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 탄다. 아우 탄다. 아수 탄다.’는 말이 있다. 맏이 아이가 태어나고 연이어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 어머니는 부득이 어린 동생을 더 보살피게 된다. 그러면 형은 지금까지 어머니로부터 받아오던 사랑을 동생에게 뺏긴 것으로 생각하여 동생을 미워하게 되고 어머니도 싫어하면서 몸이 점점 여위어가는 것을 옛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정확한 관찰이고 좋은 표현이다.

여러 명의 아이들을 키워본 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고 그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지도 알 것이다. 만약에 부인이 있는데도 아무런 동의도 없이 둘째 부인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을 때 첫째 부인이 받는 충격은 엄청날 것이지만, 아우 타는 경우의 충격은 그 보다 훨씬 더 강할지도 모른다.

맏이에게 어머니는 자기만의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전부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한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맏이가 받는 충격은 상상할 수가 없다. 어머니가 아무리 달래고 설득을 해도 아이 수준에서는 그것이 통할 리가 없다. “동생도 너와 똑 같은 자식이다. 어머니는 차별하지 않고 둘을 보살필 것이니 걱정하지마라.” 이렇게 설득하고 타이른다고 될 일이 아니란 것은 자식을 키워본 사람이면 안다. 이 시기의 어머니의 역할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잘못하면 형제간에 큰 상처를 남기게 되고 그 상처가 평생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의 삶이 겪게 되는 최초의 충격이고 고통이 바로 아우 탄다는 것이다. 만약에 형이 어머니에게는 형제가 모두 소중하다는 것을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면 자기중심의 삶은 어느 정도 극복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원초적으로 인간은 자기중심의 삶을 살게 되어 있다. 그것은 생명을 지닌 인간의 운명이며 또한 고통의 근원이다. 삶의 고통이 얼마나 크면 그것을 고해(苦海)라고 했을까? 자기중심의 삶을 극복하게 되면 고통은 줄어든다. 마치 맏이가 동생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어머니의 입장을 이해하면 고통이 줄어드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을 담고 있는 유식학은 자기중심의 삶을 말라식으로 설명한다. 말라식은 마음의 중심을 이루는 것으로 사량분별(思量分別)하는 것이 근본속성이다. 어떤 자극이나 상황이 나타나면 그것을 살피고 계산하고 그리고 나에게 이득인지 손해인지를 따져보는 기능을 담당한다. 항상 나를 중심으로 작용하는 마음이다. 머리가 좋다는 말 속에는 말라식의 작용이 빠르다는 것을 일컫는 경우도 있다. 즉 계산이 빠르다는 뜻이다. 그것이 고통의 근원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말라식은 자기를 중심으로 사량분별하기 때문에 항상 이익과 손해를 따지고, 잘나고 못남을 따지고, 옳고 그름을 따지고, 아름답고 추함을 따지지만 그것은 객관적인 근거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의 기준을 근거로 삼는 한계를 지닌다. 달리 표현하면 항상 자신의 입장에서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착각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차별성이 생기고 분별심이 일어나고 시시비비의 다툼이 발생한다. 당파싸움이니 계파간의 갈등이니 하는 것도 모두가 이렇게 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심리적 불편이나 장애 역시 자기중심의 삶을 극복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를 분별심이나 차별성을 극복하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것이 극복된 경지를 평등성지(平等聖智)라고 한다. 분별과 차별이 극복된 경지이니 당연히 평등하고 성스러운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자기중심의 삶은 어떻게 극복할 수가 있을까? 얼른 생각하면 역지사지(易地思之) 즉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타인의 입장이란 것도 아직은 자타를 구분하는 차별성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삶의 태도는 대인관계의 갈등을 현저히 줄일 수 있고 생활 속에서 약간의 여유를 가질 수는 있다.

 

자기중심의 삶을 극복하는 궁극적인 길은 무아(無我)를 증득하는 것이다. 무아란 무엇이며 그것의 증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기중심의 삶을 유아론적 삶이라고 하면 자기중심을 극복한 삶은 무아론적 삶이 된다.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그것을 증득하여 자신의 삶속에서 구현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다. 타인을 보기는 쉬워도 자기를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기독경전에도 남의 눈의 티끌은 보면서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다.” 라는 구절이 있다. 자기중심의 삶은 남의 허물은 잘 보지만 자신의 허물은 잘 보이지 않는다. 설혹 타인이 그것을 보고 자신에게 일러주어도 고맙다고 여기기는커녕 관계가 나빠지기 십상이다. 무아론적 삶의 길은 닦을 수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우선 자신의 견해나 주장을 고집하는 삶의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자신의 주장이 타인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무시당하더라도 화내지 말고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견해만을 고집하는 것이 바로 집착이다. 그것을 조금씩 줄여나가면 무아론적 삶에 점점 더 다가서게 되고 삶의 고통도 동시에 점점 줄어들게 될 것이다. 한꺼번에 무아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다가서는 길 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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