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 그리고 암 판정

2006년 12월경부터 치질이 항문에서 조금 삐져나와서 움직일 때마다 항문이 시깃시깃하다던 아내가 치질 수술을 하자고 했다.

2007년 3월 치질 수술을 위해 인근에 있는 병원에 들렀다. 진찰을 하던 의 사는 단박에 ‘치질이 아닌 것 같다’면서 큰 병원으로 가서 진단과 조직 검사를 받아보라고 하였다. 놀랍지만 그래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큰 병원에서 검사를 받은 결과 직장암 말기였고, 이미 간과 폐까지 전이되어 있으며, 항암치료는 큰 의미가 없다고 하였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애써 마음을 진정해 보았다.

‘그래, 70살에 생길 것이 30년 빨리 왔을 뿐이다. 맘 굳게 먹자.’

그러나 직장 노동조합 사무총장을 맡고 있었던 나는 귀가가 늦어졌으며, 아내를 제대로 보살펴주지 못했다. 더구나, 2006년 1월 사무총장에 당선된 뒤부터 그만두라는 아내와 다투고 난 후 1개월 침묵, 어떤 경우에는 2~3개월간 아내와의 침묵이 계속되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안팎으로 힘들었고, ‘이 짓을 계속해야 하나’ 고민도 많이 했다.

마음이 힘들 때마다 절에 가서 108배 하고, 금강경 읽고, 아내를 향해 마음이 누그러지길 발원하였다. 그래도 나의 번민은 계속 쌓여만 갔다.

 

제25기 불교호스피스 교육 받으며

2006년 여름에 읽었던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책을 떠올리면서 인터넷에서 ‘정토마을’을 검색하게 되었고, 제25차 불교호스피스교육이 2007년 8월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 어쩌면 지금 내 마음을 잡아줄지도 모르겠구나.’

기대를 걸고 신청을 하여 교육을 받게 되었다.

교육받는 동안 내내 아내의 ‘직장암’에 대한 생각과 이러한 아내의 암 투병을 어떤 자세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 그리고 앞으로 이 사태를 애들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가 화두였고,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내 아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나는 내 아내에게 내 맘을 이해시켜 보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나는 어쩌면 그렇게 내 아내에게 나그네였고, 아내에게 가까이 가지 못한 방관자였을까.’

그런 자각과 함께 아내와의 다툼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리고 현재의 병 원인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나에 대한 스트레스가 주범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아내에 대한 연민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능행스님은 교육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분노하고, 타인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등 자신을 파괴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을 서럽게 했으며, 자신을 외롭게 했습니다. 자신을 못났다고 했으며, 자신을 쓸모없다고 했습니다. 밖으로 밖으로만 매달렸던 것입니다. 오장이 살아남기 위해, 육체가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가! 자신의 존재를 꼬옥 온몸으로 안아주시기 바랍니다.’

이 법문을 듣고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내 자신에 대한 미안함에 눈물을 쏟으며 참회하였다. 내가 바깥으로만 끌려 다니며 사는 동안 아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 자신의 아집을 본 것에 감사하며

나는 5남 1녀 중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누님은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시집을 갔다. 우리 집에 여자라고는 단지 엄마 혼자였다. 밤늦게 일을 하고 집에 들어와도 누구 하나 밥을 해놓지 않아서 엄마가 그 지친 몸으로 밥도 하고 방청소도 하였다.

나는 자라면서 여자에 대한 배려와 여자들의 생각, 여자들이 말하는 법 등을 배우지 못했다. 그냥 내가 잘해주면 될 것이다. 이렇게만 생각하였다.

큰애 임신 중에 시원한 것 먹고 싶다는 아내 말에 나는 고작 아이스크림을 사주었고, 추석이나 설날 시골에 가는 날이면, 아내가 내게 “나는 시금치의 ‘시’자도 싫어한다.”고 말하면, 버럭 화를 내면서 “왜 시골만 가려고 하면 그렇게 말을 하느냐? 차라리 시골 가지 말자.” 이렇게 말을 해버렸고, 그 말로 인해 명절 내내 서로가 기분이 좋지 않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자를 싫어한다는 말은 아내가 남편에게 위로받고 싶어서 그냥 하는 말이었는데 그땐 정말 몰랐다. “그래, 나한테 시집 와서 힘들지, 그리고 시골에 가면 당신이 일을 많이 해야 될 거야. 힘들어도 참어.” 이렇게 말하고 위로 했어야 했는데, 그때 나는 아내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을 내려버려서 잦은 다툼이 일어났던 것이다.

 

입원, 수술, 그리고 부처님 가피

2007년 12월 19일 새벽, 결국 항문으로 변이 나오지 못하던 것이 위태로워지면서 조선대학교 응급실로 직행하였고, 오전에 능행스님과 전화 통화 후 곧바로 일산에 있는 동국대학교 불교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직장암으로 항문이 막혀 대장 속에 변이 쌓여 있는 것이 극에 달한 것이었다. 장은 본능적으로 운동을 하여 항문 쪽으로 보내는데, 항문이 막혀 있어서, 육안으로도 보면 딴딴하게 굳어서 볼록한 것이 보였다.

2007년 12월 21일 새벽, 내내 부풀어 올라온 배를 부여잡고 진통제 투여와 고통을 호소하는 마누라 손을 잡은 채 가슴을 조이다가 아침을 맞았다. 참으로 우리는 많은 말들을 나누었고, 아내의 착한 마음도 보았으며 내 자신의 아 집도 보았다. 오후에 수술 준비를 위해 간호사님들이 병실로 들어왔을 때, 그저 수술(대장에서 변을 빼내기 위한 장루 수술임)이 잘 되길 바랄 뿐이었다. 3시간 수술이 끝났다는 연락을 받고 회복실에 달려가서 아내 얼굴을 보니 너무 좋았다.

빙긋 웃는 아내가 그냥 고마웠다. 나는 ‘이게 반가움일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비죽이 흘러나오는 웃음으로 아내를 보았다. 너무 잘된 수술이었다. 모두가 부처님 가피와 여러 도반들의 기도 덕택인 것 같았다. 아내의 수술 사실이 호스피스 동문방에 알려진 후 아침 7시와 저녁 10시에 ‘찰나기도’를 간절히 해주신 스님들과 동문님들께 어떻게 감사함을 표해야 할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는 아직도 완벽하게 아내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종종 아내는 내게 독설을 퍼붓는다. 그래도 감사하다. 수술 전까지의 2박 3일의 시간은 나와 아내의 현생의 업이 녹았던 시간이었으며, 연애시절 그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그때만은 이 세상 모두가 청정해 보였었다. 아내는 내게 아버지 같은 남편의 모습을 기대한 것 같았으나, 나는 언제나 내 몸 편하고 싶은 마음에 빠져 아내에게 보채기만 하는 어린 남편이었다. 하염없이 참회의 눈물이 흘렀다.

 

질병, 수행의 도구로 삼아

2007년 12월 19일 수요일 새벽부터 12월 21일 금요일 집사람이 입원하여 장루(腸瘻) 수술이 끝날 때까지, 이렇게 많은 도반님들의 쾌유 기도를 느껴보니 부처님의 가피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깊고 깊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스스로 내 삶의 명심문을 만들었다.

“부처님 뜻대로 베풀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아내의 아픔을 계기로 부처님 말씀에 의지하며 더욱더 부지런히 정진 수행하겠습니다. 함께 공유하고, 함께 나누고, 아내와 즐겁게 웃어보겠습니다. 모든 인연에게 회향하며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나의 도반과 일체 중생들이 아픔에서 벗어나 부처님 전 복짓기 발원 합니다.”

 

장용열│25기 호스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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