 죽는 것을 허용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방어적이고 공격적으로 나갑니다. 먹어버리게 허용한다면 호랑이는 제 할 일을 했기 때문에 없어집니다.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이란 고통으로부터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때입니다. 왜냐하면 고통을 경험하면 기쁨으로 전환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먹힘을 당하는 순간 완전히 끝납니다. 고통의 관점 자체가 끝납니다. 자신이 고통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자신을 먹어버리는 것입니다. 도망가는 것을 자각 하십시오. 자각하는 순간 더 이상 뛰지 않습니다. 자각 자체가 고통을 경험하는 것입니 다. 그것이 온전한 경험입니다. 고통의 관점이 고통 경험을 가로막을 뿐입니다. 딱 한 번 먹힘을 당하면 호랑이가 올 때마다 가만히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경험 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것이든 온전히 경험하면 남는 여유는 환희와 기쁨입니다. 고통으로부터 성공 적으로 도망치면 한숨은 쉬지만 그것은 잠시 동안 잘 도망친 것입니다. 물론, 처음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도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두려움 극복의 두 가지 방법은 첫째, 이 두려움이 마인드가 사용하는 회피 방법임을 통찰하는 것입니 다. 그리고 둘째, 이 과정에서 나는 홀로가 아니며, 나는 부처님의 가피를 받고 갈 수 있다는 용기와 가피를 경험하면서 극복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자면, 마치 아이들이 엄마 뒤에 숨어서 강아지를 만지듯이 말입니다.

※2008년 5월 23~24일 마하보디교육원 주관으로 이루어진 ‘스님들을 위한 의식과 영성교육’의 내용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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