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불안과 걱정과 고통에서 벗어나 즐겁고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한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준비하거나 수행을 하거나 마음공부를 하기도 한다. 보다 행복한 삶을 이루기 위해 각자가 판단하고 생각한 일들을 하게 된다. 곳간을 많이 채워야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죽기 살기로 물질을 탐하고 모을 것이며, 명예가 있어야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감투를 잡으려 할 것이고, 날씬해져야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은 돈을 투자하면서 몸매를 가꿀 것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좋은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각자의 성품과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초기 수행공동체였던 그노시스(신지주의) 학파에서는 인간의 수준을 세 단계로 구분하였다. 육체적 인간, 정신적 인간, 영적 인간이 그것이다. 육체적 수준의 사람들은 주로 물질과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고, 정신적 수준의 사람들은 정신적인 행복과 즐거움을 추구하며, 영적 수준의 사람들은 종교적, 영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했다. 천국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영적 수준의 사람들이며 아래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영적인 단계에 이르러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주여! 주여! 하고 신을 찬탄하고 믿는다고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 유식학에도 인간의 수준(씨앗)을 다섯 단계로 구분하는 견해가 있다. 보살종성(菩薩種姓), 연각종성(緣覺種姓), 성문종성(聲聞種姓), 무성종성(無性種姓), 부정종성(不定種姓)이 그것이다. 이런 수준은 선천적인 것이어서 개개인의 업이라고 볼 수도 있다. 각자의 수준에 따라 살아가는 모습도 다르고 추구하는 행복의 수준도 다를 것이다. 아래 단계의 중생들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수행이고 자기 성장이지만 통찰이 깊지 않다면 자신의 수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최근에 성립된 심리학의 영역 중에 긍정심리학이란 것이 있다. 2009년에 국제학회가 창설되었으니 이제 꼬박 10년이 된 짧은 역사를 지닌 학문 분야이지만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근본 목적으로 설립된 학회이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보다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긍정심리학은 현존하는 심리학이 인간의 심리적 문제를 파헤치고 또 그것을 해결하는 데 상당 부분 기여하고 있지만, 정신적으로 큰 문제가 없는 사람들에게 무슨 도움을 주었느냐는 자기반성에서 출발한다. 과학은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했으며 문학은 인간의 삶을 더욱 향기롭게 만들었고 경제학은 인간의 욕구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그런데 심리학은 인간의 삶에 어떤 기여를 하였는가? 
 현재의 심리학이 인간의 심리적 장애나 병리적인 측면, 그리고 취약한 부분에 대해 주로 연구해 왔다면, 긍정심리학은 인간의 긍정적인 측면 즉 강점이나 훌륭한 덕성에 대한 연구에 초점을 두고 있는 심리학이다. 긍정심리학자들이 말하는 행복한 사람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서 무엇이건 목표를 설정해두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59세의 어느 유명 여자 가수는 보디빌딩 대회에 출전하려고 매일 하루 3시간씩 연습을 하여 실제로 대회에 출전했다. 폐지를 줍는 경우에도 하루 또는 한 달의 목표량을 정한다든지 또는 일정 금액을 모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목표를 가질 때, 일하는 의욕이 더 생기고 행복감도 더 느끼게 된다. 목표를 가진 사람들은 넘어야 할 산을 스스로 만들며 살아간다. 그들의 눈빛에는 생기가 돌고 그들의 삶은 항상 의미가 따르게 된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은 세월에 떠밀려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세월을 헤치며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나는 어떤 목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스스로 한 번 쯤은 물어봄직하다. 
 둘째가 불필요한 비교를 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자기보다 앞서거나 잘사는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고 살아간다. 현대인들은 비교하는 삶에 익숙하다. 오랜 경쟁으로 인해 그런 습성이 강화된 것이다. 그래서 항상 주변을 살피고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이 있는지에 관심을 두게 된다. 그것은 행복한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은 타인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설정한 목표와 현재의 달성 정도를 비교한다. 즉, 타인들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경쟁하는 것이다.  
 셋째는 행복한 사람들은 시련과 역경이 닥쳐도 낙관적이고 긍정적으로 대처해 나간다는 것이다. 사건의 부정적인 측면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가급적이면 긍정적인 측면을 찾고 거기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옛말에 ‘눈알이 빠져도 이만하길 다행이다.’라는 말이 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대처하는 지혜이다.  
 불교에서는 행복에 이르는 근본적인 길을 ‘탐,진,치’ 삼독을 이기는 것이라고 한다. 욕망(탐심)은 고통의 근원이지만 욕망을 모두 없애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마음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남을 미워하는 욕망, 부질없고 허황된 것을 바라는 욕망, 도를 넘는 지나친 욕망도 대단히 많다. 그런 것들을 찾아서 극복하는 것이 행복한 삶으로 나아가는 올바른 길이 될 것이다. 

 

김경일│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아시 탄다. 아우 탄다. 아수 탄다.’는 말이 있다. 맏이 아이가 태어나고 연이어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 어머니는 부득이 어린 동생을 더 보살피게 된다. 그러면 형은 지금까지 어머니로부터 받아오던 사랑을 동생에게 뺏긴 것으로 생각하여 동생을 미워하게 되고 어머니도 싫어하면서 몸이 점점 여위어가는 것을 옛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정확한 관찰이고 좋은 표현이다.

여러 명의 아이들을 키워본 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고 그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지도 알 것이다. 만약에 부인이 있는데도 아무런 동의도 없이 둘째 부인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을 때 첫째 부인이 받는 충격은 엄청날 것이지만, 아우 타는 경우의 충격은 그 보다 훨씬 더 강할지도 모른다.

맏이에게 어머니는 자기만의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전부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한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맏이가 받는 충격은 상상할 수가 없다. 어머니가 아무리 달래고 설득을 해도 아이 수준에서는 그것이 통할 리가 없다. “동생도 너와 똑 같은 자식이다. 어머니는 차별하지 않고 둘을 보살필 것이니 걱정하지마라.” 이렇게 설득하고 타이른다고 될 일이 아니란 것은 자식을 키워본 사람이면 안다. 이 시기의 어머니의 역할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잘못하면 형제간에 큰 상처를 남기게 되고 그 상처가 평생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의 삶이 겪게 되는 최초의 충격이고 고통이 바로 아우 탄다는 것이다. 만약에 형이 어머니에게는 형제가 모두 소중하다는 것을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면 자기중심의 삶은 어느 정도 극복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원초적으로 인간은 자기중심의 삶을 살게 되어 있다. 그것은 생명을 지닌 인간의 운명이며 또한 고통의 근원이다. 삶의 고통이 얼마나 크면 그것을 고해(苦海)라고 했을까? 자기중심의 삶을 극복하게 되면 고통은 줄어든다. 마치 맏이가 동생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어머니의 입장을 이해하면 고통이 줄어드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을 담고 있는 유식학은 자기중심의 삶을 말라식으로 설명한다. 말라식은 마음의 중심을 이루는 것으로 사량분별(思量分別)하는 것이 근본속성이다. 어떤 자극이나 상황이 나타나면 그것을 살피고 계산하고 그리고 나에게 이득인지 손해인지를 따져보는 기능을 담당한다. 항상 나를 중심으로 작용하는 마음이다. 머리가 좋다는 말 속에는 말라식의 작용이 빠르다는 것을 일컫는 경우도 있다. 즉 계산이 빠르다는 뜻이다. 그것이 고통의 근원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말라식은 자기를 중심으로 사량분별하기 때문에 항상 이익과 손해를 따지고, 잘나고 못남을 따지고, 옳고 그름을 따지고, 아름답고 추함을 따지지만 그것은 객관적인 근거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의 기준을 근거로 삼는 한계를 지닌다. 달리 표현하면 항상 자신의 입장에서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착각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차별성이 생기고 분별심이 일어나고 시시비비의 다툼이 발생한다. 당파싸움이니 계파간의 갈등이니 하는 것도 모두가 이렇게 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심리적 불편이나 장애 역시 자기중심의 삶을 극복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를 분별심이나 차별성을 극복하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것이 극복된 경지를 평등성지(平等聖智)라고 한다. 분별과 차별이 극복된 경지이니 당연히 평등하고 성스러운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자기중심의 삶은 어떻게 극복할 수가 있을까? 얼른 생각하면 역지사지(易地思之) 즉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타인의 입장이란 것도 아직은 자타를 구분하는 차별성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삶의 태도는 대인관계의 갈등을 현저히 줄일 수 있고 생활 속에서 약간의 여유를 가질 수는 있다.

 

자기중심의 삶을 극복하는 궁극적인 길은 무아(無我)를 증득하는 것이다. 무아란 무엇이며 그것의 증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기중심의 삶을 유아론적 삶이라고 하면 자기중심을 극복한 삶은 무아론적 삶이 된다.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그것을 증득하여 자신의 삶속에서 구현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다. 타인을 보기는 쉬워도 자기를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기독경전에도 남의 눈의 티끌은 보면서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다.” 라는 구절이 있다. 자기중심의 삶은 남의 허물은 잘 보지만 자신의 허물은 잘 보이지 않는다. 설혹 타인이 그것을 보고 자신에게 일러주어도 고맙다고 여기기는커녕 관계가 나빠지기 십상이다. 무아론적 삶의 길은 닦을 수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우선 자신의 견해나 주장을 고집하는 삶의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자신의 주장이 타인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무시당하더라도 화내지 말고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견해만을 고집하는 것이 바로 집착이다. 그것을 조금씩 줄여나가면 무아론적 삶에 점점 더 다가서게 되고 삶의 고통도 동시에 점점 줄어들게 될 것이다. 한꺼번에 무아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다가서는 길 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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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그림으로 나타낼 때는 흔히 둥근 원 또는 구로 그린다. 그것은 마음이란 물건이 원만하고 둥글다는 의미보다 가장자리에서부터 가운데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자신이 알 수 있는 얕은 표면의 마음이 있고 표면 아래로 들어가면 점점 더 깊은 마음 즉 자신이 알 수 없는 마음도 있다.

마음은 지구에 비유할 수 있다. 지구의 내부를 지표, 지각, 맨틀, 외핵, 내핵으로 구분하듯이 사람의 마음도 전 오식, 의식, 말라식, 아뢰야식 등으로 구분해서 설명하는 것이 유식학이다. 전 오식이 가장 얕은 수준의 마음이라면 아뢰야식은 지구의 내핵에 해당하는 가장 깊은 마음이다. ‘내 마음은 내가 안다.’라고 할 때의 마음은 대부분 마음의 표피 정도이다. 깊은 속마음은 보통사람(범부)들은 알지 못한다. 자신의 마음을 얼마나 알고 있나 하는 정도에 따라 인격자 또는 성숙한 사람의 기준을 삼을 수도 있다. 정신치료자 소암선생은 자신을 모르는 것을 정신장애로 설명하기도 했다. 수박껍데기를 보고 수박 속을 짐작하기란 쉽지 않은 것처럼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속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다. 타인의 속마음을 짐작하는 것도 어렵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의 속마음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아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다.

유식학에서는 사람의 가장 깊은 마음을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한다. 아뢰야식은 무시이래로 즉 시작을 알 수 없는 아득히 먼 과거로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경험과 정보들이 보관되어 있는 마음이 창고이다. 보관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아뢰야식을 장식(藏識)이라고도 한다. 아득히 먼 과거, 생명의 출현에서부터 사람으로 진화해 온 모든 과정의 정신적인 산물들과 개인의 모든 경험들이 총체적으로 보관된 곳이다. 융의 분석심리학에 대비하면 콤플렉스, 개인무의식, 집단무의식,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 자기 등이 통합된 개념이다. 마음에 보관된 정보들은 화석처럼 생명을 잃은 것이 아니라 조건만 맞으면 언제든지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에서 종자, 씨앗이라고 부른다. 태어날 때 가지고 온 종자를 본유종자라 하고 태어나서 새롭게 만들어진 종자를 신훈종자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옛날 어른들이 아이들을 보고 이 놈의 종자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 바로 인간의 선천적인 기질이나 소인을 지칭할 때 쓰였던 말이다. 태어날 때부터 좋은 종자가 있는가하면 그렇지 못한 종자도 있다. 가장 최신 심리학에 해당하는 긍정심리학에서도 행복의 조건으로서 태어날 때의 행복지수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물론 태어날 때 가지고 온다고 해서 반드시 숙명적으로 비관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훈습에 의해서 종자는 변할 수도 있고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프로이드의 무의식의 개념과 아뢰야식은 자신이 모르는 마음이라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그 구성물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난다. 프로이드의 무의식 개념은 감당하기 힘들어서 억압한 것들, 외면한 것들, 트라우마 등 주로 병리적인 것들의 저장소라고 할 수 있지만 아뢰야식은 병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것, 생산적인 것, 종교적인 것 등 훨씬 다양한 것들의 저장소이다.
 
아뢰야식은 되살아날 수 있는 종자의 보따리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무수히 많은 종자들을 품고 산다. 언제 어디에서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종자는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으로 마치 물속에 잠겨있는 장애물처럼 우리의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있다.

학교로 출퇴근하는 길옆에 큰 저수지가 있었다. 항상 시퍼런 물이 가득 차 있어서 저수지 안에는 물고기들만 살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해 심한 가뭄이 들더니 저수지 물이 서서히 마르기 시작했다. 가장자리부터 바닥을 드러내더니 점점 깊은 바닥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저수지 바닥은 검은 색을 띤 진흙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상태로 열흘 정도 가뭄은 이어졌는데 무심하게 저수지 옆을 지나다니던 어느 날,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시커먼 모습의 저수지 바닥에 잔디처럼 새싹들이 파릇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깜짝 놀랐다.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난 것인가? 그 사이 어디에서 날아온 씨앗은 아닐 것이다. 진흙 속에 묻혀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오래 전부터 이미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바닥이 드러나고 햇빛을 받으면서 순식간에 싹을 틔웠다. 보통 때는 짐작할 수도 볼 수도 없었지만 씨앗은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의 마음에도 자각할 수 없는 많은 씨앗(조건)들이 숨어 있다. 마치 암을 유발하는 DNA 인자가 잠복해 있다가 자라날 환경이 되면 암을 유발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마음을 살핀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아뢰야식을 통찰하는 작업이다. 단번에 깊은 심연을 알 수는 없다. 가까운 것부터 순서에 따라 자신의 내면을 살피게 된다. 흔히 말하는 알아차림 명상은 가장 자각하기 쉬운 것부터 자신을 살피는 작업이다.

유식삼심송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유식 3)
 
불가지집수(不可知執受), 처요상여촉(處了常與觸), 작의수상사(作意受想思), 상응유사수(相應唯捨受), “아뢰야식은 그 작용을 알 수 없고, 집수와 처()와 요()의 작용도 알 수 없다. 항상 촉()과 작의와 수()와 상()과 사()로 더불어 상응하되, 오직 사수(捨受)로만 한다.”
 
아뢰야식은 작용이 미세하고 광범위하기 때문에 범부의 식견으로는 알지 못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꾸준히 마음공부를 이어가면 조금씩 아뢰야식의 종자들을 통찰하게 되고 마침내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https://mahadohi.tistory.com/entry/불교-유식학唯識學-산책3?category=485840

 

불교 유식학(唯識學) 산책(3)

[천천히 읽는 명상]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김경일 교학처장님이 들려주시는 따뜻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세요. 불교 유식학(唯識學) 산책(3)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마음을 그림으로 나타..

mahadohi.tistory.com

 

유식학(唯識學)은 불교의 여러 사상들 가운데서 매우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흔히 구사론을 8년 공부하고 유식학을 3년 동안 공부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이렇게 어려운 유식학을 공부하고 실천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식학을 공부하는 목적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전식득지(轉識得智)이다. 번뇌와 경험에 물든 마음 즉 염정심을 지혜의 마음으로 바꾼다는 뜻이다. 지혜의 마음이란 영리하고 똑똑하고 지식으로 가득 찬 마음이 아니라 청정심 즉 깨끗한 마음, 텅 빈 마음을 뜻한다. 사람들은 텅 빈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번뇌와 욕망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판단하고 평가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중생이다. 그것이 왜 문제이고, 왜 잘못된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유식학을 공부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살면 된다. 중생의 삶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자극에 대해서 화를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심하게 웃어넘기는 사람도 있다. 낮선 사람에게서이 바보야!” 하는 말을 들었을 때도 사람에 따라 반응은 달라질 수 있다. 반응의 차이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며 그것을 주관적인 인식이라고 한다. 무시당한 경험이 많은 사람은 화를 더 많이 낼 것이고 무시당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보다 가볍게 대응할 수도 있다. 마음속에는 다양한 경험들이 쌓여 있고 경험을 통해서 상처도 입게 된다.
 
탐진치(貪瞋癡) 삼독에서 비롯된 마음에 걸리는 것과 마음의 상처를 극복한 것이 청정심이다. 청정심은 착각 없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즉 여여하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다. 물든 마음을 청정한 마음, 지혜의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 유식학의 목적이다.

정신분석학은 마음을 크게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분하지만 유식학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말라식(末那識), 아뢰야식(阿賴耶識) 등 모두 여덟 가지로 구분한다. 구유식학파에서는 불성에 해당하는 아마라식(菴摩羅識)을 상정하여 구식(九識)으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아마라식은 식의 실성이며 진여성이기 때문에 이를 제외하고 범부의 정신 세계인 팔식만을 설명하고 있다. 범부의 정신세계인 팔식 즉 염정심을 지혜의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 전식득지이다.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을 전오식(前五識)이라 하는데 전오식은 눈, , , , 피부의 다섯 가지 감각에서 발생하는 알아차림 즉 인식작용을 말한다. 전오식이 작용할 때는 눈과 귀 등 다섯 가지 감각작용이 동시에 작용하기도 하고 하나씩 단독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대상으로 삼는 것은 물질, 소리, 냄새, , 감촉(色聲香味觸)의 다섯 가지이다. 감각기관이 인식활동을 할 때에 그 주체가 되는 것을 근()이라고 한다.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의 다섯 가지이며 근()이 인식하는 마음을 식이라고 하여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이라고 한다.

전오식은 다른 식들에 비해 인식활동이 단순하고 품성도 얕기 때문에 통칭하여 전오식이라 부르고, 이들이 대상을 인식할 때는 어떠한 사려분별도 요하지 않고 오직 눈앞에 있는 대상만을 직감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이 감각기관들 중에 한 가지라도 오염이 되거나 손상을 입으면, 그 분야만큼은 직감이나 추리, 억측으로 인하여 인식에 오류나 손상이 발생하게 된다.
 
다음은 의식(육식)에 대한 설명이다. 의식은 전오식(, , , , )이 인식한 내용을 총괄적으로 판단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감촉 등과 같은 감각은 의식이라는 마음을 만날 때 비로소 그 내용이 인식된다. 잠든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고막이 작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식은 대상을 알아차림하는 작용을 하므로 요별능변식이라고 한다. 의식이 일어날 때는 두 가지 양상을 보이는데, 5가지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을 오구의식(五俱意識)이라 하고, 의식이 단독으로 일어나는 것을 독두의식(獨頭意識)이라 한다. 독두의식을 예로 들면, 눈을 감고 혼자 상상을 하면서 일어나는 의식이다. 독두의식도 독산(獨散)의식과 정중(定中)의식으로 구분한다. 독산의식은 홀로 떠도는 의식이고 정중의식은 선정 속의 의식을 말한다.

다음은 말라식이다. 말라식의 특성은 항심사량(恒審思量)이다. 항심사량은 항상 살피고 득실을 계산하고 따지는 작용을 하는 마음이다. 본래 청정하고 생멸이 없는 진여열반을 등지고 중생심을 일으키는 마음이 말라식이다.
말라식은 어떻게 사량하는가? 사량이란 연려(緣慮), 관찰, 분별, 집취(執取)의 뜻으로 오직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만 하는 것으로 아탐(我貪), 아애(我愛)하는 분별사량의 주체로서 수행자가 반드시 넘어야 할 관문이다. 말라식에는 번뇌의 뿌리가 숨어 있다. 의식으로 아무리 번뇌를 극복한다고 해도 말라식의 근본번뇌를 제거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번뇌에 휩싸일 수가 있다. 아치(我癡),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 등으로 자성(自性)을 장애하여 성불을 막고, ()에 집착하여 업을 일으키고 생멸의 고통을 탐닉하여 스스로 고뇌를 자초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아치는 어리석음의 뜻으로 라는 상에 집착함으로써 생기는 어리석음이다. 탐진치의 삼독을 일으켜서 해탈을 방해함으로써 아치는 번뇌 가운데 가장 근본이 된다. 아견은 몸과 마음을 라고 여기고 여기에 집착하여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는 어리석음이다. 아집이라고도 한다. 일체만법에는 가 없으나 헛되이 에 집착함으로서 일어나는 번뇌이다. 아만은 교만하고 오만하여 남을 무시함으로서 남에게 존경받지 못하고, 자신을 낮출 수 없으므로 정진하지 못하게 된다. 아애는 번뇌에 물든 자신을 사랑하고 집착하는 작용이다.
말라식은 사량하고 에 집착함으로서 항상 4번뇌의 바탕이 되고 집착으로 인해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말라식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여 악업을 짓게 되므로 염오식(染汚識) 또는 염오의(染汚意)라고 한다. 아뢰야식에 대한 설명은 다음으로 미룬다.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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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유식학(唯識學) 산책(2)

[천천히 읽는 명상]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김경일 교학처장님이 들려주시는 따뜻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세요. 불교 유식학(唯識學) 산책(2)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유식학(唯識學)은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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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유식학(唯識學) 산책①

 

불교 유식학은 중관학(中觀學)과 더불어 대승불교 사상의 두 기둥이라 불릴 정도로 중요한 가르침이다. 중관학은 흔히 공사상(空思想)이라 하여 불교신자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다. 공사상을 집약해서 나타낸 것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며 그 중에서도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은 공사상을 가장 함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대부분의 불교의식에서는 반야심경을 독송한다. 그래서 공사상은 일반인들에게도 낯설지 않다. 그러나 유식사상은 불교인들에게조차도 잘 알려진 것이 아니다.

유식학은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활용적이고 실천적인 사상이다. 보통사람(중생)들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살아간다. 그것이 중생들의 속성이다. 욕망은 삶의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고통의 근원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욕망을 추구하는 삶은 갈등과 대립 그리고 투쟁은 피할 수가 없다. 자신과 타인, 자신과 세상과의 갈등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도 근원은 욕망이다. 욕망의 근원이 무엇이며 욕망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해 주는 가르침이 유식사상이다.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불교사상이며 또한 보편적인 사상이기도 하다.

 

공사상은 진리 그 자체이다. 우주의 근본은 텅 빈, 공이다. 다만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현상들이 나타난 것으로 연기의 법칙으로 설명한다. 유식사상은 진리에 이르는 길을 통찰하게 하고 나아가 욕망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상세하게 안내하는 가르침이다. 진리 자체를 배우고 이해하여 남들에게 전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식과 이론은 배워서 타인들에게 전달하면 된다. 그러나 자신이 진리에 이르는 것은, 달리 말하면 자신 안에서 진리를 구현하는 것은, 스스로 공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진리 자체를 말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며 자비를 베풀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많지만 실제로 자신이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드물다.

 

유식(唯識)이란 오직 마음이란 뜻이다. 글자의 의미는 오직 안다는 뜻이지만 안다는 것의 심리적 의미는 인식이다. 인식은 마음의 작용이며 마음의 작용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주관적 인식이라고 하고 자기 마음대로 인식하기 때문에 착각이라고 한다. 그것이 오해와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인식은 존재하기 어렵다. 달걀을 달걀이라고 알아차릴 수는 있지만 달걀에 대한 의미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다. 개개인의 인식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종자(성품)와 개인적 경험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현대물리학에서 밝히고 있는 물질의 최소단위는 원자핵이다. 원자핵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전자나 원자핵을 구성하는 양성자나 중성자 등은 움직이는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관찰하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다. 고정불변의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현상과 작용 그리고 갈등과 대립 등도 보는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르게 인식된다. 주관적인 인식이 존재할 뿐이다. 예측할 수 없는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도 자국의 입장에서는 당연하고 옳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주관적인 인식이다. 주관적인 인식의 근원은 마음이며 욕망이다. 마음을 알고, 마음이 움직이는 원리를 알면 갈등의 근원을 이해할 수가 있다. 유식사상은 마음이 움직이는 원리를 설명하고 순간순간 요동치는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려서 열반(마음의 평화)에 이르게 하며 나아가 개인은 물론 사회, 국가 간의 갈등도 해소할 수 있는 지혜를 담고 있는 사상이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을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보편적인 질문으로 받아들여서 질문에 대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해답을 찾으려고 밤을 새우며 노력한다면 그것은 부질없는 헛수고가 될 것이다. 마음에 대한 공부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을 알아보았자 본인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견(知見)만 늘어날 뿐이다. 오로지 본인 자신의 주관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타인의 수고를 슬쩍 차용한다 해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 따라서 마음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나의 마음은 무엇인가?’라고 바꾸어야 비로소 올바른 과제가 되고, 넘어야 할 산을 구체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나의 마음은 무엇인가?’에 대한 살핌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성찰이 된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자신을 아는 정도(의식성)에 따라 마음공부의 진전을 평가할 수도 있고, 정신장애의 심각성 정도를 구분할 수도 있다.

 

유식학은 마음에 관한 학문이고 자신의 마음을 살피게 하는 가르침이며 나아가 진정한 자유인, 참된 도인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이다. ‘천천히 읽는 명상 코너는 앞으로 유식학을 통한 자기 통찰과 자기 심리치유에 관한 내용을 연재할 계획이다. 같은 길을 걷는 도반들은 이 코너가 끝날 때까지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놓치지 않고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이어가길 바란다. 나무 불법승

 

김경일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주임교수

출처: https://mahadohi.tistory.com/entry/불교-유식학唯識學-산책1?category=485840 [웹진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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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보디교육원 - 추가모집- 대학원 전문가과정 (2019. 8.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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