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은 좀처럼 카메라를 내려놓지 않는다. 약속된 방송날짜, 방송시간에 반드시 프로그램을 송출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다. 그 업계의 규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어라도 찍어서 무어라도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이기에 호시탐탐 무언가를 담기 위해 늘 카메라를 들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방송분량’을 어떻게든 카메라에 담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CJB 청주방송 창사11주년 특집 휴먼기획 <호스피스 병동에서 삶을 만나다>를 촬영하기 위해 정토마을을 처음 찾았을 때도 당연히 우리 손에는 배터리가 가득 충전된 카메라가 두 대씩이나 들려 있었다.

하지만 카메라를 들고 찾아든 낯선 방송국 손님들에게 정토마을이 처음으로 베푼 것은 방송 분량이 될 법한 그 무언가가 아니었다. 마침 그날은 정토마을의 거실을 넓히는 공사를 하기 위해 거실의 짐을 밖으로 옮겨 나르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우리는 바로 카메라를 내려놓고 무거운 짐들을 밖으로 나르는 일부터 해야만 했다. 초여름 날씨에 온몸이 구슬땀에 젖었다. 당시에는 적잖게 당황스러운 기분이었으나 그렇게 정토마을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탤 수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 훗날 오히려 감사했다. 정토마을을 찾고 정토마을의 일상을 조금이라도 체험 하게 되는 이라면 그 누구라도 나의 이 감사하는 마음을 공감할 수 있으리라.

그날부터 시작해서 수 개월에 걸친 정토마을 취재를 끝낼 때까지 결국 우리의 카메라는 평소의 부지런을 별로 발휘하지 못했다. 우린 정토마을을 취재하고 촬영하기보다는 정토마을에있는 마지막 가는 이들의 아름다운 마지막 삶을 함께 살아보고자 했다. 카메라는 스위치 한번 제대로 켜지지 않은 채로 거실 한쪽 구석에 처박히기 일쑤였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로서 그런 무모함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은 정토마을의 환자들이 겪어내는 삶의 마지막 길이 결국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반드시 겪어야 하는 길이라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취재의 대상이기보다는 함께 하고 함께 겪어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이었다.

 

어느 날 정토마을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땅바닥을 기어가는 개미를 너무나도 환하고 천진난만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위암말기의 환자라는 사실을 접하고 난 뒤에도 그를 결코 환자로 대할 수 없었다. 건강하기도 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구만리인 나마저도 짓지 못할 그 환하고 천진난만한 표정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표정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지금도 이따금 고민을 한다.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 나는 과연 그런 아름다운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어떻게 일생을 살면서 후회를 남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리석음이 우리 삶의 필연적 배경 중 하나인 이상 수많은 실수를 짓고 남기면서 살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삶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지나온 삶을 참으로 행복했던 시간들로 돌아보고 기억할 수 있다면 그 죽음은 슬픈 것만은 아닐 것이다. 정토마을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그에게서 가슴속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지나온 삶을 마치 소설에나 나올 법한 행복한 시간들이었다고 회고했다. 그의 지나온 삶이 과연 어떠했는지 낱낱이 알 수는 없었으나 편안한 표정으로 그런 이야기를 들려줄 땐 사실 부러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인생의 목표라 해서 뭐 거창할 필요가 있겠는가. 죽음에 임박해서 나 참 행복하게 살았노라고 회고해도 좋을 만큼 살아내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을 만하지는 않은가.

정토마을을 찾은 어떤 자원봉사자는 그를 만나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정토마을에서 조금 더 지내보면 그 눈물을 거둘 수 있으리라. 삶의 진실에 보다 가까워지고 행복의 비결과 만나는 기쁨에 점점 더 익숙해질 테니까 말이다. 나 역시 그를 보며 눈물지은 적 있었으나 그것은 그가 안쓰러워서가 아니라 그 아름다운 사람과 영원히 작별하는 것이 안타까워서였고, 그 아름다운 사람이 사랑했던 모든 것들과 영원히 작별을 고하며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그 무엇이든 욕심낼 것이 아니라 사랑해야 한다. 그걸 구별하지 못해 어리석고 삶이 아프다. 지혜롭게 잘 살고 싶은 마음이다. 빛깔 곱던 어느 가을날 그는 떠났다. 소원대로 극락에 갔으리라 믿는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결국 찾아든다. 누구나 무조건 겪게 된다. 그게 두려워서 대부분 자신의 삶에서 죽음이라는 것을 밀어내려고만 한다. 삶의 입장에서 볼 때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은 불편한 진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을 제대로 바라보아야 삶이 제대로 보인다. 삶은 준비할 틈이 주어지지 않은 채로 시작되지만 다행히도(?) 죽음은 준비하고 공부할 시간이 주어지기도 한다. 살기도 바쁜데 죽음을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가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배운 죽음은 품질이 다르다. 또한 죽음을 배우면 삶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진다. 그 삶이 많이 남았던 짧게 남았던 관계없다. 나는 정토마을에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삶을 배웠다. 죽음에 임박한 환자들이 모여사는 호스피스 시설에서 삶을 배웠다니 이러한 기막힌 역설을 믿을 수 있을까.

지금도 정토마을 마당 어딘가에는 자그마한 개미가 기어다니고 있을 것이다. 그 개미를 바라보며 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정토마을이다. 그 행복의 비결이 함께하는 곳이 바로 정토마을이다. 그 비결은 죽음을 바로 보고 바로 대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록 삶이 바쁠지라도 정토마을에서 살아볼 일이다. 비록 늘 일손이 부족한 곳이지만 무언가를 도우려 발을 들여놓기보다는 그들의 마지막 삶을 함께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머물러 볼 일이다. 그 얼마 되지 않는 경험으로 모든 삶의 순간들이 행복해지는 기적이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분명 일생을 통해 삶이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들은 더욱 많아지리라. 참고로 작년 여름보다 넓어진 정토마을의 거실에는 새로 들여놓은 고화질 TV가 있다. 그 TV를 환자들과 함께 시청해볼 것을 추천한다. 부쩍 가까워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가슴에 담긴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정토마을을 나설 때는 마당 어디에선가 기어다니고 있을 개미 한 마리를 반드시 찾아볼 일이다. 그리고 이전과는 변화된 자신의 표정을 반드시 살필 것. 이쯤 되면 세상에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 어디 개미 한 마리뿐이겠는가.(재단법인 정토사관자재회 정토마을 계간지 2009. 여름호)


 

김한기|CJB 청주방송 프로듀서

※CJB 청주방송 창사 11주년 특집 휴먼기획, <호스피스 병동에서 삶을 만나다>(2008년 11월 28일 방영)로 한국PD연합회(회장 김영희)가 주는 제105회 이달의 PD상을 수상하였다.

 

http://www.jajae-hospital.com

 

정토마을자재요양병원

원무부장 채용 합니다... 직책 : 원무부장 2. 원무행정 경력자.. 2017.07.28

www.jajae-hospital.com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